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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바르톨로메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1472~1517)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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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바르톨로메오(이탈리아어: Fra Bartolomeo, 1472년 3월 28일~1517년 10월 31일)는 종교적 주제를 주로 다룬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이다. 바르톨롬메오 디 파골로[1](Bartolommeo di Pagholo), 바르톨롬메오 디 산 마르코[2](Bartolommeo di San Marco), 바르톨로메오 디 파올로 디 야코포 델 파토리노(Bartolomeo di Paolo di Jacopo del Fattorino)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본래의 별명은 바초 델라 포르타[3](Baccio della Porta)였다. 그는 중년이 될 때까지 전 생애 대부분을 피렌체에서 보냈고, 이후 로마를 포함해 여러 도시로 작업 여행을 떠났다. 그는 화가 코시모 로셀리에게서 사사했으며, 1490년대에는 사보나롤라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1500년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어 수년간 회화를 그만두었다. 그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성모자와 성인들이 등장하는 정적인 인물 군상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4]

1504년, 그는 수도회의 이익을 위해 다시 그림을 그리라는 지시를 받았고, 같은 해 제작한 《성 베르나르도의 환상》에서 이상화된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작품은 현재 보존 상태가 좋지 않지만, “그 인물과 옷자락의 움직임은 천상의 은총으로 가득 차 있어, 젊은 라파엘로에게 계시와도 같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라 평가된다.[5] 그는 라파엘로와 친분을 유지했으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그린 사보나롤라의 초상화는 개혁가의 모습을 담은 가장 잘 알려진 그림으로 남아 있다. 프라 바르톨로메오는 유화와 프레스코 모두 제작했으며, 그의 드로잉 가운데 일부는 순수한 풍경 스케치로, 이는 이탈리아 화가 가운데 가장 이른 사례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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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그는 토스카나의 사비냐노 디 프라토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이 산 피에르 가톨리니(San Pier Gattolini) 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바초 델라 포르타”(문가의 바초)라는 별명을 얻었다.

1483년 또는 1484년경, 그는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의 추천으로 코시모 로셀리의 공방에서 도제로 수학하기 시작했다. 1490년 또는 1491년에는 마리오토 알베르티넬리와 협업을 시작했다. 1490년대 후반, 바초는 당시 세속적이고 타락했다고 여겨진 예술을 비판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가르침에 이끌렸다. 사보나롤라는 문맹자를 교육하기 위해 성경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하는 예술을 주장했다. 1498년에 제작된 그의 유명한 사보나롤라 초상화는 현재 피렌체의 산마르코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듬해 그는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을 위해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를 의뢰받았으나, 1500년 7월 26일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면서 작품은 알베르티넬리와 줄리아노 부자르디니가 완성했다. 이듬해 그는 산 마르코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수년간 회화를 포기했다가, 상급자의 명에 따라 1504년 수도원 공방의 책임자가 되면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같은 해 바디아 피오렌티나의 베르나르도 비안코 가문 예배당을 위해 《성 베르나르도의 환상》을 그리기 시작해 1507년에 완성했다. 그 직후 라파엘로가 피렌체를 방문해 그와 친분을 쌓았다. 바르톨로메오는 젊은 라파엘로에게서 원근법을 배웠고, 라파엘로는 그에게서 채색과 옷자락 표현의 기법을 익혔는데, 이는 이후 라파엘로의 작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두 사람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라파엘로가 로마를 떠날 때 미완성 작품 두 점을 남기고 갔는데, 이를 바르톨로메오가 완성하기도 했다.[1]

1508년 초, 그는 무라노의 산 피에트로 마르티레 도미니코회를 위해 《성부, 성 마리아 막달레나, 성 카타리나 시에나》를 그리기 위해 베네치아로 이주했으며, 이때 베네치아 색채주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그러나 도미니코회가 대금을 지불하지 않아 작품을 루카로 가져갔고, 현재 그곳에 소장되어 있다. 1509년 10월, 그는 루카에서 알베르티넬리와 함께 루카 대성당을 위한 《성인들과 함께한 성모자》 제단화를 제작했다. 1510년 11월 26일에는 피에로 소데리니가 피렌체 시의회실을 위한 제단화 제작을 의뢰했으며, 이 작품은 현재 산 마르코 박물관에 있다. 2년 뒤에는 브장송 대성당을 위한 또 다른 제단화를 완성했다.
1513년 그는 로마로 건너가 현재 바티칸 회화관에 소장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그렸다. 이후 몇 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으로는 피렌체 피티 궁전의 《성 마르코 복음사가》와 피에솔레 외곽 피안 디 무뇨네(Pian di Mugnone) 도미니코회 수도원의 프레스코화들이 있다.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를 위해 약속되었던 《비너스의 향연》은 현재 스케치만 남아 있으며, 그의 마지막 작품은 역시 피안 디 무뇨네에 있는 《놀리 메 탄제레》(1517년) 프레스코이다.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는 1517년 무화과를 과다 섭취하여 소화불량 및 고열에 시달린 후 피렌체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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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로셀리의 조수였던 피에로 디 코시모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필리피노 리피의 영향이 보인다. 1500년에서 1503년 사이의 공백기 이후, 그는 형태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했으며, 라파엘로의 영향을 받아 빛이 인물과 형태를 어떻게 드러내고 변화시키는지를 표현하게 되었다.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인물들은 대체로 작고 옷을 입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결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는데, 그는 이러한 자신의 스타일이 역량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성 마르코 복음사가》(그의 걸작으로 평가됨)와 옷을 입지 않은 《성 세바스티아노》의 장대한 인물을 그렸다. 《성 세바스티아노》의 경우 고통과 고뇌의 표현이 너무도 강렬해, 수도원 예배당에 전시되었던 자리에서 철거해야 했다고 전해진다.[1]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구도는 명암의 덩어리 처리, 풍부하면서도 섬세한 색채, 그리고 뛰어난 옷자락 표현으로 유명하다. 그는 관절이 있는 마네킹(라이 피겨)을 최초로 도입해 사용한 화가이기도 하다.[1]
그의 제자들로는 체키노 델 프라테(Cecchino del Frate), 베네데토 참파니니(Benedetto Ciamfanini), 가브리엘 루스티치(Gabriel Rustici),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아들 리돌포 기를란다요(Ridolfo Ghirlandaio), 그리고 프라 파올로 피스톨레세(Fra Paolo Pistolese)가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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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아래의 작품들은 모두 캔버스에 유화로 제작되었다.
- 《풀리에세 타베르나콜로》(약 1497–1499),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성모 승천》(1508), 베를린 카이저 프리드리히 미술관(1945년 소실)
- 《성인들과 함께한 영광의 성모》(1512, 알베르티넬리와 공동 제작), 프랑스 브장송 대성당
- 《성스러운 대화》(1512)
- 《두 천사에게 받쳐진 그리스도》(약 1514), 아레초 카사 바사리
- 《성 세바스티아노》(1515), 프랑스 페즈나 알라프르 컬렉션
- 종교 작품
- 《미네르바》, 1490년, 루브르 박물관
- 《성모자와 어린 세례자 요한》, 1497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풀리에세 타베르나콜로》, 1497년~1499년경, 우피치 미술관
- 《세례자 요한과 함께한 이집트로의 피난 중 휴식》, 1509년경, J. 폴 게티 미술관
- 《성인들과 함께한 영광의 성모》, 1512년, 알베르티넬리와 공동 제작, 브장송 대성당
- 《자비의 성모》, 1515년
- 《성전에서의 그리스도》, 1516년, 빈 미술사 박물관
-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 산마르코 국립박물관
- 《피에타》, 1516년, 피티궁
- 《토마스 아퀴나스》
- 《남자의 초상》,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아기 성 요한과 함께한 성가족》
각주
출처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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