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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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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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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쓰네(일본어: 西園寺公経)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전기의 구교(公卿), 가인(歌人)이다. 나이다이진(内大臣) ・ 후지와라노 사네무네(藤原実宗)의 아들이다. 관위는 종1위(従一位) ・ 태정대신(太政大臣). 사이온지 가(西園寺家)의 실질적인 비조(鼻祖)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간략 정보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 4대 쇼군(将軍)이 된 후지와라노 요리쓰네(藤原頼経) ・ 간파쿠(関白) 니조 요시자네(二条良実) ・ 고사가 천황(後嵯峨天皇)의 중궁(中宮)인 姞子의 할아버지이며, 시조 천황(四条天皇) ・ 고후카쿠사 천황(後深草天皇) ・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 ・ 가마쿠라 바쿠후 5대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쓰구(藤原頼嗣)의 증조부가 되었던, 일본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그 누나는 후지와라노 데이카(藤原定家)의 후처가 되어 사다이에에게는 처남이 되기도 한다.

오쿠라 백인일수(小倉百人一首)에서는 뉴도 전 태정대신(入道前太政大臣)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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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요약
관점

지쇼 3년(1179년)에 종5위상(従五位上)이 되었다. 요와(養和) 원년(1181년]])에 시종(侍従), 주에이(寿永) 2년(1183년)에 정5위하(正五位下), 분지(文治) 원년(1185년)에 에치젠노곤노스케(越前権介), 좌소장(左少将), 2년(1186년)에 비젠노스케(備前介), 3년(1187년)에 종4위하(従四位下), 5년(1189년)에 사누키노곤노스케(讚岐権介), 겐큐(建久) 원년(1190년)에 정4위하(正四位下), 4년(1193년)에 좌중장(左中将), 7년(1196년)에 구란도노카미(蔵人頭)로 승진한다. 9년(1198년), 종3위(従三位) 산기(参議)로 취임하여 구교 반열에 들었다. 조지(正治) 2년(1200년)에 에치젠노곤노카미(越前権守)를 겸하였고, 겐닌(建仁) 원년(1201년)에 정3위(正三位), 2년(1202년)에 곤노주나곤(権中納言), 3년(1203년)에 종2위(従二位),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 겐큐(元久) 3년(1206년)에 주나곤(中納言), 겐에이(建永) 2년(1207년)에 정2위(正二位)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 쇼겐(承元) 5년(1211년)에 중궁대부(中宮大夫)를 겸하였으나 같은 해에 사임하였다. 겐포(建保) 6년(1218년)에는 다이나곤(大納言)이 되고, 동궁대부(東宮大夫)를 겸하게 되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자매인 보몬히메(坊門姫)와 그 남편인 이치조 요시야스(一条能保) 사이에서 난 딸 덴시(全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는 것(즉 요리토모의 조카사위), 또한 자신도 요리토모가 후원하였던 다이라노 요리모리(平頼盛)의 증손이라는 점으로 해서 가마쿠라 바쿠후와는 친밀하였고, 조큐(承久) 원년(1219년)에 3대 쇼군(将軍) 사네토모(実朝)가 암살당한 뒤에는 외손자에 해당하는 미토라(三寅, 구조 요리쓰네)를 쇼군 후계자로써 가마쿠라로 내려 보내자는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주 1] 같은 해에 우다이쇼(右大将), 우마료고칸(右馬寮御監)이 되었다. 3년(1221년), 조큐의 난(承久の乱)이 일어나자 고토바인에 의해 유폐되었으나, 사전에 난의 정보를 바쿠후에 알렸고 난이 바쿠후의 승리로 끝난 뒤에는 바쿠후와의 연줄을 강화하여, 51세의 나이에 나이다이진(内大臣)이 되었고, 조오(貞応) 원년(1222년)에 다조다이진(太政大臣), 이듬해에는 종1위(従一位)로 승진하였으며(같은 해에 다조다이진은 사임한다) 사위 구조 미치이에(九条道家)와 함께 조정의 실권을 쥐었다. 또한 간토모시쓰기(関東申次)에 취임하여 바쿠후와 조정 사이의 조정에도 힘썼다.

미치이에의 외손자인 시조 천황(四条天皇)이 닌지(仁治) 3년(1242년)에 급서하고, 천황 계승 문제가 떠오르자, 미치이에 등은 준토쿠 상황(順徳上皇)의 아들인 다다나리 왕(忠成王)을 옹립하고자 하였으나, 바쿠후는 그가 조큐의 난 관계자임을 들어 반대하였고, 난에 소극적이었던 쓰치미카도 상황(土御門上皇)의 아들인 구니히토 왕(邦仁王)의 옹립을 지지했다. 긴쓰네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즉시 연척인 시조 다카치카(四条隆親)의 저택에서 구니히토 왕을 맞이하여 천황으로 앉혀 버렸다. 이가 고사가 천황(後嵯峨天皇)으로, 일본 역사에서는 이를 닌지 3년의 정변(仁治三年の政変)이라고 한다. 정무나 인사 방침을 놓고 미치이에와 불화가 있었으나, 미치이에의 사위였던 간파쿠 고노에 가네쓰네(近衛兼経)를 사임시키고 미치이에와의 불화로 긴쓰네가 키운 미치이에의 차남 니조 요시자네(二条良実)를 그 뒤 셋칸으로 미는 등 조정 인사를 자기 생각대로 조정하였다. 나아가 손녀딸(적남인 사네우지의 딸) 사이온지 깃시(西園寺姞子)를 고사가 천황의 중궁(中宮)으로 삼아, 간겐(寛元) 원년(1243년)에 그 소생 구니히토 친왕(久仁親王, 훗날의 고후카쿠사 천황)을 황태자로 삼기까지 하였다. 이후 사이온지 집안으로부터 중궁을 배출하는 관례의 선구가 되는 동시에, 지묘인 왕통(持明院統, 고사가 천황의 계보)이 바쿠후와 가까운 관계를 갖는 계기가 된다.

간겐 2년(1244년) 8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였다.[2]

많은 장원(荘園)이나 송(宋)과의 교역으로 막대한 수입을 쌓았고 호화와 사치를 다하였으며, 처세에도 탁월하였으나, 조정 지지파들은 바쿠후를 추종하여 자기 보신을 꾀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간사한 자라고 긴쓰네를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3] 긴쓰네의 죽음에 대해 동시대의 구교였던 다이라노 쓰네타카(平経高)도 "한 시대의 간신"(世の奸臣)이라고 자신의 일기 《히라도키》(平戸記)에 냉소적인 평을 남겼다.[주 2]

한편 '사이온지'(西園寺)라는 가명(家名)은 이 후지와라노 긴쓰네가 현재 일본 교토의 로쿠온지(鹿苑寺, 긴카쿠지) 부근에 세웠던 사찰 사이온지(西園寺)에서 따온 것이다. 긴쓰네 이후 사이온지 집안은 가마쿠라 시대 내내 간토모시쓰기(関東申次)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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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

세찬 바람에 벚꽃잎 흩날리네 지는 것은 눈송이가 아니라 바로 이 몸일세
花さそふ嵐の庭の雪ならでふりゆくものはわが身なりけり

각주

같이 보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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