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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수리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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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수리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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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이바노비치 수리코프(Vasily Surikov, 러시아어: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Суриков; 1848년 1월 24일 – 1916년 3월 19일)는 러시아의 사실주의 역사화가였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삽화로 사용되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간략 정보 바실리 수리코프Vasily Surikov, 신상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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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그는 시베리아에 정착한 돈 코사크 가문[1]에서 유래한 유서 깊은 예니세이 코사크 가문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대학 등록관으로, 오랫동안 우체국장으로 일한 공무원이었다. 1854년, 아버지의 근무지 변경으로 인해 가족은 수호부짐스코예 마을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는 초등교육을 받았다.

1859년, 그의 아버지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가족은 크라스노야르스크로 돌아왔고, 재정적 어려움으로 집의 2층을 세 놓아야 했다. 수리코프는 지구 학교에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지역 미술 교사의 격려를 받았다. 그의 첫 공식 작품은 18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미술 교육을 계속할 여유가 없어, 정부 기관의 서기 일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수리코프는 예니세이스크 주 주지사였던 파벨 자먀틴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는 수리코프에게 후원자를 찾아주었다. 그 후원자는 여러 작은 금광을 소유한 지역 상인인 표트르 쿠즈네초프였다.[3]

1868년, 그는 말을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지만, 제국 예술원 입학 자격을 얻지 못하여 제국 예술 장려 협회의 그림 학교에서 공부했다.[1] 그곳에서 1년 후, 그는 제국 예술원 수업을 청강할 수 있게 되었고, 1869년 말에 정식 학생이 되었다.

1869년부터 1875년까지 그는 파벨 치스차코프, 보그단 빌레발데, 표트르 샴신과 함께 공부하며 여러 메달을 획득했다.[1] 수리코프는 구도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그는 "작곡가"라는 별명을 얻게되었다. 1875년, 그는 1등급 예술가 자격으로 졸업했다.

모스크바에서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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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879,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1877년, 그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당시 건설 중)의 벽화를 의뢰 받아 모스크바로 이사했다.[3] 집을 살 형편이 안 되어 그는 임대 아파트와 호텔에 거주해야 했지만, 가능한 한 자주 크라스노야르스크를 방문했다. 1878년, 그는 프랑스 여성 엘리자베트 샤레(1858-1888)와 결혼하여[1] 두 딸을 얻었다.

그 후 그는 모스크바에 머물기로 결정하고 스트렐치 처형일 아침으로 시작하여 역사화 연작을 그리기 시작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881년, 그는 예술가 협동조합인 이동파와 함께 첫 전시회를 가졌다.[1] 1883년, 파벨 트레티야코프가 소개해준 베료조보 주의 알렉산드르 다닐로비치 왕자가 그의 작품을 구매했고, 그 금액으로 그는 유럽 여행을 할 수 있었다. 1887년, 그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시작으로 자신의 작품 레퍼토리에 초상화를 추가했다.[3]

1888년, 그의 아내가 사망했고, 그는 두 딸과 함께 크라스노야르스크로 돌아가 2년간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가장 명랑한 그림인 눈이 덮힌 도시의 모습(The Capture of Snow Town)을 그렸다. 그는 시베리아에 있는 조상의 집을 방문했고, 그곳 오비강에서 그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인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그의 조상 중 몇몇이 참가했던 사건)을 위한 스케치를 했다.[3] 이 작품으로 그는 제국 예술원의 정회원이 되었다.[1] 1897년, 그는 스위스를 방문하여 <수보로프의 스위스 원정>을 그렸고, 이 작품은 니콜라이 2세가 구입하였다.

1907년, 그는 이동파를 탈퇴하고 러시아 예술가 연합에 가입했다. 3년 후, 그는 사위인 표트르 콘찰롭스키와 함께 스페인을 방문했다.[3] 같은 해, 그는 건축가 레오니트 체르니쇼프와 함께 미술 학교를 열었다. 4년 후, 그는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장기간 머무르며 풍경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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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경 수리코프의 흑백 사진

이때 그는 만성 관상 동맥 질환을 앓고 있었다. 1915년 치료를 위해 크림반도로 여행했지만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고, 이듬해 초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 사망했다. 그는 바간코보 묘지의 아내 옆에 묻혔다.[1]

1948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있는 그의 저택이 박물관이 되었고, 1954년과 2002년에 두 개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1959년 모스필름에서 그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 《바실리 수리코프》가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에밀 브라긴스키가 각본을 쓰고 아나톨리 리바코프가 감독을 맡았으며, 예브게니 라자레프가 수리코프 역을, 라리사 카도치니코바가 엘리자베트 역을 맡았다.[4] 러시아 전역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많을 뿐 아니라 수성의 크레이터 중 하나에도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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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

각주

더 읽어보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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