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
19세기 후반, 청나라 말기에 관료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군사중심의 근대화운동이다.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양무 운동(洋務運動, 중국어: 洋务运动, 영어: Self-Strengthening Movement, Westernization, Western Affairs Movement, 1861년 ~ 1894년)은 19세기 후반, 청나라 말기에 관료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군사중심의 근대화운동으로 서양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려 하였다. 유럽 근대기술의 도입으로 봉건체제를 유지하고 보강하려 했던 청나라의 자강 운동(自強運動)이다. 양무(洋務)는 다른 나라와의 외교 교섭에 관한 사무를 뜻하는 말이지만, 넓게는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쓰였다.[1]
당시 청나라는 열강의 침략적인 아편전쟁, 애로호 사건 등으로 여지없이 약체를 드러냈으며,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봉건적 지배체제가 위기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증국번, 이홍장 등 한족 출신 관료들이 근대적인 군사공업을 일으키는 한편, 장지동, 성선회 등은 관상합판사업을 크게 일으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초기에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군수 공업의 육성에 중점을 두고 전개되었지만, 1870년대 이후에는 광공업이나 교육 등 다른 부문까지 근대적 개혁이 확산되었다. 이로써 청의 지배 체제를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중국 사회에 근대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안팎의 여러 장애에 부닥쳐 제한된 성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1] 가장 커다란 한계는 전국적 차원에서 통일된 계획 아래 추진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양무파는 중앙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지 못했고, 군사중심의 근대화에 너무 치중했을 뿐, 사회, 정치 체제의 근대화는 무시되었다. 그 결과, 때마침 일어난 청불전쟁(1884)과 청일전쟁(1894)에서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어 그 약체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리하여 구체제의 지배자는 그 자리를 무술변법의 지도자에게 물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