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1세 (잉글랜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군주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제임스 1세(제임스 찰스 스튜어트, 1566년 6월 19일 – 1625년 3월 27일)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및 아일랜드의 군주이었다. 1567년 7월 24일 스코트인의 왕으로 즉위하여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되었고, 1603년 3월 24일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잉글랜드 국왕을 계승하여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되었다.[1] 당시 아일랜드 왕국의 국왕은 잉글랜드 국왕이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임스 1세 역시 잉글랜드 왕위 계승과 함께 아일랜드 국왕을 겸하였다. 이로서 브리튼 제도의 이 세 왕국은 각자 독자적인 의회가 있는 독립적인 주권국이지만 같은 군주가 군림하는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고, 제임스의 스튜어트가는 이전의 튜더가를 대신하여 잉글랜드의 왕가가 되었다.[2]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의 왕위 서열에 따른 제임스 6세보다 잉글랜드의 것을 따른 제임스 1세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임스 6세/1세 James Charles Stuar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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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국왕 | |
재위 | 1567년 7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
대관식 | 1567년 7월 29일 |
전임 | 메리 스튜어트 |
후임 | 찰스 1세 |
섭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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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왕 | |
아일랜드 국왕 | |
재위 | 1603년 3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
대관식 | 1603년 7월 25일 |
전임 | 엘리자베스 1세 |
후임 | 찰스 1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66년 6월 19일 |
사망일 | 1625년 3월 27일 |
가문 | 스튜어트 |
부친 |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
모친 | 메리 스튜어트 |
배우자 | 아나 애 단마르크 |
자녀 | 웨일스 공 헨리 프레더릭 보헤미아 왕비 엘리자베스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 찰스 |
종교 | 성공회 |
묘소 |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
서명 |
제임스 1세의 잉글랜드 국왕 즉위는 선대로 부터 오랫 동안 진행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복잡한 외교 관계의 산물이었다.[3] 잉글랜드와 지속적인 갈등과 전쟁을 계속하던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는 헨리 7세의 딸 마거릿 튜더를 제임스 4세의 아내로 맞아들여 화친을 맺었고, 부부는 후계자인 제임스 5세를 낳았다. 그러나 두 왕국은 이후로도 전쟁을 계속하였고 제임스 4세와 5세 모두 잉글랜드와 전쟁을 치르는 중에 사망할 정도로 양국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제임스 5세는 전장에서 사망하기 직전 자신의 후계가 될 딸 메리 1세의 출생 소식을 들었다.[4] 메리 1세 역시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운명을 겪었으나 헨리 7세의 후손으로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였고 평생 엘리자베스 1세의 라이벌로 여겨졌다. 1567년 6월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메리 1세를 축출하기 위해 반기를 들었고 메리 1세는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태어난 지 13개월에 불과하였던 메리 1세의 아들 제임스가 7월 24일 왕위에 올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된다. 메리 1세는 잉글랜드에서 연금되어 감시를 받으며 사는 도중에도 재기를 위한 계획을 꾸미다 발각되어 1587년 2월 8일 처형되었다.[5]
제임스가 유년기를 보내는 사이 스코틀랜드는 4명의 섭정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제임스는 1578년에 친정을 할 수 있었다. 1589년 덴마크 왕녀 아나와 결혼하였고 두 부부 사이에는 헨리, 엘리자베스, 찰스와 같은 자녀들이 있다.[6]
엘리자베스 1세 시기의 잉글랜드는 국력이 크게 신장되어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으나, 엘리자베스 1세 본인은 결혼을 하지 않아 후사가 없었다. 1603년 튜더가의 마지막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자 헨리 7세의 증손자였던 제임스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하였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및 아일랜드의 세 왕국 모두에서 국왕으로서 군림하게 되자 1617년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그는 스스로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의 왕"으로 칭하였는데 이 명칭은 훗날 영국의 정식 국호로 자리잡게 된다.
제임스 1세는 재위기간 동안 런던에 있으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의회를 단일화 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그는 아일랜드에서는 얼스터 지역에 대한 식민정책과 북아메리카 대륙 내의 잉글랜드 식민지 확대를 추진하였다.
제임스의 스코틀랜드 재위 기간은 57년 246일로 스코틀랜드 국왕 가운데 가장 길다. 제임스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자 끊임 없던 스코틀랜드의 불안 요소들은 대부분 해소되었지만, 이전까지 전쟁 상대였던 스튜어트가를 새로운 왕가로 받들게 된 잉글랜드인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1605년 화약 음모 사건은 점령군으로 비추어진 스튜어트가를 인정하지 않는 암살 시도였고, 이미 마그나 카르타 이후 오랜 전통이 된 잉글랜드 의회와 국왕의 협치는 제임스 1세에게 불편한 것이었다. 그는 왕권신수설과 이에 따른 절대왕정을 지향하여 의회와 반복적인 갈등을 빚었다. 제임스의 이러한 성향은 후계자 찰스 1세와 찰스 2세에게도 이어져 결국 내전과 혁명을 겪는 원인이 된다.
제임스 1세 치하의 잉글랜드는 계속하여 번성하였다. 문화 면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던, 벤 존슨, 프란시스 베이컨과 같은 작가들이 있었고[7] 제임스 1세 스스로가 《악마론》(1597년), 《자유 군주제의 참된 법률》(1598년), 《왕권에 대한 조언》(1599년)과 같은 여러 작품을 저술한 작가이었다.[8][9]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내의 종교적 갈등에 대한 대응으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도록 하여 《킹 제임스 성경》을 출간하였다. 제임스는 잉글랜드 국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통합을 도모하여 1604년 《성공회 기도서》의 개정판에 청교도의 요구 사항 일부를 받아들였다.[10]
제임스 1세는 고집이 세고 신경질적인 면이 있었고 정당한 주장이라 할 지라도 말할 때를 살피는 요령이 없었다. 이 때문에 제임스 1세는 한 때 프랑스의 앙리 4세를 가리키던 "기독교세계에서 가장 현명한 바보"라는 별명을 얻었다.[11] 당대인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도 제임스에 대한 평가는 의회와의 불화와 국정 운영의 무능으로 잉글랜드 내전의 배경을 만든 군주라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그의 평화를 유지하려던 노력과 종교적 관용을 재평가하며 신중하고 사려깊은 성격이었다고 보는 추세이다.[12] 제임스 1세는 유럽의 종교적 갈등에 개입하는 것을 꺼렸고 특히 30년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한편 의회는 가톨릭과 맞서는 개신교를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강경파가 점차 부상하였다.[13] 제임스 1세는 왕세자였던 찰스 1세를 스페인의 왕녀와 결혼 시켜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스페인의 냉대를 받아 실패하였고, 그 대신 프랑스의 왕녀를 며느리로 맞게 된다. 1625년 3월 27일 제임스 1세가 사망하자 찰스 1세가 왕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