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 방송일 | 출연 | 편성표 줄거리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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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10.08 21:30-21:50 |
이선근, 이형구, 주현, 박근형, 이효춘, 김자옥 등[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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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48] |
1 |
1973.10.09 21:30-21:50 |
주현, 박근형, 이효춘, 김자옥, 김성옥, 신구 등[49] |
"고려 성종 12년서기 993년 10월 글안은 소손녕 정병 17만으로 고려를 침략..."[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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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973.10.10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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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벽상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난 강감찬은 983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다"[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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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973.10.11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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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전회의에서 문신들은 강화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나 좌보궐 강감찬과 종당 용호군의 강조, 양규 등은 싸우자고 주장"[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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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973.10.12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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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1973.10.13 21:30-21:50 |
주현, 박근형, 이효춘, 김자옥, 김성옥, 신구 등[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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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1973.10.15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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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손녕의 강화봉서를 놓고 조정은 또 다시 격론이 벌어진다"[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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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1973.10.16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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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마침내 막중한 국운을 걸고 적장과 강화담판을 벌이기 위해 적진으로 향한다"[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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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1973.10.17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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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치창검이 정연한 글안 진영, 단신으로 적장 소손녕과 대좌한 서희는 팽팽한 위압감을 무시하고, 땅은 결코 내놓을 수 없다는 결의를 보인다"[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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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1973.10.18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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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가 담판을 계속하는 동안 조정은 초조와 긴장 속에 잠겨있다"[54]
"글안의 진의를 간파한 서희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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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1973.10.19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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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에 조공을 바치는데 방해되는 여진땅을 토벌, 국로를 개설해야 한다는 서희의 묘책에..."[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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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1973.10.20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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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판을 성공시킨 서희는 서경에 돌아와 성종께 글안 조공로를 명분삼아 철군하는 글안군을 따라 강동6주를 정벌할 것을 진언한다"[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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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973.10.22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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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6주를 얻어 성을 쌓고 변방 국경경비를 단단히 대비하는 고려의 총력태세를 깨드리는 중국 일각의 음모는...."[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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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1973.10.23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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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보름 연등회에 변복하고 남경으로 오라는 김치양의 밀서에 천추태후는 그리움에 몸부림친다"[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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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1973.10.24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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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부 개편에 강조가 물망에 오르자 그의 야심과 사조직을 꺼리는 서희는 반대한다"[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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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1973.10.25 21:30-21:50 |
주현, 박근형, 이효춘, 김자옥, 김성옥, 신구 등[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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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1973.10.26 21:40-22:00[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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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1973.10.27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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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양이 승병을 키우는 사실을 알고 서희를 위시한 조정 충신들이 대책을 숙론한다"[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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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1973.10.29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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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시국은 어수선하고 강감찬 부자는 모여 앉아 탄식을 하는데..."[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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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1973.10.30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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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만승의 자리를 개령군에게 양위할 뜻이다"[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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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1973.10.31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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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혈사 김치양의 무리를 감시하던 호신은 발각되어 칼을 맞고 쓰러진다"[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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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1973.11.01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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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침소 만녕전 앞에서 소외당한 천추태후는 분통을 터뜨린다"[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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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1973.11.02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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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현의 대량원군과 원화 젊은 부부는 가난 속에서도 마음을 의지하고 단란하게 살아간다"[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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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1973.11.03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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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군의 등극 소문에 김치양의 야심은 불타오르고 사수현 대량원군의 적소한 강감찬은..."[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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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1973.11.05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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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를 손아귀에 쥔 김치양에겐 대량원군이란 존재가 눈의 가시같다. 사수현에서 대량군 부부를 모시고 오던 감찬은..."[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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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1973.11.06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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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찬의 집에 잠시 머문 대량원군, 감찬 일행은 그의 기개있고 영민한 모습에 흠모와 존경을 보낸다. 성종은 사경을 헤매고..."[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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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1973.11.07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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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1973.11.08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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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이 붕어하고 개령군이 즉위하여 고려 7대 목종이 된다. 섭정을 맡은 천추태후 가슴은 복수와 야심에..."[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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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1973.11.09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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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 일각에서는 실의를 쫓기 위한 무리와 천추태후가 김치양을 추대하고 조정대신의 숙청음모가 함께 시작되는데..."[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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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1973.11.10 21:30-2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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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찬과 서희를 거세시키자는 태후의 청을 뿌리치는 목종. 감찬은 천추전으로 태후를 알현하고..."[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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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1973.11.11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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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사신을 맞은 영접절차로 아뢰는 강감찬에게 태후는 냉랭히 물러가라 외친다"[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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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1973.11.14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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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태후는 김치양을 합문사인의 벼슬에 앉히고 그 무리로 궁중인사가 개편되니 감찬은 삭탈관직을 당한다"[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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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1973.11.15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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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찬은 담담히 낙향을 결심하는데 김치양은 거드름을 피며 입궐한다. 문하시중 한언공은 산발하고 노구를 끌며..."[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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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1973.11.16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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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는 김치양에게 우복야 겸 판삼사사의 벼슬을 내리니 고려조의 인사권과 재정권은 그의 손아귀에 잡힌다"[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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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1973.11.17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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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1973.11.19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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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후가 대량원군의 축출음모를 꾸민다는 한언공의 간언에 천추전의 납신 목종은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는데..."[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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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1973.11.20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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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양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는 모후의 추악한 광경을 목격한 목종은 분노가 폭발, 칼을 빼어들고 천추전으로..."[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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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1973.11.21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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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국사를 통탄하면서 서희는 눈을 감는다. 천추전에선 태후와 김치양이 태연히 주연을 베풀고 목종은 침식을 전폐하고 술로 날을 보낸다"[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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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1973.11.22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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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은 침식을 전폐하고 술로 날을 지새우니..."[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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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1973.11.23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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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1973.11.24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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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1973.11.26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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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비 원정이 포태했다는 소문이..."[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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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1973.11.27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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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에 현혹당한 동생을 책망하는 강감찬"[68]
"강조에 현혹당한 동생 중찬의 경거망동을 지탄하는 감찬 궁중에선 태후의 지령으로..."[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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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1973.11.28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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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1973.11.29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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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가 김치양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놀라운 후문을 확인하고 강감찬은 등골이 오싹해진다"[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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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1973.11.30 22:00-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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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원군을 옹호하는 감찬의 집엔 불안과 긴장이 감도는데, 그날밤 치양이 보낸 자객이..."[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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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1973.12.01 22:00-22:20?[70] 22:10-22:3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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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마다 치양의 심복들이 잠복한 낡은 숭고사. 대량원군은 치양의 속셈을 알아채자..."[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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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1973.12.03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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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월을 메고 천추전으로 들어간 한언공. 늙은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 처참한 모습에 어린 목종의 가슴은 찢어질 듯하다"[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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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1973.12.04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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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틀을 준비하고 독기를 품은 천추태후의 발치에서 원한과 통탄어린 눈빛으로 상소문도 울부짖던 한언공 대감은 끝내 숨을 거두니..."[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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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1973.12.05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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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틀을 준비하고 독기를 품은 천추태후의 발치에서 원한과 통탄어린 눈빛으로 상소문도 울부짖던 한언공 대감은 끝내 숨을 거두니..."[72]
"한언공 대감이 숨을 거두자 하늘도 우는 듯 천둥이 친다 그밤으로 입궐하라는 칙지가 감찬에게 내려지니..."[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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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1973.12.06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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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밤중에 감찬을 불러들인 목종은 대량원군에 양위할 뜻을 비치니..."[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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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4] |
1973.12.07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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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모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불륜의 씨를 잉태한 기막힌 현실 속에 강감찬은..."[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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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1973.12.08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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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1973.12.10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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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으로부터 은밀히 직첩을 받은 감찬은 정신용을 보내 숭교사 대량원군을 보호케 하고 한편으론 강조의 군사를 일으켜 치양을 거세키로 하는데..."[39]
"감찬은 숭교사의 대량원군을 보호하는 한편 치양을 거세할 계책을 꾸미기 시작한다"[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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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1973.12.11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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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원군 독살 계략이 탄로나자 치양의 자객과 정제는 필사의 혈투를 벌인다"[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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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1973.12.12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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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과 강감찬은 은밀히 강조의 군사를 일으킬 칙지를 내린다"[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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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
1973.12.13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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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양의 세력은 천추태후가 난 자식이 커가자 더욱 커지고 목종은 더욱 몸이 쇠약해진다"[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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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1973.12.14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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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양 일당이 목종 침실에까지 침입, 협박하는 속에 감찬은 죽기를 결심하고 상감을 호위한다"[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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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1973.12.15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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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원군이 피신한 신혈사에서 감찬이 보낸 정신용 형제와 치양의 자객들은 필사의 혈투를 벌인다"[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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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
1973.12.17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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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의 밀서를 받아쥔 강조는 당혹한다. 목종 곁에 있는 강감찬을 의식한 강조 대량원군을 옹립 새 조정을 꾸밀 야심으로 드디어..."[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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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1973.12.18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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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의 군사가 개경에 돌입하니 궁중은 아비규환 수라장이 된다. 발악이 극에 달한 치양은 천추태후를 끌고 내전으로 가다 감찬에게 체포당한다"[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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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
1973.12.19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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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통에 목종과 천추태후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감찬의 집에 피신했던 대량원군은..."[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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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
1973.12.20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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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
1973.12.21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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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에 날조된 서약에 목종은 적성현 촌가에서 한많은 일생을 마친다"[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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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
1973.12.22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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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이 40만 대군을 일으켜 강조의 죄를 물으니"[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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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
1973.12.23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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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의 외침에 대급해진 궁중에서는 현종과 감찬이 강조의 거세를 뒤로 미루고 일치단결, 글안과 싸울 채비를 차린다..."[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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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1973.12.25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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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마침내 현종의 단안으로 강조를 행영도홍사로 삼고 양규 정신용 정제 형제를 홍화진으로 파병..."[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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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
1973.12.26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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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은 정4품 예부시랑으로 삼아 거란과 일전을 겨누는데..."[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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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
1973.12.27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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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 일전을 겨누는 강감찬"[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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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
1973.12.28 20:50-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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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진의 양규는 첩첩이 싸인 3만의 적진을 12번이나 야습을 감행, 13의 적장과 5천 3백의 적병을 베어 글안의 후진을 교란시키니..."[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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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
1973.12.29 20:40-21:00? 21:00-2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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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진에서 글안군의 예봉을 꺾어 승전을 올렸다는 강조의 장계를 받고 현종은 기뻐한다"[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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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
1974.01.01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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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진에서 글안의 예봉을 꺾고 2만이 넘는 적병을 무찔렀다는 강조의 장계에 궁중은 환희에 싸인다"[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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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
1974.01.02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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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배압이 이끄는 글안의 결사대에 강조가 생포되자 고려군은 허물어지고 조정은 허탈감에 빠진다"[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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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
1974.01.03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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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 진영에서 강조는 귀순을 권유받으나 굴하지 않는다"[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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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
1974.01.04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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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찬의 상주를 들어 현종은 나주로 파천하고 텅빈 성내에 패잔병과 시체만이..."[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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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
1974.01.05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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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 파천한 현종은 글안 성종에게 친조하기를 약속한다. 개경에 복위한 현종은 감찬을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임명한다"[14]
"마지막회- 고려에 재침입한 글안은 감찬의 구주대첩으로 십만대군을 잃는다"[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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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
1974.01.07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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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글안군은 개경에 도달한다. 나주로 파천한 현종은 척화론에 골치를 앓고 텅빈 개경 성내엔 파잔병과 백성들이"[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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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01.08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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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로 파천한 현종은 척화론에 골치를 썩이는데 텅빈 개경 성내엔 시체만이 즐비하다"[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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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01.09 20:40-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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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고려는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고 글안군은 물러간다"[6]
"현종은 강감찬을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삼아 북방경비를 강화하다가 글안의 재차 침입을 당한다"[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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