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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리노 레스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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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리노 레스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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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리노 레스피기(이탈리아어: Ottorino Respighi, 1879년 7월 9일 ~ 1936년 4월 18일)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바이올린 연주자, 교사, 음악학자이자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주요 작곡가 중 한 명이다. 오페라, 발레, 관현악 모음곡, 합창곡, 실내악, 16~18세기 이탈리아 작품의 편곡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울렀지만,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이 연주되는 작품들은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세 편의 관현악 교향시이다. 이들은 로마의 분수 (1916), 로마의 소나무 (1924), 그리고 로마의 축제 (1928)이다.

간략 정보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기본 정보 ...

레스피기는 볼로냐에서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격려를 받아 음악을 접했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웠다. 1891년, 볼로냐 리세오 무지칼레에 입학하여 바이올린, 비올라, 작곡을 공부했으며, 러시아 제국 극장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했고,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잠시 배웠다. 1913년, 로마로 이주하여 산타 체칠리아 리세오 무지칼레의 작곡 교수가 되었다. 이 시기에 제자이자 가수였던 엘사 올리비에리-상자코모와 결혼했다. 1923년, 레스피기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투어와 작곡에 전념했지만, 1935년까지 계속 가르쳤다. 192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미국과 남아메리카 전역에서 다양한 활동으로 연주하고 지휘했다.

1935년 후반, 오페라 루크레치아를 작곡하던 중 레스피기는 병에 걸려 세균성 심내막염 진단을 받았다. 4개월 후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내 엘사는 그보다 거의 60년을 더 살면서 남편의 작품과 유산을 1996년 사망할 때까지 옹호했다.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살바토레 디 비토리오는 레스피기의 미완성 및 미발표 작품 여러 개를 완성했는데, 여기에는 2010년에 초연된 완성된 바이올린 협주곡 가장조 (1903)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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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요약
관점

초기

레스피기는 1879년 7월 9일, 볼로냐의 판투치 궁전 옆에 위치한 아파트 건물인 귀도 레니 거리 8번지에서 태어났다. 주세페와 에르실리아(결혼 전 성 푸티) 레스피기 부부의 세 자녀 중 막내였으며, 누나 아멜리아와 함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형 알베르토는 9세에 사망했다.[1] 우편국 직원이었던 주세페는 스테파노 골리넬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볼로냐 필하모닉 아카데미에서 음악을 가르쳤던 유능한 피아니스트였다.[2] 에르실리아는 저명한 조각가 가문 출신이었다. 레스피기의 친할아버지는 현재의 피덴차 대성당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오르간 연주자였다.[2][3][4] 아멜리아는 레스피기를 내성적이지만 성실하고 섬세하며 너그러운 성격으로 묘사했다.[2]

아버지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레스피기는 8세가 될 때까지 음악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5] 아버지에게 기본적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운 후 바이올린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지만, 선생님이 악절을 잘못 연주했다고 자로 손을 때리자 그만두었다. 이후 다른 교사에게 다시 레슨을 받았다.[6] 레스피기의 피아노 실력은 처음에는 들쑥날쑥했지만,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보니 레스피기가 로베르트 슈만교향적 연습곡을 자신감 있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 곡을 몰래 배웠던 것이다.[7] 레스피기는 독학으로 피아노를 계속 배웠고, 나중에 작곡에서 음계를 정확하게 연주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계를 피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악기들을 빠르게 익혔다. 예를 들어, 며칠 만에 하프를 독학으로 배웠다.[8]

1891년, 가족은 카스타뇰리 거리 2번지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레스피기는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가질 수 있었다. 은둔생활을 하면서 책을 수집했고, 지리, 과학, 언어에 대한 평생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9] 레스피기는 성인이 되어 11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그 언어로 된 문학을 읽었다.[10] 그의 아내는 레스피기가 베를린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만났을 때, 아인슈타인이 레스피기의 과학 이론 이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상했다.[2]

볼로냐에서의 삶, 1890년–1913년

1890년 10월, 레스피기는 긴나시움 귀니첼리에서 2년간의 학교 교육을 시작했다.[11] 다음 해에는 볼로냐 음악 리세움에 입학하여 페데리코 사르티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체사레 달올리오에게 오르간, 대위법, 푸가를 공부했다.[12][2] 이 시기에 레스피기가 완성하고 날짜를 기입한 초기 작곡 작품 중에는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Piccola ouverturePreludio가 있었다.[13] 과정에 들어선 지 4년 후, 레스피기는 작곡과 음악사 수업을 듣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리세움의 교장 주세페 마르투치에게, 그 다음에는 루이지 토르키에게 배웠다. 볼로냐 음악계의 지지자이자 오페라가 아닌 이탈리아 음악의 작곡가였던 마르투치는 젊은 레스피기에게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14] 1899년 6월, 시험에서 니콜로 파가니니의 《마녀들(Le Streghe)》을 연주하며 바이올린 연주 디플로마를 받았다.[13]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스피기는 볼로냐 코무날레 극장 오케스트라에 합류하여 몇 시즌 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했다.[15]

1900년 겨울, 레스피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 제국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오페라 시즌 동안 수석 비올라 연주자 역할을 수락했다.[14] 이 기간 동안 레스피기가 매우 존경했던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만났고,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그에게 5개월 동안 오케스트레이션과 작곡에 대한 귀중하고 영향력 있는 가르침을 주었다.[16] 레스피기가 1902년 겨울에 또 다른 공연 시리즈를 위해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추가 레슨이 마련되었다.[14] 레스피기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지도 아래 작곡한 Preludio, corale e fugaLiceo Musicale에서 고급 작곡 과정을 통해 학업을 마쳤다.[17][13] 1901년 6월 졸업 시험의 일부로 연주된 이 곡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디플로마를 수여하면서 마르투치는 "레스피기는 학생이 아니다. 레스피기는 대가이다"라고 말했다.[18][19][20]

1902년, 레스피기는 베를린으로 가서 작곡가 막스 브루흐에게 짧은 지도를 받았다.[14] 일부 자료에서 그가 1908년에 브루흐에게 배웠다고 잘못 주장하지만,[14] 레스피기의 아내는 레스피기가 실제로는 브루흐에게 전혀 배우지 않았다고 밝혔다.[21] 1905년, 레스피기는 그의 첫 오페라 희극인 레 엔초를 완성했다. 1903년부터 1910년까지 그의 지역적 명성이 높아지면서 레스피기의 주요 활동은 코무날레 극장에서의 연주와 작곡가 브루노 무젤리니의 순회 실내 5중주의 수석 바이올린 연주였다. 여러 가수, 특히 키아리나 피노-사비오와 협력했으며, 피노-사비오는 아다 네그리카를로 장가리니의 시를 가사로 한 레스피기의 독창과 피아노를 위한 여러 곡을 연주했다. 여기에는 아마도 그의 가장 잘 알려진 곡인 "네비에"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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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의 레스피기

1906년, 레스피기는 17세기와 18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여러 차례 편곡한 것 중 첫 번째를 완성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아리안나의 탄식"을 목소리와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한 그의 버전은 1908년 베를린 방문 중 연주되었을 때 첫 국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두 번째 독일 체류는 거의 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헝가리 소프라노 에텔카 게르스터가 레스피기를 자신의 성악 학교 반주자로 고용했기 때문이며, 이는 그의 후속 성악 작곡에 큰 영향을 미쳤다.[22] 레스피기는 당시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지휘자였던 아르투르 니키슈를 만났고, 니키슈는 유명 가수 줄리아 쿨프를 솔리스트로 하여 콘서트에서 몬테베르디 편곡을 지휘하도록 주선했다. 전기 작가 마이클 웹은 이를 몬테베르디 작품 재발견의 이정표로 보았고, 공연의 비판적 성공은 레스피기가 더 많은 오래된 작품들을 편곡하도록 격려했다.[23] 여기에는 볼로냐 출신 동료 작곡가 아틸리오 아리오스티의 원곡 음악에서 가져온 비올라 다모레와 하프시코드를 위한 두 개의 소나타가 포함된다.[2]

레스피기가 독일에 머물렀던 시간의 음악적 영향은 그의 두 번째 오페라 《세미라마》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레스피기 작품의 첫 전문적인 무대 공연이었다.[14][2] 1910년 11월 볼로냐 시립 극장에서 초연되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2년 후 비평가 잔노토 바스티아넬리는 이 작품이 레스피기의 스타일이 베리스모에서 데카당스로 전환되는 것을 보여주며, 그의 풍부한 다성음악 사용을 칭찬했다고 썼다.[24] 그러나 오페라 작업은 레스피기를 지치게 만들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각 악보를 손으로 직접 썼고, 공연 후 만찬에서 잠이 들었다. 레스피기의 평생 동안 불규칙한 수면 패턴은 기면증으로 인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25]

1910년, 레스피기는 바스티아넬리와 동료 작곡가인 일데브란도 피체티, 잔 프란체스코 말리피에로, 렌초 보시 등이 참여한 레가 데이 친퀘(유명한 러시아 "5인조"에서 따온 이름)라는 단명한 그룹에 참여했다.[14] 같은 해 볼로냐 필하모닉 아카데미 회원으로 임명되었다.[26] 다음 해, 레스피기는 토르키를 대신하여 리세오 무지칼레의 작곡 교사가 되었는데, 이는 그가 로마로 이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2]

로마에서의 삶, 1913년–19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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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부터 1935년까지 레스피기는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아카데미에서 가르쳤다.

1913년 1월, 레스피기는 볼로냐를 떠나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리세오 무지칼레의 작곡 교수가 되었다. 이 시기의 제자로는 작곡가 비토리오 리에티, 엔니오 포리노, 다니엘레 암피테아트로프, 지휘자 안토니오 페드로티마리오 로시, 피아니스트 피에트로 스카르피니, 오르간 연주자 페르난도 게르마니 등이 있었다.[2][14] 그러나 도시의 번잡하고 혼잡한 분위기는 레스피기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가르치고 작곡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향수병에 시달렸으며, 불규칙한 수면을 겪었다.[27]

1913년 몇 차례의 공연을 위해 독일을 다시 방문한 후, 레스피기는 주로 가르치는 일에 집중했다. 그의 푸가 및 작곡 수업의 새로운 학생 중 한 명은 19세의 엘사 올리비에리-상자코모였다. 둘은 관계를 시작했고, 14세 연하인 엘사와 레스피기는 1919년 1월에 결혼했다.[28][29] 두 사람은 그레고리오 성가에 대한 사랑을 공유했으며, 레스피기는 종종 엘사에게 단선율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는데, 때로는 두 시간 동안이나 불렀다.[30] 1921년부터 그들은 보르게세 궁전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고, 그곳을 I Pini라고 불렀다.[31][32] 엘사는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가 그들의 결혼을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30] 레스피기 부부의 공통 친구이자 대본 작가인 클라우디오 과스탈라는 그들의 결혼이 "거의 초월적인 수준의 인간적, 영적 조화 위에서 기능했다"고 말했다.[33]

1915년 2월, 출판사 티토 리코르디가 레스피기에게 관심을 보였고, 레스피기는 1908년부터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편곡 모음집, 즉 니콜라 포르포라, 주세페 타르티니, 프란체스코 마리아 베라치니의 작품을 출판하는 데 동의했다.[2] 같은 해 알프레도 카셀라Liceo Musicale의 다른 직원들이 프랑스 방문의 결과로 이탈리아 음악을 현대화하기 위해 1915년에 설립한 그룹인 Società Italiana di Musica Moderna에 약간 참여했다.[14]

1915년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36세의 레스피기는 병역 대상이었지만, Liceo Musicale에서의 직위 덕분에 일시적으로 면제되었다.[34] 레스피기는 곧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1916년 3월 어머니가 폐렴으로 사망하자 깊은 슬픔에 잠겼다. 어머니의 병 소식을 들었을 때 볼로냐로 출발이 지연되었고,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사망했다. 레스피기는 로마로 돌아와 잠시 작업을 재개했지만 곧 중단하고 볼로냐로 돌아갔다. 엘사에 따르면 낮 시간의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냈고, 거의 먹지 않았으며,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카살레키오디레노 근처 시골 언덕에 있는 종교 휴양지 에레모 디 티차노에서 회복했다. 그의 짧은 오르간 작품인 Preludio는 그곳에서 작곡되었다.[35] 1917년 1월 피노-사비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레스피기는 "나는 외롭고, 슬프고, 병들었다"고 썼다.[36]

1917년 3월, 그의 첫 오케스트라 교향시로마의 분수가 로마의 테아트로 아우구스테오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은 원래 1916년 말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개막 공연에 연주된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적대적인 청중 반응으로 콘서트가 일찍 끝났다. 레스피기는 아우구스테오에서의 미지근한 반응에 실망했고, 이는 더 성공적인 후속작을 쓰려는 그의 열망을 부추겼다.[37] 초연 후 피노-사비오, 바이올리니스트 아리고 세라토, 피아니스트 에르네스토 콘솔로와 함께 또 다른 실내악 그룹으로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순회했다. 1917년 12월, 레스피기의 세 개의 관현악 모음곡 중 첫 번째인 고풍스러운 아리아와 무곡도 로마에서 초연되었다. 각 모음곡은 16세기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류트 곡을 자유롭게 편곡한 것이다. 전체 악보의 유일한 사본은 콘서트 후 어쩐지 분실되었고, 레스피기는 개별 파트를 사용하여 다시 써야 했다.[38]

1916년 여름, 레스피기는 비아레조로 가서 발레 뤼스의 운영자인 러시아 흥행사 세르게이 댜길레프를 만났다. 댜길레프는 바로크와 고전 시대에 기반한 새로운 작품인 《라 부티크 판타스크》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 했고, 레스피기는 조아키노 로시니의 《노년의 죄악》에 나오는 피아노 곡들을 사용하여 발레를 오케스트레이션하기 위해 1,500 리라를 받았다.[39][40]

명성 상승, 1918년–1925년

레스피기의 경력에 전환점이 된 것은 1918년 2월,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밀라노에서 열릴 12개의 콘서트 시리즈에서 연주할 작품을 선택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였다. 마지못해 1917년 초연 이후 한 번밖에 연주되지 않았던 《로마의 분수》를 선택했다. 콘서트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레스피기를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주요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게 했으며, 토스카니니와의 길지만 때로는 격동적인 관계가 시작되었다.[41] 몇 달 후 레스피기는 카사 리코르디와 계약을 맺어 작품을 출판하고 임대 및 공연 권리의 40%를 받게 되었다.[42] 1918년 말 가벼운 스페인 독감에 걸려 병을 앓았고,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화성 이론》(1922)과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대위법 책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협상에 들어갔지만, 이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43]

1919년 여름, 레스피기는 발레 뤼스를 위한 디아길레프의 두 번째 의뢰를 수락했다. 도메니코 치마로사의 《여성적 계략(Le astuzie femminili)》의 개정판으로, 러시아 음악 주제에 기반한 일련의 춤으로 마무리되며, 레스피기는 악보를 새롭게 편곡했다. 이 발레는 1920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다.[44] 레스피기는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도 있어야 할 조반니 파이시엘로의 《마님이 된 하녀》의 부활 공연을 위한 악보를 제작하기로 동의했다. 원고를 1920년 3월에 제출했는데, 한 달 늦었다. 그러나 디아길레프는 완전한 무대 제작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레스피기의 음악을 다양한 노래와 춤곡 시리즈의 일부로 사용했다. 악보는 90년 동안 분실된 것으로 간주되다가 2014년 볼로냐에서 완전히 재발견되어 연주되었다.[45] 1922년, 레스피기는 비토리오 포드레카의 인형극단을 위해 요정 이야기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숲속의 잠자는 미녀(La bella dormente nel bosco)》를 작곡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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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의 레스피기와 과스탈라

1921년 1월, 레스피기와 엘사는 바이올린 연주자 마리오 코르티와 함께 공동 연주자로서 첫 콘서트 투어를 시작했다. 이는 엘사의 첫 라이브 공연 데뷔였다. 투어는 이탈리아 전역을 거쳐 프라하, 브르노, 으로 이어졌다.[46] 리세오 무지칼레의 레스피기 고용주들은 그의 오랜 부재에 불만을 품고, 학년이 끝날 때까지 교사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다.[47] 1921년까지 레스피기는 작가이자 언론인 클라우디오 과스탈라와 평생 우정을 쌓기 시작했고, 과스탈라는 그에게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고 대본을 쓰겠다고 제안했다. 이는 창작 기간을 촉발시켰고, 레스피기는 일반적으로 작품이 끝난 후 그를 덮치던 우울증 없이 10년 만에 첫 오페라인 《벨파고르》를 완성했다.[48] 이 오페라는 1923년 4월 밀라노에서 초연되었다. 과스탈라는 레스피기의 후속 네 오페라의 대본을 모두 작성했으며, 그의 오페라가 아닌 일부 작품의 구상 또는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쳤다.[14]

1922년 1월, 리체오 무지칼레의 추가적인 반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레스피기 부부는 두 번째 콘서트 투어를 떠났는데, 이번에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48] 레스피기는 1922년부터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그의 커져가는 국제적 명성은 그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정권이 그의 음악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도록 부추겼다. 레스피기는 토스카니니와 같이 보다 노골적인 비평가들이 정권 하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보증했다.[49] 1923년, 레스피기는 현재 국영이 된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이 직책이 요구하는 시간 소모적인 행정 업무를 싫어하여 1926년에 사임했지만, 1935년까지 음악원에서 고급 작곡 과정을 계속 가르쳤다.[14]

《로마의 분수》 6년 후, 레스피기는 후속 오케스트라 교향시로마의 소나무를 완성했고, 1924년 12월 아우구스테오에서 초연되었다. 이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지고 널리 연주되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1925년, 레스피기와 세바스티아노 루치아니는 음악사와 이론에 대한 초등 교과서인 《오르페우스》를 출판했다.[50]

국제적 명성, 1925년–1936년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레스피기의 전 세계적인 명성이 커지면서 작곡가는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거나 피아노 작품의 독주자로 연주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여행했다.[14] 1925년 12월에 미국을 처음 방문하여 일련의 콘서트를 연주하고 지휘했는데, 그의 첫 공연은 12월 31일 카네기 홀에서 그의 피아노 및 오케스트라 작품인 미솔리디안 양식의 협주곡 초연의 독주자로 열렸다.[51] 1926년 3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는 레스피기에게 일련의 콘서트를 헌정했고, 1931년에는 벨기에에서 레스피기 페스티벌이 열렸다.[2]

1927년 5월, 레스피기와 엘사는 브라질로 가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 시리즈에 참여했다. 음악 스타일과 현지 풍습에 영감을 받은 레스피기는 방문을 바탕으로 한 5악장 관현악 모음곡을 다음 해에 다시 방문하여 만들겠다고 언론에 밝혔다. 1928년 6월 리우로 돌아왔지만, 최종 작품은 Impressioni Brasiliane라는 3악장 관현악 작품으로 완성되었다.[52] 1927년 9월, 레스피기는 에서 산드로 보티첼리의 세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3악장 관현악 작품인 트리티코 보티첼리아노의 초연을 지휘했다. 이 작품을 작품의 후원자인 미국 피아니스트 엘리자베스 스프레이그 쿨리지에게 헌정했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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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의 레스피기

1928년 11월, 레스피기는 카네기 홀에서 그의 피아노와 관현악 작품 토카타 페르 피아노포르테 에 오르케스트라의 초연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작곡가가 피아노를 맡고 빌럼 멩엘베르흐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53] 그해 말 레스피기는 단 9일 만에 세 번째 로마 교향시로마의 축제를 완성했다. 이 곡은 1929년 2월 21일 뉴욕 시 카네기 홀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하여 초연되었다.[54] 이탈리아 초연은 3월 17일에 이어졌다. 이 작품을 완성한 후 레스피기는 오케스트라에서 "최고의 관현악 음향과 색채"를 통합했으며 더 이상 그러한 대규모 작품을 쓸 수 없다고 느꼈다. 이 시기에 더 작은 앙상블을 위한 작품을 선호하기 시작했다.[55]

1929년 말, 레스피기는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를 통해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에게 그의 두 에튀드-타블로, 작품 33작품 39에서 피아노곡을 선별하여 관현악으로 편곡하는 허락을 요청하는 제안을 전달했다. 열정적인 라흐마니노프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이전에 비밀로 유지되었던 다섯 곡의 프로그램 설명을 레스피기에게 제공했다.[56] 쿠세비츠키는 1931년 11월 보스턴 교향악단과 함께 레스피기의 Cinq Études-Tableaux의 초연을 지휘했으며, 레스피기의 편곡이 "매우 훌륭하고" 오케스트라에게 8번의 리허설을 요구할 정도로 까다롭다고 언급했다.[18] 라흐마니노프는 레스피기에게 그의 작업과 원곡에 충실했음에 감사를 표했다.[57] 1930년 후반, 레스피기는 보스턴 교향악단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위촉 작품을 작곡했다. 그 결과는 주제와 12개의 변주를 포함하는 관현악 작품인 《메타모르포세온, 모디 XII》였다.

1932년, 파시스트 정부는 레스피기에게 레알레 아카데미아 디탈리아 회원 자격을 수여했는데, 이는 이탈리아 과학 및 문화 분야의 가장 저명한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였다.[58] 같은 해 레스피기는 피체티, 알체오 토니, 주세페 물레 등 여러 작곡가가 참여한 반근대주의 그룹의 서명자였다.[2]

193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레스피기는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다.[14] 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는 1932년에 작곡된 《헌팅타워: 밴드를 위한 발라드》로, 최근 사망한 작곡가이자 지휘자 존 필립 수자를 기리기 위해 에드윈 프랑코 골드만미국 밴드마스터 협회로부터 위촉받은 작품이었다. 레스피기는 6주 만에 이 곡을 작곡했으며, 스코틀랜드 헌팅타워 성을 최근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이 곡은 밴드를 위해 작곡된 그의 유일한 작품이었다.[59] 또한 1932년, 레스피기는 두 번째 미국 콘서트 투어를 마쳤다.[60]

레스피기의 오페라 《라 피암마》는 1934년 1월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1934년 6월, 레스피기와 엘사는 한 달간 아르헨티나로 항해했고, 그곳에서 레스피기는 같은 오페라를 지휘했다.[61] 이어서 우루과이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여러 관현악 콘서트가 라디오 방송을 위해 마련되었다.[62] 레스피기의 마지막 완성 작품은 베네데토 마르첼로의 칸타타 디도네의 편곡이었다.[63]

질병과 죽음

1935년 5월경, 레스피기는 건강 악화로 인해 할리우드 볼에서 예정되었던 일련의 콘서트 지휘를 포함하여 여러 약속을 취소했다. 11월까지 다음 오페라 루크레치아의 피아노 초안과 대부분의 관현악 편곡을 마쳤다. 1936-37 시즌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루크레치아와 함께 상연될 프란체스코 카발리의 오페라 편곡 작업을 계획했지만, 건강 악화로 인해 작업을 중단했다.[64] 레스피기의 생전에 두 작품 모두 완성되지 못했다. 엘사는 1937년 레스피기의 사망 후 그의 옛 제자 엔니오 포리노와 함께 루크레치아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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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피기의 무덤

1935년 말 오페라 《루크레치아》를 작업하던 중 레스피기는 열과 피로로 병이 들었다. 1936년 1월의 후속 검진에서 그의 혈액에서 S. 비리단스 박테리아 샘플이 발견되어 아급성 세균성 심내막염으로 진단되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치료 불가능한 심장 감염이었고, 아마도 최근의 인후 감염과 구강 수술로 인해 발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4][65] 레스피기의 건강은 다음 4개월 동안 악화되었고, 그 동안 세 번의 수혈과 독일에서 수입된 설파제를 이용한 실험적 치료를 받았다.[66] 엘사는 몇몇 선택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질병의 심각성을 숨기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레스피기는 4월 18일 로마에서 혈액 중독 합병증으로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엘사와 몇몇 친구들이 그의 곁을 지켰다.[67] 이틀 후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시신은 1937년 봄까지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조수에 카르두치 시인과 조르조 모란디 화가 옆 볼로냐 체르토사에 재매장되었다.[66][26] 그의 묘비에는 이름과 십자가가 새겨져 있으며, 생몰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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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요약
관점

엘사는 남편보다 거의 60년을 더 살면서 그의 작품과 유산을 끊임없이 옹호했다. 레스피기가 사망한 지 몇 달 후, 그녀는 구아스탈라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그를 위해 진정으로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살아간다. 그리고 나는 죽는 날까지 그것을 할 것이다, 분명히."[68] 그러나 무솔리니 이후의 이탈리아 정부는 레스피기, 말리피에로, 피체티, 피에트로 마스카니를 포함한 민족주의 작곡가들과 거리를 두었고, 몇몇 이탈리아 신문들은 엘사에게 수여된 명예에 항의했다.[69]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1년 그녀는 미발표 및 미완성 원고 컬렉션을 리세오 무지칼레에 기증했으며, 1969년에는 베네치아 치니 재단에 폰도 오토리노 레스피기 재단을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여기에는 많은 수의 편지와 사진 기증도 포함되었다.[70] 초기 작품 원고, 개인 물품, 작곡가의 데스 마스크 컬렉션도 볼로냐 국제 박물관 및 도서관에 기증되었다.[26] 엘사는 1979년 레스피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레스피기 백주년 기념 행사에서 선두에 섰지만, 그녀가 "좌익 정치적 성향을 가진 음악 진보주의자들"이라고 묘사한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의 유산을 폄하하려 했다.[71][69] 이 기념 행사에서는 오랫동안 소홀히 다루어졌던 레스피기의 여러 작품이 처음으로 연주되고 녹음되었다. 엘사는 1996년, 102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사망했다.

1993년, 스위스 지휘자 아드리아노 바우만은 레스피기의 "삶과 작품이 [...] 정확하고 공정한 정보의 확산을 통해 더 잘 알려지고 이해되도록" 노력하기 위해 런던에 레스피기 학회를 설립했다.[69] 이후 이 학회는 해산되었다. 2000년 3월 4일, 볼로냐 귀도 레니 거리 레스피기 생가에 기념 명판이 공개되었다.[72] 그의 조카 루이사 푸티와 조카손녀 엘사, 글로리아 피촐리가 참석했는데, 이 중 후자는 레스피기가 《로마의 분수》와 《로마의 소나무》를 작곡하는 데 사용했던 피아노를 1956년 볼로냐 필하모닉 아카데미에 기증했다.[26]

2006년, 엘사와 글로리아는 이탈리아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살바토레 디 비토리오에게 접근했고, 레스피기 아키비스트이자 목록 작성자인 포티토 페다라와 함께 레스피기의 미완성 및 이전에 미발표된 작품 여러 개를 완성해 줄 것을 의뢰했다. 여기에는 1903년의 바이올린 협주곡 가장조가 포함되었으며, 2010년 디 비토리오가 그의 뉴욕 챔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초연되었다.[73] 이 오케스트라는 낙소스 레코드에서 디 비토리오의 레스피기 음악 신판을 계속 초연하고 녹음하고 있다. 2008년, 디 비토리오는 레스피기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작곡한 관현악 작품인 《서곡 레스피기아나》를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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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오페라

  • 레 엔초 (1905)
  • 세미라마 (1909)
  • 마리 빅투아르 (1913년 완성되었으나 2004년까지 공연되지 않음)
  • 숲속의 잠자는 미녀 (1922)
  • 벨파고르 (1923)
  • 라 캄파나 섬머사 (1927)
  • 마리아 에지치아카 (1932)
  • 라 피암마 (1934)
  • 루크레치아 (1937) 1막 오페라 (사후 그의 아내 엘사와 제자 엔니오 포리노가 완성)

발레

  • 환상 가게 (1918), 19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로시니의 선율을 차용. 1919년 6월 5일 런던에서 초연.
  • 세브르 드 라 비에유 프랑스 (1920), 17세기 및 18세기 프랑스 음악 편곡
  • 마법의 솥 (1920), 인기 있는 러시아 주제를 바탕으로 함
  • 베네치아 스케르초 (콜롬비나의 계략) (1920)
  • 세바의 여왕 벨키스 (1932)

관현악곡

레스피기의 《보티첼리 삼부작》 (1927)에서 A의 프리지아 선법 사용.[74] 이 소리의 정보재생 
  • 뉴욕 필하모닉의 로마의 분수
    프렐루디오, 코랄레 에 푸가 (1901)
  • 아리아 페르 아르키 (1901)[75]
  • 레젠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P 36 (1902)[76]
  •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1902)
  • 수이트 페르 아르키 (1902)[77]
  • 유모레스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P 45 (1903)[78]
  • 바이올린 협주곡 가장조 (1903), 살바토레 디 비토리오가 완성 (2009)[79]
  • 판타시아 슬라바 (1903)
  • 모음곡 마장조 (교향곡) (1903)
  • 세레나타 페르 피콜라 오케스트라 (1904)[80]
  • 모음곡 사장조 (1905), 오르간과 현악기를 위한[81]
  • 서곡 부를레스카 (1906)
  • 협주곡 알 안티카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1908)
  • 서곡 카르네발레스카 (1913)
  • 세 편의 가곡 (1913), 메조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밤, 안개, 비)[82]
  • 교향곡 드라마티카 (1914)
  • 로마의 분수 (1916)
  • 고풍스러운 아리아와 무곡 모음곡 1번의 1부
    고풍스러운 아리아와 무곡 모음곡 1번 (1917), 르네상스 류트 곡들을 바탕으로 함. 시모네 몰리나로, 빈첸초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 그리고 익명의 작곡가들의 곡들을 사용.
  • 발라타 델레 그노미디 (1919), 클라우디오 클라우세티의 시를 바탕으로 함[83]
  • 아다지오 콘 바리아치오니 (1921),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 그레고리오 협주곡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1921)
  • 고풍스러운 아리아와 무곡 모음곡 2번 (1923), 류트, 아르킬루트, 비올족을 위한 곡들을 바탕으로 함. 파브리치오 카로소, 장바티스트 베사르, 베르나르도 지아논첼리, 그리고 익명의 작곡가들의 곡들을 사용. 또한 마랭 메르센에게 귀속된 아리아가 삽입되어 있음.
  • 로마의 소나무 (1924)
  • 미솔리디안 양식의 협주곡 (믹솔리디안 선법의 협주곡) (1925)
  • 포에마 아우툰날레 (가을 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1925)
  • 로시니아나 (1925), 로시니의 퀘클 루앙 (《노년의 죄악》 중에서)에서 자유롭게 편곡
  • 교회 스테인드글라스 (1926), 네 악장 중 세 악장은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그레고리오 선율 전주곡 (1919)을 바탕으로 함.
  • 보티첼리 삼부작 (1927),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보티첼리의 세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세 악장: , 동방 박사의 경배, 그리고 비너스의 탄생. 가운데 악장은 잘 알려진 선율 Veni Emmanuel (오소서, 오소서, 임마누엘)을 사용.
  • 브라질 인상 (1928)
간략 정보
  • (1928), 새를 모방한 바로크 시대 작품들을 바탕으로 함. 서곡 (베르나르도 파스퀴니), 비둘기 (자크 드 칼로), 암탉 (장필리프 라모), 나이팅게일 (익명의 17세기 영국 작곡가), 뻐꾸기 (파스퀴니)로 구성됨.
  •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토카타 (1928)
  • 로마의 축제 (1928)
  • 메타모르포세온 (1930)
  • 고풍스러운 아리아와 무곡 모음곡 3번 (1932), 현악기만을 위해 편곡되었고 전반적으로 다소 우울한 분위기. 베사르의 류트 가곡, 루도비코 론칼리바로크 기타 곡, 산티노 가르시 다 파르마의 류트 곡, 그리고 익명의 작곡가들의 곡들을 바탕으로 함.
  • 콘체르토 아 친퀘 (5인조를 위한 협주곡) (1933), 오보에, 트럼펫, 바이올린, 더블 베이스, 피아노와 현악기를 위한
간략 정보

성악곡/합창곡

  • 안개 (1906), 목소리와 피아노
  • 스토르넬라트리체 (1906), 목소리와 피아노
  • 5개의 옛 노래 (1906), 목소리와 피아노
  • 아리안나의 탄식 (1908), 메조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84]
  • 아레투사 (가사: 셸리) (1911), 메조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타
  • 세 편의 가곡 (1913), 메조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밤, 안개, 비)[82]
  • 감각적인 식물 (가사: 셸리) (1914), 메조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 일 트라몬토 (노을, 가사: 셸리) (1914), 메조소프라노와 현악 4중주 (또는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 5개의 서정시 (1917), 목소리와 피아노
  • 4개의 서정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1920), 목소리와 피아노
  • 봄 (가사: 콘스탄트 자리안) (1922), 독창, 합창 및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정시
  • 숲의 신들 (가사: 안토니오 루비노) (1925), 소프라노와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연가곡
  • 주님의 탄생을 위한 라우다 (탄생 찬가, 가사: 야코포네 다 토디에게 귀속) (1930), 세 명의 독창자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테너), 혼성 합창 (8성부 혼성 및 TTBB 남성 합창의 상당 부분 포함), 실내 앙상블 (목관악기 및 피아노 4수)을 위한 칸타타

실내악

  • 단악장 라장조 현악 4중주 (날짜 미상)
  • 현악 4중주 1번 라장조 (1892–98)
  • 현악 4중주 2번 내림나장조 (1898)
  • 현악 4중주 라장조 (1907)
  • 현악 4중주 라단조 (1909), 작곡가가 "삶은 진지하고 예술은 즐겁다"고 부제로 붙임
  • 도리아 현악 4중주 (1924)
  • 그레고리오 선율에 의한 세 개의 전주곡, 피아노를 위한 (1921)
  • 바이올린 소나타 라단조 (1897)
  • 바이올린 소나타 나단조 (1917)
  • 피아노 소나타 바단조 (1897–98)
  • 변주곡, 기타를 위한
  • 더블 콰르텟 라단조 (1901)
  • 피아노 5중주 바단조 (1902)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여섯 곡 (1901–06)
  • 피아노를 위한 여섯 곡 (1903–05)
  • 4개의 비올을 위한 라장조 4중주 (1906)
  • 헌팅타워: 밴드를 위한 발라드 (1932)
  • 현악 5중주 바이올린 2대, 비올라 1대, 첼로 2대를 위한 사단조 (1901, 미완성)

서적

  • 오르페우스 (1926; 현대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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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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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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