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아이히만
나치 독일의 군인, 홀로코스트의 전범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lower-alpha 1](독일어: Otto Adolf Eichmann, /ˈaɪxmən/ EYEKH-mən[2], German: [ˈɔtoː ˈʔaːdɔlf ˈʔaɪçman]; 1906년 3월 19일 ~ 1962년 6월 1일[lower-alpha 2])은 독일인이자 오스트리아인으로,[4] 나치 독일의 상급돌격대지도자를 맡았다. 그는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 즉 홀로코스트 실행을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아래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동유럽의 게토와 학살 수용소로 강제 추방하는 것을 촉진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치 독일이 해체되고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열린 재판에서 전쟁범죄 혐의에 유죄 판결을 받아 1962년 6월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 Otto Adolf Eichmann | |
1942년의 아이히만 | |
출생지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라인주 졸링겐 |
---|---|
사망지 | 이스라엘 라믈라 |
국적 |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
배우자 | 베로니카 리블 |
자녀 | 클라우스, 호르스트 아돌프, 디터 헬무트, 리카르도 프란시스코 |
복무 | 나치 독일 |
근무 | 나치 친위대 국가보안본부 |
최종계급 | SS상급돌격대지도자(SS-Obersturmbannführer) |
주요 참전 | 홀로코스트 |
서훈 | 고참전사명예수장 친위대 민사휘장 안슐루스 메달 |
서명 |
아이히만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1914년 가족이 오스트리아로 이사했을 때, 아버지의 광산 회사에서 잠시 일했다. 1927년부터는 석유 판매원으로 일하다가, 1932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하였고, 1933년 독일로 돌아와 SS국가지도자 보안국에 입회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유대인 문제에 관련된 부서 책임자로 임명되어, 유대인의 강제 이주시키는 것에 관련된 일을 했다. 이후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아이히만과 관련 부서 책임자들은 유대인들을 더 먼 동쪽으로 이송할 수 있도록 주요 도시들에 게토를 건설하고 이송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에 폴란드 남동부의 니스코에 유대인 보호구역을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 침공을 시작했고, 유대인 정책은 이주에서 학살로 변했다. 유대인 문제에 관한 정책을 조정하기 위해 아이히만의 상관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1942년 1월 20일에 반제 회담을 열어 각 부서의 책임자들을 초대했다. 아이히만은 이 회의에 참석하고 의사록을 작성했고,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절멸 수용소로 추방시키는 일을 맡게 되었다. 또한 1944년 3월에 나치 독일이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도 아이히만은 그 지역의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추방시키는 것을 감독했다. 아이히만이 추방한 대부분의 추방자들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75%가 도착하자마자 살해당했다. 수용이 중단되던 1944년 7월까지 아이히만의 활약에 헝가리의 72만 5000명의 유대인 중 43만 7000명이 살해당했다. 디터 위슬리세니는 아이히만이 "500만 명[lower-alpha 3]을 죽인 것이 나의 양심에 엄청난 만족감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웃으면서 무덤에 뛰어들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6]
유럽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으로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아이히만은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독일 전역에서 도망쳐 다녔다. 그는 1950년까지 니더작센주의 작은 마을에 살았고, 이후 알로이스 후달이 이끄는 조직의 도움으로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1960년에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모사드와 신베트 요원들에게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당하여 이스라엘로 데려가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포함한 15가지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등 유대인을 강제 추방한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전체주의적 총통 체제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혐의에 유죄 판결을 받았고, 1962년 6월 1일[lower-alpha 2]에 교수형에 처해져 사망했다. 이 재판은 언론에 널리 퍼져 보도되어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등의 책에 주제가 되었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설명하기 위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