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기원전 83년 1월 14일 - 기원전 30년 8월 1일)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이자, 장군이었다. 그는 로마 공화국이 로마 제국으로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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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안토니우스 Marcus Antoniu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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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미술관에 전시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조각 | |
로마 공화국의 삼두 | |
임기 | 기원전 43년 11월 27일- 기원전 33년 12월 31일 |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4년 1월 1일 - 기원전 34년 12월 31일 |
전임 | 루시우스 코르니피시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
후임 | 아우구스투스 루시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
로마 공화국의 기병대장 | |
임기 | 기원전 48년 |
전임 | 루시우스 발레리우스 파쿠스 |
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로마 공화국의 호민관 | |
임기 | 기원전 49년 1월 1일 - 기원전 49년 1월 7일 |
신상정보 | |
출생일 | -83년 1월 14일(오류: 시간이 잘못되었습니다.)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일 | -30년 8월 1일(-30-08-01)(53세) |
사망지 |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알렉산드리아 |
정당 | 포풀라레스 |
배우자 | 풀비아 옥타비아 클레오파트라 |
군사 경력 | |
복무 | 로마 공화국 |
복무기간 | 기원전 50년 - 기원전 34년 |
소속군 | 로마 육군 |
최종계급 | 총독 |
지휘 | 제13군단 제미나 |
주요 참전 |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 |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이자 지지자였고, 갈리아 전쟁과 내전 당시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했다. 카이사르가 정적들을 그리스, 북아프리카, 스페인에서 제거하는 동안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안토니우스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와 힘을 합쳐 3인 집정제를 열었고, 이는 제2차 삼두정치라고 불린다. 삼두정치의 지도자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인 리베라토레스를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격멸시켰고, 이후 공화국 정부를 그들 스스로 나누었다. 안토니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비롯한 로마의 동방 속주들로 가게 되었다. 이후 그는 로마-파르티아 전쟁의 사령관이 되었다.
다른 삼두정치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각자가 더 큰 권력을 추구하면서 경색되었다.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했을 때 내전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결혼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권력에서 축출되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관계가 기원전 33년 악화된 이래, 삼두 정치의 지배층들은 분열되었다. 결국 이 분열은 기원전 31년 내전으로 이어졌고,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게 패배했고, 이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쳐 그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안토니우스의 사망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공화국의 사실상 유일한 지배자가 되면서, 로마 공화국은 로마 제국이 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그는 로마의 최초의 실질적 황제가 되며 제정이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긴 했으나, 본인을 '제 1시민', 즉 프린켑스라고 자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