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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마사무네
일본의 다이묘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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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마사무네(일본어: 伊達 政宗, 1567년 9월 5일 ~ 1636년 6월 27일)는 센고쿠 다이묘이자 다테씨의 당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막부 전기까지 활동했던 무사이다. 그는 한쪽 눈을 천연두로 잃었고, 이로 인해 당대에 오슈의 "독안룡" 또는 간단히 "독안룡"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584년 아버지였던 다테 데루무네가 마사무네에게 가독을 맡긴 이래, 다테 마사무네는 20여 년간 전쟁터에서 생활했다. 1585년 다테 데루무네가 니혼마쓰씨에게 암살당하자 마사무네는 이에 대한 복수로 히토토리바시 전투에서 니혼마쓰씨와 그 연합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1586년부터 1589년까지 3년 동안 아시나씨 가문을 상대하였고 1589년 스리아게하라 전투에서 아시나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 이후 다테씨는 무쓰국 남부의 강력한 지도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이후 다테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였다. 그리고 무쓰국 북부의 구노헤성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다테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도요토미군에 합류해 반군을 토벌했고 이 공로로 이와데야마성 일대를 영지로 하사받게 되었다. 다테 마사무네는 임진왜란에도 참전했고,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에는 도쿠가와씨를 적극 지지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했을 때, 다테 마사무네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협력하는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막기 위해 하시도성에 출전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1615년 오사카 전투 때는 도묘지 전투에서 도요토미군을 격파했다. 1600년부터 다테 마사무네는 센다이번의 다이묘로 임명되었고, 1636년 에도에서 사망하였다.
다테 마사무네는 오늘날 뛰어난 무사이자, 센고쿠 다이묘 중 하나였던 다테씨를 일본 도호쿠 지방의 패자(霸者)로 발돋움하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다테 마사무네는 회화와 요리 등에도 능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센고쿠 다이묘 중 유일하게 로마 교황에 사절을 보낸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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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어린 시절
1567년(에이로쿠 10년) 데와의 요네자와 성에서 태어난 그는 1571년(겐키 2년) 천연두로 오른쪽 눈을 잃었다. 그의 생모는 후일 그보다는 그의 동생 고지로(小次郎)를 편애했는데, 이를 후대의 호사가들은 그녀가 마사무네의 신체적 결함을 싫어했기 때문이라 말하기도 한다.
1577년(덴쇼 5년)에 원복(성인식)을 치렀다. 무쓰의 슈고 다테 집안의 성인식 전통은 무로막치 막부의 세이이대장군에게 이름을 한 자 내려받는 것이었다. 이에 그도 숙부 이시카와 아키미쓰(石川昭光)처럼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아키(昭)'를 내려받아 '다테 아키무네(伊達昭宗)'가 됐어야 하나, 이미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빈고 지방으로 쫓겨난 상태였으므로 문무겸전의 선조 이름인 '마사무네(政宗)'라 정했다.
1579년(덴쇼 7년) 센도(仙道)의 센고쿠 다이묘 미하루(三春) 성주 다무라 기요아키(田村淸顯)의 딸 메고히메(愛姫)와 혼인했다. 1581년(덴쇼 9년) 이웃 센고쿠 다이묘 소마씨(相馬氏)와의 전투가 그의 처녀출전으로서 곧 승리했다. 그의 나이 15세였다.
가독 상속에서 스리아게하라(摺上原) 전투까지
1584년(덴쇼 12년) 아버지에게 가문을 물려받아 다테 집안의 17대 당주가 됐다. 데루무네는 41세로 아직 한창 때였으나 아들에게 가독(家督)을 넘겨줬다. 이에 오데모리(小手森) 성주 오우치 사다쓰나(大內定綱)는 아시나(蘆名) 집안의 가신이던 니혼마쓰(二本松) 성주 니혼마쓰 요시쓰구와 손잡고 다무라씨의 지배에서 이탈, 마사무네에 맞서려 했다. 이에 덴쇼 13년(1585년), 마사무네는 오데모리 성을 공격했다. 이때 그는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성에 대한 철저한 학살과 파괴를 행하는 비정한 일면을 보였다. 당시 호족의 대부분이 서로 친척 내지는 연척 관계였던 오슈에서 이러한 몰살 전술은 여지껏 전례가 없었던 대사건이었으며 인근 센고쿠다이묘를 공포에 빠뜨렸다. 이는 주변에 대한 경고의 뜻이기도 했다(그러나 한편으로 마사무네는 훗날 전략적인 차원에서 사다쓰나를 가신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사다쓰나의 몰락을 가까이서 지켜본 니혼마쓰 요시쓰구는 화해를 신청했고, 데루무네의 중재로 그의 소유 다섯 개 마을만을 하타케야마씨 소유로 넘겨주게 되었다. 그런데 데루무네는 영지 안도건 등의 문제로 회견했던 요시쓰구에게 곧 납치된다. 당시 사냥 중이던 마사무네는 이 소식에 다급히 돌아와 니혼마쓰 일행을 뒤쫓았고, 사격을 명령하여 이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원 몰살시켜 버렸다고 한다. 아버지 데루무네도 이때 죽었다(이 사건에 대해서는 데루무네가 마사무네에게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는 설도 있고, 마사무네가 의도적으로 아버지를 죽이고자 했다는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그 뒤 아버지의 공양을 위한 7일간의 법요를 끝낸 마사무네는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한 전투라며 니혼마쓰 성을 포위했고, 니혼마쓰 집안을 돕기 위해 사타케 요시시게가 규합한 남부 오슈의 아시나 · 소마 · 이와키 · 유키 · 니카이도(二階堂) 집안 등 3만의 반(反)다테 연합군과 아다치군의 히토토리(人取) 다리에서 사투를 벌였다. 숫적으로는 1/5 이하의 전력이었던 다테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고령의 중신 오니니와 요시나오의 최전선에서의 분전으로 마사무네는 간신히 모토미야(本宮) 성으로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다(히토토리바시 전투). 결국 사타케가문이 자국내 사정으로 인해서 퇴각하자, 다른 가문들도 사타케를 따라서 퇴각하였다(그 후 사타케 집안은 호조와의 싸움으로 오슈에서 신경을 끄게 되었다).
마사무네는 다시 전투에 임하여 덴쇼 16년(1588년)에 고오리산(郡山) 전투에서 상대국의 영토를 빼앗았고, 아내 메고히메의 친정인 다무라 집안의 협력을 얻어 지금의 후쿠시마 현 중부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당시의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토 · 도호쿠의 여러 다이묘, 특히 간토의 호조 집안과 도호쿠의 다테 집안에 대해 총무사령(總無事令, 개인적인 전투 금지)을 내렸지만,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의 명령도 무시한 채 전쟁을 계속 이어나갔고, 그 해 북방의 오자키(大崎) 집안의 내분에 개입해 1만의 군사로 침공을 감행하지만 오자키 집안의 완강한 저항과 아군인 구로카와 하루우지(黑川晴氏)의 배반, 그리고 폭설에 의해 패배한다. 이 틈에 다테 집안 소유 영지 남쪽에 아시나·니카이도 집안 등이 침공해 왔으며, 백부 모가미 요시미쓰와도 일촉즉발의 사태까지 갔지만 어머니 요시히메의 중재로 화해가 성립되어 간신히 궁지를 벗어났다(오자키 전투).
덴쇼 17년(1589년)에는 도호쿠의 패권을 놓고 아이즈번의 아시나 요시히로(蘆名義廣) · 사타케 요시노부의 연합군과 싸운다. 이 싸움을 스리아게하라 전투(반다이 산기슭·이나와시로정猪苗代町町 부근)이라고 한다. 그 무렵 아시나 집안은 이미 간파쿠 히데요시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마사무네가 아시나 집안과 싸운다는 것은 히데요시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아시나 요시히로는 1만 5천, 마사무네는 2만 1천을 이끌고 각자 반다이 산 중턱에 진을 쳤다. 이 싸움에서 마사무네는 요시히로측 기마 무사 3백 기, 군사 2천 남짓을 죽였다고 하며, 마침내 구로카와(黑川) 성을 함락시키고 아시나 집안을 멸망시킨 마사무네는 아이즈 지방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고, 거듭 군사를 스카(須賀) 강으로 진군시켜 니카이도 집안마저 멸망시켰다. 이 싸움을 전후해 시라카와 요시지카(白河義親)·이시카와 아키미쓰(石川昭光)·이와키 쓰네타카(岩城常隆)가 차례대로 마사무네에게 복속했다.
이 때 마사무네는 지금의 일본 후쿠시마 현과 아이즈 및 야마가타현의 남부, 미야기 현의 남부를 다스리며 전국적으로도 굴지의 영토 규모를 자랑했다. 여기에 시라카와 집안이라는 남부 무쓰의 여러 호족, 그리고 지금의 미야기현이나 이와테현 일부를 지배하던 오자키·가사이(葛西) 집안도 마사무네의 세력하에 있었다.
오다와라 전투와 도요토미 정권 치하에서
그 무렵 중앙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사업을 이어받아 한창 진행 중에 있었고 간토의 호조 집안을 멸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다테 집안에 대해서도 히데요시는 교토로 올라와 공순의 뜻을 보이라고 재촉하는 서신을 여러 번 보냈지만, 마사무네는 이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마사무네는 아버지 데루무네의 대부터 호조 집안과는 동맹관계였으므로, 히데요시와 싸울 것인가 오다와라 전투에 가담할 것인가를 끝내 고민했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오다와라를 포위(오다와라 정벌) 중이던 덴쇼 18년(1590년) 5월, 도요토미 정권의 오봉행 가운데 한 명이었던 아사노 나가마사로부터 오다와라 전투에 동참할 것을 재촉받자 마침내 마사무네는 5월 9일에 아이즈를 떠나 요네자와·오구니를 거쳐 에치고 · 시나노를 돌아 도쿠가와령인 가이를 거쳐 오다와라에 이르렀다. 히데요시가 동원한 병력의 수를 감안한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에 복속해, 히데요시는 마사무네가 가지고 있던 본령을 그에게 안도했다(다만 아이즈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반한 행위로 간주되었으므로, 아이즈의 영지는 몰수되어 72만 석이 되었다). 기록에는 이 때 오다와라 공격에 늦게 참여했다는 이유로 히데요시는 마사무네를 감금한 채 위협했지만,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그를 힐문하러 온 마에다 도시이에 등에게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우고 싶다"고 신청해 히데요시 등을 감탄시켰다고 한다.(이는 히데요시의 성격을 파악하고 행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맹을 맺고 있던 다테 집안의 마사무네가 히데요시에게 복속하면서, 마사무네의 동맹이었던 호조 우지마사·우지나오 부자는 히데요시에게 항복했고, 마사무네의 거성 아이즈·구로가와 성에 들어온 히데요시는 오슈 징계(奧州仕置)를 실시했다. 이로써 히데요시의 '센고쿠 통일'은 달성되었다(전투에 참전하기에 앞서 어머니로부터 독살 위협을 받자 어머니를 죽이는 대신 남동생의 다테 고지로를 참살했다는 설이 통설이 되고 있지만, 독살 창작설도 존재한다. 어머니인 호슌인 요시히메는 그 후로도 다테 집안에 머물렀지만, 4년 뒤 친정 오빠 요시미쓰가 있는 야마가타 성으로 갑자기 달아났다).[1]
이듬해 덴쇼 19년(1591년)에는 가모 우지사토와 함께 가사이·오자키 집안이 일으킨 잇키(一揆)를 평정하지만, 마사무네 자신이 잇키를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는 우지사토가 마사무네가 썼다는 잇키 세력에게로 보내는 편지를 입수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교토에서는 마사무네가 교토에 인질로 남겨둔 부인은 실은 가짜라던지, 잇키 세력이 농성하는 성에는 마사무네의 깃발이 세워져 있다던지 하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마침내 히데요시의 귀에까지 이 소문이 들어가게 되었고, 이에 마사무네는 교토로 올라와 잇키를 선동한 서신은 가짜라는 취지를 히데요시에게 변명하여 용서받았지만, 요네자와 성에서 다마쓰쿠리 군(玉造郡) 이와테자와(岩手澤) 성의 58만 석으로 감봉되어 성의 이름을 이와데야마(岩出山) 성으로 바꾸었다. 그 무렵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羽柴) 성씨를 받았고 또한 본거지 이와데 산성이 오자키 집안의 옛 영토였으므로 마사무네는 '하시바오자키지주(羽柴大崎侍從)'라 칭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
분로쿠 2년(1592년)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다테 마사무네는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1593년 4월 부산에 상륙하여 나고야의 대본영으로 돌아온 9월까지 진주성 등에서 전투를 치렀다. 조선으로 출병할 당시 다테가의 부대의 행렬이 화려하다고 소문이 돌았고, 수는 3천 명 혹은 1,50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군이 통과할 때는 조용하던 교토의 주민도 다테군이 지나갈 때는 그 화려함에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다테 마사무네는 휘하 아시가루들에게 황금으로 된 긴 진사가를 씌우는 등 옷을 엄청나게 화려하게 입혔다. 이 후 화려한 치장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켜 '다테모노(伊達者)'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고쿠다카가 매우 많아서[2] 속칭 '배부른 호랑이'였던 다테 마사무네가 참전하기 싫은 전투에 억지로 참전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잘 보이기 위한 아부성 행동이었다. 조선의 동맹국으로 전쟁에 참전한 명과의 교섭 중 일본군은 조선 남부 연안 등지에 '왜성'이라 불리는 성을 쌓았는데, 이때에 즈음해 마사무네는 공사가 면제되었음에도 상관하지 않고 히데요시에게 아부를 떨기 위해서 히데요시로부터의 자금 지급도 없이 적극적으로 축성에 참가했다고 한다. 정작 마사무네는 조선에 건너가서도 축성은 열심히 한 반면 침략 행위를 태만히 하면서 다른 다이묘들이 전투를 하고 있을 때는 부하들과 팔씨름을 하는 등 놀면서 시간을 죽이는가 하면 직접 참전한 전투도 제2차 진주성 전투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다른 다이묘들에 비해서도 조선 침략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정유재란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에는 분로쿠 3년(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부대에 비해 그렇게 큰 활약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겼다. 하지만 여기서 다테는 전투에 굉장한 염증을 보였는데 조선은 일본과는 달리 겨울에 살인적으로 추워서였다. 이 때문에 어떻게든 전쟁을 하기 싫어서 발버둥쳤고 결국 정유재란에는 고집을 부려가며 불참하게 된다.
분로쿠 2년 이후 아사노 나가마사가 다테 마사무네와 도요토미 정권 사이의 중개가 되었지만, 분로쿠 5년 8월 14부의 편지로 마사무네는 나가마사의 태도를 참지 못하고 결국 그와 절교해버린다. 일찍부터 히데요시에게 복속하여 고다이로(五大老)로 선택된 다른 다이묘들과는 달리 마사무네는 호조 집안과 동맹해 히데요시와 맞섰다는 이유로 고다이로로 뽑히지 못했다. 이보다 앞서 분로쿠 4년(1595년), 히데요시로부터 모반 혐의를 받은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할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히데쓰구와 친했던 마사무네의 주변은 긴박한 상황이 되었고, 이 때 마사무네의 외종사촌으로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고마히메(駒姬, 1581년~1595년)가 히데쓰구의 측실이 되기 위해 상경한지 얼마 안 되어 히데쓰구의 처자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마사무네도 히데요시로부터 모반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테 마사무네의 변호를 서서 마사무네를 살리려 애썼고 최종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 판명되어 연좌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다테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분에 목숨을 구해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어쩔 수 없이 동군에 가담하게 된다.
히데요시 사후, 마사무네와 고다이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인(天下人) 히데요시의 유언 중 하나인 "다이묘의 자녀끼리 결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어기고, 게이초 4년(1599년) 마사무네의 맏딸 이로하히메(五郞八姫)와 이에야스의 여섯째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서로 약혼시켰다. 그리고 히데요시에 대해 큰 염증을 느꼈던 마사무네는 이 시기를 즈음해서 히데요시를 완전히 버리고 아예 이에야스 사람이 된다.
히데요시 사후인 게이초 5년(1600년), 이에야스는 아이즈의 영주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우에스기 토벌에 나섰는데, 이때 마사무네도 종군하여 7월 25일에 우에스기의 지성(支城) 시라이시(白石)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야스가 없는 틈을 타서 히데요시의 다섯 부교 중 한 명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 등이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총대장으로 이에야스에 맞서 거병하자, 오야마(小山)까지 북상해 있던 이에야스는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이 때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싸움에 이긴 뒤, 지금의 영지 58만 석에 다시 49만 석의 영지를 더 주겠다는 내용의 편지(편지는 현재 센다이 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를 보내고 있다. 이는 이에야스가 가게카쓰를 아이즈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마사무네가 동군에 참가하는 것이 꼭 필요했으므로, 백만 석의 고쿠다카를 준다는 보증 문서를 주어 동군 참가를 재촉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 해 9월, 세키가하라 전투가 터지자, 동군에 가담한 마사무네는 우에스기씨 집안의 장수인 나오에 가네쓰구(直江兼續)가 모가미씨 소유의 거성 야마가타(山形) 성을 치자, 루스 마사카게(留守政景)를 묘다이(名代)로서 모가미에게 원군을 보낸다(하세도우 성 전투). 9월 25일에는 모니와 쓰나모토(茂庭綱元)에게 명하여 우에스기씨 소유의 유바라(湯原) 성을 치게 했다. 마사무네는 하세도우 성 전투 뒤 나오에 가네쓰구가 요네자와로 돌아간 것을 간파하고 센도 방면에 침략을 개시, 10월 6일 미야지로에서 혼조 시게나가(本庄繁長)가 지휘하는 우에스기군을 격퇴한다. 다테군은 거듭 후쿠시마(福島)성을 포위했지만 성의 견고한 방어에 밀려 다음날 퇴각한다.
전투가 끝난 뒤, 마사무네가 몰래 일족 시라이시 무네나오(白石宗直)를 시켜 난부씨(南部氏) 소유의 영지 안에서 와가 다다치카(和賀忠親)를 시켜 난부씨에 대한 잇키를 선동하게 한 사실이 발각된다(잇키군은 이듬해 게이쵸 6년 4월에 패했고 다다치카는 마사무네에게 암살되었다). 이는 마사무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과는 상관없이 고쿠타카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제멋대로 병력을 일으킨 것으로,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에야스는 사건 추궁의 자세를 보여 애초 마사무네에게 약속했던 49만 석 증가, 즉 합계 1백만 석의 약속을 백지화시켜 버린다. 결과적으로 마사무네에 대한 논공행상은 센다이 개부(開府)의 허가와 무쓰 국 갓타 군(刈田郡, 시라이시) 합쳐 2만 석으로 늘려주는 데에 그쳤고, 마사무네의 영지는 60만 석이 되었다(후에 오미국과 히타치국의 영지 2만 석을 더 늘려주어 62만 석가 되었다).
센다이번과 유럽에의 사신 파견
1601년에는 센다이 성, 센다이 성 아래에 도시 건설을 시작해 거점을 옮긴다. 다테 마사무네를 번조(藩祖)로 하는 센다이 번의 탄생이었다. 62만 석이라는 수확량은 당시 가가의 마에다 집안, 사쓰마의 시마즈 집안에 이어 전국에서 제3위였다. 그리고 도쿠가와 집안으로부터 마쓰다이라 성씨를 받아 '마쓰다이라(松平) 무쓰노카미(陸奧守)'라 칭했다. 센다이 성은 천연의 지형을 이용한 산성이었지만 센다이 성 아래에 지어진 도시는 처음부터 전면적인 개발이었으므로, 거의 연인원 1백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번내 통치에는 48곳의 관(館)을 두고 가신을 배치했다.
마사무네는 센다이 번과 에스파냐와의 통상(태평양 무역)을 꾀하여, 게이초 18년(1613년), 센다이 영내에 있던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의 사절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Sebastián Vizcaíno)의 협력을 받아 갤리온선 산후안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 호를 건조했다. 이에야스의 승인을 얻은 마사무네는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텔로(Luis Sotelo)를 사절로 임명해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 등 일행 180여 명을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에스파냐 그리고 로마에 파견한다(게이초의 견구遣毆사절).
오사카 전투
1614년의 오사카 전투(겨울 싸움)에서는 야마토구 방면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쳤다. 화해가 성립된 뒤, 다테군은 오사카성 바깥쪽 해자 매립 공사의 임무를 받게 되었고, 그 해 12월 쇼군 히데타다로부터 이요 우와군(宇和郡)에 영지를 하사받는다. 이듬해인 게이초 20년(1615년)의 오사카 여름 전투 도묘지(道明寺)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고토 모토쓰구 등과 싸웠다. 모토쓰구는 다테 집안의 가중(家中) 가타쿠라 시게나가(片倉重長)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할복했다고 한다. 도묘지 어귀의 요충지인 고마쓰(小松) 산에 포진해 있던 고토 부대를 괴멸시킨 야마토구 방면의 군사들은 곧 혼다(誉田) 마을로 진군했지만, 여기서 다테 부대는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의 반격을 받고 후퇴해야만 했다. 이에 선봉장이던 미즈노 가쓰나리(水野勝成)는 마사무네에게 사나다 재공격을 세 번이나 요청했지만 마사무네는 탄약 부족과 군사의 부상 등을 이유로 거절했고, 마지막에는 마사무네가 직접 가쓰나리의 진에 찾아가 그 요청을 거절했다. 때문에 노부시게는 유유히 오사카 성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간토의 무사가 100만이라고는 하나, 사내라 부를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더이다"라며 비웃었다고 한다(덧붙여 혼다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 와중에 마사무네측은 미즈노 집안의 가중 세 사람을 습격해 미즈노 집안의 말을 빼앗았지만, 가쓰나리는 매복했다가 마사무네의 군세를 습격해 그들을 죽이고 말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마사무네는 가쓰시게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5월 7일에 벌어진 덴노지 전투에서 마사무네는 후네바구치(船場口)에 진군해 아카시 다케노리(明石全登) 부대와 교전 중이던 가쓰나리 소속 진보 스케시게(神保相茂) 부대 약 3백 명을 일부러 공격해 몰살시켰다고 한다(6일의 도묘지 전투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도 한다). 때문에 진보 부대는 전멸하고 스케시게 자신도 전사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이 있어 미즈노 가쓰나리 등을 통해 마사무네에게 항의했지만, 마사무네는 정색하면서 "진보 부대는 아카시 부대에 완패했고 우리 군이 말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처분이었다. 다테의 군법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사쓰한구기(薩藩舊記)》권6). 이 풍문은 처음 나돌기 시작한 직후부터 여러 흥미와 억측을 낳았고 《나니와전기》(難波戰記) 같은 강담본에서는 고토 모토쓰구의 부대를 노려 공격하는데 진보 부대가 있고 없고를 신경쓰지 않고 발포한 것이라는 설이나, 휴식 중이던 진보 부대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는데 자신들이 아군이라며 호소하는 것도 듣지 않았다는 설, 진보 부대가 세운 공훈을 시기해 일부러 죽였다는 설도 나왔다. 다만 마사무네 자신은 이 사건에 대해 비난받은 기록이 없으며, 《간세이 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 같은 에도 막부의 기록에도 "(진보 스케시게는) 분전하다 죽었다"는 기술이 있어 정말 다테 마사무네가 자신의 아군을 일부러 죽였는가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부족하다(마사무네의 조력이 필요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부러 이 일을 불문에 붙였다는 설도 있다).
오사카 전투가 끝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논공행상으로 난카이도 이요 국 안의 10만 석이 더 주어졌는데, 마사무네는 서장자인 다테 히데무네(伊達秀宗)에게 이를 모두 주어 센다이 번에서 분가 독립시켰고 이를 계기로 히데무네는 우와지마(宇和島)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말년
막부의 일본 통치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전투도 일어나지 않자 마사무네는 영토 개발에 매진했고 후일 데이잔보리(貞山堀)라 불리는 운하를 정비했으며, 기타카미 강 수계 유역을 정리하고 개척하여 오늘날까지 손꼽히는 곡창지대로 거듭나게 한 결과 센다이 번은 표면상으로는 62만 석으로 불리는 것과는 달리 고쿠타카 1백만 석을 훨씬 넘는 쌀 생산량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문화상으로는 기사(技師)·대공(大工,목수) 등을 기나이에서 다수 초빙하여 모모야마 문화 특징인 장엄과 화려에 홋코쿠만의 특성이 더해진 양식을 낳아 오늘날까지 일본 국보로 남아 있는 건조물인 오자키 하치만구(大崎八幡宮) · 즈이간사(瑞巌寺) · 시오가마(鹽竈) 신사 · 무쓰고쿠분지(陸奧國分寺) 야쿠시도(藥師堂) 등을 남겼다. 나아가 오미에 거주하던 기사 가와무라 손베에(川村孫兵衛, 가와무라 시게요시)을 불러다가 기타카미 강 하구에 이시마키(石卷) 항을 열어서 기타카미 강 유역에서 물길을 따라 이시마키에서 에도까지 쌀을 반출하는 루트가 갖추어졌다(에도 시대 대부분의 기간 에도에서 유통되는 쌀의 절반은 센다이 번에서 이시마키 항을 이용해 보냈다).
2대 쇼군 히데타다와 3대 쇼군 이에미쓰의 무렵까지 막부를 섬겼지만, 간에이 13년(1636년) 정월 무렵부터 '식사가 목에 걸린다'는 몸의 이상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보다 앞선 간에이 12년(1635년)에 시작된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제도에 따라 그해 5월 1일에는 에도성에서 쇼군 이에미쓰를 알현했다. 병을 무릅쓰고 알현하러 찾아온 마사무네에게 감격한 이에미쓰는 그 후 자주 마사무네가 에도에서 머무르던 사쿠라다의 다테가 처소에 문병하고자 로주(老中)를 보냈다. 5월 21일에 이르러 마사무네는 위독해졌고 이 소식을 들은 이에미쓰가 곧바로 문병하러 찾아온 것에 감격한 마사무네는 머리를 반듯하게 빗고 의복을 정제하고서 노중 세 사람에게 부축받으면서 이에미쓰를 영접했다.
사흘 뒤인 5월 24일 아침에 다테 마사무네는 서거했다. 향년 70세(만 68세)였다. 사인은 암성 복막염 혹은 식도암(식도분문암)으로 추정된다. '다테모노'라는 이름에 걸맞게, 임종 때조차 처자에게도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당당한 얼굴이었다. 26일에는 적자 다테 다다무네(伊達忠宗)에게 마사무네가 남긴 영지 상속이 허락되었다. 마사무네의 사체는 쇼쿠다이 차림으로 목관에 안치되었고 사체가 썩지 않게 수은 · 석회 · 소금을 채운 다음 상여에 실려, 생전의 다이묘 행차처럼 떠받들어져 6월 3일에 센다이에 돌아왔다. 순사자는 가신 15명에 배신 5명. "비록 병으로 잃었다고는 하지만, 부모에게 받은 한쪽 눈을 잃은 것은 불효이다"라는 마사무네의 생각으로 사후 만들어진 목상이나 초상화에는 약간 오른쪽 눈을 작게 해서 두 눈이 들어가 있다. 막부는 에도에서 7일, 교토에서 3일간 사람들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는데 이것은 고산케를 제외하면 상례에서 벗어난 특이한 예였다.
죽기 전에 마사무네는 "한 점 흐림없는 내 마음속의 달을 앞세워 속세의 어둠을 밝히리(曇りなき 心の月を 先だてて 浮世の闇を 照してぞ行く)"라는 지세[辞世]를 읊었다. 법명은 서엄사전정산선리대거사(瑞巖寺殿貞山禪利大居士). 존칭은 데이잔공(貞山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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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작품
소설
- 장편소설
- 다테 마사무네 (저자:야마오카 소하치)
드라마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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