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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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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군(河南郡)은 중국 한나라에서부터 당나라까지 존속한 군으로, 전국 시대와 진나라에서는 삼천군(三川郡, 參川郡)이라 했다. 후한에서는 서울 낙양을 관할하면서 하남태수 대신 하남윤(河南尹)을 두었다.
전국·진
요약
관점
한선혜왕이 삼천군이란 이름으로 처음 설치했다. 이 이름은 군에 황허·뤄허·이수(伊水) 세 강이 있는 데서 비롯한다.[1] 기원전 249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해 한나라가 성고와 공 땅을 바치면서 진나라에서 삼천군을 재설치했다.[2] 치소는 낙양현이다. 유물과 문헌에서 확인되는 속현은 다음과 같다.[3]
이 중 초현은 위나라에서 진나라가 탈취한 것으로 보인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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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요약
관점
진나라 멸망 후에는 항우의 십팔제후왕 중 신양이 분봉된 하남나라였다. 고제가 신양의 항복을 받아 하남나라를 병합하고서 그대로 군으로 전환했다.[4]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27만 6444호, 174만 279명, 22현을 관할했다.[5] 하동군·하내군과 함께 삼하(三河)라 하여, 주에 속하지 않고 사례교위의 관할을 받았다.[6]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지리지의 내용이다.[7] 원연·수화 연간으로 여겨지며, 일반적으로 첫 현이 군국의 치소로 간주된다. 현대의 뤄양 시 동부와 덩펑 시를 제외한 정저우 시 대부분을 관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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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천봉 3년(16년), 따로 군을 두지 않고 특수한 관직(경조윤·좌풍익·우부풍)의 관할지로 둔 전한의 삼보처럼, 보충신경(保忠信卿)이라는 특수한 관직을 두어서 기존 이 군이 관할하는 현을 다스리게 했다.[8][9]
속현 중 형양(滎陽)을 떼어내어 기수군(祈隧郡)을 설치하였고, 진류군을 해체시켜 진류현(陳留縣) 이서를 기수군에 편입시켰다.[8]
후한
요약
관점
건무 15년(39년)에 하남윤으로 개칭했다. 하남윤은 서울인 낙양을 관할했으며 다른 태수들보다 한 급 높은 중이천석에 해당했다.[10] 영화 5년(140년) 기준으로 28만 486호, 110만 827명이 있었다. 사예교위부에 속했다. 현의 순서는 《속한서》 군국지를 따르며, 첫 현이 태수의 치소다. 190년(초평 원년) 십상시의 난을 진압한 뒤 정권을 잡은 동탁이 낙양성을 불태우고 군역의 상당수가 군벌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되면서 크게 황폐화되었다. 196년(건안 원년)헌제 탈출전을 성사시켜 헌제를 비롯한 황실과 중앙 관료들을 장안에서 탈출시킨 조조가 황폐화된 낙양을 대신하여 영천군의 허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220년 조비가 낙양으로 수도를 옮길때까지 완전히 버려졌다. 213년(건안 18년), 조조가 위공에 오르면서 전국을 13주에서 9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사예교위부가 없어져 예주자사부 관할로 들어갔으며, 형양도위가 떨어져나왔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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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
220년 12월 10일,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세우게 된 조비가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재건되었다. 영천군으로부터 양적현(陽翟縣)이, 홍농군으로부터 육혼현(陸渾縣)이 본윤으로 이관되었다. 서진 건국이후 266년(태시 2년) 하남윤 동부지역의 옛 형양도위 지역이 형양군으로 분리신설되면서 군역이 축소되었다. 영가의 난시기 한나라의 황제 유연이 보낸 유총의 군대, 석륵, 왕미의 공격을 받으면서 식인이 행해지는 등 황폐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311년 4월, 유총이 낙양을 함락시키면서 전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1현 114,400호를 거느렸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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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태수
진
- 이유(李由, ? ~ 기원전 208년)
전한
경시 정권
- 무발(武勃)
후한
- 정홍(25년 ~ ?)
- 마황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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