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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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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디아스포라(히브리어: גוֹלָה gōlā)는 이스라엘 땅 밖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로 이루어진다. 역사적으로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레반트 남부의 원래 고향에서 광범위하게 흩어진 이후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 정착하며 생겨난 다양한 유대인 공동체들을 가리킨다.[1][2]

히브리어 성경에서 '갈루트'(히브리어: גָּלוּת gālūṯ)라는 용어는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일어난 2가지의 대규모 유배 사건, 즉 기원전 8세기에 신아시리아 제국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한 후에 일어난 아시리아 유수와, 기원전 6세기에 신바빌로니아 제국유다 왕국을 정복한 후에 일어난 바빌로니아 유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스라엘에서 끌려간 사람들은 사라진 열 지파로 흩어졌으나, 유다에서 끌려간 유다 지파베냐민 지파는 "유대인"(히브리어: יְהוּדִי Yehūdī, 말 그대로 '유다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들은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한 후에 귀환할 수 있었다.[3][4]

유대인 디아스포라 인구는 서기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수세기 동안 존재했다. 그 이전의 제2성전 시대에는 정치 및 전쟁에 의한 난민, 노예화, 추방, 인구 과잉, 부채, 군역, 사업, 상업, 농업의 기회를 포함한 다양한 요인의 결과로 발생하였다.[5] 서기 1세기 중반 이전에, 유대, 시리아, 바빌로니아 외에도 이집트크레타 키레나이카의 로마 속주는 물론 로마 자체에도 큰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다.[6] 서기 6년에 남부 레반트 대부분이 로마의 속주인 유다이아 지배 하에 조직되었고, 그곳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가 제1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이어져 제2성전예루살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로마 군대에 대한 유대인 세력의 패배와 이에 수반한 유대인 정체성의 상징적 중심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제2성전 유대교의 종말을 의미했고, 이에 따라 많은 유대인들이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여 스스로 기한 없는 유랑을 전망하게 되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민족주의자들과 로마 제국 사이의 간헐적인 전쟁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 서기 129/130년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폐허 위에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를 건설하도록 명령했고, 이는 서기 132년의 바르 코크바의 반란을 촉발했다. 시몬 바르 코크바가 이끈 이 봉기는 4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실패했고, 유대-로마 전쟁의 마지막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학살당하거나 이 지방 전역에서 쫓겨났고,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유대교를 실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크게 증가하였다.

중세 시대에 이르러 이주와 재정착의 증가에 따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뚜렷한 지역별 집단으로 나뉘었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2개의 주요한 지리적 집단, 즉 신성 로마 제국동유럽에 모인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베리아 반도아랍 세계에 모인 세파르디 유대인으로 구분되었다. 이 집단들은 밀접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많은 문화적 유사성은 물론 박해추방 및 도피의 경험(예컨대 1290년 영국에서의 추방, 1492년 스페인에서의 추방, 그리고 1948년 이후 무슬림 세계에서의 추방)을 공유한다. 두 분파는 제각각 고유한 민족문화적 관습을 가지고 있으며 현지 주민(아슈케나지 유대인의 경우 중부 유럽인, 세파르드 유대인의 경우 히스파니아인아랍인)의 영향을 받았지만, 공통의 종교 관습과 공통 조상, 그리고 지속적인 의사소통과 인구 이동을 통해 로마 후기 이래로 그들 사이에 통일된 민족 의식은 굳건히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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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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