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후삼국 시대 태봉의 군주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궁예(弓裔, 869년 음력 5월 5일? ~ 918년 7월 24일, 재위: 901년 7월 ~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는 신라 시대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서자(庶子)였다.[1]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간략 정보 궁예弓裔, 재위 ...
궁예 弓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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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칠장사 벽화에 그려진 궁예 | |
태봉 국왕 | |
재위 | 901년 ~ 918년 7월 24일 |
섭정 | |
부왕 | 헌안왕 혹은 경문왕 |
이름 | |
별호 | 미륵(彌勒) |
연호 | 무태(武泰), 성책(聖冊),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 |
법명 | 선종(善宗) |
신상정보 | |
사망일 | 918년 7월 24일(918-07-24) |
가문 | 경주 김씨 |
부친 | 헌안왕 혹은 경문왕 |
배우자 | 강비(康妃) |
종교 |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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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가 피신시켜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였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해 호족들, 궁예의 태봉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불교 세력, 유학자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태봉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게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궁예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