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중
조선 중기의 문신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민정중(閔鼎重, 1628년 ~ 1692년 6월 25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여흥으로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민유중의 형으로 인현왕후의 백부이다. 당색은 서인(西人)이며, 1689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때는 노론을 선택하였다. 산림 학자들의 중용과 민회빈 강씨의 복권 등의 여론을 주도하였다.
1649년(인조 27)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 성균관전적이 되고 삼사와 승정원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남인 유학자들의 등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대사성 재직 시 성균관의 개보수와 강과(講課)에 마음을 다해 선비 양성을 기울였고 함경도관찰사로 재직 중에도 그곳의 학구열과 문풍 향상 등 쇄신에 힘썼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상소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논죄되어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이후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을 청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와 숙종 때 복권된다. 그러나 예송논쟁을 계기로 남인에 대해 경직된 태도를 보였고, 1675년(숙종 1) 다시 이조판서가 되고 그 해 허목, 윤휴, 허적 등 남인이 집권하자 서인 당원이라는 이유로 배척되어 관직이 삭탈되고, 1679년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해 우의정이 되고,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좌의정 재직 시 호포(戶布) 개혁 등을 실행하려 하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등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680년(숙종 6년)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남인 온건파 영수 허적은 외외종숙으로[1], 이때문에 윤휴, 허목 등을 적극 추천하여 정계입문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송 논쟁을 거치면서 남인에게도 열린 자세를 견지했던 그의 포용력은 사라졌고, 경신대출척을 전후하여 남인을 척결하는데 앞장 선다. 흥선대원군의 외할아버지 민경혁은 그의 4대손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