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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페킨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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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소프 페킨포(영어: Roger Thorpe Peckinpaugh, 1891년 2월 5일~1977년 11월 17일)는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유격수였다. 1910년부터 1927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의 클리블랜드 냅스, 뉴욕 양키스, 워싱턴 세너터스,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뛰었다.
페킨포가 고등학생이었을 당시 그의 재능을 발견한 냅 라조이와 첫 프로 계약을 맺었다. 페킨포는 클리블랜드 냅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지만, 1913년에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되었다. 1914년에는 소속팀 양키스의 감독을 맡아 20경기를 지휘했으며, 이후 타팀으로 이적하기 전까지 양키스의 주장을 맡았다. 1922년에 워싱턴 세너터스가 그를 영입했으며, 페킨포는 1927년에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후 1928년부터 1933년까지, 그리고 1941년 1년 동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감독을 맡았다.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팀의 감독도 역임했으며, 1942년부터 1947년까지는 인디언스와 버펄로 바이슨스에서 구단 프런트로도 일했다.
페킨포는 뛰어난 수비력을 갖춘 유격수이자 더그아웃을 이끄는 리더로 평가받았다. 양키스 감독에 재직할 당시에는 MLB 역사상 가장 나이가 어린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1925년에는 아메리칸 리그(AL)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3시즌 동안 월드 시리즈에 출전했는데, 워싱턴 세너터스 소속으로 1924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양키스 시절이던 1921년 월드 시리즈와 역시 세너터스 시절이던 1925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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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과 아마추어 경력
로저 페킨포는 미국 오하이오주 우스터에서 프랭크와 코라 페킨포 부부의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세미프로 야구 선수로 뛴 경험이 있었다.[1]
페킨포가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우스터에서 클리블랜드로 이주했다. 페킨포는 이스트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미식축구, 농구, 야구 등 여러 스포츠를 했고,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클리블랜드 냅스의 냅 라조이가 그를 발견했다.[1] 그렇게 라조이는 190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페킨포와 월급 125달러(오늘날 화폐 가치로 4,218달러)에 계약을 맺었다.[1]
프로 경력
요약
관점
클리블랜드 냅스와 뉴욕 양키스 (1910~1921)


클리블랜드 냅스 구단은 페킨포를 클래스 B 코네티컷 리그 팀 뉴헤이븐 프레리헨스로 내려보냈고, 페킨포는 그곳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19세이던 1910년 9월에 메이저 리그의 부름을 받아 냅스 소속으로 19경기를 뛰었다. 다음해 냅스는 페킨포를 클래스 A 퍼시픽 코스트 리그 팀 포틀랜드 비버스로 보냈고, 페킨포는 그곳에서 시즌 전부를 소화했다.[1][2] 페킨포는 1912년 냅스 소속으로 70경기에 출전했으며, 그해 메이저 리그에서 기록한 시즌 타율은 .212에 불과했다. 1913년 시즌에 들어서 레이 채프먼이 팀의 유격수 주전으로 자리잡자, 냅스는 페킨포를 뉴욕 양키스로 보내고 잭 릴리벨트와 빌 스텀프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3]
하지만 냅스 구단은 얼마 안 되어 이 트레이드를 후회할 수밖에 없었는데,[3] 소속팀을 양키스로 옮긴 페킨포는 선수단을 이끄는 리더 역할을 하며 1914년에는 프랭크 챈스 감독의 추천으로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1] 한편 같은 해 시즌 종료 3주를 앞두고 챈스 감독이 사임하면서, 페킨포는 남은 시즌 동안 선수 겸 감독 역할을 맡았다.[4][5] 당시 23세에 불과했던 페킨포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나이가 어린 감독으로 기록되었다.[1] 1914년, 페킨포는 38도루로 이 부문 AL 5위에 올랐다.[6]
오프 시즌에 빌 도너번이 양키스의 차기 사령탑으로 부임 했으며, 같은 기간 페킨포는 시카고 페더럴스, 버펄로 블루스, 인디애나폴리스 후시어스 등의 구단에서 영입 제안을 받으면서 양키스를 떠나 페더럴 리그로의 이적을 고려했다.[7] 그중에서도 시카고 페더럴스로의 이적을 염두에 뒀지만,[8] 끝내 양키스에 남기로 하고 1915년부터 1917년까지 매년 6,000달러(오늘날 화폐 가치로 186,493달러)를 받는 3년짜리 계약을 맺었다.[1] 그리고 1918년에도 양키스 구단과 재계약을 맺었다.[9] 1919년 시즌에는 89득점으로 벅 위버와 함께 AL 득점 부문 공동 4위, 7홈런으로 이 부문에서 다른 네 명의 선수와 함께 AL 공동 8위에 이름을 올렸다.[10]
1915년에 제이콥 루퍼트와 틸링해스트 로메듀 휴스턴이 양키스 구단을 인수한 후, 1921년 시즌까지 팀에 남아 있던 선수는 페킨포를 비롯해 월리 핍, 밥 쇼키를 포함해 세 명 뿐이었다.[11] 뉴욕 양키스는 1921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뉴욕 자이언츠에게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중 페킨포는 시리즈 1차전에서 9개의 어시스트로 메이저 리그 단일 경기 최다 어시스트라는 기록을 세웠다.[12]
워싱턴 세너터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 (1922~1927)

1921년 시즌이 끝나고 페킨포는 두 차례 트레이드되었다. 1921년 12월 20일, 뉴욕 양키스는 페킨포와 립 콜린스, 빌 피어시, 잭 퀸, 10만 달러(오늘날 화폐 가치로 1,762,873달러)를 보내고 보스턴 레드삭스의 불릿 조 부시, 새드 샘 존스, 에버렛 스콧을 데려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1][13]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22년 1월 10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워싱턴 세너터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가 참여한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는데, 페킨포는 세너터스로, 조 듀간과 프랭크 오로크는 레드삭스로 이적했으며, 애슬레틱스는 빙 밀러, 호세 아코스타, 5만 달러(오늘날 화폐 가치로 939,264달러)를 받았다.[1][14] 클라크 그리피스 세너터스 구단주는 트레이드 당시 페킨포에게 선수 겸 감독의 역할을 맡기겠다는 의견을 내비쳤으나,[15] 그 대신에 클라이드 밀린에게 1922년 시즌 팀의 선수 겸 감독 자리를 맡겼다.[16]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 부상까지 겹치면서 페킨포는 예년에 비해 저조한 경기력을 보였다.[1]
한편 양키스 시절 페킨포와 사제 관계였던 프랭크 챈스 감독은 1923년에 레드삭스 감독을 맡았는데, 시즌 개막 전에 페킨포를 자신의 팀에 데려오려고 시도했다.[17] 그럼에도 세너터스에 남은 페킨포는 그해 득점권에서 팀에 필요한 타격과 안정된 수비로 부진을 털고 반등했다.[18]
1924년 시즌을 앞두고 그리피스 구단주는 버키 해리스를 세너터스의 감독으로 임명했다. 해리스 감독은 페킨포를 사실상의 부감독으로 신임했다.[1] 소속팀 세너터스가 뉴욕 자이언츠와 꺾고 우승을 차지한 1924년 월드 시리즈에서도 페킨포는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19] 1925년에는 알 시먼스를 근소한 차이로 제치고 당시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에게 수여하는 리그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20] 소속팀 세너터스가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맞붙은 1925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7경기에 모두 출전해 8개의 실책을 저질렀는데, 이는 메이저 리그 단일 월드 시리즈 최다 실책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21]
1927년 1월 15일, 워싱턴 세너터스는 페킨포를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보내고 리오 망검과 슬로피 서스턴을 데려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22] 하지만 시즌에 접어든 이후 페킨포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2] 대신 페킨포는 레이 샬크 화이트삭스 감독을 보좌하는 자문 역할을 했다.[23] 그렇게 화이트삭스에서 한 시즌을 소화한 후 페킨포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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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및 구단 프런트 경력
1927년 시즌이 끝난 후, 페킨포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2] 1933년 시즌 중 팀 순위가 1위에서 5위로 곤두박질치면서, 인디언스 구단은 페킨포 감독을 경질했고, 그 자리를 현역 시절 투수 출신이었던 월터 존슨으로 교체했다.[24]
페킨포는 1933년 시즌 말미에 공석이었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을 맡을 인물 중 한 명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25] 대신 1934년 시즌을 앞두고 클래스 AA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팀 캔자스시티 블루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26] 이듬해인 1935년부터는 몸담고 있던 프로 야구계를 잠시 떠나 루 폰세카와 함께 야구 영화를 상영하고 기술 시범을 선보이는 전국 순회 투어에 동참했다.[27][28] 1937년 시즌이 끝난 후에는 보스턴 비스의 감독 자리에 지원했지만 떨어졌고, 그 자리에는 케이시 스텡걸이 임명되었다.[29] 페킨포는 1939년에 클래스 A1 서던 어소시에이션 팀 뉴올리언스 펠리컨스의 감독을 맡으면서 프로 야구계로 복귀했다.[30]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단은 1941년에 페킨포와 2년 계약을 맺으며 다시 감독으로 데려왔다. 1933년에 이미 페킨포를 감독직에서 경질한 바 있는 앨바 브래들리 회장은 페킨포에게 전폭적인 지원과 간섭 최소화를 약속했다.[31] 1941년 시즌 종료 후 페킨포는 팀의 부회장을 맡게 되었고,[32] 이후 인디언스 구단의 단장과 회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1] 1946년 7월 빌 벡이 인디언스 구단을 인수하며 팀에 해리 그래비너와 조지프 C. 호스텔러를 구단 프런트로 데리고 왔는데, 이에 페킨포와 브래들리는 사임했다.[33]
페킨포는 1946년과 1947년 사이 비시즌 기간에 해리스의 뒤를 이어 인터내셔널 리그 버펄로 바이슨스의 단장으로 임명되었다.[34] 하지만 1947년 시즌 종료 후 경질되었는데,[35] 구단 이사회는 페킨포가 팜 시스템을 충분히 구축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36]
개인사
페킨포는 화를 잘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성격의 선수이자 감독으로 평가받았다.[37]
페킨포는 야구계를 완전히 떠난 후에 클리블랜드 오크 벨팅 컴퍼니의 제조업체 대표로 근무했다.[1] 1976년에 85세의 나이로 은퇴했으며, 암과 심장병을 앓다가 호흡기 질환으로 병원에 이송되어 1977년 11월 17일에 클리블랜드에서 사망했다.[21] 페킨포의 시신은 오하이오주 메이필드하이츠에 있는 아카시아 메이소닉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되었다.[38] 그의 아내인 밀드레드는 그보다 5년 앞서 세상을 떠났으며,[1] 두 사람 사이에는 네 아들이 있었다.[39] 사망 당시에는 두 아들이 생존해 있었다.[1]
기록
선수 기록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감독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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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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