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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군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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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군(南陽郡)은 중국의 옛 군현제의 군이다. 군의 치소는 완현(지금의 난양 시 완청 구)에 있었고, 한때에는 양성(허난성 덩저우 시)에도 있었다.
진
소양왕(昭襄王) 25년(기원전 292), 백기(白起)가 초(楚)나라를 공격해 완(宛)을 점령하고, 소양왕 35년(기원전 272)에 남양군을 설치했다.[1]
전한
요약
관점
형주자사부에 속했다.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구 35만 9316호, 인구 194만 2051명, 36현을 관할했다. 현대의 난양 시 중부와 동부, 샹양 시 북부, 쑤이저우 시 일대의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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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왕망은 남양의 이름을 전수(前隊)로 고쳤으며, 또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신나라 말기, 정정이 혼란해져 여기저기 반란군이 일어나고, 인근 강하군에서 녹림군이 일어났다. 녹림군은 근거지에 역병이 돌자 이를 피해 흩어졌고, 이들 중 이 전수군(前隊郡)에 자리를 잡은 무리를 신시병(新市兵)이라고 일컫는다. 한편 채양현 사람으로 전한의 종실인 유연이 거병해 용릉병을 일컫고 녹림군에 가담했으며, 유연의 부름에 응해 한데 모인 녹림군은 마침내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를 무찔러 죽이고 한 경시제를 황제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경시제 정권이 몰락한 이후, 이 군의 축양현 출신 군벌 연잠이 원래의 세력인 한중에서 밀려나 관중을 거쳐 이 군의 몇 현에서 할거하고 광무제와 싸웠으나 패퇴해 공손술의 세력권이 된 한중으로 달아났다.
후한
37성, 52만 8551호, 243만 9618명이 있었다.
건안(建安) 13년(기원전 207), 조조(曹操)가 형주를 손에 넣고 남군의 서쪽을 갈라내어 남향군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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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14현 24,400호를 거느렸다.[11] 영가의 난시기 전조의 창업자 유연이 행한 원정으로 평양군, 하동군, 홍농군, 상당군의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하남군, 영천군, 양성군, 여남군과 본군에 정착했다. 하지만 이들은 토착민들에게 온갖 멸시를 받았고 이에 불만을 품은 유랑민들이 남양군, 영천군, 양성군, 여남군, 하남윤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미의 반란에 호응했다.[12]
동오 멸망 후, 남양군을 분할하여 의양군을 분리신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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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
유유가 후진을 정복하고 획득한 중원, 관중일대를 포기하면서 그 지역의 주민들이 남양군 일대에 정착했다. 때문에 관중, 중원에 있던 여러 군현들이 본군지역에 교치되면서 군역이 축소되었고, 형주에서 옹주로 소속이 바뀌었다. 한편, 강하군등지에 살던 남만종족이 영가의 난이후 혼란기를 틈타 남양군 지역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여러차례 남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유송말의 기준으로 남양군은 7현 4,727호 38,132명을 거느렸다.[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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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개황 초기 주현제가 실시되면서 등주(鄧州)가 설치되었고, 양제 때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등주가 남양군으로 바뀌었다. 8현 77,520호를 거느렸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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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태수
전한
신
후한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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