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
신라의 제56대 국왕 (897~978)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경순왕(敬順王, 897년 ~ 978년 음력 4월 4일/양력 978년 5월 18일(율리우스력 5월 13일))은 신라의 제56대 군주이다. 경주 김씨의 시조이며, 재위 기간은 927년 음력 11월 ~ 935년 음력 12월 12일이다.
신라 경순왕 新羅 敬順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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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왕 | |
경순왕의 실제 어진의 복사본 (조선 후기에 제작) | |
제56대 신라 국왕 | |
재위 | 927년 음력 11월 ~ 936년 1월 13일 (양력) |
전임 | 경애왕 |
후임 | 고려 태조 |
고려의 경주사심관 | |
재임 | 935년 ~ 978년 5월 18일 |
이름 | |
휘 | 부(傅) |
시호 | 경순(敬順)·효애(孝哀) |
왕호 | 낙랑왕(樂浪王) |
작호 | 정승공(政丞公) |
신상정보 | |
출생일 | 897년 |
출생지 | 신라 서라벌 |
사망일 | 978년 5월 18일 (80~81세) (양력) |
사망지 | 고려 개경 |
왕조 | 신라 |
부친 | 신흥대왕 김효종 |
모친 | 계아태후 김씨 |
배우자 | 죽방부인, 낙랑공주 |
자녀 | 마의태자, 김덕지, 헌숙왕후 |
종교 | 불교 |
묘소 |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현 대한민국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경순왕릉) |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부(傅)이며,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일명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고도 한다.[1][2][3]
출생연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출생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족보에 따르면 897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4] 경순왕은 영특한 기상을 지닌 외모에 하늘을 업신여길 만한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5]
문성왕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의흥대왕에 추존된 김인경(또는 김실홍, 또는 김관유)이며, 아버지는 신흥대왕에 추존된 김효종이고, 어머니는 계아태후에 추존된 헌강왕의 딸이다.[6]
왕비는 죽방부인으로[7]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속칭 마의태자이고 막내아들은 계자이다. 이들 왕자들은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양국하는 것에 반대하여 개골산(현재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8]
신라는 경명왕 때부터 고려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정월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출동시켜 고려를 도왔다.
927년 11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급습하여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던 경애왕을 사로잡아 자살하게 하고, 경애왕의 이종사촌 동생인 김부를 왕위에 세우니 그가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재위 8년 동안 나라의 힘이 완전히 약해지고, 국토가 날로 줄어들어 나라를 제대로 이끌 형편이 되지 않았다.
935년 10월 경순왕은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나라를 고려에 양국하는 것을 논의하는데 찬성과 반대가 분분하여 끝이 없었다. 이에 경순왕은 935년 11월 시랑 김봉휴를 시켜 항복을 청하는 국서를 고려 왕건에게 바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는 멸망했다.
935년 11월 경순왕은 문무백관과 함께 금성을 떠나 송악(지금의 개성)으로 향했는데, 향차와 보마의 행렬이 30여 리에 이어졌다.
경순왕이 송악에 도착하자 태조 왕건이 그를 맞아 들여 유화궁에 머무르게 하고, 왕건의 큰 딸인 안정숙의공주(일명 낙랑공주)[9] 및 아홉째 딸인 ‘공주’[10]와 다시 혼인시켜 경순왕을 사위로 삼고 신란궁도 지어주었다. 이후 경순왕은 헌숙왕후 김씨를 두었다.
경순왕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정승 상주국 낙랑왕에 봉해졌는데 그 품위가 태자보다 높았다. 신라를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978년(경종 3) 음력 4월 4일에 죽었다. 고려 조정으로부터 경순이라 시호를 받았다. 능은 신라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 장단에 있다[11]. 오늘날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천 경순왕릉은 사적 제244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