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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황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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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황(具滉, 1561년 ~ 1600년 6월 2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의 장군이다. 솔정(率丁)으로 1583년(선조 18) 알성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직후 함경도로 올라오는 가등청정(加藤淸正) 군과 교전했다. 그해 경성 오촌보 권관(吾村堡 權管)으로, 장군 정문부(鄭文孚)의 휘하에서 길주(吉州) 장덕산(長德山), 단천군 쌍포(雙浦)에서 왜군과 섬멸, 대패시켰다.

1593년(선조 26) 훈련원정(訓鍊院正) 재직 중 단천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 휘하 장군으로 왜군과 교전했다. 1599년(선조 32)에 다시 보을하진의 첨사가 되었다.1600년(선조 33) 보을하진 첨사로 재직 중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6월 여진족 노토(老土) 부락이 두만강을 넘어 귀순 여진족 부락을 공격하자, 이들을 지원하러 출전했다가 전사했다. 자(字)는 사호(士浩), 호(號)는 검산(劒山), 인산(釼山), 본관은 능성(綾城). 충청남도 비인(庇仁)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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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출생과 가계

구황은 1561년(명종 16) 충청남도 비인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보공장군(保功將軍) 행충좌위부사과(行忠佐衛副司果), 행충무위부사과(行忠武衛副司果), 사과(司果) 등을 지내고 자헌대부 병조판서추증된 구종숙(具宗淑)이고, 그의 두 부인 여산송씨와 파평윤씨 중 파평윤씨 소생 셋째 아들이다. 파평윤씨는 사직(司直) 윤제(尹濟)의 딸이다. 고조부는 군수 석경(碩卿)이고, 증조부는 부위(副尉), 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을 지낸 정(禎)이고 할아버지는 군수 사성(思誠)이다. 형은 생원 구침(具沈), 구준(具濬), 동생은 구운(具澐)이다.

어려서부터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남다른 면이 있엇고, 9세에 천자문을 읽고 효당갈력(孝當竭力) 충즉진명(忠則盡命)의 두 글자를 직접 써서 걸어놓고 스스로 이를 실천하는 데 노력했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그는 '대장부가 어찌 일개 서생으로 세상을 마칠 수 있으리'하고는 병법과 말 타고 활 쏘는 기량을 익혔다. 이때 때마침 용감한 노비와 뛰어난 말이 때를 맞추어 그에게 나타났는데, 김복한은 이를 두고 기이한 일이라 했다.

과거 급제와 임진왜란

만력11년계미4월초4일문[무]과방목(萬曆十一年癸未四月初四日文[武]科榜目)에 의하면 그는 솔정(率丁)으로 재직했다 한다. 솔정(率丁)으로 재직 중, 1588년(선조 21) 4월 4일 알성무과(謁聖武科)에 병과(丙科) 67위로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도총부도사, 경력, 훈련원첨정, 훈련원정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오촌보 권관(吾村堡 權管)이 되었는데, 그해 4월 임진왜란이 터졌다. 바로 일본 장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연이어 경기도, 한성부를 함락시키고 함경도 관북으로 들어와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자, 북평사 정문부(鄭文孚)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해 9월 정문부, 이희당 등과 경성부(鏡城府)를 지켰다. 이때 길주에 있던 왜군이 경성으로 와 이희당, 미전첨사(美錢僉使) 김범(金範) 등이 함께 성 위에 올라 아래를 향해 활을 쏘아 일본군이 퇴각하자, 강문우(姜文祐) 등 15인과 함께 적을 추격하여 30여 리까지 따라가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해 12월 정예 기병 2백 명을 4대로 나눌 때 정문부의 휘하 1대대장으로 출전[1], 일본군을 길주 장덕산에서 교전, 패배시켰다. 1592년 12월 20일 나머지 3개 대대와 각각 50명을 선발, 단천군으로 가 쌍포에서 크게 승리했다.[1] 1593년 1월 23일 단천에서 고니시 군을 격파했다. 이후 훈련원 첨정으로 발령되었다가 다시 권관(權管)에 임명되었다. 그 후 훈련원 부정이 됐다가 다시 훈련원정으로 승차하고 이어서 보을하진 첨사(甫乙下鎭 僉使)로 옮겼다.

1593년 7월 비변사로부터 경직(京職) 임명 추천을 받았다.[2] 그해 10월 대구부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나이 젊고 패망스러운 사람이다. 한 때의 군공이 있기는 하지만 자목(字牧)의 소임을 이러한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다(年少悖妄. 雖有一時軍功 字牧之任 不可付如此之人。 請命遞差)'며 수령관으로서의 자질 부족을 이유로 그의 부사 임명을 반대하는 사헌부의 상소로, 체차됐다.[3]경상좌도병영 우후(虞侯)로 전임됐다가 다시 행 훈련원첨정이 되고, 1593년(선조 26) 훈련원정 재직 중 단천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 휘하 장군으로 왜군과 교전했다. 그해 다시 훈련원부정으로 옮겼다.

1595년 경연동지사 이항복이 구황, 인원심의 공이 큰 것을 건의했다. 이항복은 "구황(具滉)은 북도의 권관(權管)으로 있을 때 그 보(堡)의 토병(土兵)을 거느렸으며, 인원심(印元諶)은 다년간 군관을 하면서 여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또한 토병도 많이 거느렸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좌·우척후(左右斥堠)가 되었고 거느린 군사도 모두 날쌔고 용맹스러웠기 때문에 적을 벤 공이 가장 많았다 합니다." 하자, 선조는 "인원심은 지금 무슨 직임에 있는가? 그 같은 장사는 거두어 두는 것이 가하다. 구황은 내 일찍이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답했다.[4]

이항복은 "인원심은 전에 훈련원 관원으로 있다가 사소한 죄로 해임되었는데, 보다 나은 직위에 별도로 서용해야 하겠습니다. 구황도 싸움에 과감한 용사입니다."라며, 북방에서 전공을 세웠고, 전투에 과감한 용사라는 이유로 구황을 천거하였다.[4] 1596년 11월 16일중추부권율이 남도로 파견할 장군을 추천할 때 한 사람으로 추천되었다. 비변사병조에 독촉해서 그를 경상우도우후로 내려보냈다.[5]

보을하진 재부임과 순직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선조 32)에 다시 보을하진 첨사로 재임명, 부임했다. 이때 북방의 여진족이 수시로 기습, 약탈을 감행하여 난을 일으켜 소란하게 하자, 조정에서 장수의 재질을 엄밀하게 가리던 중 그가 은애와 위엄이 본디 북관(北關:북방 국경지대)에 드러났음을 감안하여 특별히 그를 임명했다.

다시 보을하진 첨사로 부임하자 국경지대의 군영(軍營)을 살펴본 뒤, 여진족의 재침략을 대비해 성곽, 보루(堡壘)를 수축, 정비하고, 병졸들을 훈련시켜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였다. 1600년(선조 33) 보을하진 첨사 재직 중 질병에 걸려 눕게 되었다. 1600년(선조 33) 6월 여진족 노토(老土)는 병력을 크게 증원해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국경지대에 귀순한 오도리(吾都里), 마적개(馬赤介) 부락이 있던 운두령(雲頭領)을 기습 공격, 성(城)을 겹겹으로 포위하였다. 운두령은 보을하진과 10리 거리에 있었다. 그는 귀순 여진족을 구원하러 출정하였다.

그는 병석에 누워있었으나 여진족의 습격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종에게 이르기를 '나와 생사를 같이 할 사람은 오직 너와 말뿐이다.'하고 종과 말을 배불리 먹인 후 출정, 성 밖으로 나가서 노토부락 진영에 돌진하여 많은 적의 머리를 베었다. 그러나 그가 탄 말이 여진족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종들도 역시 창에 찔려 희생됐다. 고립된 곳에 있어 지원 요청이 어려웠다. 그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선언하며 돌진, 홀로 분전하여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600년 6월 29일이었다.

사후

1600년 7월 14일 북병사(北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조정에 보고했고[6], 선조는 진상조사를 명하였다.[7] 이정암의 사류재집에 의하면 7월 15일에 북병사가 보고했다 한다.[8] 바로 7월 17일 비변사에서 추증(追贈)과 부의호상을 건의했다.[9] 비변사는 구황이 용맹을 믿고 경솔히 진격했다, 중과(衆寡)와 용겁(勇㤼)을 살펴 헤아리지 않고 경솔히 고군(孤軍)으로 대적(大敵)을 공격하다가 국위를 손상하였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라 하였다.[9] 당일 비변사는 주변의 야인들을 탐문, 그가 죽게 된 정황을 조사케 할 것을 추가로 건의했다.[9]

7월 28일 선조승정원비망기를 내려 안타까운 일이고 구황의 오도리, 마적개 지원은 당연한 것이며 승리했다면 위무를 떨치고 울타리를 보호하는 일이었지만 어쩔수 없었다며 이수일 처벌은 반대했다.[10] 이후 선조는 전교를 내려 구모(具某)는 오랑캐들이 국경을 침범하던 날에 분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죽었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하고 (贈) 통정대부 병조참의추증하였다.

1605년(선조 38)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11] 1606년 2월 27일에는 선조의 특명으로 그의 아들을 녹용하라는 명이 내려졌다.[12] 1607년(선조 40) (贈) 가선대부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에 가증(加贈)되었다. 현종정문부를 모신 사당 경성 창렬사(彰烈祠)에 배향(配享)되고, 충남 서천군 비인면에 있는 청절사(淸節祠)에도 제향되었다.

20세기에 와서 후손 은서(殷書), 태서(泰書) 등이 김복진에게 신도비문을 청하여, 김복진이 신도비문을 짓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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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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