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
조선 선조 때 발생한 옥사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 선조 때 발생한 옥사로, 1589년 10월,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에서[1] 시작되어 약 3년간 정여립과 연루된 1,000명의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불리는[2] 이 옥사는 붕당정치가 시작된 초반 과도기에 당쟁에 의해 벌어진 권력투쟁사건이다. 사화(士禍)와 붕당(朋黨)으로 지배체제가 크게 동요한 16세기에 벌어진 기축옥사는 조선시대 역모사건 가운데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사건 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다.[3][4][5][6]
정여립이 대동계(大同契)를 이끌고 반란을 꾀한다는 역모고변으로 옥사(獄事)가 시작되었다.[7] 정여립의 자결로 역모는 사실로 굳어졌고,[7] 동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재탈환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서인들은 사건을 확대시켜 3년간이나 옥사(獄事)를 이어가며 1,000여 명의 동인들을 유배나 사형에 처했다.[8][9]
이 사건으로 동인과 서인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며 비판, 견제, 공존이라는 붕당정치의 금도가 깨지고 당쟁은 유혈숙청으로 비화되었다.[10] 앙심을 품은 동인들은 건저문제(1591)에서 기회를 잡아 서인들을 유혈숙청하였고,[11] 인조반정(1623)으로 전세가 다시 역전되는 등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이 옥사는 물증 등 분명한 증거 없이[12] 다만 고변 만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정여립의 사인에 대해서는 타살설,[13] 역모에 대해서는 여러 조작설이 제기되고있어[6][14] 아직도 사건의 진위여부 등 많은 논란을 빚고 있다.[4]
옥사가 종결된 뒤 곧 임진왜란이 벌어져 많은 자료가 유실되었기에[15]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또한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득세하고 이후에는 서인 출신의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기에 조선후기 300년 간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기축옥사에 대한 논의는 금기사항에 해당했다.[16] 3년 간 이어진 옥사로 1천명의 인재가 사망했기 때문에 인재부재로 인해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조선은 전주 이씨가 건국한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으로 호남 지역은 소외되었고 호남 선비들은 인재 등용에서 큰 차별을 받았다.[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