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프리스틀리
영국의 신학자, 화학자, 교육자, 정치 이론가(1733-1804)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조지프 프리스틀리(영어: Joseph Priestley, FRS, 1733년 3월 13일 ~ 1804년 2월 6일)는 영국의 화학자, 성직자, 신학자, 교육학자, 정치학자, 자연철학자(영어: natural philosopher)이다. 그는 자유주의, 정치학, 종교, 실험철학 등 다방면에 기여했다. 산소의 발견자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스스로는 과학자라기보다는 성직자로 생각했다.[1] 신학적으로는 유니테리언,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 철학적으로는 유물론을 표방했다.
조지프 프리스틀리 Joseph Priestley | |
엘런 샤플스가 그린 초상화 (1794년) | |
출생 | 1733년 3월 13일(1733-03-13) 영국 잉글랜드 버스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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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04년 2월 6일(1804-02-06)(70세)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노섬벌랜드 |
국적 | 영국 |
종교 | 유니테리언 |
주요 업적 | |
수상 | 코플리 메달(1772년) |
분야 | 화학 |
주요 과학적 업적으로는 탄산수의 발명, 전기에 대한 연구, 여러 기체(아산화 질소, 암모니아, 염화수소, 이산화 황)의 발견 등이 있지만, 최대의 공적은 "탈플로지스톤 공기" 즉 산소의 명명이다. 1774년 여름 프리스틀리는 볼록 렌즈로 태양 광선을 모아 적색 산화 수은에 쬐어서 얻어낸 "공기"가 연소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후 그 기체 안에서 쥐가 장수 하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는 플로지스톤설이 진리였기 때문에, "탈플로지스톤 공기"라 간주하여 같은 해 프랑스의 앙투안 라부아지에에게 이 발견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는데, 이 "공기"가 바로 산소이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실험을 변형하여 연소의 화학적 과정을 해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리스틀리 자신은 플로지스톤설을 끝까지 맹신하며 화학 혁명을 거부하여 과학계에서 고립되게 되었다.
프리스틀리는 과학은 신학에 없으면 안되는 요소라고 생각하였으며 계몽적 합리주의와 기독교의 융합을 생각하였다.[2] 그의 철학적 저작에서는 유신론, 유물론, 결정론의 융합을 시도하여 그 결과물을 "대담하고 독창적인(audacious and original)"이라고 칭하였으며, 자연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으로 인류의 진보가 촉진되어 기독교적 천년왕국이 도래한다고 믿었다.[3]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여 종교적 관용과 비국교도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 잉글랜드의 유니테리언주의(단일신론주의)의 확립에 관여했다. 프리스틀리는 〈잘못과 미신이라는 낡은 건물을 폭파하라〉를 출판해 프랑스 혁명 지지를 표명한 것으로 인해 정치적 의혹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국교회에 의해 선동된 군중이 그의 집과 교회에 난입하여 불을 지르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후 1791년에는 런던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프리스틀리는 교육학에도 큰 공헌을 하였으며 영문법에 관한 중요한 저작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역사에 관한 책도 집필하여 연표를 기재해 후세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교육 목적의 저작이 그의 저작 가장 출판 부수가 많았으나 후대에 길게 영향을 준 것은 철학적 저작이다.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허버트 스펜서 등 공리주의자들이 프리스틀리에게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