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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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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고려의 역사에 대해서 서술한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7년 3월 3일)  | 
고려(高麗)는 궁예 가 건국하여 공양왕의 치세 시기까지 474년간 존속되었고, 1392년 당시 실권자였던 수문하시중 이성계의 정변에 휩쓸려 멸망하였다.
신라의 분열과 고려의 성립, 후삼국 통일
10세기 초 신라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여 정치가 혼란해졌고 전국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 호족들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웠는데 그 중에서도 신라 진골 왕족이었던 궁예와 신라의 장수였던 견훤이 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견훤이 먼저 후백제를 자칭했고, 곧 궁예가 태봉을 세웠다. 이로써 신라, 태봉, 후백제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 부른다.
이후 궁예가 국호를 계속 바꾸고 무리한 천도를 하는 등 민심을 잃게 되자 이에 918년 통일신라 송악 지방의 유망한 신라 호족 출신이자 태봉의 장군인 왕건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어 태봉을 멸망시킨 후, 임금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나라 고려를 건국한다. 그리고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고, 919년 태봉의 초기 수도이자 자신의 고향인 송악(개성)으로 천도했다. 본인이 고구려의 혈통이었기 때문에 국호로 고려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한 것이다. 한편 926년 발해가 요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자, 발해의 왕족을 비롯한 유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웠다. 이는 왕건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 대한 계승의식을 확고히하면서 신라 호족으로서의 성격 역시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또한 대외 정책에서도 궁예와는 달리 친(親)신라 정책을 썼다. 이는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가 되려고 한 것이었다. 왕건은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금성(金城) 북(北) 50리의 땅에 신광진(神光鎭)을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를 주둔하게 하였다.
결국 신라 경순왕은 신라의 고려 귀순을 결정했고, 936년에 신라 군사와 함께 후백제를 패망시킴으로써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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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의 개혁 정치
요약
관점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 때에는 황권이 불안정하여 황족들과 외척들 사이에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신라 호족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황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956년)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약화된 반면, 노비들은 양민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황권이 안정되었다. 물론 이는 고려 귀족들에 의해 한계가 있긴 하였다. 최승로의 노비환천법은 노비안검법으로 풀려난 자들을 도로 노비로 만들었다.
957년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가 신라의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계승·확장하자고 건의하였고, 958년 광종은 문예와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문반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다. 과거는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던 종래의 관리 등용 제도를 억제하고, 새로운 관리 선발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광종은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또한 이것은 문치주의(文治主義)로 전환한 표시로, 무신 대신에 문신을 관리로 등용하려는 것이다. 문신을 등용하는 기준은 유교에 두었다. 따라서 과거제도의 실시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새로운 관료 체제 설정의 기초 작업이었다. 이것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마련한 것이 백관(百官)의 공복(公服) 제정이었다. 복색을 제정함으로써 왕권 중심으로 귀족층을 안정시키고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게 된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또한 광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西都)라 칭했으며, 광덕(光德)·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다만 고려 국왕들은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으나 광종처럼 대내외에 노골적으로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고려 외왕내제를 쓰는 국가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광종의 개혁은 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었고, 성종 때의 지배 체제 정비로 이어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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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요약
관점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신라 말기 지방 호족 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하였으며, 문벌 귀족이라 불리었다. 문벌 귀족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과 관직에 따라 혜택을 받았으며, 자기들끼리 혼인 관계를 맺는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였고, 때로는 황실과도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거의 독점하여 정국을 주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한편 11세기에 들어와서는 선대에 이룩해 놓은 성과를 바탕으로 선대 이래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숙제들이 당면한 현실 문제로 부각되어 시련과 진통을 적지 않게 겪어야만 하였다. 이를 내정과 대외 정책으로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수 있는데,
우선 내정에서 고려 왕조가 건국한 이래의 오랜 숙제이던 황권의 강화는 역대 황제의 일관된 노력에 의해 상당히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그 기반이 확고하게 자리 잡히지는 않았다. 가령 성종의 다음 왕인 목종(穆宗)이 서북면 순검사(西北面巡檢使) 강조에게 폐위(廢位)당하고 그에 대신하여 현종(縣宗)이 즉위하게 된 것이 예가 될 것이다. 고려는 신하에 의해 왕이 폐위되는 비정상적인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다음으로 대외 문제에도 고려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당시 고려의 대외 관계는 매우 미묘하고도 복잡하였다. 중국 대륙에는 한족(漢族)인 송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고려는 송나라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송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북방 민족인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강성해지면서 동아시아 정세에 파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즉 거란은 고려의 친송 정책에 반감을 품고, 두 나라의 외교 관계를 단절시켜 고려를 요나라의 영향권 아래에 두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10세기 말에는 거란이 대군을 거느리고 내침하여 고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희의 외교 수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강동 6주(江東六州)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이때 고려에서는 형식적으로 거란과 우호 관계를 맺고 송과의 관계를 단교한다고 했다. 그러나 고려는 문화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던 거란에 대하여 성의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 송과는 여전히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교적 모순을 빌미로 11세기 초 거란은 대대적인 무력 침략을 자행한다. 1010년 거란의 성종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내침하여 이듬해까지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을 비롯한 서북부 지역을 침공/약탈하였으며, 현종은 전라도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의 분전으로 요군의 기세가 꺾였으며, 이에 요군은 고려와 강화 후 물러갔다.
1018년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공하였으나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본국으로 패퇴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결국 고려가 요나라와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국방 강화에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했고, 북쪽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아 외세의 침입을 저지코자 하였다.[2]
그 뒤에도 거란은 여러 차례 침략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에서는 거국적인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내침한 거란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 뒤 고려와 거란은 화평을 되찾아 비교적 평온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이러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극복하면서 점차 그 사회와 문화를 향상시켜 나갔다. 10세기 말에 성종이 시행한 제도 정비는 주로 당제(唐制)를 모방한 것이었다. 따라서 제도를 시행하는 데 고려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1세기의 고려에서는 고려 사회의 실정에 맞추어 부분적 개편을 마침으로써 고려 일대의 제도 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즉 문종(文宗)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시책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세기의 고려에서는 빛나는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대각국사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 문화를 집대성한 사실을 주목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 세기는 고려 일대를 통하여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어 놓았다.
말하자면 이 세기는 전(前)세기가 남겨 놓은 난제를 풀어 나가면서 고려 일대의 사회 체제를 보다 확고하게 마련하였다는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북방 민족인 여진족과의 관계도 묘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때로는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별로 강대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이 세기까지 여진족은 고려에 복속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여진족은 점차 세력을 규합하여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는 고려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요나라의 침공
10세기 초에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송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송나라를 외교적, 군사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을 토벌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는 수차례 외교적 충돌이 있었다.
처음 요나라는 6만의 군사로 고려를 침공했다 (993년). 요나라는 고려가 영유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요구하는 것과 함께 송나라와의 교류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안융진에서 요나라의 공격을 저지하는 한편, 서희가 요나라와의 협상에 나섰다. 이때 요나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았다. 아울러 요나라로부터 고구려의 옛 땅인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한편, 요나라와 교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요나라가 군대를 거둔 뒤 고려는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요나라와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빌미 삼아, 강동 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요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1010년). 강조가 직접 거란군을 격파하기도 하였으나 하지만 통주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개경이 일시 함락되는 난관을 겪기도 하였으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거란군은 곳곳에서 패퇴하였다. 이에 요군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여러 차례 소규모의 침입을 시도하던 요나라는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공해 왔다 (1018년). 개경 인근까지 침입했던 요군은 도처에서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결국 황해도 신은현에서 군사를 돌려 본국으로 패퇴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요나라의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할 지경이었다(1019년).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고려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연달아 참패한 요나라는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송나라를 침입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려가 요나라와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는 데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요나라를 포함한 외세의 침입을 저지코자 하였다.[2]
여진족과 9성 개척(12C, 1107년)
고려는 두만강 연안의 여진족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및 동화 정책을 펴서 이들을 포섭해 나갔다. 그러나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여진 완옌부의 추장이 다른 여진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정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여진족과의 1차 충돌에서 패전한 고려는 기병 중심의 여진족을 보병만으로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보강한 특수 부대인 약 15만의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하였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1107년),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아 방비하였다.
그러나 생활 터전을 잃은 여진족의 계속된 침략으로 고려는 9성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고려 조정은 다시금 고려를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족의 조건을 수락하고,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고려의 처지에서도 서북쪽의 요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여진족 방어에만 힘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진족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후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금나라를 세우고(1115), 고려에 군신 관계를 맺자고 압력을 가해 왔다. 고려는 그들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격심한 정치적 분쟁을 겪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금나라와 무력 충돌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결국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신하의 나라가 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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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12세기)
요약
관점
한편 12세기의 인종(仁宗) 초로부터 고종(高宗) 즉위 전후에 이르는 약 90년간은 정치적·사회적인 면에서 확실히 한 획을 그을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때는 고려 전기 이래의 정치 조직 자체에 내포된 문신 귀족 전성기의 타성과 부패 속에서 여러 모순과 상극적 요소가 자라 차례로 폭발되었다. 그 분규는 먼저 개경의 부패한 귀족 사회 자체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즉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그것이다. 그 뒤를 이어 서경 중심의 소위 개혁정치를 꿈꾸던 묘청(妙淸) 일파의 천도운동이 일어났다.
귀족 세력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그들 상호간의 항쟁을 조성하였다. 그러한 항쟁은 수차에 걸친 반란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게 되었다. 귀족 문화의 극성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인종(仁宗)·의종(毅宗) 때에 연달아 일어난 반란은 경원 이씨(인주 이씨) 세력의 절정을 이룬 이자겸(李資謙)이 일으켰다.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황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내고 인종이 황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황실과 중복된 혼인 관계를 맺은 이자겸은 권력과 재산이 황제보다 더했으며, 내외의 요직에 일족을 앉히고 반대 세력을 거세하여 권세를 독차지했다.
이자겸 세력은 대내적으로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 금나라와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반면 이자겸의 횡포를 증오한 인종은 1126년(인종 5년) 김찬(金粲)·안보린(安甫麟)·최탁(崔卓)·오탁(吳卓) 등 측근 세력을 결집하면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년). 이자겸은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되리라는 참설(讖說)을 믿고,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척준경의 군사행동으로 왕을 금족(禁足)시키고 측근의 여러 신하에게 해를 입혔다. 그러다가 뒤에는 도리어 일당인 척준경과의 불화로 실각되고, 이자겸을 몰아낸 척준경마저도 정지상의 탄핵으로 제거되니 귀족의 발호는 일단 진압되었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황권의 쇠미와 귀족 세력의 강대로 빚어진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황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자겸 일파, 즉 개경 귀족 세력의 제거에 앞장섰던 묘청·백수한(白壽翰)·정지상 등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와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을 1수도로 변경,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칭제건원함으로써 황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천도하여 새 왕궁인 대화궁(大華宮)을 짓고,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서경은 고려 초부터 북진정책과 관련하였으며, 또 개경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중요시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태조 때부터 서경에서는 분사제도(分司制度)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반면 개경을 세력 기반으로 하며 전통을 존중하는 김부식 등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었다. 결국 이러한 정치 개혁과 대외 관계에 대한 의견 대립이 지역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묘청 세력은 서경을 1수도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1135년(인종 13년) 서경에서 유참·조광 등과 더불어 나라 이름을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하면서 난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묘청 반대파의 수장인 김부식(金富軾)에게 서경 정토(征討)의 명령을 내렸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정지상·백수환 등을 죽이고 북상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조광(趙匡)은 정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묘청·유참 등을 목베어 귀부(歸附)의 뜻을 표했으나 거절된 후 끝까지 반항하였다. 1136년(인종 14년) 2월 서경성이 함락되어 난은 1년 만에 평정되었다. 이로써 서경 세력의 정권 장악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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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의 성립(12세기, 1170년)
요약
관점
12세기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정치가 혼란스러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평소에 문신들만 우대받는 것에 불만이 고조되었던 무신들은 정중부, 이의방 등을 중심으로 1170년에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허수아비 임금인 명종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무신정변이라고 부른다. 또한 최충헌(崔忠獻)이 두각을 나타내기까지에는 무인의 군웅시대로서 정중부·이의방·이고(李高)·이의민 및 경대승 사이에 세력 쟁탈과 알력이 심하였다. 명종3년(1173년), 동북면 병마사로 있던 김보당은 의종을 경주로 데려와 의종을 복위 시켜준다고 하여 정중부에게 김보당의 난을 이르켰다. 김보당은 정중부에게 붙잡혔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은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모두 독점하고 부를 늘려갔으며, 저마다 사병을 길러 서로 권력을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벌였다. 이 때문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화되어갔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져 여기저기에서 여러 차례 봉기가 일어났다.
또 이러한 지배 체제에 대한 반발적 운동이 무신 상호 간의 상극, 각 지방의 농민 및 노비의 반란이란 형태를 띠고 일어났다. 이리하여 20여 년의 짧은 기간에 주마등같이 무인들의 군상(群像)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등 고려 사회는 혼란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1196년에 장군 최충헌과 그의 아우 최충수가 이의민을 살해하여 정권을 독점한 것은 무인 정치의 진전에 있어서의 한 획을 그은 것이다. 이리하여 최충헌 일대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최씨 정권의 기초는 그의 아들 최우(崔瑀)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어 무인 정권의 기구가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최우에 의해 최씨 정권이 더욱 강화된 결과 정방(政房)·서방(書房)이 설치되고 최충헌이 조직한 도방은 더욱 확대되었다. 최우는 또한 교정도감을 의연(依然)히 존속시켜 권신(權臣)의 막부로 삼았으며, 이에 따라 교정별감의 관직도 권위가 서게 되어 역대 권신의 필수직이 되었다.
농민과 노비의 난
의종 때의 사치와 유락(遊樂)은 국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왔고, 이는 농민 수탈의 강화를 초래했다. 이에 도탄에 빠진 농민들은 지배 체제의 문란과 무신들의 하극상 풍조에 자극되어, 신분 해방과 지배층의 압박·수탈에 항거하기 위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12세기 초부터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케 하던 유민들은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 도처에서 벌 떼처럼 일어났다.
1172년(명종 2년) 북계의 창주(昌州, 창성)·성주(成州, 성천)·철주(鐵州, 철산) 등지에서 지방관의 횡포에 분격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그 뒤 묘향산을 근거로 조위총(趙位寵)의 남은 무리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반란을 계속하였다.
남쪽의 반란은 1176년(명종 7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망소이가 봉기를 하기에 이르러 크게 번져갔다. 경상도에서는 손청(孫淸)과 이광(李光)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1182년(명종 12년) 전주에서 군인과 관노(官奴)들이 관리의 가혹한 조선(造船) 독역(督役)에 반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러한 초기의 반란은 대체로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서, 지방관이나 향리들의 억압에 반항하여 농민이나 군인 혹은 노비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부당한 압박의 제거와 신분 해방 등이었으나 아직은 개별적인 요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193년(명종 23년) 김사미·효심의 난에서부터 반란군은 연합 전선을 펴며, 또 일련의 지속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리하여 명주(溟州, 강릉)의 농민 반란군은 동경(東京, 경주)의 반란군과 합세하였고, 진주(晋州)의 노비 반란군은 합주(陜州, 합천)의 부곡 반란군과 연합하여 공동 전선을 폈다. 또 신라 부흥을 외치며 일어난 동경의 반란군은 운문(雲門)·울진(蔚珍)·초전(草田) 등 각지의 반란군과 연합하였다. 경상도 일대에는 서로 밀접한 연락을 가진 반란군의 연합 전선이 이루어져서 10여 년간 세력을 떨쳤다. 이러한 반란은 지방뿐만 아니라 개경에서도 일어났다.
1198년(신종 1년)에 일어난 만적의 난은, 신분 해방은 물론 더 나아가서 정권 탈취를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이들 반란은 모두 최충헌이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군의 부르짖음은 그 후 정부 시책에도 반영되었다. 고려의 신분 질서의 동요를 말하여 주는 이들 반란은 고대적인 유산을 청산하려는 사회적인 움직임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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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과의 전쟁
요약
관점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나라를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였다.
이때 금나라의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에 쫓겨 고려로 침입해 왔다. 고려는 이들을 반격하여 강동성((江東城)에서 포위하였고,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골 및 두만강 유역에 있던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하였다. 이후 몽골은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고 내세우면서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 왔다.
마침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일행 저고여가 귀국하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거란족에게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골군이 침입해 왔는데(1231년), 이른바 고려-몽고 전쟁의 시작이었다. 힘겹게 의주를 점령한 몽골군은 귀주성(龜州城)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몽골군도 큰 소득 없이 물러갔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몽골군이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 전투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가 이끄는 민병과 승병에 의해 사살되자 퇴각하였다. 이후 고려는 7차에 걸친 몽골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 내며, 약 30년간의 장기 항전에 들어갔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수로를 통하여 조세를 걷어 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아울러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점차 그 세력을 만회하기 시작한 문신들은 몽골와의 강화를 주장했다. 즉 문신들은 외세를 이용하여 무인 세력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이리하여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는 일부 무신과 결탁하여 최씨 정권이 무너졌다. 이에 대해 김준(金俊)·임연(林衍) 등 무인들의 반대도 노골화하였으나 1270년 개경 환도와 더불어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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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간섭기
요약
관점
고려인들은 긴 항쟁에 버티고 원 간섭기 때는 몽골의 군대는 원나라로 돌아가고 고려의 귀족과 고위층, 관리들은 모두 고려인이였다. 원나라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약 30년 동안 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강화가 성립되었다. 몽골과의 항전을 주도하던 최씨 무신정권은 붕괴되었다. 이와 함께 왕정이 복고되었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고려왕은 위구르보다 서열이 낮은 것에 대하여 불만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원나라 황제는 위구르가 저항없이 빨리 항복했기에 당연하다고 반론했다.[5][6]
고려는 원나라와의 강화 이후에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으니, 특히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그 후 고려 왕실은 원 황실과의 결혼 정책을 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며, 그 결과 고려에는 몽골의 풍속이 많이 들어왔다. 또한 제주도에는 몽골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던 삼별초를 제거한 뒤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고려 왕은 몽골 공주와 결혼하여 몽골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자주국에서 제후국으로 격하되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었으며 역시 격이 낮추어졌다. 또한 고려는 더 이상 국왕에게 황제의 칭호인 묘호(태조, 혜종, 광종, 의종, 신종, 희종, 강종과 같은 조,종 호칭)를 붙일 수 없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6대 왕들은 몽골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자를 붙여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원은 일본 공략을 목적으로 설치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통하여 고려를 직·간접적으로 지배를 하면서 정치에 간섭하려 했으며, 또 고려의 영토 일부를 직속령(直屬領)으로 하였다. 곧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과 자비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하고,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원의 고려에 대한 경제적 요구도 고려의 농민에게 커다란 부담을 지웠다. 또 원은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기 위해 충선왕(忠宣王)을 심양왕(瀋陽王)에 봉하고 후에 그의 후계자를 이용하여 고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변화·안정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여러 변화는 지배 체제의 문란을 초래했고, 이것은 또한 사회·경제면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다. 농장(農莊)이 확대됨에 따라 국가의 공전(公田)이 침식되고 이에 따라서 국가재정의 곤궁과 궁핍이 초래되었다. 이때 권문세족이 등장하는데, 고려 전기부터 있던 문벌귀족 일부와 무신 집권기에 성장한 가문, 그리고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는 등 몽골과의 친선 관계를 통해 새로 등장한 가문으로 구성되었다. 권문세족은 권력을 앞세워 민중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결함을 다시 격화시켜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권문세족의 불법행위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일반 백성들은 살던 곳을 떠나 떠도는 신세가 되었고, 이것은 국가의 통치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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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사대부의 성장
고려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꾸준히 발전하였다. 먼저 원나라와 전쟁 중에 고려의 독자적인 의술이 발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그 결과 집약적 농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때에 중국 대륙으로부터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농업 기술이 전래되어 휴한을 극복하고 한 토지에서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일찍부터 존재해 온 귀족들의 사전(私田)은 지배질서의 문란을 틈타 점차 확대되어 전시과(田柴科)의 붕괴를 가져왔다. 사전(私田)은 무인정권이 타도된 뒤에 더욱 진전되어 갔던 것으로 이를 보통 농장(農莊)이라고 한다. 농장의 경작은 전호(佃戶)나 노비(奴婢)가 담당하였다. 유민(流民)도 포함된 이들 경작자는 농노(農奴)와 성격이 비슷하였다. 농장의 증대는 국가 재정을 고갈케 했고, 그 결과 관리의 녹봉(祿俸)이 폐지되었다. 이에 농장을 가지지 못한 신진 사대부 관리들은 권문세가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무인 정권으로 말미암아 귀족정치가 붕괴된 이후에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었으며, 또한 정치 실무에도 능한 사대부(士大夫)들이었다. 이들의 사회적 진출은 드디어 고려의 정치적 대세를 일변시켰다.
권문세가들의 세력은 원나라의 강대한 세력을 뒷받침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明)이 흥기하고 원이 점차 쇠퇴하여 북방으로 쫓겨 가는 원·명 교체기에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의 개혁으로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치(反元政治),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억압이라는 두 가지 정책이 채택되었다. 공민왕은 후일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국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신돈은 이공수(李公遂) 등 권문 출신을 축출하고, 문벌이 변변하지 못한 자를 등용하였다. 또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가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권문세가의 반대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신진 사대부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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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개혁 정치와 신진사대부의 등장
요약
관점

14세기 중반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원(反元) 운동을 일으켜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였다. 공민왕은 원나라를 몰아낸 후 신돈 및 신진 사대부와 함께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그리하여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나 재산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권문세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권문세족이 다시 등장하여 정치 권력을 독점하면서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는 등 고려 사회의 어려움은 더욱 심해졌다.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이 10세의 우왕(禑王)을 옹립함으로써(1374년), 권력은 다시 권문세가의 손에 들어갔다. 이인임 일파는 신흥 사대부들을 억압하고 노골적으로 토지겸병을 자행하였다. 반원정책도 수정되어, 원나라와 명나라에 대한 등거리 외교가 추구되었다.
우왕 대 초의 최대 현안은 14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창궐하게 된 왜구(倭寇)를 격퇴하는 것이었다. 왜구는 도처에서 잔혹하게 노략질을 하여 세곡(稅穀) 수송망인 조운(漕運)까지 마비시킬 정도였다. 고려 조정은 일본 막부에 왜구의 노략질을 근절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내란에 처한 바쿠후가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별 성과가 없었다. 1377년(우왕 3년)에 최무선(崔茂宣)의 노력으로 화통도감이 설치되어 화포가 제작되었다. 1380년(우왕 6년)에는 금강 입구에 침구해 온 왜구 5백여 척의 대선단에 화포 공격을 하여, 배를 모두 불태워 퇴로를 차단하였고 내륙으로 침투한 왜구들도 이성계(李成桂) 등의 토벌군이 완전 소탕하였다. 이로써 왜구들은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는데, 1389년(창왕 원년)에는 박위(朴葳)가 이끄는 고려군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왜구 문제가 어느 정도 수습된 후인 1388년(우왕 14년) 음력 1월에는 토지 겸병으로 악명 높은 권문세가인 이인임 일당이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 이 숙청은 권문세가 출신이지만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난 최영(崔瑩)이 우왕과 상의하여 집행하였고, 신흥세력인 이성계 장군이 힘을 더하였다. 이로써 권문세가의 기세가 꺾이고 신흥 사대부들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온적인 정책을 추진하던 최영과 적극적인 개혁을 원하는 신흥 사대부 간에는 틈이 있었다.
같은 해에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며, 쌍성총관부 지역을 내놓으라고 강압적인 통보를 해오자, 최영은 북으로 밀려난 원나라에 명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의하고 명나라의 동북 방면 전진기지인 요동에 대한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이성계는 군사적 난점을 들어 반대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원정군을 이끌고 출병한 이성계는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면서 지휘권을 장악한 다음 군사를 개경으로 돌려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1388년). 이후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기도도 중지되었다.
신진사대부 집권과 멸망
요약
관점
이성계 일파의 집권 후 신흥 사대부들은 권문세가나 사원이 보유한 농장 등을 몰수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사전(私田)개혁을 추진하였다. 권문세가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나, 반발도 적지는 않았다. 폐위된 우왕의 아들 창왕이 이성계 일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나마 왕위를 이을 수 있을 만큼 구세력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성계 일파가 창왕마저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자(1389), 정치는 완전히 신진 사대부가 주도하였다.
또한 사전 개혁도 본격화되었다. 전국의 토지에 대한 측량이 시작되어 공양왕 2년(1390)에 완료되자 종래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이 모두 불태워졌다. 사전 개혁으로 국가의 세수(稅收) 대상 토지가 확보됨으로써 국가 재정이 확충되고, 관료들에게도 경제적 급부로서 과전(科田)이 지급될 수 있었다. 공양왕 3년 전시과제도와 마찬가지로 수조지인 과전을 분급하는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전시과제도 그대로 복구된 것은 아니었으니, 과전법의 수조지 분급 대상 지역은 경기지역에 한정되도록 축소되었고, 분급 대상도 대체로 현직 관리들을 중심으로 한 범위에 제한되었다.
이러한 수조지 제도의 대폭적인 축소는 소유권에 의한 토지 지배가 확대되고 수조권에 의한 토지 지배가 축소·쇠퇴되어가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신흥 사대부들은 정치와 사상 등의 면에서도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며 개혁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가 온건한 개량을 주장하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의 반대파를 꺾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는 국가 사회로서는 연속성을 가졌던 것이었으니, 왕조만이 아닌 기존 국가 사회 자체가 멸망하여 영토와 국민이 크게 변동하였던 앞 시대의 삼국에서 신라·발해로의 변화나, 남북국 시대에서 후삼국을 거쳐 고려에 이르는 왕조의 변화와는 다른 성격을 가졌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화는 왕실과 왕조로서는 종말과 새로운 개창이었으나, 영토와 국민으로서는 연속이었으며, 고려 말 당시 국가 체제 안에 포괄된 지배층 내에서의 정권교체라는 성격을 강하게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권 교체의 이면에서는 고려 후기 이후 광범한 사회 변동 속에서 암중모색되던 개혁이 확고한 방향을 잡고[출처 필요] 새로운 체제를 구체화시키는 결실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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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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