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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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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풍경(영어: View of Delft, 네덜란드어: Zicht op Delft)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1659–1661 년경에 그린 유화이다. 페르메이르의 고향을 그린 이 그림은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1] 이 그림은 페르메이르가 델프트를 그린 세 점의 작품 중 하나로, 《작은 거리》와 《델프트에 서 있는 집》(분실)과 함께 화가의 유일한 도시 풍경화이다.[2][3] 미술사학자 엠마 바커에 따르면, 당시 물이 있는 도시 풍경화는 네덜란드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델프트와 그 무역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4] 페르메이르의 델프트 풍경은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가 설립되었을 때부터 이 미술관의 네덜란드 왕립 회화실에 전시되어 있다.[5]

이 그림은 1980년 BBC Two 시리즈 《100 Great Paintings》에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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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
기술 분석에 따르면 페르메이르는 방해석, 백연, 황토색, 천연 울트라마린, 알리자린 안료를 사용했다.[6]
이 풍경화는 델프트의 남동쪽에 있는 높은 곳에서 그려졌는데, 화가의 작업실이 있던 메헬렌 선술집의 위층일 것으로 추측된다.[7] 그림의 맨 오른쪽에는 로테르담 문이라는 중세 벽돌 건물이 있고, 그 앞에는 두 척의 청어잡이 배가 있다.[5] 로테르담 문은 델프트 남쪽에 있는 두 개의 문 중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그림의 중앙에 보이는 스히담 문이다. 로테르담 문과 스히담 문 사이에는 지붕에 시계가 있는 다리가 있다.[5] 스히담 문 뒤에는 길고 붉은 지붕이 있는데, 당시 병기고로서 현재는 육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들은 스히 강의 잔잔한 항구에 반사되고 있다.[7]
그림의 왼쪽 하단에는 다섯 명이 로테르담, 스히담 또는 델프트스하번으로 가는 여객선에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5] 이 여객선은 말이 끌었으며 최대 서른 명까지 태울 수 있었다. 페르메이르는 바지선 내부의 붉은 부분에 자신의 이니셜 VM을 그렸다. 바지선 오른쪽에는 두 여인이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페르메이르는 원래 그들 옆에 세 번째 사람을 그렸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 지워버렸다.[5]
로테르담 문 뒤 왼쪽으로 신교회(Nieuwe Kerk)의 종탑이 있다. 실제로는 신교회가 더 오른쪽에 있지만, 더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중앙에 가깝게 묘사했다.[5] 이 그림에는 종탑에 종이 없는데, 종은 그림이 완성된 1661년 이후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5] 신교회는 페르메이르가 유아 세례를 받은 곳이며, 그의 어머니와 누나가 묻힌 곳이다.[8] 육군 박물관 뒤쪽 배경에는 1246년경에 지어진, 델프트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구교회(Oude Kerk)의 탑이 보인다. 페르메이르는 그곳에 묻혀 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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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옵스큐라
역사학자들은 페르메이르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는지 여부를 뜨겁게 논쟁해 왔다.[10] "어두운 방"을 의미하는 카메라 옵스큐라는 볼록 렌즈에 작은 구멍을 덮어 그 구멍으로만 빛이 통과할 수 있게 하여 반투명 유리에 역상(거꾸로 된 이미지)를 투사하는 장치로, 예술가는 그것을 따라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페르메이르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다는 문서 증거는 없지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단서는 있다.[10] 《장교와 웃는 소녀》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현저히 크게 보이는데, 이는 카메라 옵스큐라 사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 페르메이르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다는 또 다른 증거로는 이 그림의 벽에 걸려 있는 지도로서, 광학 기술의 도움 없이는 올바르게 재현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예술가들은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 번째 증거는 《빨간 모자를 쓴 소녀》에서 발견된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없었다면 아래쪽에 있는 사자 머리에 반사된 빛이 직사각형이어야 하지만(광원인 창문이 직사각형이므로), 페르메이르는 빛을 원으로 그렸는데, 이는 렌즈를 통해 이미지를 볼 때 생기는 효과라고 보인다.[10] 미술사학자 아서 K. 휠록 주니어는 이 그림에서도 건물과 물에 비친 하이라이트가 확산되었다는 점 때문에 페르메이르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다고 생각한다.[11] 하지만 다른 역사학자들은 그다지 확신하지 않는다. 미술사학자 칼 쉬츠는 페르메이르가 어떤 그림에서도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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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해석
페르메이르가 신교회를 강조한 것은 그가 오라녜 가문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648년부터 1650년까지 빌럼 2세와 네덜란드 의회는 국가의 군사 예산을 줄일지 여부에 대해 논쟁했다. 빌럼 2세는 스페인이 다시 공격할 경우를 대비하여 스페인과의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을 유지하고 싶어했지만, 네덜란드 의회는 국가가 이미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어 군대를 유지할 여유가 없다고 주장했다.[13] 네덜란드 사회는 국왕인 오라녜 가문을 지지하는 파벌과 네덜란드 의회를 지지하는 파벌로 나뉘었다. 빌럼 2세가 사망하고 네덜란드 의회가 권력을 잡은 후, 오라녜 가문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신교회에 안치된 빌럼 2세의 무덤을 담은 예술 작품을 의뢰했다. 이 그림에서 신교회가 밝게 빛나는 것은 네덜란드 군왕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12]
영향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페르메이르를 매우 존경했는데, 특히 이 그림을 매우 좋아했다. 이 그림은 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한다. 1권 《스완네 집 쪽으로》(1913년 출판)에서는 주인공 스완이 페르메이르의 전기를 쓰는 장면이 들어 있다. 5권 《갇힌 여인》(1923년 출판)에서는 작가 베르고트가 이 그림 앞에서 죽는 장면이 나온다. 베르고트는 페르메이르의 기법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묘사된 인물로, "이렇게 썼어야 했는데... 내 마지막 책들은 너무 건조해. 나는... 이 작은 노란 벽처럼 내 언어를 그 자체로 귀하게 만들었어야 했어." 라고 말하며 죽어간다. 1921년 5월 1일, 프루스트는 페르메이르에 대한 기사를 막 출판한 친구 장루이 보두아예에게 보낸 편지에서, 1902년 10월에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헤이그 미술관에서 델프트 풍경을 본 이후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4][15]
1921년 5월 말, 프루스트는 보두아예와 함께 파리의 죄드폼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네덜란드 거장 전시회를 방문하여 그림을 다시 보다가 그림 앞에서 발작을 일으켰고, 이 경험이 나중에 그가 베르고트가 그림 앞에서 죽는 장면을 쓰게 되는 영감을 주었다.[16]
2011년, 이 그림은 네덜란드 조폐국에서 발행한 금은 기념주화에 등장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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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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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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