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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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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코(Rococo 또는 Roccoco, /rəˈkoʊkoʊ/, 프랑스어 발음: [ʁɔkɔko] ) 또는 후기 바로크는 비대칭, 소용돌이치는 곡선, 금박, 흰색 및 파스텔 색상, 조각된 몰딩, 트롱프뢰유 프레스코화 등을 결합하여 놀라움과 움직임, 드라마의 환상을 창조하는 매우 장식적이고 극적인 건축, 미술 및 장식 스타일이다. 이는 종종 바로크 운동의 마지막 표현으로 묘사된다.[1]
원래 "로카이유 양식"[2]으로 알려진 로코코는, 형식적이고 기하학적인 루이 14세 양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173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곧 이탈리아 북부, 오스트리아, 독일 남부, 중앙유럽, 러시아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3] 또한 조각, 가구, 은세공, 유리세공, 회화, 음악, 연극,[4] 문학을 비롯한 다른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5] 비록 원래는 주로 개인 주택의 실내에 사용되는 세속적인 양식이었지만, 로코코는 영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특히 중앙유럽, 포르투갈, 남아메리카 교회의 실내 장식에 널리 사용되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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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

로코코(rococo)라는 단어는 피에르 모리스 케이(1777–1803)가 로카이유(rocaille)라는 단어를 유머러스하게 변형하여 처음 사용하였다.[7][8] 로카이유는 원래 조약돌, 조개껍데기, 시멘트를 사용한 장식 기법으로, 르네상스 시대부터 종종 동굴이나 분수를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다.[9][10] 17세기 말과 18세기 초가 되면서, 로카이유는 루이 14세 양식 후기에 아칸투스 잎과 조개껍데기가 얽힌 형태의 장식 모티프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1736년, 디자이너이자 보석상인 장 몽동(Jean Mondon)은 가구 및 실내 장식용 디자인 모음집인 《로카이유 양식과 카르텔에 관한 첫 번째 책》을 출판했는데, 로카이유라는 용어가 인쇄물에 처음 등장한 사례였다.[11] 이 양식은 조각되거나 주형된 조개껍데기 모티프를 야자 잎이나 꼬불꼬불한 덩굴과 결합하여, 문, 가구, 벽 패널 등의 건축 요소를 장식했다.[12]
로코코라는 용어는 1825년 인쇄물에 처음 등장하여 "구식이고 고풍스러운" 장식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1828년에는 "꼬불꼬불한 장식이 과도하게 많은 18세기의 양식"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1829년, 작가 스탕달은 로코코를 "18세기의 로카이유 양식"이라고 묘사했다.[13]

19세기에 이 용어는 지나치게 장식적인 건축이나 음악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14][15] 19세기 중반 이후, 이 용어는 미술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이 양식의 역사적 중요성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로코코는 이제 다른 양식과는 구별되는 유럽 미술 발전의 한 시기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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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로코코는 풍부한 곡선, 역곡선, 물결 등의 자연을 본뜬 요소를 가진 화려한 장식을 특징으로 한다. 로코코 건축물의 외관은 종종 단순하지만, 내부는 장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양식은 매우 연극적인 성격을 띄며, 처음 보는 순간 놀라움, 경외감, 경이로움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16] 교회의 평면도는 종종 복잡하고, 서로 얽힌 타원형을 특징으로 한다. 궁전에서는 웅장한 계단이 중심 요소가 되어 다양한 각도에서 장식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1] 로코코의 주요 장식 요소에는 비대칭 조개껍데기, 아칸투스 및 기타 잎사귀, 새, 꽃다발, 과일, 악기, 천사, 그리고 시누아즈리 (불탑, 용, 원숭이, 기이한 꽃, 중국인) 등이 있다.[17]
이 양식은 종종 주형된 스투코, 목각, 그리고 환상적인 천장화를 말하는 트롱프뢰유의 일종인 콰드라투라를 통합하여, 방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천장이 아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큐피드 등의 신화적 인물들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연출했다. 사용된 재료로는 채색되거나 흰색으로 남겨진 스투코, 다양한 색상의 나무 (주로 오크, 너도밤나무, 호두나무)의 조합, 일본식 칠기 나무, 금도금 청동, 대리석 등이 사용되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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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와 로코코의 차이점
로코코는 바로크에는 없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로카이유 양식, 즉 프랑스 로코코는 루이 15세 통치 기간 중 파리에서 나타났으며, 1723년경부터 1759년까지 번성했다.[21] 프랑스 로코코의 특징은 탁월한 예술성과 복잡한 디자인으로 얽힌 식물 형태(덩굴, 잎, 꽃)를 사용하는 것이다.[22] 이 양식은 특히 손님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하기 위해 설계된, 새로운 유형의 방인 살롱에서 사용되었는데, 가장 두드러진 예는 제르맹 보프랑과 샤를 조제프 나투아르가 1735년에서 1740년 사이에 설계한 파리 오텔 드 수비즈의 공주 살롱이다.
이 시대의 가구 역시 양식의 특징인 구불구불한 곡선과 식물 문양을 특징으로 하는데, 특히 거울과 그림 액자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 액자들은 석고로 조각한 후 금박을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양식의 주요 가구 디자이너이자 장인으로는 쥐스트 오렐 메이소니에, 샤를 크레상, 니콜라 피노 등이 있었다.[23][24]
프랑스 로코코는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의 화려함에는 미치지 못했다. 18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던 로코코 양식은, 1738년 헤르쿨라네움과 1748년 폼페이에서 로마 유물이 발견되면서 더욱 대칭적이고 덜 화려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 제르맹 보프랑이 설계한 파리 오텔 드 수비즈 살롱 (1735–1740)
- 쥐스트 오렐 메이소니에의 탁자 디자인 (1730)
- 오텔 드 수비즈의 왕자 그랜드 챔버 (1735–1740)
- 니콜라 피노의 오텔 드 바랑제빌 목공예 (1735)
- 샤를 크레상의 서랍장 (1730), 와데스던 매너
- 파리 오텔 드 사무엘 베르나르 문 세부 (1740년대)
- 보르도 노트르담 성당 (1684–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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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의 예술가들은 로코코 양식을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베네치아의 서랍장은 프랑스 로카이유 양식의 곡선미와 조각 장식을 모방했지만, 베네치아 특유의 변형을 가했다. 이 가구들은 종종 파란색이나 녹색 배경에 구아르디 또는 다른 화가들의 영감을 받은 풍경화, 꽃, 장면, 또는 시누아즈리가 그려졌다. 이는 살롱을 장식하는 베네치아 화파 화가들의 작품 색상과 어울렸다.
주목할 만한 장식 화가로는 콰드라투라 방식으로 카 레초니코의 무도회장 천장을 그린 조반니 바티스타 크로사토와, 교회와 궁전을 위한 천장화와 벽화를 그린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가 있었다. 티에폴로는 1750년부터 1753년까지 자신의 아들과 함께 독일을 여행하며 바이에른 로코코의 주요 랜드마크 중 하나인 뷔르츠부르크 공관의 천장을 장식했다. 또 다른 유명한 베네치아 화가로는 여러 주목할 만한 교회 천장화를 그린 조반니 바티스타 피아체타을 들 수 있다.[25]
베네치아 로코코는 또한 특별한 유리 제품, 특히 종종 조각되고 채색되어 유럽 전역으로 수출된 무라노 유리를 특징으로 했다. 다채로운 색상의 샹들리에와 매우 화려한 액자를 가진 거울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었다.[25]
- 산티 조반니 성당 천장화, 피아체타 작 (1727)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유노와 루나》 (1735–1745)
- 조반니 바티스타 크로사토의 천장화가 있는 카 레초니코 무도회장 천장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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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독일
요약
관점
남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로코코 장식 양식이 1730년대부터 1770년대까지 정점에 달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교회 경관을 지배하며 대중문화에 깊이 뿌리내렸다. 이 양식은 조각가 클로드 3세 오드랑, 실내 디자이너 질마리 오프노르트, 건축가 제르맹 보프랑, 조각가 장 몽동, 제도사이자 판화가 피에르 르포트르 등의 프랑스 건축가 및 장식가들의 출판물과 작품을 통해 독일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들의 작품은 독일 로코코 양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남독일 건물들의 사치스러움에는 미치지 못한다.[26]
독일 건축가들은 로코코 양식을 원래의 프랑스 양식보다 훨씬 더 비대칭적이고 화려하게 변형시켰다. 독일 로코코 양식은 벽면을 따라 폭포처럼 쏟아지는 듯한 형태를 폭발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곡선과 반곡선으로 형성된 몰딩, 뒤틀리고 구불구불한 패턴, 그리고 벽과 천장을 기어 올라가는 듯한 스투코 잎사귀가 돋보인다. 장식은 종종 흰색 또는 옅은 파스텔 벽과 대비를 이루도록 금박 또는 은박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27]
독일 최초의 로코코 건축물 중 하나인 뮌헨의 아말리엔부르크 파빌리온(1734~1739)은, 벨기에 태생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프랑수아 드 퀴빌리에가 프랑스의 그랑 트리아농과 말리성 파빌리온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하였다. 이 건출물은 지붕에 꿩 사냥용 플랫폼이 있는 사냥 숙소로 지어졌다. 화가이자 스투코 조각가인 요한 밥티스트 침머만이 만든 거울의 방은 프랑스의 어떤 로코코 양식보다 훨씬 정교하다.[28]
초기 독일 로코코 양식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예는 요한 필리프 프란츠 폰 쇤보른 주교 공작이 의뢰한 뷔르츠부르크 공관(1720~1744)이다. 궁전 건설 초기, 궁정 건축가 발타자어 노이만은 파리를 방문하여 프랑스 로카이유 장식 예술가인 제르맹 보프랑과 로베르 드 코트와 협의했다. 궁전의 외관은 보다 엄숙한 바로크 양식이지만, 내부, 특히 계단과 천장은 훨씬 더 화려하다. 노이만은 이 공관의 내부를 "빛의 극장"이라고 묘사했다. 1750년부터 1753년까지 이탈리아 로코코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가 초빙되어 3층짜리 의례용 계단 꼭대기에 벽화를 그렸다.[29][30][31] 노이만은 또한 브륄의 아우구스투스부르크성(1725~1768)에 있는 상징적인 로코코 양식 계단을 설계했는데, 이 계단은 방문객들을 그림, 조각, 철공예의 환상적인 세계로 이끌며 매 굽이마다 놀라운 경치를 선사한다.[29]
1740년대와 1750년대에는 바이에른에 독특하게 변형된 로코코 양식으로 내부를 장식한 순례 교회가 여러 군데 건설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예 중 하나는 도미니쿠스 침머만이 설계한 비스 교회(1745–1754)이다. 대부분의 바이에른 순례 교회와 마찬가지로 외관은 파스텔톤 벽과 최소한의 장식으로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예술과 형태의 놀라운 조화가 펼쳐진다. 서쪽으로 반원형 전실이 있는 타원형 성소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교회를 가득 채운다. 흰색 벽은 성가대석의 파란색과 분홍색 스투코 기둥과 대비를 이루며, 돔형 천장은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열린 하늘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다른 주목할 만한 바이에른 순례 교회로는 발타자어 노이만의 14성인 성당(1743–1772)과[32][33] 요한 미하엘 피셔의 오토보이렌 수도원(1748–1766)이 있는데, 이 수도원들은 대부분의 독일 로코코 건축들처럼, 정면의 규칙성과 내부의 화려한 장식 사이의 놀라운 대비를 특징으로 한다.[29]
- 프랑수아 드 퀴빌리에의 뮌헨 아말리엔부르크 파빌리온 (1734–1739)
- 요한 밥티스트 침머만의 아말리엔부르크 거울의 방 (1734–1739)
- 발타자어 노이만의 브륄 아우구스투스부르크궁 중앙 계단을 올려다본 모습 (1741–1744)
- 도미니쿠스 침머만의 비스 교회 (1745–1754)
- 발타자어 노이만의 14성인 성당 내부 (1743–1772)
- 발타자어 노이만의 뷔르츠부르크 공관 카이저잘 (1749–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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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영국에서는 로코코 양식이 유럽 대륙에 비해 디자인과 장식 예술에 미치는 영향이 적었지만, 은세공, 도자기, 가구와 같은 분야에서는 여전히 그 영향을 느낄 수 있다.
18세기 초 내내 영국 가구는 벌링턴 경과 다른 중요한 예술 후원자들을 위해 디자인한 윌리엄 켄트의 영향 아래 신고전주의 팔라디오 건축 양식이 대세를 이루었다.[23] 그 결과 로코코 양식은 영국에 천천히 전파되었으며, 1730년대에 은세공 장인 폴 드 라메리를 포함한 프랑스 이민 예술가와 위그노 난민들의 작품을 통해 처음 등장했다. 또한 1735년 윌리엄 호가스가 설립한 세인트 마틴 레인 아카데미는 영국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에게 로코코 양식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4]
로코코 양식 영국에서 번성한 것은 1740년에서 1770년 사이였다. 프랑스에서 수입되는 상품과 경쟁하기 위해 가구 디자이너들은 목각 장식을 활용하는 독특한 영국 로코코 양식을 개발했다. 이들 디자이너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토머스 치펀데일로, 그의 1754년 저서 《신사 및 캐비닛 제작자를 위한 지침서》는 로코코, 시누아즈리, 고딕 가구 디자인 카탈로그로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35] 프랑스 디자이너들과 달리 치펀데일은 자신의 가구에 상감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상감 가구의 대표적인 디자이너는 조지 3세 국왕의 가구장이었던 바일과 콥이었다. 영국 가구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1761년에 로코코 가구 디자인 카탈로그를 출판한 토머스 존슨이었다. 그의 작품으로는는 중국식 탑으로 장식된 캐노피 침대(현재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를 포함하여 다소 환상적인 중국 및 인도 모티프에 기반한 가구가 있다.[25]
영국 로코코 양식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은 은세공 장인 찰스 프리드리히 칸들러이다.
- 폴 드 라메리 작 은 촛대. 런던 인증, 1747-49년경
- 은세공 장인 찰스 프리드리히 칸더의 화로 (173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토머스 치펀데일의 국빈 침대 디자인 (1753–1754)
- 토머스 치펀데일의 코모드와 램프 스탠드 디자인 (1753–1754)
- 토머스 존슨의 "중국식" 촛대 디자인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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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러시아 로코코 양식은 주로 18세기에 옐리자베타 황후와 예카테리나 2세가 주도하여,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와 같은 궁정 건축가들을 통해 도입되었다.
라스트렐리가 건축한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과 차르스코예 셀로의 예카테리나궁과 같은 궁전 작품들은 서유럽 로코코 건축의 많은 특징을 계승하였다. 실내에는 금박, 거울, 내부의 자연광을 위한 큰 창문으로 장식된 웅장한 방이 있으며, 외관은 부드러운 파스텔 색상에 커다란 창문과 로코코풍의 비대칭 조개껍질이나 바위와 같은 모티프로 장식되어 있다.[37] 천장화는 종종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들과 여신들의 알레고리적 그림과, 이를 둘러싸는 로코코 풍의 소용돌이 무늬 장식이 특징이다.[38] 바닥은 다양한 나무를 상감하여 만든 쪽마루로 장식하여 목공예에 정교한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18세기 내내 러시아 정교회 건축 또한 로코코 디자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종종 같은 거리에 네 개의 날개가 달린 정사각형 그리스 십자가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외관은 파란색과 분홍색과 같은 밝은 파스텔 색상으로 칠해졌으며, 종탑 꼭대기에는 금박을 입힌 양파 돔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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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로코코

프리드리히 로코코는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통치 기간 동안 프로이센에서 발전한 로코코 양식으로, 프랑스, 독일 (특히 작센 선제후국) 및 네덜란드 공화국의 영향을 결합한 형태이다.[40] 가장 유명한 추종자는 건축가 게오르크 벤체슬라우스 폰 크노벨스도르프였다. 또한 화가 앙투안 페슨과 프리드리히 왕 자신도 크노벨스도르프의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 프리드리히 양식의 유명한 건물로는 상수시궁,[41] 포츠담 시 궁전, 그리고 샤를로텐부르크성의 일부가 있다.
쇠퇴와 종말
프랑수아 부셰와 이 시대의 다른 화가들의 작품은 장식적인 신화와 여성과의 열정을 강조하면서 곧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더 "고상한" 주제에 대한 요구를 촉발시켰다. 로코코 양식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계속되는 동안, 로마 아카데미 드 프랑스는 고전 양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는 1738년 장 프랑수아 드 트루아, 1751년 샤를조제프 나투아르이 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잔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여후작도 로코코 양식의 쇠퇴에 일조했다. 1750년 그녀는 오빠인 아벨프랑수아 푸아송 드 방디에르를 이탈리아의 예술 및 고고학적 발전을 연구하도록 2년 간 파견했다. 그는 판화가 샤를니콜라 코생과 건축가 수플로를 포함한 여러 예술가들과 동행했다. 그들은 고전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왔다. 방디에르는 마리니 후작이 되었고, 왕실 건축의 총감독으로 임명되자, 공식 프랑스 건축을 신고전주의로 전환시켰다. 코생은 중요한 미술 비평가가 되어, 부셰의 "쁘띠 스타일"을 비난하고, 회화 및 건축 아카데미에서 고대의 미학과 고귀함을 새롭게 강조하고 웅장한 스타일을 요구했다.[42]
로코코 양식은 1760년대 초 볼테르와 자크프랑수아 블롱델과 같은 인물들이 로코코 예술의 피상성과 퇴폐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종말을 맞기 시작했다. 블롱델은 당대 실내 장식을 "조개껍데기, 용, 갈대, 야자수, 식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뒤죽박죽"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43]
1785년경 프랑스에서는 로코코 양식이 유행이 끝나고, 자크루이 다비드와 같은 신고전주의 예술가들의 질서와 진지함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독일에서는 18세기 후반의 로코코가 "땋은 머리와 가발"로 조롱받았으며, 이 시기를 때로는 꼬꼬양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코코는 일부 독일 지과 이탈리아에서 인기를 유지했으나, 나폴레옹 정부와 함께 "앙피르 양식"이라는 신고전주의의 두 번째 단계가 도래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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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 및 장식
요약
관점
로카이유라고 불리는 장식 양식은 1710년에서 1750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주로 루이 15세의 섭정과 통치 기간 동안 나타났다. 이 양식은 루이 15세 양식이라고도 불렸다. 주요 특징은 그림 같은 세부 묘사, 곡선과 반곡선, 비대칭성, 그리고 연극적인 화려함이었다. 새로운 파리 살롱의 벽에는 일반적으로 금박 또는 채색된 스투코로 만들어진, 뒤틀리고 구불구불한 디자인이 출입구와 거울 주위를 덩굴처럼 휘감았다. 가장 초기의 예 중 하나는 파리의 오텔 드 수비즈(1704–1705)로, 부셰와 샤를조제프 나투아르의 그림으로 장식된 유명한 타원형 살롱이었다.[44]
이 시기 가장 유명한 프랑스 가구 디자이너는 쥐스트오렐 메소니에(1695–1750)로, 그는 조각가이자 화가였으며 왕실의 금세공인이기도 했다. 그는 루이 15세의 의 공식 디자이너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수많은 판화로 제작되어 유럽 전역에 로코코 양식을 널리 알렸고, 오늘날까지도 그의 작품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작센 선제후국과 포르투갈 왕국의 왕실을 위해서도 작품을 디자인했다.
이탈리아 또한 로코코 양식이 번성했던 곳으로, 초기와 후기 모두에서 로마, 밀라노, 베네치아의 장인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가구와 장식품을 제작했다.
- 쥐스트오렐 메소니에의 촛대 (1735–1740)
- 폴란드 바르샤바, 비엘린스키 백작 저택 천장을 위한 메소니에의 아폴로 전차 디자인 (1734)
- 폴란드 바르샤바, 비엘린스키 백작을 위해 메소니에가 디자인한 카나페 (1735)
- 콘솔 테이블, 이탈리아 로마 (1710년경)
조각 장식에는 플루레트, 야자잎, 조개껍데기, 잎사귀 등을 나무에 조각하였다. 가장 화려한 로카이유 형태는 벽에 기대어 세우는 테이블인 콘솔 테이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루이 14세 시대에 처음 등장한 코모드(서랍장) 또는 장롱은 금박 청동으로 만든 로카이유 장식으로 풍성하게 장식되었다. 이들은 장피에르 라츠를 포함한 장인들이 만들었으며, 때로는 밝고 어두운 색상의 나무를 사용하여 체스판 모양의 입체 무늬를 만들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칠과 금박을 입힌 코모드, 특히 프랑스에 이 기법을 소개한 베니스트 베르니 마르탱의 이름을 딴 '팔콘 드 신'이라고 불리는 시누아즈리 양식이 등장했다. 장피에르 라츠와 같은 장인들은 오르몰루(금박 청동)을 사용했다. 라츠는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의 포츠담 궁전을 위해, 카르토니에 위에 장착된 특히 화려한 시계를 만들었다. 종종 살롱에 전시하기 위해 오르몰루 (금박 청동)로 로코코 세팅된 테이블이나 콘솔에 수입된 중국 도자기 를 장착하기도 했다. 일본 칠기 가구를 모방하여 일본 모티프가 있는 코모드를 제작하는 장인도 있었다.[16]
- 베르나르 2세 반 리삼뷔르의 뮌헨 레지덴츠 서랍장 (1737)
-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의 시계 장식장 (1742)
- 금박 청동으로 장식된 중국 도자기 그릇과 두 마리 물고기, 프랑스 (1745–1749)
- 왕실 가구 제작자 장피에르 라츠의 엔코뉴어 ( 1750c.)
- 베르나르 2세 반 리삼뷔르의 시누아즈리 양식 칠기 코모드,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1750–1760)
영국 로코코는 대체로 절제된 경향을 보였다. 토머스 치펀데일의 가구 디자인은 곡선과 느낌을 살리긴 했지만, 프랑스식의 기발함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영국 로코코의 가장 성공적인 대표자는 아마도 18세기 중반 런던에서 활동한 재능 있는 조각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토머스 존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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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요약
관점
로카이유 양식의 요소는 그림같은 세부묘사와 같은 취향을 포함해 일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작품들은, 곡선과 반곡선,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움직임을 풍부함으로 대체한 비대칭성 등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로카이유는 독일 로코코의 사치스러움에 미치지 못했다.[45] 로카유 양식의 대표적인 주창자는 앙투안 바토였는데, 특히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1717, 루브르 박물관)에서 젊은 귀족들이 목가적인 환경에 모여 축하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페트 갈랑트라는 장르를 선보였다. 바토는 1721년 37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그의 작품은 18세기 내내 영향을 미쳤다. 1752년 또는 1765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는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성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바토의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의 한 버전을 구입했다.[45]
장식 회화에서 바토와 페트 갈랑트 양식의 계승자는 잔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여후작의 총애를 받았던 화가 프랑수아 부셰(1703–1770)였다. 그의 관능적인 작품 《비너스의 화장》(1746)은 이 양식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부셰는 태피스트리 디자인, 도자기 조각 모델, 파리 국립 오페라와 오페라 코미크 (파리)의 무대 장식, 그리고 생 로랑 박람회의 장식 등 당시의 모든 장르에 참여했다.[46] 페트 갈랑트 양식의 다른 중요한 화가로는 니콜라 랑크레와 장바티스트 파테르가 있었다. 또한 프랑수아 르무안도 이 양식에 영향을 받아, 1735년에 완성된 베르사유궁의 헤르쿨레스 살롱의 화려한 천장 장식을 그렸다.[45] 파리의 오텔 드 수비즈 (1735–1740)의 유명한 살롱에는 부셰, 피에르샤를 트레몰리에르, 샤를조제프 나투아르의 페트 갈랑트와 신화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이 장식되었다.[46] 다른 로코코 화가로는 장 프랑수아 드 트루아 (1679–1752), 장바티스트 반 로 (1685–1745), 그의 두 아들 루이미셸 반 로 (1707–1771)와 샤를아메데필리프 반 로 (1719–1795), 그의 동생 샤를앙드레 반 로 (1705–1765), 니콜라 랑크레 (1690–1743), 그리고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1732–1806)가 있다.
오스트리아와 남독일에서는 이탈리아 회화가 로코코 양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는 아들 조반니 도메니코 티에폴로의 도움을 받아 뷔르츠부르크 공관(1720–1744)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바이에른 로코코 교회의 가장 저명한 화가는 비스 교회(1745–1754)의 천장을 그린 요한 밥티스트 침머만이었다.
- 앙투안 바토,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 (1717)
- 《햄 저녁 식사》 by 니콜라 랑크레 (1735)
- 프랑수아 르무안의 《헤라클레스 살롱 천장화》 (1735)
- 프랑수아 부셰의《 비너스의 화장》 (1746)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뷔르츠부르크 공관 천장 프레스코화 (1720–1744)
- 요한 밥티스트 침머만의 비스 교회 천장 (1745–1754)
조각
요약
관점
- 안토니오 코라디니의 《베일을 쓴 여인(순수)》 (1722)
- 니콜라세바스티앙 아담의 《프로메테우스》 (1762)
- 장바티스트 르무안의 《베르툼누스와 포모나》 (1760)
- 에티엔모리스 팔코네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1763)
- 클로드 미셸, 《(클로디옹)의 와인의 취기》, 테라코타, 1780년대–1790년대
로코코 조각은 극적이고, 관능적이며, 역동적이어서, 모든 방향으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는 주로 교회의 내부에 발견되었으며, 대개 회화 및 건축과 밀접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종교 조각은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을 따랐는데, 빈의 카를 성당에 있는 극적인 제단화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초기 로코코 또는 로카이유 조각은 루이 14세의 고전적인 양식보다 더 가볍고 역동적이었다. 특히 루이 15세의 정부인 잔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여후작의 영향이 컸는데, 그녀는 자신의 샤토와 정원을 위해 많은 작품을 의뢰하였다. 조각가 에드메 부샤르동은 큐피드가 헤라클레스의 곤봉을 사랑의 화살로 조각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로코코 인물 조각상들은 베르사유궁의 후기 분수들, 예를 들어 람베르시스베르 아담과 니콜라세바스티앙 아담의 넵투누스 분수(1740)에도 많이 등장했다. 베르사유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그들은 1740년대에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의 초청을 받아 상수시궁의 분수 조각을 만들었다.[47]
에티엔모리스 팔코네(1716–1791)는 이 시기 프랑스의 또 다른 주요 조각가였다. 팔코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표트르 1세의 청동기마상으로 가장 유명했으며, 부유한 수집가들을 위해 일련의 작은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테라코타로 재현되거나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장루이 르무안, 장바티스트 르무안, 루이시몽 부아조, 미셸 클로디옹, 람베르시스베르 아담, 장바티스트 피갈 등의 프랑스 조각가들은 모두 수집가들을 위한 일련의 조각품을 제작했다.[48]
이탈리아에서는 안토니오 코라디니가 로코코 양식의 주요 조각가 중 한 명이었다. 베네치아 출신인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표트르 대제, 오스트리아와 나폴리 궁정을 위해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감상적인 주제를 선호했으며,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성들을 능숙하게 조각한 여러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49]
-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의 빈 벨베데레궁 상부, 아틀라스상 (1721–1722)
- 나르시소 토메의 톨레도 대성당 엘 트란스파렌테 제단 (1721–1732)
- 스페인 발렌시아, 도스 아과스 후작 궁전 입구 (1740–1744)
- 상수시궁의 람베르시스베르 아담의 분수 님프상, 프로이센 (1740년대)
- 14성인 성당의 14성인 조각상들을 묘사한 자비의 제단
로코코 조각의 가장 정교한 예는 스페인, 오스트리아, 남독일의 궁전과 교회 장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조각은 건축과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어, 어디에서 조각이 끝나고 건축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 빈의 벨베데레궁(1721–1722)의 아틀라스 홀 아치형 천장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디자인한 근육질 인물들의 어깨위에 세워져 있다. 발렌시아의 도스 아과스 후작 궁전(1715–1776) 입구는 히폴리토 로비라 브로칸델의 디자인으로 대리석에 조각된 조각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50]
톨레도 대성당의 주요 예배당에 있는 엘 트란스파렌테 제단은 다색 대리석과 금박 스투코로 이루어진 거대한 조각품으로, 그림, 조각상, 상징이 결합되어 있다. 이는 나르시소 토메가 1721년부터 1732년까지 제작했으며, 빛이 통과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변화하는 빛 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51]
도자기
새로운 형태의 소규모 조각인 도자기 인형이나 작은 인물들 조각상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큰 식당 테이블의 설탕 조각품을 대체했지만, 곧 벽난로 선반과 가구 위에 놓는 용도로 인기를 얻었다. 유럽의 도자기 공장 수는 꾸준히 증가했으며, 일부 공장은 중산층이 구입할 수 있는 가격의 도자기를 만들었다. 도자기에 사용되는 화려한 유약 장식의 양도 증가했다. 인형들은 보통 조각을 훈련받은 예술가들이 제작하였다. 콤메디아 델라르테의 인물들, 도시 거리 상인들, 연인들, 유행하는 옷을 입은 인물들, 그리고 한 쌍의 새들과 같은 주제들이 인기를 끌었다.
요한 요아힘 캔들러는 가장 초기 유럽 공장이자 1760년경까지 가장 중요했던 마이센 도자기의 가장 중요한 모델러였다. 스위스 태생의 독일 조각가 프란츠 안톤 부스텔리는 바이에른의 님펜부르크 도자기 공장을 위해 다양한 색상의 인물상을 제작하여 유럽 전역에 판매했다. 프랑스 조각가 에티엔모리스 팔코네(1716–1791)도 이 사례를 따랐다. 그는 대규모 작품을 제작하면서도 세브르 도자기 공장의 책임자가 되어 사랑과 쾌활함을 주제로 한 소규모 작품들을 시리즈로 제작했다.
- 음악 수업, 첼시 도자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765년경}})
- 빈 카를 성당의 고제단 (1737)
- 컵과 잔받침; 1753년경; 연질 자기와 유약 및 에나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 요한 요아힘 캔들러의 메체탱, 마이센 도자기, 1739년경
- 프란츠 안톤 부스텔리가 모델링한 님펜부르크 도자기 연인상, 1760년경
- 프란츠 안톤 부스텔리의 치즈 상인 인형, 님펜부르크 도자기 (1755)
음악
음악사학에 로코코 시대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바로크와 고전주의 형태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로코코 음악 양식 자체는 바로크 음악에서 발전했으며, 프랑스에서 이 새로운 양식을 스타일 갈랑트("화려하고 우아한 양식")라고 불렸고, 독일에서는 엠프핀트자머 스틸("감성적인 양식")이라고 불렸다. 로코코 음악은 극도로 정교하고 세련된 장식음 형태를 가진 가볍고 친밀함이 특징이었다. 이 양식의 주요 주창자는 프랑스에서는 장 필리프 라모, 프랑수아 쿠프랭, 장자크 루소, 루이-클로드 다캥이었고, 독일에서는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요한 아돌프 하세, 요한 슈타미츠, 프란츠 크사버 리히터, 이그나츠 홀츠바워, 요한 고틀리프 그라운,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 프란츠 벤다, 게오르크 안톤 벤다, 요한 쇼베르트, 요한 요아힘 크반츠,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 W. F. Bach, C. P. E. Bach, J. C. F. Bach 및 J. C. Bach (J. S. Bach의 네 아들)등이 유명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바겐자일, 게오르크 마티아스 몬, 레오폴트 모차르트 등의 음악가가, 이탈리아에서는 조반니 바티스타 삼마르티니, 조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니, 발다사레 갈루피였으며, 영국에서는 토머스 아르네, 윌리엄 보이스, 존 스탠리등이 활동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로코코 양식, 특히 과도한 장식과 꾸밈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가 주도한 이 반작용의 결과로 고전주의 시대가 탄생했다. 19세기 초에는 로코코 양식이 "헌신적인 감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다.[52]
낭만주의 시대 러시아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1877년에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차이콥스키)》 Op. 33을 작곡했다. 비록 주제는 로코코 시대와 맞지 않았으나, 로코코 양식으로 쓰여졌다.
패션
요약
관점

로코코 패션은 사치스러움, 우아함, 세련미, 장식을 기반으로 했다. 17세기 여성 패션에 비해 18세기 패션은 화려하고 정교했으며, 진정한 로코코 스타일이었다.[53] 이러한 패션은 왕실을 넘어 상승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살롱과 카페로 퍼져나갔다.[54] 현재 '로코코'라고 불리는 화려하고 장난기 넘치며 우아한 장식 및 디자인 스타일은, 당시에는 르 스틸 로카이유(le style rocaille), 르 스틸 모데른(le style moderne), 르 구(le gout)로 알려져 있었다.[55]
18세기 초에 등장한 로브 볼란테(robe volante)[53]는 루이 14세 통치 말기에 인기를 얻은 흐르는 듯한 가운이었다. 이 가운은 둥근 페티코트 위로 등 뒤로 흐르는 큰 주름이 있는 보디스를 특징으로 했다. 색상은 풍부하고 어두운 색의 직물과 정교하고 화려한 디자인 요소가 특징이었다. 루이 14세 사망 후 의복 스타일이 변하기 시작했다. 패션은 더 가볍고 경박한 스타일로 바뀌었다.[56] 후기 로코코 시대는 파스텔 색상, 노출이 심한 원피스, 그리고 프릴, 러플, 활, 레이스 장식의 풍부함으로 유명했다. 전형적인 여성 로코코 가운이 소개된 직후 로브 아 라 프랑세즈(robe à la Française)[53]가 등장했는데, 이 가운은 목선이 깊게 파인 타이트한 상의와 보통 앞 중앙에 큰 리본 장식이 있고 넓은 페티코트가 있으며 레이스, 리본,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앙투안 바토 화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바토 주름[53]도 인기를 얻었는데, 그는 레이스와 기타 장식의 바느질까지 드레스의 세부 사항을 매우 정확하게 묘사했다. 이후 718년경에는 '파니에(pannier)'와 '만투아(mantua)'가 유행했다. 이것들은 드레스 아래에 착용하여 엉덩이를 옆으로 확장시키는 넓은 후프였으며 곧 정장의 필수품이 되었다.이로써 로코코 시대에는 넓은 엉덩이와 의상에 많은 장식이 결합된 상징적인 드레스 스타일이 탄생했다. 넓은 파니에는 특별한 행사에 착용되었으며, 직경이 최대 5미터에 달했고,[57] 일상적인 환경에서는 작은 후프를 착용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원래 17세기 스페인 패션인 과르다인판테(guardainfante)에서 유래했으며, 처음에는 임신한 배를 숨기기 위한 용도였는데 나중에 파니에로 재해석되었다.[57] 1745년은 프랑스에 터키풍(la turque)라고 불리는 더욱 이국적이고 동양적인 문화가 도입되면서 로코코 시대가 황금기를 맞았다.[53] 이는 루이 15세의 정부인 잔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여후작가 화가 샤를 앙드레 반 루에게 자신을 터키 술탄으로 그려달라고 의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1760년대에는 덜 격식 있는 드레스 스타일이 등장했는데, 그중 하나는 폴란드에서 영감을 받은 폴로네즈였다. 이는 프랑스 드레스보다 짧아서 속치마와 발목이 보이는 디자인으로, 움직이기 쉬웠다. 또 다른 유행한 드레스는 남성 패션에서 영감을 받은 요소를 포함하는 로브 아 랑글레즈(robe a l'anglais)였다. 짧은 재킷, 넓은 라펠, 긴 소매가 특징이었다.[56] 또한 몸에 꼭 맞는 보디스, 파니에가 없지만 뒤가 조금 길어 작은 트레인을 형성하는 풍성한 치마, 그리고 종종 목에 두르는 레이스 손수건이 특징이었다. 또 다른 의상으로 망토와 오버코트의 중간 형태인 '레딘고트(redingote)'도 있었다.
액세서리 또한 이 시기 모든 여성에게 중요했는데, 이는 드레스에 맞춰 몸을 더욱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공식 행사에서 여성들은 소매가 없는 옷을 입을 경우 장갑으로 손과 팔을 가려야 했다.[56]
문학
문학에서 이 용어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모호하지만, 보통 즐거운 가벼움과 친밀한 분위기, 그리고 우아한 유희성을 암시한다."[5] 주요 로코코 문학 장르는 에로틱한 경쾌한 시(프랑스어: poésie légère 또는 poésie fugitive), 소네트, 마드리갈 및 기타 노래, 목가주의, 동화, 중편 소설과 같은 작은 형태였지만,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의 독일어 걸작인 《오베론》과 같은 긴 서사시도 있었다.
주로 18세기 프랑스 문학 양식으로, 17세기 프레시오지테 학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랑의 기술》의 저자인 안 클로드 드 케일뤼, P. J. 베르나르, 알렉상드르 마송 드 페제(서사시《 젤리스의 목욕》), 아베 드 파브르(시 《숙녀들의 화장 시간 4시간》), 에바리스트 드 파르니, 장바티스트 루베 드 쿠브레 등의 작가들이 대표적이다. 로코코는 이탈리아(파올로 롤리,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와 독일(프리드리히 폰 하게도른, 요한 빌헬름 루트비히 글라임, 요한 우츠, 요한 니콜라우스 괴츠)에서도 추종자들이 있었으며, 영국과 러시아(이폴리트 보그다노비치) 문학에서는 그 정도가 덜했다.[58]
갤러리
건축
- 알레이자디뉴의 오루프레투 상프란시스쿠 지 아시스 교회, 브라질, 1749–1774
-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키이우 성 안드리 교회, 1744–1767
- 츠빙거 (드레스덴)
- 때때로 "폴란드의 베르사유"라고 불리는 로코코 브라니츠키궁 (비아위스토크)
- 트리어 선제후궁
- 마누엘 데 아마 이 후니엔트가 1766년에 완성한 페루 리마 산토 도밍고 대성당
- 퓌르스텐첼 수도원 교회, 1739–1744
판화
- 작가 미상, 《천문학과 지리의 우의화》. 프랑스 (?), 1750년대경
- A. 아블랭, 몽동 르 필스를 추종. 《L′Heureux moment》. 1736
- A. 아블랭, 몽동 르 필스를 추종. 《중국 신》. 1736년 작품집 《바위 조각, 장식 테두리, 새와 용의 형상으로 장식된 제4 형태서》에서 발췌한 판화
회화 갤러리
- 앙투안 바토,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 1718–1721
- 장 프랑수아 드 트루아, 《몰리에르 작품 낭독》, 1728
- 프랜시스 헤이먼, 《춤추는 우유 짜는 처녀들》, 1735
- 샤를앙드레 반 로, 《사냥 휴식》, 1737
- 구스타프 룬드베리, 《프랑수아 부셰의 초상》, 1741
- 프랑수아 부셰, 《목욕하고 나오는 다이아나》, 1742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클레오파트라의 연회》, 1743
- 프랑수아 부셰, 《마리루이즈 오뮈르피》, 1752
- 캉탱 드 라 투르, 《잔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여후작의 전신 초상》, 1748–1755
-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 1756
-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67
-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영감》, 1769
-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드니 디드로로 오인되었던 남자의 초상》, 1769
- 호세 캄페체, 《도냐 마리아 데 로스 돌로레스 구티에레스 델 마소 이 페레스》, 1796년경 [59]
-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 《장미를 든 마리 앙투아네트》, 1783
-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라 짐블레트》, 1770–1775
같이 보기
- 이탈리아 로코코 미술
- 로코코 회화
- 포르투갈의 로코코
- 스페인의 로코코
- 문화 운동
- 금박 목조각
- 미술의 역사
- 1800년까지의 이탈리아 예술가 연대표
- 착시 천장화
- 루이 15세 양식
- 루이 15세 가구
- 리에주-아헨 바로크 가구
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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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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