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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군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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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군(金城郡)은 중국의 옛 군이다.
전한
요약
관점
소제 시원 6년(기원전 81년), 강족을 방비하기 위해 설치했다. 천수군에서 유중현과 금성현을, 농서군에서 부한현과 백석현을, 장액군에서 영거현과 지양현을 넘겨받아 만들어졌다. 선제 신작 원년(기원전 61년) 조충국을 파견해 신작 2년(기원전 60년)까지 서강을 평정하면서 윤가·파강·하관 3현을 설치하는 등 관할 구역이 더 넓어졌다.[1]
양주자사부에 속했다.[2]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38,170호, 149,648명이 있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지리지의 내용이다.[3][2] 원연·수화 연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총 13현이다. 치소는 처음에는 금성현이었으나, 서강을 몰아내고 군이 넓어지면서 금성현이 동쪽에 치우쳐 있기에 윤오현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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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군의 이름을 서해(西海)로 고치고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후한
10성 3,858호 18,947명을 거느렸다. 인근의 농서군, 무도군과 함께 강족의 연이은 침공에 시달리면서 크게 황폐화되었다. 213년 양주가 옹주에 통폐합되면서 옹주소속으로 바뀌었다가 220년 양주가 복구되면서 다시 양주에 속했다. 후한말엽 지금의 칭하이 성에 속한 지역이 서평군으로 분리되었다.[4][5]
위진
후한대와 같이 강족방어를 위한 군사적인 요충지가 되었고 치소가 유중현으로 옮겨졌다. 조조가 죽고 서평군의 국연이 소칙의 토벌에 항복한 뒤 다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군 학소와 위평이 금성에 주둔했다. 이후 국연을 진압한 뒤 소칙은 금성군으로 돌아갔다.[8]269년 진주가 신설되자 진주로 소속이 옮겨졌다. 서진대에는 5현 2,000호를 거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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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
전조, 후조, 전진, 서진, 후진순으로 속했다가 북위에 소속되었다. 북위는 금성군을 하주에 소속시켰다. 2현을 두었다.
수
주현제를 실시하면서 난주(蘭州)를 설치하고 총관부를 두었다가 대업초에 부를 폐지했다. 2현 6,818호를 거느렸다.[9]
당
수나라말 설거가 함락되었고 619년(당 고조 무덕 2년), 이들을 토벌한 뒤 하급주인 난주를 설치했다. 625년(당 고조 무덕 8년) 도독부가 설치되었는데, 본도독부는 난주 하주, 곽주, 도독부를 관할했다. 632년(당 태종 정관 6년)과 638년(당 태종 정관 12년), 각각 도독부의 관할지가 서염주(西鹽州), 양주로 확장되었다. 결과적으로 난주, 선주(鄯州), 유주, 순주(淳州)의 4속주를 두었고 금성현, 적도현, 광무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656년(당 고종 현경 원년) 도독부가 폐지되었다. 742년(당 현종 천보 원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금성군으로 개명되었다가 758년(당 숙종 건원 원년), 주현제를 재실시하면서 난주로 복귀했다. 과거 3현 1,675호 7,305명을 거느렸으나 천보연간에는 2현 2,889호 14,226명을 거느리게 되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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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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