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모모야마 문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 문화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모모야마 문화
Remove ads

모모야마 문화(일본어: 桃山文化) 또는 아즈치모모야마 문화(일본어: 安土桃山文化)는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의 통일을 이룩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일본 문화를 가리킨다.[2] 이 시기 전란의 시기가 끝나가고 천하통일이 가까워지면서 신흥 다이묘와 고쇼가 출현했고 동시에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문화가 유입되면서 화려한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Thumb
가노 에이토쿠가 그린 작품. 일본 궁내청 황거 산노마루 소장관에 보관되어 있다.[a]

'모모야마 문화'라는 명칭은 주로 일본 예술사 구분에서 시기 구분을 위해 많이 사용되며, 17세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연 에도 막부 초기 시기도 모모야마 문화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3][b] 예술사 구분에 따르면 16세기 중순부터 17세기 초까지 일본 문화를 모모야마 문화로 규정하지만, 실질적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스스로 쇼군 직에 오르면서 종결되었다.[5]

Remove ads

특징

요약
관점
Thumb
후시미성의 천수각
Thumb
앵겔베르트 캠퍼가 그린 호코지교토의 대불.

'천하포무'라는 인장을 만들고 일본의 재통일을 시작한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계승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치한 시기를 두 사람의 주요 거성의 이름을 따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라고 부른다. '모모야마'라는 이름은 교토시 후시미구의 '모모야마 구릉'에서 유래했으며, 히데요시가 이 지역에 후시미성을 지었다. 1781년 <후시미감>(伏見鑑)에 따르면 후시미성 일대에 복숭아 나무가 많이 자라 이 지역을 '모모야마'(桃山)라고 불렀다고 한다.[6]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가 이어진 약 100년은 센고쿠 시대가 거의 끝나고 권력과 부가 특정 다이묘에게 집중되고 통일 정권이 들어선 시기였다. 새롭게 열린 시대의 감각이 웅대하고 장려하며 화려하고 찬란하고, 또 발랄하면서도 신선미가 가득한 모모야마 문화를 탄생시켰다.[7][8] 이러한 문화에는 센고쿠 시대 전쟁을 통해 새로운 지배자가 된 신흥 다이묘나 전쟁과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도시에 거주하는 고쇼의 기풍이 다채롭게 반영되었다.[9]

Thumb
히데요시가 착용했다고 전해지는 갑옷.고다이지 소장)

신을 중심으로 하는 요소들이 강하게 나타났던 일본 고대중세 문화와 다르게 모모야마 문화는 인간 중심주의적인 요소들이 나타나는 것이 큰 특색이다.[9] 이전까지 다양하게 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원과 불교 세력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책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었고 다수의 사원은 몰락했다. 이로 인해 모모야마 시대 예술작품에는 종교적 특징보다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특징이 많이 나타난다.[9][c]

통일 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문화가 일본 각지로 확산되었고 이 문화가 서민까지 퍼지게 되었다. 교토, 오사카, 사카이, 하카타 등 도시에서 활동하는 상공업자들이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데 앞장섰다. 중세부터 내려오던 내세주의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후퇴하였고 현실에서 쾌락이나 행복을 찾는 사상이 퍼지게 되었다. 하가는 이런 사상이 전파된 것에 상공업자들의 활동이 그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하고 있다.[9]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인이 내항하면서 유럽 문화가 전래되었고, 왜구를 비롯하여 많은 일본인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이 영향으로 다양한 해외 문화가 일본으로 들어왔다. 모모야마 문화는 다채로우면서도 이국적인 요소가 가미된 특징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9] 이 시기 일본은 자체적으로 도자기악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유입된 조선 문화도 모모야마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10] 모모야마 문화 말기인 17세기 초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네덜란드의 학문과 기술, 그리고 17세기 유럽의 문물이 전래되었다.[11]

새로운 문화의 발달로 이전까지 일본 문화의 근간이었던 선종 사회는 센고쿠 다이묘의 고문관 역할을 하게 되었고, 문화 발전에 역할을 하게 된 공가가 영향력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하가에 따르면 이들은 안정적인 경제를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었다.[9][d]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는 센고쿠 다이묘가 이끄는 무가 문화와 공가가 주도하는 공가 문화가 함께 발달했으며, 국풍 문화히가시야마 문화와 같은 이전 문화를 계승하는 요소들이 포함된 문화가 발달하여 일본 고유의 문화가 자리잡게 되는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13]

Remove ads

모모야마 건축

요약
관점

성곽

모모야마 문화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는 성곽 건축이다.[8] 성곽은 군사시설로서 활용되었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성곽은 본래 용도에 일본 고유의 양식을 더했다는 특징이 있다.[3]

Thumb
미에현 이세시에 있는 아즈치성 모의 천수각
Thumb
천수각과 대수문이 남아있는 현대의 오사카성.
Thumb
히메지성 천수각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성곽은 중세부터 지어졌던 산성에서 구릉이나 고원의 가장자리에 지어진 평산성, 그리고 평야나 개활지에 지어진 평성으로 변화했다. 여기에 다양한 굴과 합쳐져 돌벽을 쌓기도 하고, 층을 이루어 덴슈(천수각, 일본어: 天守)나 망루를 지어 성의 방어를 강화하기도 했다.[8]

'天守'라는 말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전반 기나이에서 발생한 전란을 묘사한 군기물인 <호소카와 양가기>(細川両家記)에 따르면 16세기 초반 셋쓰국 이타미성(현 효고현 이타미시)에 '天守'가 있었다는 기록이다.[14] 동시대에 '天守'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고, 에도 시대 이전의 문헌자료에서는 '殿守', '殿主'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14] 또한 이전 불교 건축에서 불탑이나 산몬 등을 지을 때도 다층 구조의 건축물이 지어진 경우가 있었으며, 중국 대륙 문화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다층 구조물도 많았다.[8] 이와 대응해 덴슈는 일본인이 직접 창조한 다층 건축양식으로 여겨진다.[8] 높은 덴슈에는 혼마루의 바깥쪽에 도루이나 깊은 해자를 감싸는 다층 망루인 구루와를 설치했고, '니노마루', '산노마루', '니시노마루', '기타노마루'와 같은 호칭을 써서 각 루를 연결하는 구조물을 만들었다. 성 내부에는 쇼인즈쿠리를 도입해 이를 거실이나 저택으로 활용했다.[15]

이시가키노츠미의 석벽이나 해자도 본래는 침입한 적을 지연시키는 방어시설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이 방어시설들에도 예술성을 추구했다.[3] 대표적인 예시로 오쓰시의 사카모노에 있는 아노슈가 있다.[16] 이를 통해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지어진 성들은 단순한 요새의 의미를 넘어 이 성을 축조한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주민들이 성을 축조한 다이묘들을 우러러보면서 다이묘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3]

1576년 노부나가는 비와호 동쪽에 나라, 교토, 사카이의 공인을 동원해 아즈치성을 건설했다. 아즈치성은 노부나가가 북쪽의 우에스기씨, 동쪽의 다케다씨, 서쪽의 모리씨를 감시하기에 유리한 교통과 통신의 요지였다.[17]지상 6층과 지하 1층짜리 누각을 짓고 이를 '天主'라고 불렀다.[14] 이 누각의 이름을 天主라고 한 것에 대해 기독교의 하나님을 의미한다는 설, 또는 불교제석천 등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노부나가가 스스로 천하의 중심임을 공표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했다는 지적도 있다.[18] 루이스 프로이스는 아즈치성에 대해 '구조가 견고함과 패옥의 화려함은 유럽의 장대한 성과도 같다'라고 평가하였지만, 이 성은 1582년 음력 6월 야마자키 전투에서 덴슈와 혼마루가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다.[19]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해당 유적을 조사한 결과, 다수의 유교 관련 그림이 아즈치성에서 발견되었다.[20]

1583년 9월경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잇코 잇키의 거점이었던 이시야마 혼간지를 철거하고 남은 땅 위에 오사카성을 짓기 시작했다. 오사카성은 10층 규모의 거대한 천수각이 솟아있고 혼마루, 야마자토마루의 중심 역할을 하는 니노마루와 산노마루 등 총 4개의 둘레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곽이었다. 오사카성은 규모나 그 거대한 화려함으로도 아즈치성을 능가했지만 시골스러운 느낌이 나는 야마자토를 남겨두었다.[21] 1994년 연구 결과에서는 도요토미가 완공했을 당시의 오사카성의 덴슈는 복합식 또는 연결식 망루형의 5중 6층·지하 2층 구조였으며, 1층의 규모는 남북 11간 × 동서 12간(기둥 간격 7척간)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했다.[22]

Thumb
「취락제도병풍」의 일부분, 미쓰이문고 소장

히데요시는 이후 하치만야마성 (시가현 오미하치만시 위치), 고리야마성 (나라현 야마토코리야마시 위치), 요도성 (교토시 후시미구), 주라쿠다이 (교토시 가미교구 위치), 후시미성을 건축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 맞서 니조성 (교토시 나카교구 위치), 슨푸성 (시즈오카시 아오이구 위치), 나고야성, 에도성 등을 축조했다. 이 외에도 덴쇼 연간부터 간에이 연간까지 여러 성곽이 지어졌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후 성곽을 짓는 것이 일본 전국으로 확대되었다.[19] 덴슈, 로, 문, 벽 등 성곽을 구성하는 건축물에 화재 방비를 위해 흙이나 플라스터를 섞어 만들기 시작한 것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23] 오사카 전투 이후 에도 막부는 오사카성을 비롯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몇몇 성들을 개축하기도 했다.

오늘날 일본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모모야마 건축 양식을 따른 일본성에는 이케다 데루마사하리마국에 지은 히메지성이 있다.[19] 이 외에도 이누야마성, 마쓰모토성 등도 모모야마 건축양식을 따른 일본성이다. 모모야마 건축 양식을 유지한 성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3년 전국성곽존폐령에 따라 많이 사라지게 되었고,[24] 1929년 국보법에 따라 성곽의 보존이 결정되었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본토 공습으로 인해 많이 소실되었다.[25] 나고야성이나 오사카성 등 주요 성은 주민들의 성금[26]이나 지자체[27] , 혹은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아 복원되었다. 히메지성과 슈리성세계문화유산에, 히코네성은 세계문화유산 잠정등재목록에 지정되어 있다[28][29]

모모야마 양식의 일본성

현대 일본에서는 덴슈가 남아있는 모모야마 시대 성을 하나로 묶어 현존천수(現存天守)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2025년 기준, 현존천수에 속한 일본성은 총 12개로, 이 중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성에는 히메지성, 이누야마성, 마쓰모토성, 히코네성, 마쓰에성이 있다. 각 성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Thumb
이누야마성 덴슈
Thumb
마쓰모토성 덴슈
Thumb
히코네성 덴슈
Thumb
마루오카성 덴슈
히메지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던 이케다 데루마사가 1614년에 개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히메지성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혼마루를 포함한 히메지성 유적은 일본의 특별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30] 2006년에는 일본성곽협회에서 마련한 기준에 따라 일본 100 명성에 등록되기도 하였다.[31] 하리마평야의 중앙에 있는 히메지산을 이용해 만든 평산성이다. 히데요시가 3중의 천수각을 지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케다 데루마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했고, 천수각 역시 후기 망루형으로 개조했다.
3단 4층 구조의 천수각이 있는 평산성으로, 1층에 위쪽만큼 커다란 크기의 망루형 혼마루를 드리웠다. 오다 노부나가의 숙부인 오다 노부야스가 성곽을 건축하고, 1601년 재건축에 들어간 뒤 오와리번의 로주 나루세 마사나리가 입성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이누야마성으로 개축했다.[32] 20세기까지 나루세씨가 이 성을 관리하다가 현재는 재단법인이 소유권을 가지고 이누야마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천수각만 국보로 지정되었다.
158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된 오가사와라 사다요시가 후카시성을 마쓰모토성으로 이름을 바꾼 후 입성하였다. 이후 1590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로 영지를 받게 되면서 오가사와라씨의 영지도 전환되었다. 이후 이시카와 가즈마사이시카와 야스나가가 영지로서 다스렸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마쓰다이라씨가 1세기 동안의 간격을 제외하고 메이지 유신 때까지 영지로 지배를 했다. 1952년 7월 천수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1603년 이이 나오카쓰가 축성한 평산성으로,[33] 천수각은 오쓰성의 천수각을 옮겨서 가져왔다. 천하보청의 일환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 지역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수전보청을 지시해 완성했다. 막말까지 후다이 다이묘의 대표였던 이이씨의 거성으로 활용되었다. 폐성령으로 메이지 시대 천수각을 제외한 성 전체를 파괴했다. 국보인 천수각, 부로, 다청로를 포함해 총 5개의 유적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34][35] 성이 있는 사적 지역은 비와호 국정공원의 제1종 특별지역으로 지정되었고, 일본 100 명성에도 지정된 상태다.
독립식 망루형 이중삼층의 천수각으로서, 현재 일본에 있는 천수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32] 1576년 시바타 가쓰이에의 생질이었던 시바타 가쓰토요가 축성했다고 전해지지만 니와 나가히데의 가신이었던 아오야마 무네카쓰가 성주가 되었다. 천수각은 1950년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6년에 일본 100 명성에 등록되었다.
호리오 다다우지가 1607년 축성에 도움을 주었던 평산성으로, 2006년 일본 100 명성에 등록이 되어 있었고, 2015년 천수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성령에 따라 천수각을 제외한 모든 성곽이 파괴되었다.

덴슈의 형태인 망루형과 층탑형에 대해서는, 예전에 일본 학계는 망루형에서 층탑형으로 변화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두 형식의 창건 시기가 서로 겹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단순히 시대적 흐름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16세기 말엽에서 17세기 초에 걸친 짧은 시기에 각 양식이 동시에 꽃피어났던 것으로 변경해서 보게 되었다.[32] 마루오카성이나 이누야마성처럼 망루형 덴슈의 경우에는 망루의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어, 성주가 주변을 ‘내려다보는’ 군사적 기능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반면 히메지성이나 마쓰모토성 등에서는 완만한 층탑형을 채택해 주변을 '아울러 볼수 있는' 정치적 측면이 더욱 중시되고 있다.[32]

모모야마 건축물

Remove ads

다도

정원

회화

요약
관점

장벽화

Thumb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농회의 특징을 잘 살린 가노 에이토쿠의 작품『회도병풍』.
Thumb
가노 산라쿠의 금벽화인『모란도병풍』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성곽이나 사원 내부의 벽,후스마, 병풍과 천장에는 금박을 바른 바탕 위에 푸른색과 녹색의 힘찬 선으로 채색해 나가는 농회(だみえ) 기법에 의한 화려한 장화가 그려졌다. ‘농회’는 본래 색채를 사용한 회화를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수묵화에 대비되는 용어이다.[36] 농회 가운데 바탕 전체에 금박을 입히고 ‘벽(碧)’, 즉 청색 계통으로 짙게 채색한 작품은 금벽화(金碧画)라 불리며, 이는 무로마치 시대에 그 기원을 둔다.[36] 장벽화에는 농회(금벽화)와 수묵화 두 종류가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금벽 장벽화는 건축 내부에서도 공적인 공간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고, 사적인 공간의 장식에는 수묵화를 선호했다.[37]

천하 통일의 기운이 넘쳐 흐르던 시대에는 특히 황금색이 사랑받았고, 짙은 색채와 함께 힘이 넘치는 회화를 요구했다.[38] 성곽은 새로운 권위의 상징이었지만 그 내부 역시 권위를 드러내야 했고, 황금빛의 반짝임은 그러한 효과를 발휘하는 데 훌륭한 수단이었다. 또한 금색을 선호한 이유에는 단지 천하인이나 다이묘들의 미적 취향을 만족시켰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충분한 조명을 확보할 수 없었던 자시키에서 꽤 큰 조명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기도 했다.[36] 그 안에서는 화조풍월 등 일본풍의 그림이나 당사자·용호 등 송·원대 화풍에 중국풍 주제를 담은 그림이 인기였다. 금운(금빛 구름)이나 금색 배경이 대화면 속 풍경을 구획하고, 화제로 삼은 대상을 실제 크기로 그려 압도적인 현장감을 얻고자 했다.[38]

금벽 장벽화의 중심이 된 것은 가노파(狩野派)였다.[38] 가노파는 이전부터 일본 고래의 야마토에 색채주의와 무로마치 시대에 성행한 수묵화의 구성주의를 종합하려는 흐름을 이어왔다.[5] 가노 모토노부의 손자인 가노 에이토쿠는 이를 계승하여, 풍부한 색채·힘찬 선묘·웅대한 구도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장식화를 완성했다.[5] 에이토쿠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를 섬겼으며, 그의 그림은 주전(主殿)이나 광대한 대공간에서 천하인과 가신들이 그림 속 자연과 일체가 되어,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듯한 연출을 담당했다.[38] 그런 의미에서 장벽화는 뛰어난 정치적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에이토쿠는 암수 한 쌍의 사자를 그린 〈당사자도 병풍〉, 노부나가가 우에스기 겐신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 〈겐지모노가타리 병풍〉·〈락중락외도 병풍〉, 그리고 〈히노키도 병풍〉·〈화조도〉등 많은 걸작을 남겨 가노파 전성의 기초를 닦았다. 에이토쿠와 그의 문하 화가들은 안즈츠성, 오사카성, 주라쿠다이의 장벽화를 맡았으나, 에이토쿠 자신의 필적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38] 그가 안즈츠성 천수각 2층부터 7층 각각에 그린 장벽화의 주제를 적은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수는 방대하며 불화 계통의 주제, 유교적 화제뿐만 아니라, 인물과 화조, 봉황·용호·사자 등 영수(霊獣)를 소재로 한 작품이 특히 많았다.[4][7]

히데요시의 소년 시종에서 에이토쿠의 문하가 된 가노 산라쿠는 에이토쿠의 양자가 되어 그의 화풍을 계승했다. 산라쿠의 작품으로는 장식성이 높은 금벽 장벽화인 〈모란도〉, 그리고 수묵화〈송매도〉가 특히 유명하며, 모두 대각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에이토쿠의 후계자 중 에도 막부에 봉직한 가노파는 에도 가노(江戸狩野)라 불렸고, 교토에 남은 산라쿠의 계통은 교 가노(京狩野)라고 불렸다.[39]

Thumb
가이호 유조의『화훼병풍도』
Thumb
하세가와 도하쿠의『풍도』

가이호파의 시조로 알려진 가이호 유조는 북오미 지역의 센고쿠 다이묘였던 아자이씨를 섬긴 가문 출신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오타니성 공략으로 일족이 멸문했으나, 어린 시절 출가해 교토 도후쿠지에 있던 유조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중국 남송의 양해안휘의 화풍과 무로마치 수묵화를 체득했고 가노 에이토쿠 등으로부터 다양한 화풍을 익혔다.[40] 유조는 짙은 채색을 활용한 장식적 작품뿐 아니라 특히 수묵화에서 개성이 강하고 뛰어난 작품을 다수 남겼다. 겐닌지 대방장에 그린 〈산수도〉, 그리고 같은 절에 남아 있는 〈죽림칠현도〉, 〈금기서화도〉, 〈운룡도〉, 〈화조도〉 등 방대한 작품군이 대표적이다. 〈화훼도〉,〈삼산·한산습득도〉,〈금기서화도〉 등은 묘신지에 보관되어 있다. 이후 2대인 가이호 유세츠부터 가이호파는 궁중 어용화가로 활동하게 되었다.[40]

하세가와파의 시조 하세가와 도하쿠 역시 아들 하세가와 규조와의 합작으로, 치샤쿠인에 다수의 금벽화를 남겼다. 대표작〈단풍도〉는 거대한 단풍나무 아래에서 꽃들이 솟아오르듯 피어나는 장면을 비롯해, 가노파라면 생략했을지도 모를 섬세한 세부 묘사, 금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공간 구성, 잔향을 남기는 배경 등 다양한 표현 기법을 집대성한 걸작으로 평가된다.[37] 노토에서 태어나 사카이의 상인 문화와 접촉하며 교토에서 수묵화 기량을 갈고닦은 도하쿠는 수묵화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다수 남겼다.[41] 치샤쿠인의 후스마 그림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송림도 병풍〉은 화려한 모모야마 회화 속에서도 드물게 고요하고 세련된 맛을 담은 수묵화의 걸작으로 꼽히며, 높은 조형적 완성도와 풍부한 서정미로 유명하다.[41] 도하쿠는 셋슈의 제자였던 도슈에게 배웠고, 말년에는 자신의 작품에 ‘셋슈 5대’라고 적어 스스로가 셋슈의 계보를 잇는 인물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주라쿠다이 내부 장식에서 가노파와 작업을 분담했으나, 가노파와 충돌해 에이토쿠를 비난한 탓에 그 이후 궁정 건축 관련 제작에서는 에이토쿠 측에 배척되었다.[37]

수묵화 분야에는 모리 씨를 섬긴 무인 화가 운고쿠 도간 또한 당대 명망 있는 화가였다. 본성은 하라였으며, 히젠국 후지쓰군 노고미의 성주 하라 나오이에의 차남으로 태어나 마쓰우라씨를 섬겼다. 아버지가 전사한 뒤 모리 데루모토에게 넘겨졌고, 거기서 셋슈의 걸작〈산수장권〉을 모사했는데 그 뛰어난 솜씨에 데루모토가 크게 감탄했다고 전해진다.[40] 1593년, 데루모토는 도간에게 녹 100석과 장권을 하사하고, 야마구치에 있던 셋슈의 거처였던 운고쿠안의 관리를 맡겼다. 도간은 스스로를 ‘셋슈 말손(末孫)’이라 칭하며 설순파의 정통을 자처했고, 하세가와 도하쿠와 겨루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다이토쿠지 황매원 장벽화, 도후쿠지 후몬인 장벽화 등이 있다.[40]

풍속화

Remove ads

조각

Thumb
니시혼간지의「시로쇼인」의 후스마에와 란마 조각.

조각 분야에서는 불상 조각이 쇠퇴하고, 대신 저택의 문짝이나 난간 위쪽 공간(란마)에 장식하는 조각이 활발해졌다.[42]란마(欄間)’란 문이나 장지를 떠받치는 가로목(가모이)과 천장 사이의 공간에 채광과 통풍을 위해 끼워 넣은 판재를 말한다. 성곽이나 저택 내부를 장식한 란마 조각에는 투조(透し彫) 기법도 사용되었다.[42] 또한 건물 외관을 장식하는 파부(破風)에도 다양한 형태적 장치와 조각이 더해졌다. 현실성과 실용성을 중시한 도요토미·모모야마 시대에는, 조각이 천평 문화나 가마쿠라 문화에서처럼 독립된 작품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조각은 저택 건축의 부속물이라는 성격이 분명했으며, 일상생활과 가장 밀착한 조각 작품들이 탄생한 것이다.[42] '노'와 같은 새로운 문화 예술이 발달함에 따라 노에 사용되는 가면을 조각하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이 시기 불상의 경우 보다 현실적이거나 역동적인 자세를 취한 불상이 다수 제작되었다.

Remove ads

공예

자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유약을 바른 시유 도기의 산지였던 세토 가마와 미노 가마를 중심으로, 유약을 바르지 않은 무유 도기의 산지로 발전해 온 비젠·시가라키·탄바·이가의 각 가마, 그리고 조금 뒤늦게 가라쓰에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가 만들어졌다.[43][44]

학문

같이 보기

참조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