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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마돈나

라파엘이 그린 그림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시스티나 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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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마돈나(Sistine Madonna, 이탈리아어: Madonna di San Sisto)는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유화 작품이다. 이 그림은 1512년에 교황 율리오 2세피아첸차산 시스토 성당을 위해 의뢰했으며, 1513년~1514년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는 라파엘로가 그린 마지막 성모자상 중 하나이다. 조르조 바사리는 이 그림을 "정말로 희귀하고 특별한 작품"이라고 평했다.[1]

간략 정보 시스티나 마돈나, 작가 ...

이 그림은 1754년에 드레스덴으로 옮겨졌으며, 독일과 러시아 미술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0년 동안 모스크바로 옮겨졌다가 드레스덴으로 반환되어 현재까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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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이 캔버스 유화는 265 cm x 196 cm 크기이다.[2] 그림 속 마돈나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으며, 성 식스토바르바라 성녀가 좌우에 서 있다. 마돈나는 수십 명의 흐릿한 푸토들을 배경으로 구름 위에 서 있다. 두 명의 독특한 날개 달린 푸토가 마돈나 아래에서 팔꿈치를 괴고 쉬고 있다.[3][4][5][6]

그림 재료

라파엘로의 걸작[7][8]에 대한 안료 분석 결과, 그림 상단 녹색 드레이프에는 웅황과 혼합된 공작석, 마돈나의 푸른 예복에는 백연과 혼합된 천연 울트라마린 (색), 성녀 바르바라의 노란 소매에는 연주석, 주색, 백연 혼합물 등, 르네상스 시대의 일반적인 안료들이 발견되었다.

역사

요약
관점

이 그림은 로베레 가문과 오랜 관계를 맺고 있던, 피아첸차에 있는 베네딕토회 산 시스토 수도원 대성당의 제단화로, 교황 율리오 2세[9][10]가 그의 삼촌인 교황 식스토 4세를 기리기 위해 의뢰했다. 의뢰 내용은 그림에 성 식스토와 성녀 바르바라를 모두 묘사하는 것이었다.[6] 전설에 따르면 안토니오 다 코레조가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너무 감명을 받아서 "나도 화가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11]

독일로 이전

1754년, 아우구스트 3세는 이 그림을 110,000–120,000 프랑에 구매하여 드레스덴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새로운 명성을 얻었다.[11][12][13] 이 가격은 수십 년 동안 그림에 지불된 최고 가격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의 미술사학자인 한스 벨팅은 그의 저서 '보이지 않는 걸작'에서 이 그림이 독일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드레스덴의 라파엘로 시스티나 마돈나처럼 독일인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예술과 종교에 대한 논쟁에서 그들을 통합하거나 분열시켰던 예술 작품은 없었다.... 이 그림은 "세계 회화 중 최고"로 칭송 받고 "신성하다"는 별명을 여러 번 얻었는데, 이는 신성한 아이를 예술의 최고 이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14]

이야기가 정확하다면, 이 그림은 즉시 명성을 얻었는데, 아우구스트가 그림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왕좌를 옮겼다고 전해진다.[11] 시스티나 마돈나는 독일의 미술사가·고고학자인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저서 "고대 예술사"(1764)에서 특히 찬사를 받았다. 또한 이 그림을 대중의 시야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하였으며, 고전적 요소와 기독교적 요소의 상대적 중요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15] 라파엘로를 "경건한 기독교인"과 "'신성한' 이교도" 로 번갈아 묘사하면서, 독일인들은 암묵적으로 이 이미지를 그들 자신의 전설인 "라파엘로의 꿈"과 연결시켰다.[16] 18세기 말에 탄생한 이 전설은 여러 이야기와 희곡으로 이어져, 라파엘로가 신성한 환상을 받아 신성한 마돈나를 그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17] 이 그림은 많은 관람객을 감동시켰으며, 이 그림을 본 일부는 스탕달 증후군과 유사한 종교적 황홀경 상태에 빠졌다고 주장된다(여기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환자 중 한 명도 포함된다). 이 그림의 거의 기적적인 힘은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상징이 되었다.[18] 이 그림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리하르트 바그너,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영향을 미쳤다.[19]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이 그림은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계시"이다.[20] 전설에 따르면 1849년 5월의 드레스덴 봉기 당시 미하일 바쿠닌은 "혁명 정부에게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마돈나를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에서 빼내어 도시 입구의 바리케이드에 걸어놓으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프로이센인들이 교양인이기 때문에 감히 '라파엘로 작품에 감히 총을 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21] 1855년, 고트프리트 젬퍼가 설계한 건물에 "신 왕립 박물관" (Neues Königliches Museum)이 개관했고, 시스티나 마돈나는 전용 전시실을 배정받았다.[22]

제2차 세계 대전과 소련의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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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 우표에 실린 시스티나 마돈나를 바탕으로 한 미하일 사비츠키민스크의 파르티잔 마돈나.

시스티나 마돈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드레스덴 폭격에 의한 파괴는 모면했지만,[19] 그림이 구조된 상황과 그 후의 역사는 그 자체로 논란의 대상이다. 이 그림은 다른 예술 작품들과 함께 드레스덴 인근에 있는 "작센 스위스"의 터널에 보관되었는데, 붉은 군대가 이를 발견하여 가져갔다.[23] 이 그림은 임시로 인근의 필니츠 시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덮개 씌운 플랫카에 실려 모스크바로 운송되었다. 그곳에서 마돈나를 본 소련의 주요 미술 관료 미하일 흐랍첸코는 푸시킨 미술관이 이제 세계의 위대한 박물관들 사이에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24]

1946년, 이 그림은 소련이 회수한 다른 보물들과 함께 푸시킨 박물관에서 제한적으로 임시 전시되었다.[25][26] 그러나 1955년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은 "소련과 독일 국민 간의 우호 증진 및 발전을 위해" 예술품을 독일에 반환하기로 결정했다.[23][25] 이후 드레스덴 미술품 컬렉션이 소련 보관 중에 손상되었다는 언론 보도와 함께 국제적인 논란이 일었다.[23] 소련은 자신들이 작품들을 구조했을 뿐이라며 반박했다. 작센 스위스에 예술품이 보관된 터널은 온도 조절이 되었어했지만, 소련군 대변인에 따르면 컬렉션이 발견되었을 때는 전원이 끊겨 작품들이 지하의 습한 환경에 노출되었다고 한다.[23][27]

소련 화가 미하일 사비츠키민스크의 파르티잔 마돈나마이 단치그의 '구원된 세상은 기억한다'는 시스티나 마돈나를 바탕으로 제작된 그림이다.[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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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전시

독일로 반환된 후, 이 그림은 알테 마이스터 회화관에 다시 전시되었으며, 미술관 안내서에서는 이 작품을 "가장 유명한",[30] "최고의",[31] "하이라이트",[32] 그리고 "컬렉션의 정수" 등으로 소개하며 특별하게 다루고 있다.[33] 2012년 5월 26일부터 8월 26일까지 드레스덴 미술관은 이 그림의 500주년을 기념했다.[34][35]

푸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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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묘사, 시스티나 마돈나

그림 아래에 있는 날개 달린 천사들은 그 자체로 유명하다. 이러한 천사들은 푸토라고 알려져 있으며, 흔히 지천사와 혼동된다.[36] 이미 1913년에 미국의 음악 평론가인 구스타프 콥베는 "그림 맨 아래에 있는 제단 꼭대기에 기대어 있는 두 명의 지천사나 지천사 무리만큼 유명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37] 이 두 푸토는 대대적으로 홍보되어 우표, 엽서, 티셔츠, 양말,[38] 포장지 등에도 등장했다.[39] 이 푸토들은 그들만의 전설을 낳았다. 프라 매거진의 1912년 기사에 따르면, 라파엘로가 마돈나를 그릴 때 모델이 되었던 아이들이 놀러 와서 그림을 구경하곤 했다. 그들의 자세에 감동받은 라파엘로는 그들의 모습 그대로 그림에 추가했다고 한다.[40] 1912년 세인트 니콜라스 매거진에 실린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빵집 창문 안을 애틋하게 들여다보는" 거리의 두 아이들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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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내용주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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