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크롬웰
영국의 정치인 (1599–1658)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은 잉글랜드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브리튼 제도의 역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1639년부터 1653년까지 있었던 삼왕국 전쟁에서 의회파의 군사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정치가가 되었다. 1649년 1월 찰스 1세의 처형을 주도하였고 이후 수립된 잉글랜드 연방에서 호국경이 된 그는 1653년 12월부터 1658년 9월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공위시대 동안 호국경 정치의 최고 권력자였다. 크롬웰은 신형군을 동원하여 정치 권력을 장악한 것과 1649년 시작된 크롬웰의 아일랜드 원정에서 보인 잔혹함으로 역사적 평가에 논란이 있다.[1]:1-2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 |
---|---|
잉글랜드 연방의 호국경 | |
임기 | 1653년 ~ 1658년 |
전임 | (신설) |
후임 | 리처드 크롬웰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99년 4월 25일(1599-04-25) |
출생지 |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헌팅던 |
사망일 | 1658년 9월 3일(1658-09-03)(59세)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화이트홀 |
국적 | 잉글랜드 |
학력 |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 졸업 |
부모 | 로버트 크롬웰(부) 엘리자베스 크롬웰(모) |
배우자 | 엘리자베스 바우처 |
자녀 | 로버트 크롬웰 올리버 크롬웰 2세 브리짓 크롬웰 리처드 크롬웰 헨리 크롬웰 엘리자베스 크롬웰 매리 크롬웰 프랜시스 크롬웰 |
직업 | 농장주, 군인, 정치가 |
종교 | 청교도 |
묘소 | 잉글랜드 타이번 |
서명 |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시드니 석식스 칼리지에서 수학하였고 1628년 헌팅던 선거구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40세가 될 때까지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았고 한 때 뉴잉글랜드로 이민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크롬웰은 1630년대에 독립파를 지지하는 청교도가 되었다. 이후 크롬웰은 자신의 성공이 신의 섭리에 따른 결과라고 믿었다. 당시 개신교는 매우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고 크롬웰은 여러 종파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지지하였지만 퀘이커나 제5왕국파와 같은 종파는 이단으로 간주하여 반대하였다.[2]:71-73 1640년 크롬웰은 단기의회와 장기의회에서 케임브리지 의원으로 의회에 복귀하였고 1642년 8월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자 의회군에 합류하였다. 그는 자신의 군사 지휘 능력을 재빨리 입증하였고 1645년 토머스 페어팩스 휘하의 신형군 기병대 사령관이 되어 내전 기간 동안 왕당파를 물리치는 핵심 전력으로 활동하였다.
찰스 1세가 처형되고 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추방된 후 1649년부터 1651년까지 잉글랜드 의회군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하면서 크롬웰은 새로운 공화국인 잉글랜드 연방을 장악하였다. 크롬웰은 1653년 12월 잉글랜드 연방의 호국경으로 지명되어 1658년 9월 사망할 때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 그의 사후 아들 리처드가 호국경의 지위를 계승하였으나 1660년 왕정복고로 호국경 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었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던 크롬웰의 시신은 당시 사형집행장으로 쓰이던 타이번으로 끌려가 부관참시되었다. 이때 참수된 크롬웰의 머리는 30년 동안이나 런던탑 밖의 창끝에 매달려 놓였고 이후 케임브리지 시드니 석시스 칼리지에 재매장되었다.
크롬웰에 대한 평가는 논란이 있다. 정토웅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올리버 크롬웰은 처음에는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개혁주의자였으나, 군사 독재라는 오점을 남겼다.")와 윈스턴 처칠은 그를 군사 독재자로 평가하였고[3]:314 [4]존 밀턴(시인), 토머스 칼라일(역사학자) 및 사무엘 로슨 가디너와 같은 청교도 지식인들은 자유를 쟁취한 영웅으로 묘사하였다. 이후 역사적 평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되어 1856년 의회에서 제안된 크롬웰의 동상의 제작 기금은 로즈베리 백작 아치볼드 프림로즈기 대부분을 감당하였을 뿐이고 결국 완성 뒤에도 웨스트민스터궁 앞에 세워지기까지 수 많은 논란을 낳았다.[5] 크롬웰의 동상에 대한 철거 논란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어 2020년 영국 의회에서도 논의된 바 있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