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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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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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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3세(Ramesses III, ? - 기원전 1154년)는 이집트 제20왕조의 제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1186년부터 기원전 1155년 까지이다.

간략 정보 사망, 성별 ...

재위 기간 도중 바다 민족이 침공해오자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였으며,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 과정에서 이집트 문명이 파괴되는 것을 저지하였다.[1]

사인은 암살로 왕비 3명 중 한 명인 티예(Tiye)가 자신의 아들인 펜타웨레트(Pentaweret, 본명이 아닌 가명이다)를 차기 파라오로 즉위시키기 위해 벌인 것이었다. 펜타웨레트는 각지의 관료들을 선동하여 음모에 끌여들였고 하렘 관리자, 시종관, 보물 담당관들까지 포섭했다. 두 모자는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궁전의 하렘을 암살 장소로 정했고, 람세스 3세가 거기 있던 때를 노려 암살을 거행했다.

람세스 3세의 미라를 검시한 결과 목 뒤쪽으로 식도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고, 잘려나간 엄지발가락 부위에서 뼈가 재생된 흔적이 전혀 없어서 암살 직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람세스 3세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한 왕족이 선수를 쳐 왕궁을 장악했고 뒤이어서 왕세자가 테베로 들어와 음모자들을 전부 체포하면서 모자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람세스 3세가 사망하고 람세스 4세가 즉위한 뒤에 신하들 중에서 12명을 골라 수사관으로 임명해 음모자들을 수사하고 재판에 회부하여 총 28명을 사형에 처했는데, 이 재판의 진행과 결과를 기록한 문서가 토리노 법정 파피루스다. 주도자들 중 펜타웨레트는 왕족이라서 유일하게 자살을 허락 받아 목을 메는 방식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람세스 3세의 무덤 근처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불결하게 여긴 염소 가죽에 싸였으며 자연건조된 시신 한 구가 발굴되었는데 유전자 검사 결과 람세스 3세와 부계 하플로그룹 및 상당수의 유전자가 일치해서 펜타웨레트로 확실시되고 있다. 여기에 시신의 사인이 목을 메어 죽은 것으로 나와 더욱 유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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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의 연관성

요약
관점

아바리스와 고대 이집트의 셈족 연구 최고 권위자인 멘프레드 비탁 교수와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한 권위자 중 한 명인 게리 A. 렌즈버그 교수는 출애굽의 파라오를 람세스 3세로 보고 있고 초기 이스라엘인들의 유전자 풀에 포함되는 에돔(또는 세일)의 샤수(Shasu)들이 해리스 파피루스에서 람세스 3세에 의해 이집트로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이들이 가나안에 있던 이스라엘 족속에게 탈출기 전승을 가지고 왔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 실제로, 람세스 3세의 메디넷 하부(Medinet Habu) 신전에서 이스라엘 출신의 노동자가 세운 집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람세스 3세 또는 람세스 4세의 치세 시절 당시 이스라엘인이 애굽에서 노예로서 있었음을 입증한다[2].

물론, 다른 학자들은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파라오람세스 2세로 추정하며, 그보다 2세기 앞선 아멘호테프 2세로 추정하기도 한다.[3] 참고로, 중왕국 시대를 출애굽기의 배경으로 하는 소수설 역시 과거에 등장했었다.[4]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기원전 17세기로 보는 사마리아인들의 연대기에 부합하기는 하지만,[5] 성서의 전통적 연대기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과 해당 가설이 수정 연대기를 통하여 중왕국 시대를 기원전 15세기로 보았다는 문제점이 있으며, 이집트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거부되는 가설이다.[6]

출애굽을 고왕국 시대의 사건으로 보는 이들 역시 존재한다.[7] 수정연대기[8]를 사용하여 고왕국 시대를 기원전 15세기까지 낮추거나 출애굽부터 성전의 건립일까지의 기간이 480년이 아니라 1480년[9]이나 그 이상으로 보아 출애굽을 기원전 26-25세기 무렵, 즉, 고왕국 시대의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해당 설에서는 예리코와 아이(Et Tell)가 기원전 26-25세기에 파괴를 경험했다는 것,[10][11] 하솔이 기원전 2500년 무렵부터 기원전 2300-2200년까지 버려져 있었다는 것,[12] 그리고 MacGregor plaque, 제1왕조의 파라오 카아의 Abydos ivory tablet를 통해 고왕국 시대 이전부터 셈족 유목민들이 이집트로 노예나 포로로 끌려왔었다는 것 등이 근거로써 작용한다. 베냐민 부족(Binu-Jamina)이 이집트 제11-12왕조 시절인 고바빌로니아 왕국 시절(기원전 2000-1595년) 초기의 기록에서 메소포타미아를 위협하는 강렵한 유목민 부족으로 등장하고 심지어 우루크의 왕인 신카시드 왕(기원전 1801년 ~ 기원전 1771년)이 해당 부족 출신으로 기록된다는 것[13]은 적어도 출애굽이 기원전 2000년대 무렵보다는 이전에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들은 요셉은 제3왕조의 파라오 조세르의 재상이자 최초의 피라미드를 세운 임호텝과 동일시한다. 참고로, 아랍 전통에서는 출애굽 당시 바로의 신하의 이름을 하만으로 언급하며, 그는 주로 기원전 26세기의 파라오인 제4왕조의 쿠푸의 신하이자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세운 건축가 헤몬/헤미우누(Hemon/Hemiunu)로 식별되곤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보면, 출애굽은 쿠푸의 치세 동안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14] 또한, 제3왕조와 제4왕조 모두 아직 이집트에 전차나 말이 없었던 시절이지만, 성서 속 전차, 병서, 말 등에 대한 언급은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의 성서 명화에서 성서 속 인물들이 유럽인의 복장이나 아랍인의 복장 등 당시의 복장과 물건들과 함께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로 볼 수 있다. 구전되던 전승이 사본에 적히게 되거나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사본이 새로운 사본으로 옮겨지던 과정에서 시대에 맞춰 독자들과 청자들을 위해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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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참고 문헌

  • Eric H. Cline and David O'Connor, eds. Ramesses III: The Life and Times of Egypt's Last Hero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12) 560 pages; essays by scholars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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