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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식 (1948년)

대한민국의 축구인 (1948-2018)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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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식(한국 한자: 南大植, 1948년 10월 15일 ~ 2018년 3월 20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며, 포지션은 미드필더공격수였다. 선수 시절 개인기가 좋고 어시스트와 드리블에 강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 감독으로서는 선수의 심리 상태 파악 및 상황에 따라 경기 완급 조절에 능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2] 또한 고려대학교 감독 재임 시절 홍명보, 서정원 등 여러 스타 선수들을 지도했으며, 특히 미드필더였던 홍명보를 스위퍼로 포지션 변경시킨 것으로 유명하다.[3][4]

간략 정보 남대식 (南大植), 개인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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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경력

요약
관점

클럽

전라북도 군산시 중동 출신으로 군산중앙초등학교, 군산남중학교, 동북중학교를 거쳐 동북고등학교에서 주장을 맡았으며,[5] 여러 사정으로 인해 양지 축구단제일은행 축구단에서 1년여간 선수 생활을 한 뒤 1970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다.[6] 그 해 있었던 고연전에서 쐐기골을 득점해 팀의 승리에 공헌했으며,[7] 이후 1972년 전국대학축구연맹전에서는 한양대학교와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는 등의 활약으로 팀의 공동 우승에 기여하였다.[8][9] 그 뒤 1973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여러 차례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으나 팀은 8강전에서 탈락하였고,[10][11][12] 얼마 뒤 있었던 와세다 대학과의 정기전 중 두 번째 경기에서 추가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일조하였다.[13] 또한 그 해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에서 팀의 준우승을 견인하며 수훈선수상을 수상하였고,[14] 고연전에서는 팀의 결승골이 된 프리킥을 얻어내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15]

이후 1974년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최종적으로 국민은행 축구단에 합류하였고,[16] 그 해 팀의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 준우승에 일조했으나 한국신탁은행 축구단과의 결승전에서 상대 선수와 난투극 직전 상황까지 가는 상황을 연출하며 구설수에 올랐다.[17] 또한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여러 차례 득점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고,[18][19] 1975년에는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팀의 우승을 견인했다.[20][21][22][23]

그 뒤 1977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서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으며,[24] 1979년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

국가대표팀

1969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25]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성공시켜 팀의 7-0 대승을 이끌었다.[26] 또한 라오스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27] 대표팀은 이란과의 8강전에서 패배해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197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이원화 원칙에 따라 국가대표 B팀이 신설되자 남대식은 B팀인 백호팀에 포함되었으며,[28] 같은 해 열린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에 출전하였다.[29] 그 해 이원화 원칙이 다시 폐지되어 국가대표팀이 하나로 통합됨에 따라 남대식은 국가대표팀 예비 명단에 포함되었으며,[30] 킹스컵에도 나설 예정이었으나 A매치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최종적으로 제외되었다.[31][32]

그 뒤 1971년 국가대표팀의 중남미 전지훈련 명단에 포함되었고,[33] 그 해 개최된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도 참가해 말레이시아와의 조별 라운드 2차전에서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했으며, 그 경기에서 정강지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며 국가대표팀의 우승에 일조하였다.[34] 하지만 같은 해 다시 국가대표팀이 이원화되어 국가대표 B팀이 부활하자 남대식은 다시 B팀으로 편입되었으며,[35] 얼마 뒤 있었던 던디 유나이티드 FC와의 평가전에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36] 직후 열린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도 국가대표 B팀의 일원으로 출전했으며, 중화 타이베이와의 3-4위전에서 이중휘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의 활약으로 국가대표팀의 승리에 기여하였다.[37]

이후 1972년에는 제1회 한일 정기전의 대학 선발팀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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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경력

요약
관점

은퇴 이후 1980년 국민은행 축구단의 코치로 활동했으나 주심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몸싸움을 벌이며 구설수에 올랐고,[39] 이듬해부터 한동안 국민은행 남대문 지점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며 축구계와 거리를 두었다. 그 뒤 1984년 은행원 업무와 겸직한다는 조건으로 고려대학교의 코치로 임명되었으며,[40] 그 해 이영익 등 유망 선수들을 데려오는데 성공했으나 김봉길이 최종적으로 연세대학교로 진학하는 등의 손실을 안았다.[41][42] 1985년에는 송주석, 김상훈 등을 스카우트하는 성과를 올렸으며,[43] 이병우 감독을 보좌하며 팀의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견인한 뒤 지도자 코치상을 수상하였다.[44][45] 하지만 1986년 김종부에게 현대 호랑이 축구단에 입단할 것을 강압하며 당시 불거진 스카우트 파동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자리잡았으며,[46] 스카우트 파동 이후 은행원 업무를 그만두고 지도자 생활에 전념하며 고려대학교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87년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고,[47] 1988년 팀에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안기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48] 또한 같은 해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다시 한 번 팀을 정상에 올려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했으며,[49] 히로시마 축구 대회에 출전할 대학 선발팀의 감독을 맡았다.[50] 1989년 팀의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2연패를 이루어내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고,[51] 1990년에는 곽경근, 최익형 등의 유망주들을 데려오는 수훈을 발휘하였다.[52]

그 뒤 1990년 한국대학축구연맹 기술이사로 선임되었으며,[53] 같은 해 열린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할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예선 및 본선을 지휘할 감독으로 임명되었다.[54][55] 이후 대회 우승을 이끌어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 진출권을 획득했으며,[56] 대회 종료 이후 대회 준우승을 차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남북 단일팀 논의가 본격화되자 긍정적인 입장을 표시하였다.[57][58] 그리고 대회 이후 올림픽 대표팀으로 차출된 김승안, 강철, 이임생, 곽경근 등 네 선수의 U-20 대표팀 복귀를 요청했으며,[59] 대한축구협회는 이들 중 강철과 이임생을 남북 단일팀에 합류시키기로 합의하였다.[60] 그 뒤 1991년에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평가전에 출전할 대표팀을 이끌었으며,[61] 남북 단일팀의 감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안세욱이 맡고 남대식은 코치를 맡기로 결정되었다.[62] 이후 남북간 이루어진 평가전에서 1차전은 홍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2-1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은 5-1로 백팀(대한민국)이 승리하였고,[63][64] 평가전 이후 남북 단일팀 구성이 완료되었고 협의 결과 안세욱은 공격 훈련을, 남대식을 수비 훈련을 담당하기로 하였다.[65] 그 뒤 대회 본선에서 남북 단일팀은 아르헨티나를 꺾는 등의 이변을 일으키며 1승 1무 1패로 8강 토너먼트에 진출했으며,[66] 8강전에서 브라질에 패배해 4강 진출은 무산되었으나 안세욱과 남대식의 상호 협조가 좋은 평가를 받는 등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67][68] 이러한 공로로 1991년 개최된 대한축구협회 '축구인의 밤' 행사에서 공로상을 수여받았다.[69]

이후 1992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할 대표팀 감독 중 한 명으로 검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박상인이 낙점되었으며,[70] 1994년 창단 예정인 전남 드래곤즈의 초대 감독 후보로 물망이 올랐으나 최종적으로는 정병탁이 선임되었다.[71] 그리고 1995년 대한민국 유니버시아드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72] 일본과의 유니버시아드 결승전에서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이며 준우승에 머무른 것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73][74] 또한 지휘봉을 잡고 있던 고려대학교에서도 부진한 성적이 이어지자 퇴진을 요구하는 투서가 잇따랐으며,[75] 결국 1996년 감독직을 사퇴하였다.[76]

그 뒤 1998년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77] 1999년 기술위원장에 올랐다.[78] 이후 2000년 전북 현대 다이노스의 기술고문 겸 스카우트로 위촉되어 박동혁 등을 영입하기도 했으며,[79][80] 2001년 7월 성적 부진으로 최만희가 경질되어 감독이 공석이 되자 대행을 맡았다.[81] 부임 후 3경기만에 첫 승을 올리는 등 4개월여간 2승 6무 6패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였고,[82] 그 해 11월 신임 감독으로 조윤환이 선임되자 기술고문으로 복귀했다.[83] 그 뒤 2003년 9월 V리그 승격을 확정지은 빈즈엉 FC 감독직에 올랐으며,[84]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팀을 지휘하였으나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며 8라운드인 테 꽁 FC와의 홈 경기에서 0-1로 패배한 직후 감독에서 물러나 기술고문으로 옮겼다.[85] 하지만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된 마이응옥코아 또한 부진한 성적을 거두어 16라운드 종료 후 경질된 이후 남대식은 다시 기회를 얻어 감독으로 복귀하였지만,[86] 분위기 반전에 실패하며 결국 시즌이 끝난 이후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2007년까지 한국중등축구연맹의 부회장을 지내며 2006년 '한국중등연맹회장배 국제친선 축구대회' 신설에 관여했으며,[87][88] 그 해 '전북 축구인의 밤' 행사에서 전북축구협회장 공로패를 수상하였다.[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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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2018년 3월 2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91] 고려대학교 감독 시절 제자 중 한 명이었던 김대의는 직후인 3월 26일 있었던 수원 FC부천 FC 1995와의 K리그2 경기에서 검은색 정장을 입고 나오며 조의를 표했다.[92]

기타

1988년 대한민국 내의 대학교 중 처음으로 고려대학교에서 개설된 '스포츠 여름교실'에 강사로 참여했으며,[93] 1994년 고려대학교에서 마련한 '바른교육 큰사람 만들기 국민 성금' 운동에 동참하였다.[94]

1994년 개최된 고려대학교 '메달리스트의 밤' 행서에 참석했으며,[95] 얼마 뒤 열린 고려대학교 '체육인의 날'에서는 '자랑스러운 고려대 출신 체육인'으로 선정되어 지도자상을 수상하였다.[96]

2000년에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던 남북 단일팀의 다른 임원들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탈북윤명찬에게 성금을 전달하였다.[97]

2014년 이혜훈새누리당 서울시장 예비 후보로 나왔을 당시 지지 의사를 발표하기도 했다.[98]

선수 및 지도자 기록

클럽

국가대표팀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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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경력

클럽

국가대표팀

감독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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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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