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와 러시아 5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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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차이콥스키와 러시아 5인조는 19세기에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작곡가를 지칭한다. 이들은 러시아의 클래식 음악이 서구의 방법론을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자국 러시아의 방법론을 따라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 차이를 보였다.
차이콥스키는 서구의 전통적 기준에 부합하며, 국경을 초월하는 전문적 수준을 가지면서도 선율, 리듬이나 이외의 음악적 성격은 러시아의 특색을 간직하고 있는 악곡을 희망하였다. 반면 밀리 발라키레프, 세자르 쿠이, 알렉산더 보로딘,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로 구성된 러시아 5인조는 오래된 유럽 음악의 모방 또는 유럽풍의 음악원 교육에 의존한 음악이 아닌, 명료하게 러시아다운 예술 음악의 창조를 목표로 삼았다.
차이콥스키도 자신의 작품에 민요를 차용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서구의 작곡기법을 재현하고자 하였으며 그 경향은 조성이나 화성 진행에 현저히 드러났다. 차이콥스키와 달리 5인조의 음악가들은 교육기관에서 정식으로 작곡이론을 학습한 적이 없었으며, 이에 5인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발라키레프는 학문주의(academism)을 음악 창조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발라키레프는 5인조를 옹호한 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와 함께, 차이콥스키의 모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과 그 창설자인 안톤 루빈스타인을 향해 출판물과 구두로 가차 없는 공격을 가했다.[1]
루빈스타인의 가장 유명한 제자였던 차이콥스키는 자연스럽게 5인조의 최초 공격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쿠이가 출판한 비판적 평론이 차이콥스키를 비판의 선상에 올려두었다.[2] 이러한 5인조의 태도는 1867년 루빈스타인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계를 떠나게 되면서 다소 변화한다. 1869년, 차이콥스키는 발라키레프와 협력 관계를 맺고 로미오와 줄리엣을 발표한다. 이는 차이콥스키의 첫 출세작이었으며, 5인조 또한 이 작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3] 차이콥스키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르비아 환상곡에 호의적인 비평을 집필하자, 5인조는 학문적 성격이 강한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배경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면서도 그를 포용하기로 결정한다[4]. '작은 러시아'라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2번의 피날레는 1872년 초연되자마자 5인조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기도 했다.[5]
차이콥스키는 5인조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일정 거리를 두었고,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5인조의 목표와 미학이 차이콥스키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 차이콥스키가 안톤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으로부터 초빙을 받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직에 오르게 되면서, 5인조와 음악원의 구태의연한 파벌 경쟁으로부터 거리를 둔 독립적 음악을 창조하기 위해 고통을 겪는다.[7]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직 제안을 받았을 당시[8], 조언과 지도를 위해 의지했던 사람이 차이콥스키였다. 후에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애국주의자 동료들로부터, 자신이 열의를 기울여 온 음악연구와 음악지도에 대한 태도를 바꾸라는 압력을 받았을 때에도[9] 차이콥스키는 그를 도의적으로 지원해 나갔다. 차이콥스키는 그의 예술적 겸허함과 강력한 개성을 칭찬하며,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작업에 대한 전면적인 지지를 표명했다.[10] 1870년, 5인조는 각각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정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1880년대가 도래하자 '벨랴에프 서클'이라는 세력이 대두해 5인조의 빈자리를 메운다. 차이콥스키는 이 그룹을 주도하는 멤버였던 알렉산더 글라즈노프, 아나톨리 랴도브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으며, 림스키코르사코프와도 이전과 같은 친밀한 관계를 이어 나갔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