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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경록
고려후기 문신 이색과 이인복이 저술한 역사서.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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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경록》(金鏡錄)은 고려 시대의 역사책이다. 충렬왕 때의 문신 정가신(鄭可臣, ?∼1298)이 처음 편찬한 이후 민지(閔漬), 이인복(李仁復), 이색(李穡) 등에 의해 증수가 이루어졌다.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본조금경록(本朝金鏡錄)이라고도 불렸다.
개요
요약
관점
과거의 역사를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한 감계(鑑戒) 즉 '거울'에 비유하는 것은 중국 고대 이래의 동아시아 전체에 널리 퍼진 역사관으로[1] 이러한 의식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이 바로 북송 시대의 《자치통감》이다. 금경록(金鏡錄)이라는 책의 제목은 이미 중국 당 현종(唐玄宗) 때에 장구령이 현종의 천추절을 맞아 《천추금경록》(천추금감록이라고도 함) 10권을 지어 바쳤다고 전해지는 데에서, 해당 책의 제목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금경록》이라는 책 제목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충선왕 복위년(1308년) 원에 하정사로 들어가는 평리(評理) 조련(趙璉)에게 충선왕이 왕명으로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와 《금경록》(金鏡錄)을 가지고 가서 바치게 하였다는 데에서 나온다.[2] 《고려사》 정가신열전과 민지열전에는 정가신이 《금경록》(천추금경록)을 찬하였고[3] 충렬왕이 이 《천추금경록》을 민지에게 명하여 증수하게 하였는데, 당시 나라에 변고가 많았던 까닭에 그것을 완성할 겨를이 없었다가 후에 권보와 함께 교열을 보고 찬술하여 《세대편년절요》(전7권)로 완성하였다고 한다.[4] 정가신이 저술한 《금경록》(천추금경록)은 충렬왕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5]
《금경록》의 증수 개찬에 대해 표면적 이유는 빠진 것을 보충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노우에 히데오[6]나 김상현[7]은 고려가 원을 의식해서 혹은 원의 압력에 의해 원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내용을 보정 및 개편한 것으로 추측하였다. 당시 충렬왕 4년(1278년) 원의 중서성(中書省)은 국사원(國史院)의 요구에 따라 고려에 역대 고려 국왕들의 사적 및 중국 왕조에 조공한 기간, 사신의 명목, 국왕의 친조 연월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바치도록 고려에 요구했고[8] 충렬왕은 재위 12년(1286년) 직사관(直史館) 오양우(吳良遇)에게 원에 바칠 《국사》(國史)의 편찬을 명하는가 하면[9] 33년(1307년)에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역대 고려 왕실의 실록 185책을 원에 보내기까지 했다(이 선대실록 185책은 충선왕 4년(1312년)에 다시 고려로 송환되었다).[10] 고종 및 원종의 실록도 원에서 보낸 시호에 맞춰 《충헌왕실록》과 《충경왕실록》으로 개찬되었는데, 이는 원의 간섭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11] 반대로 《금경록》을 《세대편찬절요》로 개찬한 것은 원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고려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산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12]
공민왕 20년(1371년)에 왕명으로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이인복(李仁復)·지춘추관사(知春秋舘事) 이색(李穡) 등에게 명하여 《본조금경록》을 증수하게 하였는데, 이 《본조금경록》이 정도전이 《고려국사》를 저술하는데 직접적인 기본 자료로 쓰였다.[13]
정총의 '고려국사서'에는 이색, 이인복이 증수한 《금경록》(본조금경록)은 태조에서 정왕(靖王)까지를 다루었으며 그 내용이 지나치게 소략하였다고 평하고 있다.[14] 조선 후기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정가신과 민지의 《금경록》 편찬 및 증수에 대해 개인이 사적으로 지은 역사책이라고는 해도 왕이 그 책을 증수할 것을 명한 것은 후세에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호평하였으며, 그 책들이 전해지지 않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문헌을 숭상하지 않은 소치라 탄식을 금할 수 없다고 평하였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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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의 해동금경록
조선 중기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16] 및 김노응(金魯應)의 《익재선생연보》(益齋先生年譜)[17]에 따르면 고려 후기의 문신인 이제현(李齊賢)도 《금경록》(해동금경록)을 지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이인복과 이색 등이 증수한 것을 착각하였다고 부정하였고,[18] 한국의 사학자 변태섭(邊太燮)도 이수광의 지적에 대해 정말 이제현의 저술인지 아니면 이제현이 지었다는 사략(史略)을 가리킨 것인지, 이마니시의 지적처럼 《본조금경록》을 착각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등 이제현의 저술 해동금경록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 제55집 '高麗後期 性理學 受容에 關한 硏究' Ⅳ. 性理學의 受容 2. 李齊賢의 歷史認識(이원명 집필) 및 같은 책 제71집 高麗時代의 書籍刊行 〈附錄〉高麗의 逸書目錄(허흥식 집필)에서는 이제현의 저술로 《금경록》을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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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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