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
동학의 호남대접주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김개남(金開南, 1853년 9월 15일 ~ 1894년 12월 3일)은 1894년 동학 농민 선언의 지도자이자 혁명가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 교과서 등에서는 전봉준, 손화중과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족보에 실린 이름은 영주(永疇), 어릴적 이름은 기선(琪先), 성인이 되어 기범(箕範),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동학에 입도한 후 동학의 교리에 따라 태평천국으로 밝은 이상적인 나라를 남쪽으로부터 연다는 뜻으로 호를 개남(開南)으로 정했다. 동학농민혁명기에는 김개남대접주, 개남장(開南丈) 또는 개남장군(開南將軍)으로 불리었다고 한다.[1]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2년 7월) |
김개남(金開南) | |
---|---|
본명 | 영주, 동학입도후 개남, |
출생 | 1853년 9월 15일 태인현 종송리 지금실 (현 정읍시 산외면 지금실) |
사망 | 1894년 12월 3일 (42세) 전주 초록바위 |
성별 | 남성 |
본관 | 도강김씨 |
별칭 | 자는 기선, 20대 기범, 개남장, 개남장군, 개남국왕 |
직업 | 훈장, 정치인, 종교지도자 |
종교 | 천도교(동학) |
가족 | 김대흠(부), 7남매의 3형제중 막내 |
친척 | 김시풍(무과급제,전라감영 영장) |
웹사이트 | https://blog.naver.com/sang4323 |
전주화약이후 전봉준은 금구,원평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전라우도를 호령하였고,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무주, 진안, 용담, 장수, 순천, 낙안, 고흥 등을 비롯한 전라좌도를 호령하였다. 또한 김개남은 휘하의 김인배로 하여금 순천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게 하여 하동,진주 등 영남의 서남부지방까지 그 세를 떨쳤다. 제2차 봉기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로,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병영이 있던 청주로, 손화중의 동학농민군은 나주로 진격하였다. 김개남은 11월 10일 청주병영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에 패한 후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너듸마을(산내면 장금리) 매부인 서영기 집에 피신해 있다가 임병찬의 고발로 12월 1일 황헌주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2]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하는 일이 위험하다고 느껴 12월 3일 임의로 처형하고 그 머리만 서울로 이송하여 12월 25일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시(梟示)되었다. 향년 42세였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보국안민"을 주장하던 전봉준 등의 근왕주의자와 달리 부패한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남쪽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김개남은 혁명가였다.
김개남은 1894년 12월 1일 전라감사 이도재에게 붙잡혀 전주 초록바위에서 즉결처분되면서 같은 날 붙잡혔지만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 공사 등에게 두달 여간의 재판을 거쳐 공초기록이 있는 전봉준 등과 달리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활약상은 역사속에 묻혀버리고 만다.[3] 이처럼 공초 등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당시 양반들과 일본군의 공공의 적이었던 김개남은 그 후의 기록을 기초로 오늘날 "비타협적 전투적 모험주의자"로 몰거나 "전봉준 장군의 수하 인물" 정도로 인식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