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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키·나가쿠테 전투

1584년 도요토미와 도쿠가와가 오와리국에서 맞붙은 전투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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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키·나가쿠테 전투(일본어: 小牧・長久手の戦い)는 덴쇼 12년(1584년) 3월부터 11월에 걸쳐, 하시바 히데요시 진영과 오다 노부카츠·도쿠가와 이에야스 진영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전투는 오와리 북부의 고마키야마성, 이누야마성, 라쿠덴성을 중심으로, 오와리 남부, 미노국, 이세국 북부, 기이국, 이즈미국, 셋츠국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이 전투와 연동된 싸움이 호쿠리쿠·시코쿠·간토에서도 일어나, 사실상 전국 규모의 전쟁이었다. 히데요시군이 병력에서 우위였지만, 전투는 양측의 무승부로 끝나게 되었다.

간략 정보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날짜 ...

도쿠가와와 히데요시의 분쟁은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인질 교환에 동의하면서 해결되었다. 1586년 이에야스는 아들인 오기마루를 히데요시에게 보냈고, 히데요시는 자신의 누이인 아사히히메와 어머니인 오만도코로를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이후 158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스스로 신속(臣屬)하면서 양측의 분쟁은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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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인 노부카쓰를 지지하고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인 노부타카를 지지하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격파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와 다른 장군들을 그 해에 막 완공한 자신의 오사카성 저택으로 초대했다. 이러한 초대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히데요시에게 경의를 표하게 함으로써 히데요시와 노부카쓰의 역할을 뒤바꾸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와의 관계를 끊고 오사카성에 가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의 세 주요 가신(쓰가와 요시후유, 오카다 시게타카, 아자이 나가토키)에게 화해를 제안했고, 이로 인해 그들이 모두 히데요시를 지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로 인해 노부카쓰는 그 세 사람을 의심하게 되었고, 덴쇼 12년 3월 6일 (양력 1584년 3월 17일)에 그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8] 이러한 행동은 히데요시에게 노부카쓰를 공격할 정당성을 부여했고, 그 결과 노부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다음 날 이에야스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이 전투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사이의 전투가 되었다.

도쿠가와 군대는 전통적인 오다 가문의 거점인 오와리국을 점령했다. 히데요시는 오와리국으로 군대를 보내 대응했다. 이에야스는 고마키에서 히데요시의 군대와 대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의 장군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그 지역이 도쿠가와 군대가 서쪽에서 오는 적들과 싸우기에 유리하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9]

3월 7일, 노부카쓰는 노부즈미 오다를 도사로 보내 고소카베 지카야스에게 서한을 보내 조소카베 모토치카에게 자신의 가신 암살과 히데요시와의 관계 단절을 알리고 조소카베씨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계획은 호쿠리쿠 지방삿사 나리마사마에다 도시이에니와 나가히데를 공격하고, 조소카베 가문은 모리씨를 견제하면서 아와지섬에서 오사카를 공격하며, 사이카슈, 네고로슈 승병, 그리고 겐뇨의 혼간지 군과 협력하여 도요토미 군과 동시에 싸우는 것이었다.[10] 노부카쓰의 명령에 따라 이에야스는 이미 7일 하마마쓰성을 출발하여 오카자키, 야하기, 아노, 나루미를 거쳐 12일 야마자키에 진을 쳤다.[11][12]

히데요시는 모리씨가 전투에 참여할 것을 우려하여, 노부카쓰와 이에야스에 대한 캠페인 내내 우키타 히데이에와 이나바 가문 병력을 경계 상태로 두어 모리씨의 움직임을 예상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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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전투

요약
관점

이 분쟁 동안 혼다 다다카쓰단바국의 사무라이 씨족인 아카이 씨족과 협상을 벌였는데, 아카이 씨족은 아카이 나오마사의 동생인 아시다 도키나오가 이끌었으며, 도키나오는 도쿠가와 씨족에게 기여하여 아카이 씨족의 부흥을 열망했다.[14][a] 도키나오는 그 후 단바에서 군대를 일으켜 이에야스를 도왔다.[16]

3월 8일 밤, 히데요시는 노부카쓰가 자신의 가신 세 명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각 지역의 부하들에게 전투 준비 명령을 내렸다. 그는 또한 도미타 도모노부를 파견하여 노부카쓰에게 와서 상황을 설명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노부카쓰는 거절했고, 15일 히데요시는 오와리국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노부카쓰는 마쓰가시마성을 다키가와 가쓰토시에게 주었지만, 가쓰토시의 가신들이 성을 차지하러 갔을 때 쓰가와의 가신들에게 입장을 거부당하자, 가쓰토시와 고즈쿠리 나가마사 군대는 성을 포위하고 점령했다. 그 이후부터 가쓰토시는 히오키 다이젠노스케와 함께 마쓰가시마성을 노부카쓰를 위해 차지했다.[11][17] 또한 가쓰요시는 히데요시에게 설득되어 그와 편을 들었다고 전해지지만, 가쓰요시는 거절했다.[18]

3월 9일, 가니에 성의 영주인 사쿠마 노부히데(마사카쓰)와 야마구치 시게마사가 이세로 파견되어 도요토미 세력에 가담한 세키 모리노부와 그의 아들 가즈마사가 방어하는 이세 가메야마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쉽게 점령할 수 없자 그들은 수리 중인 미네 성으로 후퇴했다. 나카가와 다케타다(사다나리)와 세키 진고베이는 이세로 증원군으로 향했다.[11]

3월 10일,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카쓰 세력에 속해 있던 미즈노 다다시게, 니와 우지쓰구, 타카기 사다토모를 가신으로 영입하려 했으나 그들은 거절했다.[19] 같은 날, 노부카쓰는 미노의 오가키성이케다 쓰네오키와 가네야마 성의 모리 나가요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도 자신의 가신인 비토 도모노부를 보내 두 사람을 설득했다. 이케다 가문 내에서 불화가 발생했지만 이키 다다쓰구가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츠다 하야토사(노부유키)를 보내 추가로 설득하며 미노, 오와리, 미카와 세 지역을 보상으로 약속했다. 결국 이케다와 모리 가문은 노부카쓰의 요청을 거절하고 히데요시에게 합류했다.[11] 다른 곳에서는 오다 노부카게, 호리 히데마사, 가모 우지사토, 하세가와 히데카즈, 히네노 히로나리, 그리고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1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미네 성을 공격했다. 성의 방어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쿠마 노부히데는 공격을 결정했지만,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매복 공격을 받아 패배했고, 세키 진고베이가 전사했다. 노부히데는 성을 버리고 후퇴했다.[10][11]

3월 13일, 다다시게와 그의 아들 미즈노 가쓰나리는 이세의 고베성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0] 다다시게는 오카다 시게타카(노부카쓰에게 처형된 인물)의 동생인 오카다 요시타다의 진지를 공격하여 그를 항복시키고 점령했다.[21][22] 다른 곳에서는 이세로의 증원 임무 때문에 방어가 허술했던 이누야마 성이 이케다 쓰네오키의 아들 이케다 모토스케에 의해 갑작스럽게 공격당하고 점령되었다. 성을 맡고 있던 나카가와 세이조노스케는 패배하고 전사했다. 3월 14일, 나카가와 유타다는 급히 이누야마로 돌아오던 중 개인적인 복수심을 품은 이케지리 헤이자이몬에게 암살당했다. 이누야마 성의 함락 소식을 들은 사카이 다다쓰구와 미즈노 다다시게는 구와나 성 방어에 합류하여 미노의 도요토미 세력으로부터의 추가 공격에 대비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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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키 성 옛 지도

같은 날, 노부카쓰는 이에야스와 기요스 성에서 전략 회의를 가졌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나서서 오다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경계에 있는 고마키야마에 요새를 건설하여 본부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고마키야마에는 노부나가 시대의 성터가 있었는데, 나중에 3월 22일 거의 완공되었다. 그 후 노부카쓰는 이세 방어를 위해 나가시마성으로 돌아갔다.[11]

하구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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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의 이누야마성

3월 16일, 장인 이케다 쓰네오키의 전공을 부러워하던 모리 나가요시는 이누야마성을 넘어 하구로의 하치만바야시에 병사 비토 도모노부와 함께 진을 쳤고, 자신만의 성공을 거두기를 희망했다. 3월 21일, 히데요시는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를 떠나 27일 이누야마성에 입성했다. 28일 이에야스도 나이토 노부나리미야케 야스사다에게 기요스성을 맡기고 고마키야마에 입성했으며, 다음 날 노부카쓰도 고마키야마 진영에 합류했다.[10][11] 동시에 모리 나가요시는 기요스성을 목표로 했다. 나가요시 군의 움직임을 오랫동안 정찰하던 사카이 다다쓰구는 그들의 위치를 발견하고 즉시 이에야스의 허락을 받아 공격에 나섰다. 사카이는 아마노 유키미쓰를 길잡이로 삼아 다음 날 새벽,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마쓰다이라 이에노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혼다 야스시게와 함께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오쿠다이라는 고조강을 건너 돌격했지만, 모리 나가요시와 비토 도모노부는 용감하게 싸워 그들을 격퇴했다. 그러나 퇴각하는 적들을 너무 멀리 추격하다가 다다쓰구의 별동대에게 뒤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나가요시의 병사들 사이에 혼란이 일어났다.[10][11] 이로 인해 모리 나가요시는 3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23] 나가요시의 장교 중 한 명인 노로 무네나가(Norō Munenaga)는 마쓰다이라 사다하루(Matsudaira Sadaharu)에게 죽임을 당했다.[24] 그러나 그들은 결국 나가요시를 함정에 빠뜨리지 못했고, 그는 포위망을 뚫고 후퇴할 수 있었다.[3][25] 이어서 다다쓰구는 고마키로 돌아와 혼다 다다카쓰와 이시카와 가즈마사와 함께 병력을 주둔시켰다.[26]

3월 18일까지, 가신 니시오 요시쓰구와 아베 마사카쓰는 공동으로 도야마 사도노카미에게 답신을 보내 3월 17일 하구로 전투에서 모리 나가요시를 격파하여 나가요시 병사 1,000명 이상을 죽였다고 보고했다.[4] 이 소식에 대해 쿠시하라 도야마, 사도노카미, 한자에몬노조는 노부카쓰와 이에야스 편으로 돌아섰고, 히데요시 편의 모리 나가요시와 대치했다. 나가요시가 하구로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케치성을 공격했다. 이에야스는 도야마 도시카게를 파견했다. 4월 8일, 그들은 이와무라성도 공격했다.[27]

고마키 산에서의 대치

하구로 전투 후, 이에야스는 3월 18일 고마키야마 성을 점령하고 그 주변에 요새와 토루를 건설하여 하시바 군에 대비했다. 히데요시는 3월 21일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사카성을 출발하여 3월 21일 또는 27일경에 기후로 진격했다.[5][28] 4월 4일, 히데요시는 또한 이와사키산에 요새를 건설하고 라쿠덴 성에 본부를 설치했다. 양측은 수많은 요새를 건설했다.[10][11]

4월 8일, 다다시게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선봉을 이끌고 오카나가 나가모리, 오스카 야스타카,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혼다 히로타카, 니와 우지쓰구와 함께했다. 오바타성에서 열린 군사 회의에서 다다시게는 적의 주력을 피하고 도요토미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전략을 제안했다. 사카키바라와 다른 장군들은 동의하고 다다시게의 계획을 실행했다.[29]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미요시 히데쓰구의 본영을 공격하여 그를 격퇴했다.[21] 이 교전에서 다다시게의 가족인 미즈노 분초가 적장 기노시타 도시마사를 죽였다고 전해진다.[29] 히라노 나가야스도 이 전투에서 히데쓰구 휘하에서 싸웠다고 전해진다.[30]

덴쇼 12년 3월 13일(1584년 4월 23일), 이에야스는 기요스성에 도착했다. 같은 날, 이케다 쓰네오키가 이끄는 오다씨 가신단의 무사들이 히데요시 편으로 전향하여 본래 오다 노부나가가 건설했던 이누야마성을 점령했다.[31]

한편, 다키가와 가쓰토시는 도쿠가와 장군 핫토리 한조로부터 지원군을 받아 하시바 히데나가의 포위 공격에 맞서 버텼다. 그러나 한 달 안에 니노마루(성곽의 두 번째 방벽)로 몰리게 되었고, 힘든 싸움 끝에 병사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항복했다.[32] 가쓰토시는 아내 게이호니를 통해 포위군과 협상하여 안전하게 성을 떠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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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쓰구의 원정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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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키 산과 고마키성 (고마키야마성은 아님)

히데요시와 그의 군대는 21일 (5월 1일) 오사카성의 요새를 떠났고, 히라노 나가야스는 후타에보리성 전투에서 싸운 후 후퇴했다.[30]

5월 4일, 히데요시는 지역을 시찰하고 다케가하나 성에 대한 수공(水攻) 준비를 명령했다. 그는 미노의 가가노이 성에 대한 첫 공격을 명령했는데, 가가이 시게무네와 그의 아들 시게모치가 농성하고 있었다. 나가오카와 가모의 하시바 군은 맹렬히 공격했고, 방어군이 평화를 요청했지만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6일 새벽, 그들은 성문을 열고 돌격했다.[33] 나중에 히데요시는 27일 (5월 7일) 이누야마 성에 도착했다.

5월 9일, 노부카쓰 측의 오다 노부테루가 방어하던 오쿠성이 항복했다. 5월 10일, 제방이 완성되어 다케가하나성은 완전히 포위되고 수몰되었다.[11] 5월 11일, 오다 노부카쓰의 가신 사쿠마 미치노리가 교토 이치조초를 갑자기 공격하여 반란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쇼시다이(부총독) 마에다 겐이오와리국으로 가 있는 동안 야마시로 요도에 주둔하던 오노기 시게쓰구가 즉시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미치노리는 도망쳤다. 반란은 실패했지만, 이는 히데요시를 격분시켰고, 천황, 조정, 혼간지 사원을 포함한 큰 혼란으로 이어졌다.[33]

이에야스는 고마키성에 입성한 후부터 가쿠덴에 도착할 때까지 몇몇 작은 교전을 제외하고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상황에 안심했고, 쓰네오키는 "이에야스는 지금 고마키야마에 있습니다. 그는 오카자키의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우리가 그에게 공격을 가하면 분명히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히데요시를 부추겼다. 게다가 1581년 3월부터 10월까지 쿠시하라-도야마 씨족과 아케치-도야마 씨족이 모리 나가요시에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하구로에서의 패배로 인해 나가요시가 소유했던 많은 성들이 위험에 처했다. 이는 나가요시를 크게 좌절시켰고, 즉시 미카와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게 했다.[4]

야심만만한 히데요시는 미카와로 향하기로 결정했으며, 모리 나가요시, 이케다 쓰네오키, 호리 히데마사 그리고 어린 히데쓰구 (당시 17세)의 지원을 받았다. 각 부대의 주요 편성은 다음과 같다.[5]

  • 제1군단 - 이케다 쓰네오키 - 5,000명
  • 제2군단 - 모리 나가요시 - 3,000명
  • 제3군단 - 호리 히데마사 - 3,000명
  • 제4군단 - 하시바 히데쓰구 - 9,000명.

이와사키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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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사키 성

이와사키 전투는 이케다 쓰네오키의 군대와 이와사키성 주둔군인 니와 우지쓰구의 군대 사이에 벌어졌다. 이 전투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전체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결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1] 이케다 쓰네오키는 이와사키성 공격을 이끌었으나 즉시 말에서 떨어졌다. 낙마에 당황한 쓰네오키는 일격이탈 전술을 잊고 성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 방어군이 잘 싸웠지만 성은 함락되었다. 니와 우지쓰구는 동생을 포함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34]

하쿠산 숲 전투

이와사키성 포위가 진행되는 동안 히데쓰구 군대는 하쿠산 숲(나고야시 모리야마구, 오와리아사히시)에서 휴식 중이었고, 이에야스는 시노기(현재 가스가이시)에 있는 히데쓰구의 진영을 알게 되었다. 9일 4시 35분경, 미즈노 다다시게, 니와 우지쓰구, 오스가 야스카타의 군대에 의해 후방에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군대에 의해 측면에서 공격받았다. 이 기습 공격으로 히데쓰구의 군대는 전멸했다. 히데쓰구는 자신의 말을 잃고 동료들의 말을 타고 도망쳤다. 히데쓰구의 후퇴를 확보하려던 기노시타 가문의 많은 구성원, 히데요시의 아내 네네의 아버지인 기노시타 스케히사, 그리고 그의 동생 기노시타 도시마사를 포함한 감찰관으로 임명된 사람들이 전투에서 사망했다.[35][36][37] 히데쓰구 자신은 말에서 떨어졌지만 다른 말을 얻어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야스마사와 야스타카의 군대는 호리 히데마사가 이끄는 증원군과 맞닥뜨렸고, 이로 인해 히노키가네 전투가 벌어졌다.[38]

히노키가네 전투

하쿠산모리 전투 이후, 도쿠가와는 고마키산을 요새화하여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요 사령관 중 한 명인 이케다 쓰네오키는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인근 미카와국을 통해 약탈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야스는 이를 예상하고 도쿠가와 군을 이끌고 히데요시의 군대에 도전했다. 미즈노 다다시게는 도쿠가와의 후방 경계를 이케다 군에 맞서 이끌었으며, 전투 소음은 히데요시 사단의 지휘관인 호리 히데마사에게 경고를 주었다. 호리 히데마사는 부하들을 이끌고 동료들을 방어하기 위해 나가쿠테 마을에 진지를 잡았다. 그는 초기 도쿠가와 공격을 저지했다. 이 패배로 인해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이와사쿠로 도망쳤고, 오스가 야스카타는 이노코이시로 도망쳤다.[39] 그러나 히데마사는 도쿠가와군의 본대가 약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23]

나가쿠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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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쿠테 옛 전장 공원

히데요시의 또 다른 사령관인 모리 나가요시는 이에야스가 이이 나오마사를 지원하기 위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처음에는 나오마사의 병사들이 적의 공격에 무너져 후퇴하다가, 이에야스가 격분하여 나오마사의 부관인 기마타 모리카쓰를 보내 나오마사의 질서를 회복하도록 도왔다.[40] 역사가 기쿠치 히로유키는 이 전투에서 나오마사가 직접 전선에서 싸우고 적병과 격투를 벌이는 등 무모하게 행동하여 위험한 상황에 자신을 노출시켰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부하 안도 나오쓰구가 나오마사에게 무모한 행동과 후방에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데 집중해야 할 군사 지휘관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이는 또한 나오마사의 다른 현장 장교인 기마타 모리카쓰가 병력을 조율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40] 전투는 두 시간 넘게 이어졌는데, 나오마사 부대는 총포 사격으로 쓰네오키와 모리 나가요시 군의 진격 시도를 반복적으로 저지했다.[41][42] 전투는 도쿠가와 군이 돌아서지 않고 돌격하면서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고, 이이 나오마사는 이 전투에서 약 3천 명의 뎃포병을 지휘했다. 이윽고 나가요시는 나오마사 군과의 전투가 한창일 때 총에 맞아 전사했다. 나가요시는 미즈노 가쓰나리의 가신 미즈노 타로사키키요히사의 머스킷병 스기야마 마고로쿠에게 눈 사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고 전해진다.[43] 쓰네오키 역시 나가이 나오카쓰의 창에 찔려 전사했다.[b] 또한 쓰네오키의 아들 이케다 모토스케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45][46] 나가요시와 쓰네오키의 군대는 전멸했고, 도쿠가와 군의 승리로 끝났다.[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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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쇼지 절의 승려들이 나가쿠테 전투에서 사망한 이들을 매장한 무덤.

전투가 끝난 후, 오다 노부카쓰의 서신("요시무라 문서")과 루이스 프로이스의 서신에서 약 1만 명의 전사자 대부분이 히데쓰구 군대 출신이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c] 오다-도쿠가와 군은 59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5][6] 이 소식에 히데요시는 격노했다.[7] 한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본군이 다가오자 더 이상의 사상자 발생을 피하기 위해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고마키로 돌아왔다.

오후에 하쿠산모리 전투의 패배 소식이 도착하자, 히데요시의 2만 명의 병력은 전투 현장 근처의 류센지로 돌진했다. 그날 저녁, 이에야스가 오바타성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 날 아침에 공격하기로 결정했지만, 그 동안 이에야스는 오바타성을 떠나 고마키야마 성으로 갔다가 마침내 기요스성으로 돌아왔다. 히데요시는 쓰네오키의 사망 소식과 이에야스의 출발 소식을 곧이어 들었고, 4월 10일 (5월 19일) 가쿠덴을 떠나 5월 1일 (6월 9일) 오사카성으로 돌아왔다.

4월 9일 모리 나가요시가 나가쿠테에서 전사하자, 4월 17일 아케치성이 함락되었다. 쿠시하라 도야마, 아케치 도야마, 나에기 도야마 씨족은 여러 곳에서 계속 싸웠고, 도야마 도모마사도 나에기성을 탈환했을 가능성이 높다. 시나노국기소 요시마사는 도쿠가와의 공격을 받아 히데요시에게 증원군을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모리 다다마사에게 소수의 증원군을 기소에 보내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나중에 취소되었다.[27] 또한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스즈키 시게쓰구 등이 도야마 성을 강화하기 위해 출정했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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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키산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쫓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를 묘사한 에도 시대 그림

야스마사는 히데요시의 행동을 오다 노부나가의 뜻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고, 히데요시가 천한 농민 계급 출신이라는 점을 모욕하는 비하적인 선언문을 유포했다.[49] 이 선언문을 듣고 히데요시는 격노하여 야스마사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10만 관(일본 금괴)을 포상하겠다고 명령했다.[5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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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전 추가 전투

요약
관점

6월 7일, 푸와 히로쓰나는 다른 선택지가 없자 히데요시의 가신 이치야나기 나오스에를 통해 화평을 요청했다. 6월 10일, 그는 성을 항복하고 기요스성으로 후퇴했다.[11] 6월 12일, 이에야스는 고마키산을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맡기고 기요스성으로 후퇴했다.[11] 6월 13일, 히데요시는 적군으로부터 지원군을 기대했지만, 이에야스와 노부카쓰가 어떠한 도발에도 응하지 않자 오가키성으로 후퇴했으며, 21일 오미로 돌아갔다가 6월 27일 오사카로 돌아왔다.[10]

가니에성 공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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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니에성 유적 공원

4월 나가쿠테 전투 이후, 오와리 북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때 가니에 성은 이에야스의 기요스 성과 노부오의 나가시마 성 사이 약 3마일 지점에 위치했으며, 미에 해자(堀)와 오노 성, 시모지마 성, 마에다 성이라는 세 개의 성곽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니에 성은 바다와 접해 있었고, 아쓰타, 쓰시마와 함께 오와리의 주요 항구 중 하나였다. 시모지마는[52]

한편,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그의 옛 영지인 이세 북부와 오와리의 나가시마로 파견되었다. 마에다 요주로(마에다 다네토시 또는 나가사다)는 그가 없는 동안 성을 지키고 있었다. 가즈마스는 다네토시를 사촌으로 보고, 그를 설득하여 도요토미 군에 가담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마에다 성의 보조 성을 방어하는 마에다 나가타네와 시모이치바 성을 방어하는 마에다 요헤이(마에다 사다토시)는 공격에 동참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오노 성을 방어하는 야마구치 시게마사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 6월 15일 밤, 가즈마스는 구키 요시타카에게 바다에서 오노 성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시게마사는 강둑에서 맹렬한 반격을 가했다. 한편, 이이 나오마사는 이 소식을 듣고 전함을 보내 저지 노력을 강화하고 강을 봉쇄하여 그들이 상륙조차 하지 못하고 후퇴하게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노부카쓰는 가지카와 히데모리와 고사카 유키치를 보내 오노 성을 지원하게 했다. 6월 16일, 가즈마스는 전함으로 인근에 상륙하여 가니에 성에 진입하려 했지만, 나오마사, 미즈노 가쓰나리 등에게 저지당했다. 오직 다키가와 가즈타다의 병력만이 성에 진입할 수 있었고, 주력 부대는 가니에 해안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야스와 노부카쓰는 협의하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오다 나가마스를 파견하여 시모이치바 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가즈마스와 요시타카는 배를 통해 시모이치바 성에 지원군을 보내려 했지만, 오카베 나가모리(도쿠가와 측)와 노부카쓰 측의 시게마사가 이들의 시도를 저지하여 요시타카의 선봉선을 나포하고 요시타카의 조카(동생)인 구키 조베이를 포로로 잡았다. 가니에 해안에서 기다리던 가즈마스는 가니에 성이 고립되어 위험하므로 아군을 대피시키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노부카쓰가 여러 척의 대형 함선으로 공격을 이끌자 구키의 함선들은 후퇴했다. 가즈마스는 탈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가즈마스는 가니에 성으로 들어가 아군과 재회했으며, 함께 포위되었다. 이 전투에서 노부카쓰는 가즈마스의 말 깃발을 나포하고 많은 적군의 목을 베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도쿠가와 가신 마미야 노부타카와 마쓰다이라 다다쓰나(신스케)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11]

6월 18일, 이에야스와 노부오는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니에, 마에다, 시모지마를 포위했다.[52] 가니에 성은 마에다 나가타네다키가와 가즈마스가 방어했다. 다다쓰구, 오카나베 모리, 야마구치 시게마사가 시모지마 성 공격을 주도했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오스가 야스카타는 도망치는 수비병들을 잡기 위해 배치되었다.[53][54] 오후에 시모이치바 성은 야스마사 사카키바라, 나가마사 오다, 마에다 사다토시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마에다 사다토시는 야마구치 시게마사의 가신에게 참수되었다. 이에야스는 오카모토 나가모리에게 성 방어를 맡겼다.[11]

6월 21일, 히데요시가 다시 오미로 진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부카쓰와 이에야스는 22일 가니에 성에 대한 강공을 시작했다. 남쪽 오테-우미카이 문에서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니와 우지쓰구(도쿠가와 군), 아마노 유키미쓰(노부카쓰 군)가 삼면에서 맹공을 펼쳤다. 동쪽 마에다구치 문에서는 이에야스가 마쓰다이라 야스다다, 혼다 다다카쓰, 이시카와 야스미치, 핫토리 한조의 이가 병력을 이끌었다. 서쪽 이누이구치 문에서는 노부카쓰의 주력군이 오스가 야스카타와 미즈노 다다시게(도쿠가와 군)와 함께 맹렬한 총공격을 펼쳤다. 다키가와 가즈마스 역시 1,000명가량의 병력을 세 그룹(다니자키 주에몬, 헤키 고자에몬, 다키가와 노리타다)으로 나누어 맹렬히 저항했지만, 수적 열세로 인해 병력을 철수하고 산노마루(일본 성곽의 외성)를 포기했다. 공격군은 산노마루를 점령하고 망루를 세워 혼마루와 니노마루(일본 성곽의 내성)에 총격을 가하여 성내 사기를 점차 떨어뜨렸다. 6월 23일, 이시카와 가즈마사와 아베 노부카쓰는 노부카쓰 군과 함께 마에다 성을 기습 공격하여 마에다 나가타네를 평화 조약으로 이끌고 성을 항복시킨 뒤 미노로 후퇴했다.[11] 6월 23일, 이에야스는 가니에 성이 평정된 후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함께 입성했다.[52]

가니에 공성전 이후

6월 29일, 노부카쓰는 오다 나가마스의 가신인 나루미 기타로를 사신으로 보내 가즈마스에게 항복을 촉구했다. 가즈마스는 기꺼이 쓰다 도자부로를 보내 협상했지만, 이에야스의 조건은 다네토시의 목을 내놓는 것이었다. 가즈마스는 이를 수락하고 서약서를 제출했다.[11]

7월 3일, 가즈마스는 다키가와 아케마스와 쓰다 도자부로를 상대편에게 인질로 넘겼고, 이에야스는 오스가 야스카타를 성으로 들여 인질로 삼았다. 마에다 요주로는 위험을 감지하고 도주하려 했으나 붙잡혀 살해당했다. 가즈마스는 사촌의 목을 바치고 성을 항복했다. 인질 교환 후 이세로 돌아가려 했으나, 기즈쿠 성(또는 고베 성)을 지휘하던 도미타 잇시로는 히데요시의 허락 없이 성이 항복한 것을 의심하여 입장을 거부했다. 비참한 패배를 당한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교토의 묘신지 절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10] 이에야스는 사쿠마 노부히데를 가니에 성으로 돌려보내고 마에다 성과 시모이치바 성을 철거하도록 했다. 5일, 노부카쓰와 이에야스는 구와나에 주둔했다. 고베와 시라코를 순찰한 후, 그는 하마다(하마다 성)에 요새를 건설하고 다키가와 다케토시와 미쿠모 나리모치에게 방어를 맡겼다.[11] 7월 12일, 기즈쿠리 나가마사는 구모즈 강을 건너 스가(스가)로 진격하여 가모 고세이와 전투를 벌였다. 나가마사는 부상당했지만, 기즈쿠리 군은 반격하여 가모 군을 격파하고 도기로 돌아왔다.[55] 7월 13일, 이에야스는 이시카와 가즈마사를 구와나 성에 배치하고 기요스 성으로 돌아왔다.[11]

7월 중순, 삿사 나리마사는 갑자기 오다씨-도쿠가와씨 군으로 편을 바꿨다. 나리마사는 고향으로 돌아온 호쿠리쿠 군의 일원인 헤이자이몬으로부터 하시바 군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들은 후, 오다-도쿠가와 측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여겨진다.[56]

8월 19일,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혼다 마사노부는 조소카베 가문에 서신을 보내 노부카쓰가 지카야스에게 비젠국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알렸다. 노부카쓰는 고소카베 지카야스에게 바다를 건너 본토로 와서 셋쓰국이나 하리마국에서 히데요시 군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위협으로 인해 히데요시는 고마키에 진영을 치고 있었음에도 오사카로 돌아갔지만, 조소카베 모토치카이요국의 지역 다이묘들의 저항, 모리씨의 움직임, 센고쿠 히데히사와 소고 마사유키 같은 히데요시 장군들의 위협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12] 이후 8월 27일, 히데요시는 다시 미노국으로 진격하여 니노미야 산에 올라 도쿠가와 측의 상황을 분석하고 다음 날 그들에게 다가갔다. 노부카쓰와 이에야스도 기요스 성을 떠나 이와쿠라 성으로 진격하여 그들을 맞섰다. 부하들의 반복적인 패배를 의식했는지, 히데요시는 9월 2일 니와 나가히데를 통해 노부카쓰와 이에야스 사이를 중재하려 했다. 노부카쓰와 이에야스 역시 조소카베 가문과 호조 가문으로부터 기대했던 증원군이 도착하지 않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일방적인 요구(노부카쓰의 딸, 이에야스의 차남과 동생, 이시카와 가즈마사, 오다 나가마스, 다키가와 다케토시의 자녀들을 인질로 잡고 오와리에서 만나라는)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양측은 9월 6일 헤어졌다. 양군은 다시 전 병력으로 대치했다.[10]

9월 17일, 히데요시는 군대를 오가키로 철수하고, 오미-사카모토와 교토를 거쳐 10월 6일 오사카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10월 중순, 이에야스는 주둔군을 배치한 후 오카자키성으로 돌아갔고, 노부카쓰는 나가시마성으로 돌아갔다.[10]

9월 9일 (10월 12일), 삿사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의 명령에 따라 노토국스에모리성을 공격하여 그곳의 거주자를 몰아냈다. 나중에 마에다 도시이에가 한밤중에 도착하여 삿사 군을 격파했다. 나중에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카쓰가 농성하던 구와나 성을 포위했지만, 미즈노 다다시게와 그의 부하들은 버티고 공격을 물리쳤다. 구와나 전투 중에 다다시게의 장남 가쓰나리는 아버지의 가신 도미나가 한베이를 아버지에게 비방죄로 처벌받았다고 주장하며 죽였다. 다다시게는 고마키에서 아들의 설명을 들었지만 용서하지 않고 추방했다.[21] 히데요시는 10월 20일 오미-사카모토에 도착한 후 남쪽으로 진군하여 10월 23일 이세-하쓰에 진을 쳤다. 그는 가모 우지사토를 나와 성에, 하세가와 이에마사를 구와베 성에 배치하여 방어했다. 노부카쓰는 즉시 기요스 성의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알렸다. 11월 9일, 이에야스는 기요스로 진격하여 사카이 다다쓰구를 파견하여 구와나 성의 이시카와 가즈마사를 지원하게 했다.[10]

같은 달,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카쓰가 농성하던 구와나 성을 포위했지만, 다다시게와 그의 부하들은 버티고 공격을 격퇴했다. 구와나 전투 중에 다다시게의 장남 가쓰나리는 아버지의 가신 도미나가 한베이를 아버지에게 비방죄로 처벌받았다고 주장하며 죽였다. 다다시게는 아들의 고마키에서의 설명을 들었지만 용서하지 않고 추방했다.[21] 9월 17일, 히데요시는 군대를 오가키로 철수하고, 오미-사카모토와 교토를 거쳐 10월 6일 오사카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10월 중순, 이에야스는 주둔군을 배치한 후 오카자키성으로 돌아갔고, 노부카쓰는 나가시마성으로 돌아갔다. 이를 본 히데요시는 10월 20일 오미-사카모토에 도착한 후 남쪽으로 진군하여 10월 23일 이세-하쓰에 진을 쳤다. 그는 가모 우지사토를 나와 성에, 하세가와 이에마사를 구와베 성에 배치하여 방어했다. 노부카쓰는 즉시 기요스 성의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알렸다. 11월 9일, 이에야스는 기요스로 진격하여 사카이 다다쓰구를 파견하여 구와나 성의 이시카와 가즈마사를 지원하게 했다.[10]

10월 말, 이시신덴 센슈지 절의 주지사 교에이가 평화 협상을 중재하면서 도기 공성전은 끝났다. 나가마사 기즈쿠리가 가모 군에 성을 항복하고 후퇴하자, 노부카쓰는 그에게 이나베 군에 10,270관 상당의 땅을 주었고, 그곳에 다나베 성을 짓고 이사했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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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요약
관점

11월 11일, 히데요시는 이세 야다 강에서 노부카쓰를 만나기로 했다. 그는 마치야 강을 건너야 했으므로 히데요시는 의자에 앉아 노부카쓰가 오기를 기다렸다. 노부카쓰는 말을 타고 오다가 히데요시를 보자 말에서 내렸다. 히데요시는 엎드려 노부카쓰에게 20개의 큰 동전, 후도 구니유키의 칼과 와키자시, 그리고 이세 북부의 반란에서 포획한 35,000개의 짚 가마니 군수품을 정중하게 바쳤다.[11][10] 11월 15일, 노부카쓰는 히데요시와 별도로 화친하고 그의 가신이 되었으므로 다다시게는 종속 가신이 되었다. 1585년 2월, 히데요시가 사이가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을 때, 노부카쓰는 같은 달 12일에 출정하라고 명령했다. 정확한 날짜는 불분명하지만, 다다시게는 이 무렵 히데요시의 직속 가신이 된 것으로 보인다. 9월, 히데요시는 그에게 셋쓰국 도시마 군 간다에 728석의 토지를 추가로 주었다.[22][57]

이에야스는 두 전투 모두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1585년 초에 화해했다. 오다 나가마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 그리고 삿사 나리마사와 마에다 도시이에 사이의 평화 중재자가 되었다. 조지 샌섬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어리석은 싸움에 힘을 낭비하기에는 너무나 현명했다."[58]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모두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며 이전에 충돌한 적이 없었다. 사실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적대 기간이 될 것이다.[58][59]

어쨌든 결국 이에야스는 휴전에 동의하여 아들 오기마루(후에 유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냄으로써 분쟁을 끝냈다.[60] 이어서 히데요시는 선의의 표시로 여동생 아사히히메와 어머니 오만도코로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다.[61][62] 그러나 이에야스의 원로 가신인 혼다 시게쓰구는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가 인질 교환 협정 중에 어머니를 바꿔치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63] 도요토미와의 회담 후, 시게쓰구는 이이 나오마사오쿠보 다다요와 함께 오카자키 성을 담당하게 되었다.[64] 나중에 이에야스가 교토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던 중 사건이 발생했다. 시게쓰구는 교토에서 이에야스의 안전을 우려했다. 시게쓰구는 당시 인질로 미카와에 머물고 있던 오만도코로의 거주지 주변에 나무토막을 쌓았다. 그는 교토에서 이에야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오만도코로를 불태울 것이라고 말했다.[65][66]

12월 14일, 노부카쓰는 토토미국 하마마쓰성으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지원군 제공에 대한 노고에 감사했다.[67] 12월 25일에 돌아왔다.[10] 역사가 시바 히로유키는 이 평화 조약 이후 히데요시가 노부카쓰를 산보시의 대표로 대신하여 오다 씨족의 공식적인 수장으로 임명했다고 지적한다.[68]

그의 일본외사("일본 비공식 역사")에서 라이 산요는 이에야스를 일본의 통치자로 만든 가장 중요한 순간이 오사카 전투세키가하라 전투가 아니라 고마키-나가쿠테라고 주장했다.[69] 영토적 이득은 전혀 없었지만, 일본 연구자들은 이 전쟁의 여파가 오다 가문의 영토 내 정치적 균형과 위신이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사이에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노부카쓰에 대한 이러한 후원으로 인해 노부카쓰의 정치적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고 보았다.[6][70]

1586년 일본 지진과 홍수

진행 중인 적대 행위와 함께 5월부터 7월까지 칸토 지역에서 도카이 지방에 이르는 지역에 폭우가 끊임없이 내렸는데, 이에 대해 이이타다 일기에는 "50년 만의 가장 큰 홍수"로 기록되어 있다.[71]

이 갈등의 한가운데 1586년 덴쇼 지진이 발생했다.[61] 오랫동안 도쿠가와 가문의 영토가 황폐해져 도요토미 정권에 맞서 계속 싸우기 어려워졌고 나라를 재건해야 했다는 것이 널리 믿어졌다.[72] 이것은 노부나가의 죽음 이후 오다 씨족이 붕괴되면서 도쿠가와 씨족이 전멸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49]

그러나 21세기 일본의 지진사 연구자들은 그러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61] 히데요시가 노부카쓰와 평화 협정을 맺은 후,[60]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복종하기를 거듭 거부한 다음, 지진으로 오사카가 크게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의 전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61] 역사가 히라야마 마사루도 이 견해를 지지했다. 그는 역사 기록을 통해 해당 지진의 양상을 검토하여, 이 재해가 도요토미의 지배 영토 대부분을 황폐화시킨 반면, 도쿠가와가 지배하는 미카와국은 지진의 미미한 부분만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히라야마는 이 재해가 사실 이 갈등에서 이에야스에게 다소 도움이 되었다고 보았다.[73]

지진 후 노부카쓰는 나가시마성에서 기요스성으로 옮겨 대대적으로 개조했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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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부록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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