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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보트
독일이 양차 대전에서 사용했던 잠수함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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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보트(영어: U-boat 유보트[*], 독일어: U-Boot 우보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제2차 세계 대전사이에 독일에서 운용한 잠수함의 총칭이다. U보트라는 이름 자체가 "수중 보트"를 뜻하는 독일어 운터제보트(Unterseeboot)를 줄인 것이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잠수함도 U보트로 불렸지만 일반적으로 독일의 것을 가리킨다. 2차 대전 이후 독일에서 설계, 제작하는 잠수함도 U보트에 포함하기도 한다.

독일은 두 세계 대전 모두에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으로 향하는 상선을 공격하였다. U보트는 이 작전에서 악명을 떨쳤다. 1차 대전 당시 독일은 대서양을 통해 운송되는 미국의 물자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1915년의 첫 작전은 미국의 강력한 항의로 중단되었으나 1917년 전황이 불리해지자 다시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미국 역시 호위함을 운용하여 작전의 성과는 크지 않았고 결국 독일의 패전으로 이어졌다.[1]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쟁해군 잠수함대의 총사령관 카를 되니츠는 이리떼 전술을 구상하여 호위함을 물리치고자 하였다.[2] 여러 척의 U보트가 먼저 호위함을 공격하여 함대의 방어를 무력화하는 이 전술은 대서양 전투 초기에 큰 성과를 보였으나 연합군이 고주파 방향 탐지를 이용하여 잠수함 위치를 탐지하고, 개량된 폭뢰 시스템인 헤지호그를 도입하면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되었고 U보트는 괴멸적인 손실을 입었다. 1943년의 검은 5월 무렵이 되자 U보트가 오히려 사냥당하는 신세가 되어 U보트 자체를 운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세계 대전 이후 남아있던 U보트는 대부분 자침되었다. 서독은 한 동안 해군 무장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냉전의 격화로 1954년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의 길이 열렸고 1955년부터 350톤급 미만의 잠수함 보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재무장 초기 독일은 잠수함 승조원 훈련을 위해 침몰되어 있던 2차 대전 당시의 U보트를 인양하여 사용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허용 톤수가 늘어나고 수출용 잠수함을 개발하면서 독일은 다시 한 번 디젤-전기 잠수함 제조의 선두 국가가 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의 손원일급 잠수함은 독일의 214형 잠수함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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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이전의 초기 U보트
요약
관점

수중에서 은밀히 운항하여 적선을 격침시킬 수 있는 잠수함에 대한 상상은 매우 오래된 것이었지만 이를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증기기관이나 내연기관과 같은 엔진의 가동에는 공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수중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아일랜드 태생의 미국 발명가 존 필립 홀랜드는 전기 모터를 사용한 잠수함을 개발하여 이를 해결하였다.[3] 이후 여러 나라에서 잠수함 개발에 뛰어들게 되었고 독일 제국역시 잠수함 개발에 착수하였다.
1851년 독일 황립해군은 킬에서 건조된 잠수정 브란트타우허를 시험 운항하였지만, 시험 도중 좌초하였다. 브란트타우허는 원형이 남아있는 것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잠수정으로 드레스덴의 독일 연방군 군사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4][5][6]
그로부터 약 50년 후인 1903년, 킬의 프리드리히 크루프 게르마니아베르프트 조선소는 모든 기능이 완전하여 운항가능한 잠수함인 포렐레를 제작하였고[7]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3년 4월 러시아에 판매하였다.[8] 이 당시 독일의 해군 사령관이었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목표는 대양함대를 건설하여 영국 왕립 해군의 세계적인 재해권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독일 해군은 고가의 전함 건조에 집중하였고 잠수함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러시아가 3 척의 카르프급 잠수함을 더 주문한 뒤에야 티르피츠는 크루프 조선소에 잠수함 한 척을 주문하였다.[9][10]
이렇게 제작하여 1906년 12월 14일 취역한 SM U-1는 독일 최초의 U보트이자[11] 마지막 카리프급 잠수함이었다.[9] SM U-1은 이중선체를 채용하였고 지름 45 cm의 단일 어뢰 발사관으로 무장하였다. 수상에서는 등유를 사용한 엔진으로 항해와 충전을 하고 수중에서는 이렇게 충전된 축전지로 전기 모터를 돌려 추진하였다.[12]
1908년 제작된 독일 해군 두번째 잠수함 SM U-2는 U-1에 비해 50% 더 커켰고[13] 45cm 어뢰 발사관 역시 4개로 늘었으며 축전지 용량도 키워 더 오래 잠수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등유 엔진과 전기 엔진 모두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U 3형 U-3과 U-4는 신뢰할 수 있는 성능을 보였다.[12]

크루프는 독일 해군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잠수함을 인도하고 있었다. 1907년 3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으로부터 2 척의 237 톤급 U보트를 주문을 받았고, 10월에는 노르웨이가 비슷한 U보트 한 척을 주문했다. 이 수출용 U보트들은 카르프급인 U-1의 설계를 기반으로 개량하였다.[14]
1908년에서 1910년 사이에 독일 해군은 4개의 45cm 어뢰 발사관과 2개의 재장전 어뢰를 갖춘 14 척의 500 톤급 잠수함을 주문했다. 이 잠수함들은 휘발유보다 안전하고 증기보다 강력한 등유 엔진을 사용했지만, 등유 특유의 흰색 배기 가스로 인해 U보트의 위치를 노출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경유를 사용하는 디젤 엔진을 도입하면 이러한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개발 초기에는 신뢰할 수 있는 고출력의 디젤 엔진이 없었다.[15] 초기 U보트는 적재 하중 역시 적어 일부 장비는 지정된 중량을 초과하였고, 늘어난 무게를 줄이기 위해 축전지의 셀 수를 줄였다. 셀의 갯수가 줄어들면 잠항 가능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수중 성능 역시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16]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디젤 엔진 도입이 필수적이었지만 개발이 지연되었다. 이 때문에 디젤 엔진 장착을 전재로 개발된 U 17형은 실제로는 등유 엔진으로 운용되었다.[17]
디젤 엔진은 1910년이 되어서야 개발되었고 독일 해군은 1912년까지 디젤 U보트 23 척을 주문하였다.[15] 1910년 잠수함 제조사 카이저리헤 베르프트 단치히(KWD)가 MAN의 엔진을 장착한 4 척의 650 톤급 U 19형을 수주하였고, 1911년에는 크루프트도 자체 개발한 디젤 엔진을 장착한 U 23형 4 척을 수주하였다. 이 U보트들은 디젤엔진 수용을 위해 규모가 더 커졌으며 50 cm 크기의 어뢰 발사관을 장착하였다. 이후 1912년 KWD는 4 척의 U 27형을 수주하였고, 크루프도 11 척을 수주하였다. 크루프가 자체 개발 디젤 엔진에 결함을 발견하고도 제작을 강행하는 바람에 해군 인수가 8개월 지연되었고 1915년이 되어서야 인수를 완료할 수 있었다.[18]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 독일은 13개 등급의 잠수함 48척을 운용 중이거나 건조 중이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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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요약
관점
작전
1차 대전이 시작된 1914년, 독일의 U보트는 영국 함대를 목표로 한 작전에 투입되었다. 1914년 9월 5일, 경순양함 HMS 패스파인더가 U-21이 발사한 자항 어뢰에 의해 격침되었다. 9월 22일 U-9는 영국 대양함대의 장갑순양함 HMS 어보커, HMS 크레시, HMS 호그를 잇달아 침몰시켰다. U보트의 위협이 거세지자 영국 대양함대는 보다 안전한 북아일랜드 해역으로 철수해야 하였다. 1차 대전 초기 독일 잠수함은 상선에 대해선 일단 정지 시키고 수색한 뒤 승무원을 하선시킨 후 격침하는 전시 노획물 규정을 준수하고 있었다. 1914년 10월 20일 노르웨이 해상에서 영국 상선 SS 글리트라를 경고 없이 격침하기는 하였으나 잠수함 작전 정책이 바뀌는 1915년 2월 18일 이전까지 이런 방식으로 침몰된 상선은 10 척 정도였다.[22]
수상 군함 | 55 |
기뢰 | 48 |
잠수함 | 18 |
Q-십 | 11 |
상선 | 7 |
항공기 | 1 |
사고 | 19 |
불명 | 19 |
총계 | 178 |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략은 빠르게 유럽 대륙을 장악하는 것이었지만,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참호전 양상을 띄게 되면서 전황이 불리해지기 시작하였다. 독일은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작하였다. 독일 해군은 U보트 함장에게 중립국을 포함한 작전 해역의 모든 상선을 경고 없이 격침할 수 있도록 하는 지침을 전달하였다.[22] 당시 작전에 투입 가능한 U보트는 단 29 척이었고 영국 제도 주변에서 활동하는 U보트는 한 번에 7 척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해역 전체를 봉쇄할 수는 없었지만, RMS 루시타니아를 포함한 3 척의 여객선을 침몰시켰다.[a] 미국은 자국의 비무장 여객선이 잠수함 공격으로 침몰한 것에 분노하였으며, 미국의 참전을 우려한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지시로 작전은 중단되었다.[24] 작전 중단 후 대부분의 U보트는 지중해로 파견되었다.[23]
독일은 전쟁 중에도 계속하여 U보트를 건조하였다. 1916년 초 운용 가능한 U보트는 54 척으로 늘었다. 독일은 영국 해역의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였지만 여객선에 대한 공격은 엄격히 금지하였고 영국 해역 밖에 대해서는 무장 상선에 대해서만 공격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3월 24일 여객 페리선인 SS 석시스가 어뢰 공격을 받아 격침되면서 미국인 25명이 사망하자 미국은 독일이 전시 노획물 규정을 지키지 않을 경우 단교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23]
1916년 9월에 들어 독일은 120 척의 U보트를 운용하였다. 미국의 경고를 받은 독일은 영국 해역에서는 전시 노획물 규정을 지켰지만, 지중해에서는 새로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진행하였다. 1916년 10월부터 1917년 1월 사이 독일의 U보트가 침몰시킨 선박은 모두 합하여 140만 톤에 달하였다. 지중해에서의 상당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전선의 교착을 타개하지 못하였고 결국 1917년 2월 1일 영국 해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였다. 독일의 이 작전은 미국이 영국을 지원하기 전에 전선 교착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고 여긴 도박이었다. 미국은 2월 3일 즉각 독일과 단교를 선언했고, 4월 6일, 전쟁을 선포하였다.[23] 작전 초기 매 달 50만 톤 규모의 선박이 침몰시키며 상당한 전과를 보였던 2차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1917년 8월 미국이 대잠 작전을 수행하는 호위함을 도입하면서 전과가 30만 톤 규모로 줄어들었다. 이로서 미국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영국을 서부 전선에서 이탈시키고자 하는 독일의 전략은 오히려 미국의 참전을 불러 패전을 앞당기는 결과를 맞았다. 패전이 확실하게 된 1918년 10월 31일 독일은 모든 U보트의 철수를 명령하였다.[25] 1918년 11월 11일 휴전 조건에 따라 U보트들은 즉시 항복해야 했다. 독일의 U보트들은 해체되거나 연합군 해군에 주어졌다.[26]
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이 건조한 U보트는 373 척이었고 이 가운데 종전 당시 운용 가능한 수는 179 척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178 척의 U보트가 격침되었다.[27] 이 과정에서 잠수함 승조원 장교 512명과 병사 4,894명이 사망하였다. 했다. 종전 후 생존한 잠수함 중 14 척은 자침되었고 122 척은 연합군에 항복했다. 독일 U보트는 1차 대전 중 전노급함 10 척, 순양함 18 척, 기타 소형 해군 함선을 침몰시켰고 총 11,108,865 톤에 달하는 상선과 어선 등의 민간 선박 5,708 척을 파괴하였다. U보트에 희생된 선원은 약 15,000 명으로 추정된다.[28] 독일은 전쟁 기간 동안 29명의 U보트 함장에게 최고 무공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를 수여하였다.[29]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함장으로는 로타르 폰 아르놀트 드 라 페리에르 (453,869 톤, 195 척), 발터 포르스트만 (391,607 톤, 149 척), 막스 발렌티너 (299,482 톤, 144 척)가 있다.[30]
1차 대전의 U보트

개전 초기 독일은 몇 개월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벨기에를 점령한 독일 해군은 영국의 상륙을 저지하기에 U보트 몇 척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예상하였고 4개월 이내의 빠른 건조가 가능한 130톤급 4 척을 주문하였다. 전쟁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장기화되면서 독일 해군은 계속하여 U보트 주문을 늘렸다. 1914년 10월 15일 15 척의 UB I형 U보트가 주문되었고, 이 설계를 기반으로 11월 23일에는 추가로 15 척의 UC I형 연안 기뢰부설 U보트가 주문되었다.[31]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과 튀르키예를 지원하기 위해 독일 해군은 이 U보트 중 일부를 다르다넬스 해협과 흑해로 보냈다.[32]
이듬해인 1915년 봄이 되자 적어도 1916년까지 전쟁이 계속될 것이 분명해지면서 더 많은 U보트가 주문되었다. 기존의 UB I형과 UC I형의 작전 능력은 우수하다고 평가되었으나 출력이 부족하였다. 독일 해군은 기존 보다 두 배 크기인 270톤급 UB II형 30 척을 주문하였다. 1915년 9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중단되면서 기뢰 부설이 더 중요한 역할이 되자, 이를 위한 64 척의 UC II형 기뢰 부설 U보트가 주문되었고, 이로서 U보트는 대량 생산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UC II형은 기뢰 부설과 어뢰 발사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다.[33]
1916년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재개되었을 때 독일 해군은 충분히 큰 U보트를 제때에 건조할 수 없었고, 대안으로 연안용 U보트를 개량하여 대서양 접근로 순찰에 투입하였다. UC II형의 선체를 기반으로 함수의 기뢰 격실을 어뢰 격실로 교체하였고 더 강력한 디젤 엔진을 장착하여 수상 속도를 증가하고 연료 탱크 역시 키워서 항속 거리를 확장했다. 1916년 5월 2일 24 척의 UB III형이 처음 주문 된 후 전쟁 기간 동안 200 척 이상이 계속 주문되었지만, 실제 취역한 UB III형은 96 척이었다.[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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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간기
요약
관점

건조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서명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제국 해체 이후 새롭게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군사력을 제한하였다. 해군의 경우 6 척의 전함, 6 척의 순양함, 12 척의 구축함, 12 척의 어뢰정 만이 허용되었고 잠수함의 건조는 금지되었다.[36]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의 제한을 회피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선박설계 기술사무소"를 설립하였다.[37] 이 사무소의 실질적 운영 주체는 크루프였으며 다른 나라를 위한 잠수함을 설계, 건조하여 기술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38] 선박설계 기술사무소는 250톤 급의 소형 U보트, 500톤 급의 중형 U보트, 750톤 급의 대형 U보트를 설계하였다.[39]
1927년부터 1931년 사이 선박설계 기술사무소는 핀란드에서 3 척의 500톤 급 중형 U보트인 베테히넨급 잠수함을 건조하였다. 이 것은 이후 개발될 VII형 U보트의 프로토타입이었다. 1933년 건조된 250톤급 소형 잠수함 핀란드 잠수함 베시코는 이후 개발된 II형 U보트와 거의 동일했다. 이때 100톤급 초소형 잠수함인 핀란드 잠수함 사우코도 건조되었다. 스페인에서는 1929년부터 1930년 사이 750톤급 대형 잠수함이 건조되었다. 스페인이 U보트에 대한 관심을 버리자 이 U보트들은 튀르키예에 판매되어 귀르라는 이름으로 취역하였다. 시험 운전은 독일 선원들이 지원하였다. 이 모든 해외 잠수함 건조는 극비 사항이었으나 로흐만 스캔들으로 폭로되었고, 그 결과 국가해군의 수장이었던 한스 첸커가 사임하였다. 그러나 첸커의 후임자 에리히 레더 역시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는 비밀 정책을 계속했다. 1932년 11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나치당은 11월 15일 U보트를 포함한 독일 해군 확장 계획을 승인하였다.[40]


1935년 영국은 독일의 노골적인 베르사유 조약 위반에 대응하고자 영국-독일 해군 협정을 타협안으로 제시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일부 제한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영국 함대와 100:35의 톤수 비율로 함선 건조가 허용되었다. 잠수함의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00:45의 제약을 받았다.[41] 이 협정에 따른 U보트 건조 허용 톤수는 24,000 톤이었다. 비밀리에 잠수함 건조를 계속하던 독일은 협정에 서명한 지 불과 1주일 만에 II형 U보트 U-1을 취역하였고 이후 동급의 잠수함 6 척이 계속하여 취역하였다. 나치 독일은 해군의 명칭을 전쟁해군으로 변경하였고[42] 1년 이내에 총 12,500톤에 달하는 36 척의 U보트를 취역시켰다.[43] 당시 취역한 U보트는 250톤급 소형 U보트 24 척, 500톤급 중형 U보트 10 척, 스페인 잠수함을 기반으로 한 750톤급 대형 U보트인 I형 2 척이었다.
카를 되니츠가 독일 잠수함사령부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되니츠는 히틀러조차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던 시기에 이미 영국을 상대로 한 해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되니츠가 영국의 호송선단 공격에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중형 U보트였고 협정에 따른 톤수 제한의 잔여량을 23 척의 중형 U보트 건조에 할당해 달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전쟁해군의 수장 에리히 레더는 보다 균형잡힌 잠수함 전력을 원했기 때문에 소형 U보트 8 척, 중형 U보트 7 척, 대형 U보트 8 척을 주문하였다.[43] 이 23 척의 U보트 가운데 21 척이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이전에 취역하였다. 영국이 잠수함 전력 규모를 52,700톤에서 70,000톤으로 확장할 것이라 발표하자 레더는 이에 비례하여 늘어난 독일의 잠수함 할당량을 중형 U보트 7 척과 대형 U보트 5 척에 투입하였다.[44]

그 동안 영국과의 마찰을 피해왔던 히틀러는 1938년이 지나는 사이 충돌을 불사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히틀러는 여전히 영국이 개입하지 않기를 희망하였지만 필요할 경우 영군을 억제할 수 있도록 해군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영독 해군협정의 잠수함 제약 예외 규정을 발동하여 총 7만 톤 규모, 52 척의 U보트를 추가하였다. 당시 추가된 U보트는 중형 21 척, 대형 11 척, XB형 기뢰부설 U보트 3 척, XI형 순양 U보트 4 척이었다.[45]
1939년 독일 해군의 규모를 영국 해군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확대하려는 야심 찬 Z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 계획에는 총 20만톤 규모의 U보트 249 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계획이 시작된 지 불과 몇 개월 뒤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실제 건조된 U보트는 소수에 불과하였다.[45]
2차 대전이 시작될 때 독일은 56 척의 U보트를 취역시켰으며, 이 중 46 척이 운용 가능했고 22 척은 대서양 작전에 충분한 항속 거리를 가졌다. 나머지 24 척은 북해 작전에만 투입될 수 있었다.[46]
개발

독일의 U보트는 1차 대전 보다 크게 개량되었다. 새로운 고강도 강철 합금을 재료로 리벳 대신 용접을 사용한 더 튼튼한 선체로 잠항 능력이 커져 더 깊이 잠수 할 수 있게 되었다. 중형 U보트의 경우 잠항에 걸리는 시간은 30초로 단축되었다. 더 커진 디젤 엔진으로 수상 항해 속도가 빨라졌고 양측면에 부가 평형 장치로 새들 탱크를 설치하였다. 당시 U보트의 새들 탱크는 연료 보관을 겸용하여 유입된 해수 위로 경유가 보관되는 방식으로 연료 저장고를 겸하여 항속 거리도 늘렸다. 탑재된 두 개의 디젤 엔진 가운데 하나가 고장이 나더라도 나머지 하나로 두 개의 프로펠러 모두를 가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운용 효율을 높였다.[47]
U보트 전용 어뢰로 개발된 G7a 어뢰는 1차 대전 당시 보다 큰 탄두를 가진 압축 공기 사출식 어뢰였다. 이후 더욱 개량한 G7e 어뢰가 사용되었다.[48] 압축공기 사출식 어뢰는 사거리가 짧고 속도 역시 느렸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아 낮에도 잠수함의 위치 노출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47] 1차 대전 중 개발되기 시작한 자기 신관이 표준적인 기술로 정착되었다. 1차 대전 당시 고전적인 어뢰는 목표물에 닿아야 폭말하는 접촉 신관을 장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빗나갈 경우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었지만, 목표물에 일정 거리 이내로 접근하면 선체의 자기장에 반응하여 폭발하는 자기 신관은 명중하지 않더라도 목표물에 피해를 줄 수 있었으며 특히 선체 바로 아래에서 폭발할 경우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49][50]
모든 U보트에 장파 및 단파 무전기가 설치되어 다른 U보트와 통신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로서 U보트 여러 대가 함께 작전에 투입될 수 있게 되었다.[49]
U보트의 구조

전형적인 U보트의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 함수에는 어뢰실이 있다. 어뢰는 출항 전에 미리 발사관에 장전하였지만 수리할 필요가 생길 경우를 대비하여 발사관에서 꺼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바닥판 아래에 4개의 예비 어뢰를 보관하였고, 위에도 2 개의 예비 어뢰를 추가로 보관하였다. 이렇게 어뢰를 채우고 나면 여유 공간이 거의 없었지만, 어뢰 장전 담당 승조원과 최하계급 승조원의 침대 역시 이곳에 있었다. 출항 후 어뢰를 발사하기 전 까지는 침대가 부족하여 교대로 취침하였기 때문에 늘 다른 사람의 체온이 남아있는 "뜨거운 침대"였다.[51][52]
- 함수 바로 뒤로 무선실과 청음실이 있고 이 두 공간 사이의 작은 방이 함장실이었다.[53]갑판 바로 아래에는 잠항시 에너지를 공급할 축전지가 있고 그 옆으로 장교와 상사의 침실이 있었다.[51]
- 조종실은 함교 아래에 위치하여 관측용 잠망경이 설치되었고, 방향타와 밸러스트 조절을 위한 밸브들이 있다. 위로는 사령탑과 연결되는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51]
- 사령탑은 조종실 위에 돌출되는 부분으로 어뢰 공격에 필요한 조준용 잠망경과 어뢰의 각도와 깊이 설정을 위한 데이터 계산기가 있다. 주 잠망경보다 작은 크기의 조준용 잠망경은 수면 위에 흔적을 보다 적게 남겼다. 사령탑은 잠수함 갑판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만 여전히 내압 선체 내부에 해당하였다. 사령탑 위로 잠수함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함교가 있다.[51] 내압 선체 외부인 함교에는 무선용 안테나, 잠망경, 배기 가스 배출과 공기 흡입을 위한 시설들이 있다.
- 조종실 뒤로는 부사관을 위한 침실과 추가 축전지 격실, 주방, 화장실 등이 모여 있다.[51]
- 선원 공간 뒤로 디젤 엔진이 놓인 엔진실이 있다. U보트는 물 위에서는 디젤 엔진으로, 물 속에서는 전기 모터로 움직인다. 전기 모터를 가동할 축전지는 비교적 짧은 시간 밖에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평소 수상 항해를 하다가 작전시에만 수중으로 잠항하였다. 잠항 후에는 다시 떠올라 디젤 엔진을 사용하여 축전지를 충전하였다. 배기 가스 배출구는 함교와 연결되고 최대한 노출을 피하기 위해 함교만 해수면 바로 위로 떠올린 뒤 연기가 바닷물에 혼입되도록 하였다.[54]
- 전기 모터실. 수중에서는 전기 모터로 추력을 얻었다. 디젤 엔진과도 연결되어 있어 수상에서 디젤 엔진을 가동하면 전기 모터가 발전기의 역할을 하여 전기를 충전하였다.[54]
- 함미 어뢰실. 별도의 함미 어뢰실을 갖춘 것은 IX형과 같은 대형 U보트뿐이었다. 소형 U보트는 모터실에 단일 발사관이 설치 되어 있었다.예비 어뢰는 엔진 사이 갑판 아래에 보관하였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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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요약
관점
작전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U보트는 주로 대서양 전투에 투입되었다. 전쟁 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U보트는 전쟁 중에 나를 정말 두렵게 한 유일한 것"이라고 회고하였다.[55]
영국은 1차 대전 후반기의 수송 선단 호위 작전이 U보트 격퇴에 성공하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 초기인 1939년 9월 즉시 호송선단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2차 대전 초기 U보트는 위치 노출로 인한 반격을 피하고자 야간에 수면 아래에서 공격하고 철수하는 방식을 택했지만, 무선 통신을 이용한 잠수함 사이의 상호 협력이 가능해 지자 되니츠는 U보트 여러 척이 작전에 참여하는 "이리떼 전술"을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이 전술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1940년 4월 베저위붕 작전으로 노르웨이를 침공하는 동안 어뢰에 많은 기술적 결함이 발견되었고 독일 전쟁해군은 U보트 작전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였다. 독일은 1940년 8월 호송선단에 대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였다. 당시 독일은 개전 초기보다 운용가능한 U보트의 수가 더 적었지만, 점령지인 프랑스와 노르웨이에 새로 잠수함 기지를 건설하여 작전 반경을 늘릴 수 있었다. 이후 가동된 이리떼 전술은 연합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연합군이 새로운 잠수함 전술에 대비책을 세우지 못한 이 시기는 U보트 입장에서 "행복한 시간"(독일어: die glückliche Zeit)이었다.[56]
1941년 초가 되자 영국의 대응책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1941년 3월 U보트 에이스 가운데 세 척이 전투중 침몰하였다. 같은 해 5월 영국은 독일의 에니그마 기계 암호 체계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고 수송선단은 U보트의 집결을 미리 회피할 수 있게 되었다.[57] 대서양 호송 선단을 미국 해군이 호위하기 시작하자 독일은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던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U보트의 작전을 제한하였다.[58] 히틀러도 독일 해군의 U보트 운용을 방해하였다. 히틀러는 연합군의 노르웨이 상륙을 저지할 목적으로 소규모 U보트 부대가 북극해에 고정적으로 주둔하기를 고집하였고[59][60], 상당량의 U보트를 이탈리아와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 지원을 위해 지중해로 배치하였다.[61]

미국의 참전 이후 U보트의 주요 작전 지역은 북미 연안으로 변경되었다. 아직까지 대서양 횡단 호송에만 중점을 두고 있던 연합국으로서는 의외의 기습이었다. 대책을 마련하는 사이 U보트는 멕시코만과 카리브해까지 작전 반경을 넓히며 다시 한 번 "행복한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62] 1942년 중반 북미 연안의 방어가 강화되자 U보트는 다시 호송선단 공격에 집중하였다.[63] 호송선단에 대한 재공세는 1943년 3월 절정에 달했고 당시 침몰된 선박 전체 가운데 3분의 2가 호송선단에서 나왔다.[64] 그러나 연합군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시행하자 오히려 U보트의 손실이 급격히 늘어났고 불과 두 달 뒤인 5월 24일 되니츠는 막대한 손실로 인해 작전을 중단해야만 하였다.[65]
2차 대전 기간 동안 U보트에 의해 침몰한 연합군의 선박은 군함 175 척, 상선 2,825 척으로 3천 척에 가까웠다.[66] 같은 기간 독일의 U보트는 총 1,181 척이 취역하여 863 척이 임무에 투입되었으며 그 가운데 785 척이 손실되었다.[67][68] 이 중에는 승조원이 스스로 파괴하여 자침한 222 척과 연합군에 항복한 174 척이 포함되어 있다.[69] 독일 항복 후 실시 된 데드라이트 작전에서도 121 척의 U보트가 자침되었다.[70]
개발

1940년 독일은 실험용 잠수함 V-80을 건조하였다. V-80은 수상 항해에는 기존과 같이 디젤 엔진을 사용하지만 잠항시에는 헬무트 발터가 설계한 과산화수소를 추진제로 하는 공기 불요 추진 터빈을 체택하였다. 잠항 속도가 순항 시 4 노트, 최대 속도 6노트에 불과한 전기 모터에 비해 발터 터빈은 수중 20 노트라는 놀라운 속도를 보였지만, 재충전할 수 있는 전기 모터와 달리 과산화수소가 떨어지면 더 이상 잠항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발터 터빈을 장착한 실험용 U보트 4 척이 더 건조되었지만, 대형 U보트로 구현할 수는 없었다.[71][72] 더군다나 전쟁 중 독일은 잠수함 함대를 운용할만큼 충분한 양의 과산화수소도 생산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독일은 24척의 XVIIB형 연안 잠수함을 주문하였지만 단 3척만이 건조되었고 그마저도 실제 운용 가능한 것은 없었다.[73]
발터 터빈 U보트는 추진체 저장을 위해 선체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발터 터빈을 제대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크기가 늘어난 선체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과산화수소수 저장을 위해 설계된 공간에 축전지를 넣게 되자 잠항 속도와 거리가 모두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74] 발터 U보트의 설계를 기반으로 대양 작전용 대형 XXI형과 연안 작전용 소형 XXIII형이 생산되었다. 이전에 비해 크게 늘어난 축전지 용량으로 "엘렉트로보트"라 불린 이 잠수함은 빠른 건조를 위해 각기 별도로 생산된 구획들을 한 곳에 모아 조립하는 방식을 택했다.[75][76]

다이버가 스노클로 호흡하듯이 잠수함도 스노클 마스트를 장착하는[77] 아이디어는 네델란드에서 시작되었다. 독일은 1940년 독일의 네덜란드 침공 이후 스노클이 장착된 네덜란드 잠수함을 노획하였지만 1943년까지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스노클 마스트를 장착하면 선체를 물 위로 부상시키지 않고도 축전지를 충전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지 않아 파도가 거세지면 무용지물이었고, 스노클 마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잠항에 맞추어진 내부 공기와 외부 대기의 기압 차이 때문에 막대한 공기가 함내로 유입되면서 승조원이 고막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너무 빠른 속도로 항해하면 스노클 마스트가 부러질 수 있으므로 최대 잠항 속도가 8노트 이하로 제한되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 후반이 되어 U보트 부족을 겪게 되자 독일은 구형 VII형 및 IX형 U보트에 스노클 마스트를 추가하여 작전 반경을 넓혔다.[78]
등급
- I형: 처음 설계된 750톤급 대형 U보트이지만 설계가 불완전하여 2 척만 건조되었다.
- II형: 훈련 목족으로 제작된 연안용 소형 잠수함이지만 IID는 연장 탱크를 갖추어 1941년까지 대서양에서도 작전하였다.
- VII형: 총 709 척이 제작된 독일 U보트의 "주력함"이었다.
- IX형: 장거리 U보트로 인도양의 몬순 그룹에서 활동하였고 남대서양에서도 작전하였다.
- X형: 장거리 기뢰부설함으로 설계되었으나 주로 보급용으로 쓰였다.
- XIV형: 보급용 U보트. 어뢰 발사관이 없고 경량 대공포만 장착되었다.
- XVII형: 과산화수소 추진체를 이용한 공기 불요 잠수함이지만 실전 투입되지는 않았다.
- XXI형: XVII형 선체 설계를 이용하여 축전지 용량을 늘린 대형 U보트. 양산을 위한 설계는 완료하였으나 실제 생산은 2 척에 그쳤다.
- XXIII형: XXI형의 소형 버전. 1945년에 소규모로 운용되었다.
- 소형 잠수정: 비버, 하이, 몰흐, 시훈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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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이후
요약
관점

201형, 202형, 205형
1954년 런던 파리 회의로 서독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1955년부터 독일 해군에 최대 350톤 크기의 잠수함 운용이 허용되었다. 독일 해군은 350톤급 201형과 100톤급 202형을 제작하였다. 이 잠수함들의 배치 이전에 승조원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에 침몰하여 있던 XXIII형 2 척과 XXI형 1 척을 인양하고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1959년에는 12 척의 201형과 3 척의 202형 U보트가 주문되었다.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두 유형 모두 소련을 상대로 발트해 배치를 목적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비자성 강철을 사용하여 자기 신관 기뢰로 부터 보호하고 자기 이상 탐지기를 회피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무장은 201형의 경우 어뢰 6 개, 202형의 경우 2개였는데, 작은 선체에 되도록 많은 어뢰를 사용하고자 출항전 장전하고 운항중에는 재장전할 수 없는 형태였다.[79]
1962년 첫 201형 U보트 3 척이 취역하였다. 식별부호로 전통적인 "U"를 부여받았지만, 번호는 새롭게 시작하여 U-1, U-2, U-3이 되었다. 취역할 무렵에는 주문 당시와 톤수 계산 방식이 달라져 고체 밸러스트도 톤수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201형 U보트의 톤수는 395톤으로 계산되었다. 이로서 201형은 런던 파리 회의의 잠수함 제한 350톤을 초과하게 되었지만, 조약의 제한을 완화하여 현재 취역하는 잠수함에 대해서는 450톤까지 이후 제작되는 U보트에 대해서는 1천 톤까지 허용하였다. 201형은 추가로 소나를 장착하면서 최종적으로 420톤이 되었다. 1963년 말까지 201형을 개량한 205형 5척이 제작되었다.[80]
206형 및 207형

1962년 노르웨이가 연안 잠수함 15 척을 주문하였고 이미 제작되어 있던 U-3가 노르웨이 왕립 해군에 훈련용으로 대여되어 HNoMS 코벤으로 명명되었다.[81] 1963년에서 1967년 사이에 건조된 15척의 U보트는 고장력 강철 선체를 사용하여 잠수 심도를 증가하였고 207형으로 분류되었다.[82] 1965년 덴마크 왕립 해군은 205형 설계를 기반으로 하는 연안 잠수함 2 척을 건조할 라이센스를 구매하였으나 복잡한 장비 설치를 추가하여 1970년까지 완료되지 않았다.[83]
1963년 201형에 채용된 비자성 강철에 부식 문제가 확인되었다. 작은 균열에 발생한 부식이 확산되는 현상이 발견되자 노르웨이에 대여한 U-3는 훈련함으로 계속 사용되었지만, U-1과 U-2는 계류되었다. 이후 제작된 U-4에서 U-8까지의 U보트 5 척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연 페인트를 코팅하였지만 정기적인 부식 점검이 필요하였다.[84] 결국 이 U보트 5 척도 훈령용으로 배정하고 예전의 강자성 강철을 사용한 새로운 U보트 2 척이 건조되어 U-1과 U-2의 번호를 승계하였다. U-9에서 U-12까지 새로 건조된 201형 U보트에는 새로운 비자성 강철이 사용되었지만 1969년까지도 해군에 인도되지 못하였다. 한편 소형으로 건조된 202형 2 척은 별다른 용도를 찾지 못하여 식별부호 역시 부여받지 못하고 시험용으로만 운용되었다.[85]
209형 및 변형
1968년 독일 해군은 U-13부터 U-24까지 12 척의 연안 잠수함을 추가 주문하였다. 새 잠수함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전자 장비 수용을 위해 205형의 설계를 변경하여 제작되었고 206형으로 분류되었다. 1970년 결함이 있는 U-3부터 U-8까지 6 척의 U보트를 대체하기 위해 U-25부터 U-30까지 6 척의 U보트가 추가로 주문되었다. 독일해군은 승인된 1천 톤의 한계 내에서 공격용 대형 잠수함을 건조하길 원했지만, 기존의 비자성 강철 문제 해결에 들어간 재정 부담과 함께 이미 핵추진 잠수함이 등장한 시기에 디젤 잠수함을 공격용으로 사용하기엔 부적절하다는 이유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86]
더 큰 규모의 잠수함 건조가 허용되자 독일은 209형 잠수함을 개발하였다. 여전히 디젤-전기 방식의 잠수함이었지만 1천 - 1천5백 톤 규모로 크기를 키우면서 추가적인 전자 장비를 탑재하였고 어뢰를 재장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축전지 역시 보강하여 잠항 능력을 키웠다. 209형은 수출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그리스 해군에게 4 척이 처음 판매되었고 이후 13개국의 해군을 대상으로 51 척이 건조되었으며 12 척이 추가로 주문되었다.[87][88] 1974년 이스라엘 해군은 206형과 209형을 기반으로 540톤급 U보트 3 척을 주문하였다. 이 U보트는 540형으로 분류되었다. 540형의 생산은 정치적 이유로 독일이 아닌 영국의 비커스 리미티드에서 이루어졌다.[89][90] 1982년 노르웨이 해군은 코벤급 잠수함의 절반을 대체하기 위해 1천 톤급 U보트 6 척을 주문했으며, 이들은 210형으로 분류되었다.[91] 아르헨티나 해군은 1974년에 2척의 209형 U보트를 인수한 뒤[92] 1977년 6 척의 대형 2,000톤 TR-1700형 U보트를 주문했다. 이 가운데 2 척은 독일에서 건조되어 포클랜드 전쟁 이후인 1984-85년에 인도되었고, 나머지 4척은 아르헨티나에서 건조될 예정이었지만 완성되지 않았다.[93] 1990년대 초 이스라엘은 209형의 확대 버전으로 후기 212형과 유사한 1,565톤급 잠수함 3 척을 주문하였고, 1999년에서 2000년 사이 돌핀급(800형)으로 인도되었다.[94]
212형 및 변형

1998년 독일은 6 척의 212형 U보트 건조를 시작하였다. 212형의 첫 진수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탈리아가 2 척, 그리스가 4 척을 주문하였고 이들은 214형으로 분류되었다.[95] 2005년부터 2007년까지 4 척의 212형이 독일 해군에 취역하였고[96], 2 척은 이탈리아 해군에 취역했다.[97] 2015년에서 2016년에 2 척의 212형이 독일 해군에 추가로 인도되었고,[96] 2016년에서 2017년에는 이탈리아 해군도 2 척의 212형을 추가로 취역하였다.[97] 212형은 수소를 연료 전지로 사용하는 공기 불요 추진 시스템을 특징으로 한다.[95][96] 212형은 노르웨이에서도 구매 중이다.[98] 후속 수출 모델로 설계된 214형 9 척이 2007년부터 2020년 사이에 대한민국 해군에 인도되었다. 2010년에서 2011년 사이에는 하위 등급인 U 209PN형 2 척이 포르투갈 해군에 인도되었다.[99] 2011년 튀르키예 해군은 레이스급 잠수함으로 214형 6 척을 주문하였고[100] 첫 잠수함이 2024년 취역하였다.[101]
호주에 제안되었던 장거리 4천톤급 216형은 진행이 불발되었고[102] 2022년에서 2024년 사이에 싱가포르 해군에 2천톤급 218형이 인도되었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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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내용주
각주
참조 문헌
추가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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