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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배우,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얼리샤 크리스천 "조디" 포스터(영어: Alicia Christian "Jodie" Foster, 1962년 11월 19일 ~ )는 미국의 배우,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이다.[1] 포스터는 흔히 동세대 최고의 배우들 가운데 한 명으로 뽑힌다.[2][3]
포스터는 3세 때 광고에 출연하며 연예 생활을 시작했으며, 13세였던 1976년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 십대 초반의 매춘부 아이리스 역을 맡아 출연하면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고 본격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1988년 영화 《피고인》에서 윤간 피해자를 연기하여 1989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91년에는 《양들의 침묵》에 출연해 전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두 번째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넬》에서 문명과 단절되어 성장한 여자 넬을 연기하여 네 번째로 아카데미 후보에 지명되었다. 그 외에도 《콘택트》(1997년), 《브레이브 원》(2007년), 《대학살의 신》(2011년) 등에 출연하였다.
포스터는 1991년에 《꼬마 천재 테이트》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홈 포 더 할리데이》(1995년), 《비버》(2011년) 등을 감독했다. 아카데미 2관왕일 뿐 아니라, 영국 아카데미상에서 3차례, 골든 글로브상을 3차례, 새턴상, 미국 배우 조합상 등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포스터는 1962년 11월 19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블린 엘라 "브랜디"(Evelyn Ella "Brandy", 결혼 전 성은 앨먼드Almond)와 루시우스 피셔 포스터 3세(Lucius Fisher Foster III) 사이의 네 아이 중 막내였다. 그의 아버지는 훈장을 받은 미국 공군 중령으로, 부동산 중개업으로 전업하여 꽤 부유했다. 부부는 포스터가 태어나기 전에 갈라섰다.[4] 포스터는 언니 두 명, 루신다 "신디" 포스터(Lucinda "Cindy" Foster, 1954년 ~ )과 콘스탄스 "코니" 포스터(Constance "Connie" Foster, 1955년 ~ ), 그리고 오빠 한 명 루시우스 피셔 "버디" 포스터(Lucius Fisher "Buddy" Foster, 1957년 ~ )이 있었다. 이 중 버디 포스터는 조디 포스터와 마찬가지로 아역배우로 활동했다.[5][6] 에블린은 영화 제작자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지원했다.[7]
포스터는 프랑스어 예비학교에 다녀서 1980년에 졸업했다. 그는 십대 당시 프랑스에서 자주 체류 및 작업하여 프랑스어에 능통하다.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여 1985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원래는 1984년에 졸업할 예정이었으나,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 존 힝클리 주니어가 조디 포스터의 팬으로 그에게 집착했음이 알려짐에 따라 포스터는 불필요한 대중의 관심을 집중받게 되었고,[8] 이 때문에 대학교를 한 학기 쉬게 되어 1985년에 졸업하였다.[9][10] 1997년에는 명예 미술박사 학위도 받았다.[11]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으로, 자기가 출연한 영화의 프랑스어판을 직접 더빙하는 경우가 많다.[12][13] 2004년에는 프랑스의 1차대전 영화 《인게이지먼트》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포스터는 영어와 불어 뿐 아니라 독어와[14][15] 스페인어,[16]이탈리아어도 할 줄 안다.[17][18]
포스터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약 50개에 달하는 영화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는 3살 때 코퍼톤 썬크림 광고에 출연하면서 연예 경력을 시작했으며,[19] 1968년에 《메이베리 R.F.D.》에 출연하면서 배우로 데뷔했다.[20] 이때 어머니가 포스터의 매니저 역할을 했다.[21] 1969년 그는 《건스모크》에 ‘조디 포스터’(Jody Foster)라는 이름으로 출연했다. 1970년에는 《대니얼 분》에 ‘조디 포스터’(Jodi Foster), 《특공대 아담 12》에 ‘조디 포스터’(Jodie Foster)라는 이름으로 출연했다. 《에디의 아버지의 연애》에는 고정 배역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등장하는 에디의 친구 조이 켈리(Joey Kelly) 역으로 출연했다.[22]
포스터는 1970년 TV 영화 《산 위의 악당》(Menace on the Mountain)에 출연하면서 영화에 데뷔했다. 1974년에는 마틴 스코세이지, 엘런 버스틴, 다이앤 래드와 함께 《엘리스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를 작업했고, 1976년에는 《벅시 말론》에 탈룰라 역으로 출연했다. 어린 포스터는 디즈니 영화에 다수 출연했는데, 《원 리틀 인디언》(1973년), 《나폴레옹과 사만다》(1972년) 등이 있다.[23] 포스터는 십대 초반에도 디즈니 영화에 출연을 계속했다.
텔레비전에서는 1974년에 《페이퍼 문》에 크리스토퍼 코넬리와 함께 출연했고, 1976년에는 컬트 영화 《리틀 걸》에 마틴 쉰과 함께 출연했다.
포스터는 1976년에 세 편의 영화(《택시 드라이버》, 《벅시 말론》, 《프리키 프라이데이》)에 출연했다. 그는 《택시 드라이버》에서의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1977년에는 스콧 바이오와 함께 출연한 《벅시 말론》.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출연한 《택시 드라이버》에서의 연기로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신인상과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프리키 프라이데이》의 연기로는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 올랐다. 십대 포스터는 디즈니 모험영화 《캔들슈》(1977년)와, 성장영화 《뉴욕 야사》(1980년)에도 출연했다.
포스터는 보다 성숙한 배역을 맡으며 성인 배우로 이행하려 하였으나, 그 첫 시도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1980년대에 찍은 그의 초기 성인 영화인 《호텔 뉴햄프셔》,[24] 《5번가의 비명》,[25] 《추억의 첫 사랑》[26] 은 상업적 흥행이 시원찮았다. 이후 포스터는 《피고인》에서 윤간 피해여성인 사라 토비어스 배역의 오디션을 보았고, 이 역할은 그에게 성인 배우로서의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실화에 바탕한 영화 《피고인》은 정의 구현을 위한 토비어스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는 대체적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포스터에게 골든 글로브상 여우주연상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및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라는 결과를 안겨주었다.[27]
1991년 포스터는 《양들의 침묵》에서 앤서니 홉킨스의 상대역인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 역으로 출연했다. 영화는 상상치 못한 대박을 쳤고, 약 2억 7천 3십만 불의 극장수익을 얻으며 흥행하여[28] 포스터의 첫 블록버스터가 되었다.[29]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포스터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두 번째로,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다. 같은 해 포스터가 감독으로서 데뷔한 《꼬마 천재 테이트》가 개봉했다. 신동을 소재로 삼은 이 영화는 포스터 본인이 아이의 어머니로 출연하였고, 비평가들에게 호의적인 평을 받았다.[30] 다음 해, 포스터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독립영화 제작을 주로 하는 영화 제작사 ‘에그 픽처스’(Egg Pictures)를 설립했다. 포스터는 “주류 팝콘” 무비를 만들 생각은 없으며, 어렸을 때부터 독립영화가 주류 영화보다 더욱 영화 사업적인 면에서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2001년까지 돌아가다 문을 닫았다.
《택시 드라이버》를 보고 조디 포스터에게 집착하게 된 존 힝클리 주니어는[31][32] 포스터가 예일 대학교에 다닐 때 그를 스토킹했으며, 캠퍼스 사서함을 통해 러브레터를 보내고 전화를 걸기까지 했다. 1981년 3월 30일, 힝클리는 당시 예일대 1학년이던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해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저격미수하는 초유의 일을 저질렀다. 그해 4월 미디어가 예일대 교정을 휩쓸었고, 포스터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33][34]
이 사건은 포스터에게 강렬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고, 기자들은 그의 면전에서 해당 사건을 언급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다. 인터뷰 도중 힝클리의 이름만 듣고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 적도 있었고,[35] 1991년에는 NBC의 《투데이 쇼》에 출연해 인터뷰하기로 했다가 방송에서 힝클리가 언급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출연을 취소해 버리기도 했다.[35] 그때까지 힝클리 사건에 대한 포스터의 유일한 공개적 반응은 사후 기자 회견과 1982년 12월에 잡지 《에스콰이어》에 기고한 〈왜 나인가?〉("Why Me?")라는 글 뿐이었다. 해당 기고문에서 포스터는 피터 오툴과 함께 《스뱅갈리》룰 작업함으로써 힝클리 사건으로 인해 흔들렸던 자신감을 되찾고 “다시 연기에 정을 붙이게 되었다”고 밝혔다.[36] 1999년, 포스터는 《60분 2》에 출연해 찰리 로스와 해당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역시 “그 사건은 너무 많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37]
에드워드 리처드슨(Edward Richardson)이라는 또다른 남자도 자신이 당시 예일대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포스터를 쏘기 위해 장전된 총을 주머니에 넣고 그를 따라다녔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너무 예뻤기 때문에” 계획을 그만두었다고 한다.[35]
조디 포스터는 슬하에 두 아들 찰스 "찰리" 포스터(Charles "Charlie" Foster, 1998년 7월 20일 ~ )와 크리스토퍼 "키트" 포스터(Christopher "Kit" Foster, 2001년 9월 20일 ~ )를 두고 있다.[38][39]
그녀는 커밍아웃하지 않은 글래스 클로짓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포스터는 1993년부터 함께하던 동반자 시드니 버나드(Cydney Bernard)와 2008년에 결별했다.[40][41] 제70회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에서 세실 B. 드밀상을 수상한 포스터는 그 수상 소감 발표 자리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커밍아웃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영웅적인 공동양육자이며, 과거 동반자이지만 지금은 진정한 자매인” 버나드에게 감사를 표하였다.[42][43][44] 또한 그는 멜 깁슨에게도 감사를 표하였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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