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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야마 문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 문화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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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야마 문화(일본어: 桃山文化) 또는 아즈치모모야마 문화(일본어: 安土桃山文化)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통일을 이룩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 문화를 가리킨다.[2] 이 시기 전란의 시기가 끝나가고 천하통일이 가까워지면서 신흥 다이묘와 고쇼가 출현했고 동시에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문화가 유입되면서 화려한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모모야마 문화'라는 명칭은 주로 일본 예술사 구분에서 시기 구분을 위해 많이 사용되며, 17세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연 에도 막부 초기 시기도 모모야마 문화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3][b] 예술사 구분에 따르면 16세기 중순부터 17세기 초까지 일본 문화를 모모야마 문화로 규정하지만, 실질적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스스로 쇼군 직에 오르면서 종결되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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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요약
관점


'천하포무'라는 인장을 만들고 일본의 재통일을 시작한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계승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치한 시기를 두 사람의 주요 거성의 이름을 따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라고 부른다. '모모야마'라는 이름은 교토시 후시미구의 '모모야마 구릉'에서 유래했으며, 히데요시가 이 지역에 후시미성을 지었다. 1781년 <후시미켄>(伏見鑑)에 따르면 후시미성 일대에 복숭아 나무가 많이 자라 이 지역을 '모모야마'(桃山)라고 불렀다는 가설이 있다.[6]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가 이어진 약 100년은 센고쿠 시대가 거의 끝나고 권력과 부가 특정 다이묘에게 집중되고 통일 정권이 들어선 시기였다. 새롭게 열린 시대의 감각이 웅대하고 장려하며 화려하고 찬란하고, 또 발랄하면서도 신선미가 가득한 모모야마 문화를 탄생시켰다.[7][8] 이러한 문화에는 센고쿠 시대 전쟁을 통해 새로운 지배자가 된 신흥 다이묘나 전쟁과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도시에 거주하는 고쇼의 기풍이 다채롭게 반영되었다.[9]

신을 중심으로 하는 요소들이 강하게 나타났던 일본 고대나 중세 문화와 다르게 모모야마 문화는 인간 중심주의적인 요소들이 나타나는 것이 큰 특색이다.[9] 이전까지 다양하게 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원과 불교 세력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책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었고 다수의 사원은 몰락했다. 이로 인해 모모야마 시대 예술작품에는 종교적 특징보다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특징이 많이 나타난다.[9][c]
통일 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문화가 일본 각지로 확산되었고 이 문화가 서민까지 퍼지게 되었다. 교토, 오사카, 사카이, 하카타 등 도시에서 활동하는 상공업자들이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데 앞장섰다. 중세부터 내려오던 내세주의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후퇴하였고 현실에서 쾌락이나 행복을 찾는 사상이 퍼지게 되었다. 하가는 이런 사상이 전파된 것에 상공업자들의 활동이 그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하고 있다.[9]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인이 내항하면서 유럽 문화가 전래되었고, 왜구를 비롯하여 많은 일본인이 해외로 진출하면서 이 영향으로 다양한 해외 문화가 일본으로 들어왔다. 모모야마 문화는 다채로우면서도 이국적인 요소가 가미된 특징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9] 이 시기 일본은 자체적으로 도자기나 악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유입된 조선 문화도 모모야마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10] 모모야마 문화 말기인 17세기 초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네덜란드의 학문과 기술, 그리고 17세기 유럽의 문물이 전래되었다.[11]
새로운 문화의 발달로 이전까지 일본 문화의 근간이었던 선종 사회는 센고쿠 다이묘의 고문관 역할을 하게 되었고, 문화 발전에 역할을 하게 된 공가가 영향력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하가에 따르면 이들은 안정적인 경제를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었다.[9][d]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는 센고쿠 다이묘가 이끄는 사무라이의 문화와 공가가 주도하는 문화가 함께 발달했으며, 국풍 문화나 히가시야마 문화와 같은 이전 문화를 계승하는 요소들이 포함된 문화가 발달하여 일본 고유의 문화가 자리잡게 되는 시기로 평가받는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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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야마 건축
요약
관점
성곽
모모야마 문화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는 성곽 건축이다.[8] 성곽은 군사시설로서 활용되었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성곽은 본래 용도에 일본 고유의 양식을 더했다는 특징이 있다.[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성곽은 중세부터 지어졌던 산성에서 구릉이나 고원의 가장자리에 지어진 평산성, 그리고 평야나 개활지에 지어진 평성으로 변화했다. 여기에 다양한 굴과 합쳐져 돌벽을 쌓기도 하고, 층을 이루어 덴슈(천수각, 일본어: 天守)나 망루를 지어 성의 방어를 강화하기도 했다.[8]
'天守'라는 말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전반 기나이에서 발생한 전란을 묘사한 군기물인 <호소카와 양가기>(細川両家記)에 따르면 16세기 초반 셋쓰국 이타미성(현 효고현 이타미시)에 '天守'가 있었다는 기록이다.[14] 동시대에 '天守'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았고, 에도 시대 이전의 문헌자료에서는 '殿守', '殿主'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14] 또한 이전 불교 건축에서 불탑이나 산몬 등을 지을 때도 다층 구조의 건축물이 지어진 경우가 있었으며, 중국 대륙 문화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다층 구조물도 많았다.[8] 이와 대응해 덴슈는 일본인이 직접 창조한 다층 건축양식으로 여겨진다.[8] 높은 덴슈에는 혼마루의 바깥쪽에 도루이나 깊은 해자를 감싸는 다층 망루인 구루와를 설치했고, '니노마루', '산노마루', '니시노마루', '기타노마루'와 같은 호칭을 써서 각 루를 연결하는 구조물을 만들었다. 성 내부에는 쇼인즈쿠리를 도입해 이를 거실이나 저택으로 활용했다.[15]
이시가키노츠미의 석벽이나 해자도 본래는 침입한 적을 지연시키는 방어시설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이 방어시설들에도 예술성을 추구했다.[3] 대표적인 예시로 오쓰시의 사카모노에 있는 아노슈가 있다.[16] 이를 통해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지어진 성들은 단순한 요새의 의미를 넘어 이 성을 축조한 지역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주민들이 성을 축조한 다이묘들을 우러러보면서 다이묘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3]
1576년 노부나가는 비와호 동쪽에 나라, 교토, 사카이의 공인을 동원해 아즈치성을 건설했다. 아즈치성은 노부나가가 북쪽의 우에스기씨, 동쪽의 다케다씨, 서쪽의 모리씨를 감시하기에 유리한 교통과 통신의 요지였다.[17]지상 6층과 지하 1층짜리 누각을 짓고 이를 '天主'라고 불렀다.[14] 이 누각의 이름을 天主라고 한 것에 대해 기독교의 하나님을 의미한다는 설, 또는 불교나 제석천 등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노부나가가 스스로 천하의 중심임을 공표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했다는 지적도 있다.[18] 루이스 프로이스는 아즈치성에 대해 '구조가 견고함과 패옥의 화려함은 유럽의 장대한 성과도 같다'라고 평가하였지만, 이 성은 1582년 음력 6월 야마자키 전투에서 덴슈와 혼마루가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다.[19]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해당 유적을 조사한 결과, 다수의 유교 관련 그림이 아즈치성에서 발견되었다.[20]
1583년 9월경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잇코 잇키의 거점이었던 이시야마 혼간지를 철거하고 남은 땅 위에 오사카성을 짓기 시작했다. 오사카성은 10층 규모의 거대한 천수각이 솟아있고 혼마루, 야마자토마루의 중심 역할을 하는 니노마루와 산노마루 등 총 4개의 둘레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곽이었다. 오사카성은 규모나 그 거대한 화려함으로도 아즈치성을 능가했지만 시골스러운 느낌이 나는 야마자토를 남겨두었다.[21] 1994년 연구 결과에서는 도요토미가 완공했을 당시의 오사카성의 덴슈는 복합식 또는 연결식 망루형의 5중 6층·지하 2층 구조였으며, 1층의 규모는 남북 11간 × 동서 12간(기둥 간격 7척간)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했다.[22]

히데요시는 이후 하치만야마성 (시가현 오미하치만시 위치), 고리야마성 (나라현 야마토코리야마시 위치), 요도성 (교토시 후시미구), 주라쿠다이 (교토시 가미교구 위치), 후시미성을 건축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 맞서 니조성 (교토시 나카교구 위치), 슨푸성 (시즈오카시 아오이구 위치), 나고야성, 에도성 등을 축조했다. 이 외에도 덴쇼 연간부터 간에이 연간까지 여러 성곽이 지어졌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후 성곽을 짓는 것이 일본 전국으로 확대되었다.[19] 덴슈, 로, 문, 벽 등 성곽을 구성하는 건축물에 화재 방비를 위해 흙이나 플라스터를 섞어 만들기 시작한 것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23] 오사카 전투 이후 에도 막부는 오사카성을 비롯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몇몇 성들을 개축하기도 했다.
오늘날 일본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모모야마 건축 양식을 따른 일본의 성곽에는 이케다 데루마사가 하리마국에 지은 히메지성이 있다.[19] 이 외에도 이누야마성, 마쓰모토성 등도 모모야마 건축양식을 따른 일본성이다. 모모야마 건축 양식을 유지한 성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3년 전국성곽존폐령에 따라 많이 사라지게 되었고,[24] 1929년 국보법에 따라 성곽의 보존이 결정되었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본토 공습으로 인해 많이 소실되었다.[25] 나고야성이나 오사카성 등 주요 성은 주민들의 성금[26]이나 지자체,[27] 혹은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아 복원되었다. 히메지성과 슈리성은 세계문화유산에, 히코네성은 세계문화유산 잠정등재목록에 지정되어 있다.[28][29]
모모야마 양식의 일본성
현대 일본에서는 덴슈가 남아있는 모모야마 시대 성을 하나로 묶어 현존천수(現存天守)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2025년 기준, 현존천수에 속한 일본성은 총 12개로, 이 중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성에는 히메지성, 이누야마성, 마쓰모토성, 히코네성, 마쓰에성이 있다. 각 성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히메지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던 이케다 데루마사가 1614년에 개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히메지성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혼마루를 포함한 히메지성 유적은 일본의 특별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30] 2006년에는 일본성곽협회에서 마련한 기준에 따라 일본 100 명성에 등록되기도 하였다.[31] 하리마평야의 중앙에 있는 히메지산을 이용해 만든 평산성이다. 히데요시가 3중의 천수각을 지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케다 데루마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했고, 천수각 역시 후기 망루형으로 개조했다.
- 3단 4층 구조의 천수각이 있는 평산성으로, 1층에 위쪽만큼 커다란 크기의 망루형 혼마루를 드리웠다. 오다 노부나가의 숙부인 오다 노부야스가 성곽을 건축하고, 1601년 재건축에 들어간 뒤 오와리번의 로주 나루세 마사나리가 입성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이누야마성으로 개축했다.[32] 20세기까지 나루세씨가 이 성을 관리하다가 현재는 재단법인이 소유권을 가지고 이누야마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천수각만 국보로 지정되었다.
- 158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된 오가사와라 사다요시가 후카시성을 마쓰모토성으로 이름을 바꾼 후 입성하였다. 이후 1590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로 영지를 받게 되면서 오가사와라씨의 영지도 전환되었다. 이후 이시카와 가즈마사와 이시카와 야스나가가 영지로서 다스렸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마쓰다이라씨가 1세기 동안의 간격을 제외하고 메이지 유신 때까지 영지로 지배를 했다. 1952년 7월 천수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 1603년 이이 나오카쓰가 축성한 평산성으로,[33] 천수각은 오쓰성의 천수각을 옮겨서 가져왔다. 천하보청의 일환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 지역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수전보청을 지시해 완성했다. 막말까지 후다이 다이묘의 대표였던 이이씨의 거성으로 활용되었다. 폐성령으로 메이지 시대 천수각을 제외한 성 전체를 파괴했다. 국보인 천수각, 부로, 다청로를 포함해 총 5개의 유적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34][35] 성이 있는 사적 지역은 비와호 국정공원의 제1종 특별지역으로 지정되었고, 일본 100 명성에도 지정된 상태다.
- 독립식 망루형 이중삼층의 천수각으로서, 현재 일본에 있는 천수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32] 1576년 시바타 가쓰이에의 생질이었던 시바타 가쓰토요가 축성했다고 전해지지만 니와 나가히데의 가신이었던 아오야마 무네카쓰가 성주가 되었다. 천수각은 1950년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6년에 일본 100 명성에 등록되었다.
- 호리오 다다우지가 1607년 축성에 도움을 주었던 평산성으로, 2006년 일본 100 명성에 등록이 되어 있었고, 2015년 천수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성령에 따라 천수각을 제외한 모든 성곽이 파괴되었다.
덴슈의 형태인 망루형과 층탑형에 대해서는, 예전에 일본 학계는 망루형에서 층탑형으로 변화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두 형식의 창건 시기가 서로 겹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단순히 시대적 흐름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16세기 말엽에서 17세기 초에 걸친 짧은 시기에 각 양식이 동시에 꽃피어났던 것으로 변경해서 보게 되었다.[32] 마루오카성이나 이누야마성처럼 망루형 덴슈의 경우에는 망루의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어, 성주가 주변을 ‘내려다보는’ 군사적 기능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반면 히메지성이나 마쓰모토성 등에서는 완만한 층탑형을 채택해 주변을 '아울러 볼수 있는' 정치적 측면이 더욱 중시되고 있다.[32]
근세적 쇼인주쿠리 완성
무로마치 시대 후반에 귀중한 고객을 응접하거나 고위 관료들이 내방하는 대면의례는 고위 무가에서 요구되는 중요한 의례였고, 일본의 통일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특별히 이 의례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장을 연출하는 데 있어 매우 적합했던 것이 바로 ‘쇼인즈쿠리(書院造)’라는 건축 양식이었다. 쇼인즈쿠리란 모서리가 진 기둥을 사용하고, 방 전체에 다다미를 깔며, 스기문·후스마·쇼지 등의 건구를 사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양식인데, 도코노마(床の間)나 치가이다나(違棚)·부쓰쇼인(付書院) 등을 고정적으로 마련해 내부 공간 자체에 신분과 격식을 표현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대면 의례의 장에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36]
이러한 가운데, 오히로마(大広間)는 중앙의 기둥 열에 의해 남북으로 구획되었고, 기존의 슈덴(主殿)보다 무려 네 배나 넓은 공간을 갖추고 있어, 신분 차이를 과시하면서도 많은 사람을 수용하려는 목적에 부합하는 방이었다. 에도 막부의 대목장이 된 헤이우치 마사노부가 집필한 『쇼우묘』에 따르면, 히데요시가 주라쿠다이(聚楽第)를 조영할 때 기존의 주옥(主屋) 건축이었던 ‘주전(主殿)’의 규모를 확대해 만든 것이 ‘히로마(広間)’ 건축의 시작이었다고 한다.[37] 한편 『쇼우묘』에 수록된 도면을 검토한 결과, 무가 저택의 주옥 건물 명칭이 ‘주전’에서 ‘히로마’로 바뀐 것은 1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38]
사원과 영묘


전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에이로쿠 10년(1567년)에는 도다이지 대불전이 마쓰나가 히사히데 (松永久秀) 군에 의해 불타 소실되었고, 겐키 2년(1571년)에는 히에이산 엔랴쿠지를 노부나가가 전소했다. 각지의 전국 다이묘들은 사찰과 신사에 정치적·경제적 압박을 가해 이를 통제하려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찰·신사가 자신의 지배에 종속되어 통치 체제 강화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는 그 복구를 추진하기도 했다.[32] 모리 모토나리의 에이로쿠 2년 이쓰쿠시마 신사 복흥,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겐키 2년 도사 신사 복흥, 다케다 신겐의 가이 젠코지 창건 등이 그에 해당한다.[32] 노부나가 자신도 아쓰타 신궁에 쓰이지베이(築地塀)를 봉납하고, 이세 신궁의 센구(遷宮)를 지원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히에 신사(시가현 오쓰시),히에이산 엔랴쿠지(오쓰시), 다이토쿠지, 다이고지, 묘신지(교토시 우쿄구), 도지(교토시 미나미구) 등의 복흥에 힘썼으며,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법화사(나라현 나라시)를 다시 일으켰다. 이들 복구의 대다수는 이전 시대의 전통적 양식을 재현한 것이었다. 오타는 전국 다이묘들이 추진한 사찰·신사 조영 사업에는 이러한 복고성(復古性)과 더불어 공사의 신속성을 특징으로 꼽고 있다.[39]
이 시대의 사원 건축 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재건된 도지(東寺) 금당(金堂)은 내진(内陣)과 외진(外陣)의 구분을 없애고 바닥을 토마(土間) 마감으로 처리한 ‘고대적 요소’와, 구조적으로는 가마쿠라 시대 이래로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대불양식(大仏様)’ 기법을 응용한 ‘중세적 요소’가 모두 지향된 건물으로 평가받는다.[39] 또한 이러한 구성에 의해 새로운 양식이 창조된 사례에 속하며, 통기둥(通柱)으로 한 번에 지붕의 하중을 떠받치는 방식은 후세의 대형 건축 공법에도 영향을 주었다.[39] 한편, 도지 금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호코쿠지(方広寺) 대불전을 본떴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40]
영묘 건축으로는 호코쿠묘가 있다. 1599년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안치하기 위해 교토 히가시야마의 아미다가미네(阿弥陀ヶ峰) 산록에 세워진 호코쿠묘는 벽면에서 처마 둘레에 이르기까지 조각과 채색으로 장식되었고, 지붕에는 가라하후(唐破風)와 지도리하후(千鳥破風)가 더해졌다.[39] 후지타는 게이초 9년(1604년)의 제례 모습을 그린 『호코쿠 제례도 병풍』을 참고하여 호코쿠묘가 곤겐즈쿠리를 활용한 본당을 비롯해 수많은 건물을 거느린 거대한 신사였다고 추정했다.[41] 호코쿠묘는 겐와 원년(1615년) 도쿠가와 가문이 파괴했지만, 유구로 남아있는 것에는 비와호의 지쿠부섬에 있는 호곤지(宝厳寺) 가라문(唐門), 그리고 쓰쿠부스마 신사 본전·가라문이 꼽힌다.[39] 도호쿠 지방에서는 오우 지역의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가 게이초 9년(1604년)에 기이국의 대목장을 센다이로 불러들여, 처마 아래 부분에 극채색 조각을 더하고 정면에는 지도리하후와 가라하후를 겹쳐 올린 곤겐즈쿠리를 활용하여 오사키하치만궁 사전을 건립하였다.[39] 복잡한 지붕 형식과 풍부한 장식성이 특징이며,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32]
모모야마 시대 성곽
- 마쓰에성 덴슈
- 히로사키성 덴슈
- 마쓰야마성 덴슈
- 고치성 덴슈
- 히메지성 연립천수각
- 히코네성 니노마루
- 히코네성 천칭로
- 니조성 가라몬
- 니조성 니노마루 어전
- 후시미성 유적에서 출토된 금박 기와
- 나고야성의 복원된 천수각
- 다이도쿠지 가라몬
- 니시혼간지 가라몬
- 니시혼간지 접견실
- 니시혼간지 기타노무대
- 사이쿄지 객전
- 치쿠부스마 신사 본전
- 도요쿠니 신사 가라몬
- 고다이지 오타야마(영실)
- 다이고지 산보인 대현관
- 다이고지 산보인 가라몬
- 가이바라 하치만 신사 복합사전
- 가이바라 하치만 신사 당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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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와 다실 건축
요약
관점
다도의 융성과 기타노오차노유

차(茶)의 세계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이르면 다이묘와 거상들뿐 아니라, 도시 일반 민중에게까지 퍼져나갔다. 사카이 상인 출신으로 다케노 조오에게 사사한 센노 리큐는 다두(茶頭)로서 노부나가를 섬기며 독자적인 다도구와 가이세키를 고안해 다도의 의례를 정립하고, 차도(茶道)를 확립한 인물이었으며, 이후 히데요시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42] 리큐가 추구한 것은 화려한 쇼인식 다도가 아니라, 소박하고 아무것도 갖추지 않음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초암의 와비차였다.[7]
차의 세계는 한편으로 생활 교양 문화로서 기존 문화를 포괄·통합하는 형태로 성립한 것이며, 렌가·요교쿠·노·쿄겐 같은 모임 문화와도 공존하면서 사람들에게 사교의 장을 제공하는 것으로 환영받았다.[43] 히데요시는 가쓰오카와의 화해 이후의 다이토쿠지 다회, 무가 관백의 권위를 높인 궁중 다회에 이어 덴쇼 15년(1587) 10월 1일, 교토의 기타노 신사에서 대규모 다회인 ‘기타노오차노유’를 개최하였다. 그곳에는 히데요시가 자랑하던 ‘황금 다실’이 반입되었고, 히데요시, 센노 리큐, 이마이 소큐, 쓰다 소규의 네 사람이 다두(茶堂)를 맡았고, 다석(茶席)이 설치되었다. 이 네 사람의 다석에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차 애호가들의 참여를 허용했다.[43] 이마이 소큐와 쓰다 소규는 모두 사카이의 거상 출신이었다. 이 두 사람에 리큐를 더해 ‘천하 삼종장’(天下三宗匠)이라 불렸다. 야마가미 소지 또한 사카이 상인 출신으로, 리큐에게 20년간 사사하여 비전서 『야마가미 소지기』(山上宗二記)를 남겼다. 하카타의 거상 시마이 소시츠와 가미야 소단 역시 유명한 다인이었다.[44]
다실 건축



무라타 쇼오(武野紹鷗)의 다실은 4조 반 규모로, 쇼인즈쿠리 풍의 단정한 구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38] 이에 비해 센노 리큐의 유일한 유작으로 알려진, 야마자키 덴노잔 기슭에 위치한 묘키안 내의 다이안(待庵)은 당시 상류 계층에게 사랑받던 산장이나 다실, 혹은 그 원형이 된 민가 건축을 바탕으로 한 초암으로, 세속적인 신분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니지리구치(躙口)를 갖추고 있다.[45][38] 이곳에서는 니지리구치와 흙처마, 그리고 노지(露地)를 통해 정원과 실내의 일체화를 도모하고 있으며, 겉보기에는 소박하고 협소해 보이지만, 천장의 복합적인 구성, 자유로운 창 배치, 도코노마 내부의 입구 기둥, 천장을 흙벽으로 덮은 실내 바닥 등 세부에 이르기까지 공간의 확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38] 야마자키 전투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종종 리큐 등과 함께 다회를 열었는데, 다이안 역시 이러한 다회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아쓰타는 분석했다.[46]
오다 나가마스가 교토 겐닌지 쇼덴인에 조성한 다실 죠안은, 겐닌지에서 도쿄의 미쓰이 문, 이어 가나가와현 오이소의 미쓰이 가문 별장으로 여러 차례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아이치현 이누야마시의 우라쿠엔에 위치하고 있다. 벽의 허리 마감 부분에 달력이 붙어 있는 구조에서 유래하여 '고요미바리노세키'(暦張りの席)라고도 불리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후루타 오리베의 취향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엔안(燕庵)은 오사카 전투 당시 오리베가 교토 저택의 다실을 의형제인 야부노우치류(藪内流)의 겐츄 조지에게 하사한 것이라는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46]
아즈치모모야마 시기 발달한 다실 건축 양식 중 하나로 스키야즈쿠리(数寄屋造り)가 있다. 모모야마 시대에 스키야즈쿠리는 건물의 본실과 구별되어 다도를 즐기는 '스키샤'(数寄者)를 위해 만들어진 다실을 의미했으나, 에도 시대 이후부터는 이를 기이한 물품을 편애하는 취미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일본 다서(茶書)에서도 이러한 해석을 피하려는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47] 본래 스키야즈쿠리는 이케바나를 비롯한 다양한 일본 전통 예술품이 함께 있었고,[48] 건축 양식 역시 나무를 비롯한 일본 자연에서 가져온 재료를 사용했다.[49] 스키야즈쿠리는 일본 현대까지 그 건축양식이 살아남아, 근대 이후부터는 새롭게 ‘스키샤’로 불리게 된 자이바쓰와 개인 자산가, 근대 건축가, 다도의 이에모토와 같은 집단이 이를 발전시켰다.[50]
모모야마 시대 주요 다실
- 후시미 모모야마성 내에 복원된 ‘황금의 다실’
- 고다이지 이호안 (遺芳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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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요약
관점
쇼인식 정원



예수회 소속의 수도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는 마쓰나가 히데히사의 시기산성 정원을 견문한 소감으로 '이보다 더 우아한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다케다는 이것을 전국 다이묘들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조원을 조성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보고 그 발전은 장대한 성곽 건축의 발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평가하였다.[51] 이 시기 정원은 히가시야마 문화와 무로마치 말기 문화의 영향을 받아 축조되었다.
모모야마 시대에는 불로불사를 기원하는 학·거북·봉래 등을 표현한 석조와 쇼인즈쿠리 저택이 조화를 이루는 쇼인식 정원이 다수 조성되었다. 다만 '쇼인식 정원'이라는 용어는 정원 양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니시혼간지 쇼인의 정원이 가레산스이인 데 비해 니조성 니노마루 정원은 지센식(池泉式) 정원인 것처럼, 건물과의 관계에 근거한 분류 명칭이다.[36] 쇼인식 정원의 '쇼인'은 기존의 서원이 아닌, 손님을 접대하는 다다미방을 의미한다.[52]
지샤쿠인 다이쇼인 정원(智積院大書院庭園)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창건한 쇼운젠지에 원형이 조성된 리큐 취향의 정원으로, 쓰키야마·센스이 정원(築山・泉水庭)의 선구를 이룬 귀중한 유산으로 여겨진다.[53] 이후 지샤쿠인으로 개칭된 뒤, 17세기 후반 제7세 화주가 된 운쇼(運敞)가 정원을 수복하였고, 17세기 히가시야마 제일의 정원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다이고지 산보인 정원(三宝院庭園)은 1598년 3월의 다이고의 꽃놀이를 맞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기본 설계를 행한 지천 회유식 정원이다. 정원 축조는 꽃놀이가 끝난 같은 해 4월부터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에는 다이고지의 기엔(義演)이 이를 총괄하였다. 정원 정면에 놓인 후지도이시(藤戸石)는 본래 간레이 가문인 호소카와씨의 교토 저택에 있던 유서 깊은 돌로, 아미타 삼존을 상징하는 돌로 여겨지며, 히데요시가 주라쿠다이에서 옮기게 한 것이다.[54]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규모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으나, 기엔은 히데요시의 구상을 발전시켜 20여 년에 걸쳐 개수를 거듭하였고, 또한 겐테이 등 당대 일류 정원사들을 모아 대형 석재를 풍부하게 사용한 호화로운 연못 정원을 완성하였다.[36] 정원 내 연못에는 거북섬(亀島)과 학섬(鶴島)이 배치되고 다리가 놓여 있으며, 정원 남동쪽에는 다실 침류정이 자리하고 있다.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구성으로 알려진 산보인 정원은 국가 지정 특별사적·특별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54]
니조성 니노마루 정원은 게이초 연간에 니조성 건축 당시 함께 조성되었다. 쇼인즈쿠리 건축은 대면 의례의 장소로 중시되었으며, 이러한 대면소에서는 건물 내부에서의 고정된 착좌 위치로부터의 시선이 특히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니노마루 고텐은 간에이 3년(1626년) 고미즈노오 상황의 행행을 계기로 개수가 이루어졌고, 이에 맞추어 정원 남측에 고교 고텐(御幸御殿)이 새로 건립되었다. 오노는 니노마루 정원을 다이고지 산보인 정원과 마찬가지로 천하인의 미의식을 보여 주는 유구로 평가하고 있다.[3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니조성과 니노마루 정원을 묘사한 '낙중낙외도'(洛中洛外図)가 있으며, 니노마루 정원은 1953년 일본의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었다.[55]
로지 (露地)
오차노유가 융성함에 따라, 이에 부응하는 형태로 정원의 조성 또한 활발해졌다. 다츠사부로는 쇼인식 정원에서 보이는 대규모의 개방적인 공간에 비해, 다실로 이르는 로지는 마치 닫힌 공간과 같은 양상을 띠어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고 평가했다.[56] 로지의 시초로 여겨지는 사례로는 『산조 소지기(山上宗二記)』에 수록된 도면 가운데, 다케노 쇼오(武野紹鷗)의 차 와시쓰와 관련된 와키쓰보노우치(脇坪ノ内)가 있다.[57] 해당 도면에는 차 와시쓰 전면에 스노코연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 멘쓰보노우치(面坪ノ内), 측면에 '와키쓰보노우치'로 불리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나, 그 구체적인 장치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센노 리큐의 와비차는 이른바 도심 속의 산거를 추구한 것으로 생각되며, 로지의 성립 또한 리큐의 시대에 구성 양식이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58] 이에 비해 후루타 시게나리는 디딤돌의 배치에 대해 사분의 기능에 육분의 경관을 더해야 한다고 말하며 미관을 중시하였다. 고보리 마사카즈는 세부 디자인에 직선을 도입하고, 디딤돌기레이사비를 선호하며 이를 지향하였다.[58]
모모야마 시대 주요 정원
- 이치노다니 아사쿠라씨 유적의 유도노아토 정원
- 치샤쿠인 정원
- 니조성의 니노마루 정원
- 쇼카도의 운지
- 도후쿠지의 상락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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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요약
관점
장벽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성곽이나 사원 내부의 벽, 후스마, 병풍과 천장에는 금박을 바른 바탕 위에 푸른색과 녹색의 힘찬 선으로 채색한 다미에(だみえ) 기법을 통해 화려한 장벽화를 그리게 되었다. ‘다미에’는 본래 색채를 사용한 회화를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수묵화에 대비되는 용어이다.[59] 다미에 가운데 바탕 전체에 금박을 입히고 청색 계통으로 짙게 채색한 작품은 금벽화(金碧画)라 불리며, 이는 무로마치 시대에 그 기원을 둔다.[59] 장벽화에는 다미에(금벽화)와 수묵화 두 종류가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금벽화는 건축 내부에서도 공적인 공간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고, 사적인 공간의 장식에는 수묵화를 선호했다.[60]
천하 통일의 기운이 넘쳐 흐르던 시대에는 특히 황금색이 사랑받았고, 짙은 색채와 함께 힘이 넘치는 회화를 요구했다.[61] 성곽은 새로운 권위의 상징이었지만 그 내부 역시 권위를 드러내야 했고, 황금빛의 반짝임은 그러한 효과를 발휘하는 데 훌륭한 수단이었다. 또한 금색을 선호한 이유에는 단지 천하인이나 다이묘들의 미적 취향을 만족시켰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충분한 조명을 확보할 수 없었던 자시키에서 꽤 큰 조명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기도 했다.[62] 그 안에서는 화조풍월 등 일본풍의 그림이나 당사자·용호 등 송·원대 화풍에 중국풍 주제를 담은 그림이 인기였다. 금운(금빛 구름)이나 금색 배경이 대화면 속 풍경을 구획하고, 화제로 삼은 대상을 실제 크기로 그려 압도적인 현장감을 얻고자 했다.[61]
금벽 장벽화의 중심이 된 것은 가노파(狩野派)였다.[61] 가노파는 이전부터 일본 고래의 야마토에 색채주의와 무로마치 시대에 성행한 수묵화의 구성주의를 종합하려는 흐름을 이어왔다.[5] 가노 모토노부의 손자인 가노 에이토쿠는 이를 계승하여, 풍부한 색채와 힘찬 선, 웅대한 구도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장식화를 완성했다.[5] 에이토쿠는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를 섬겼으며, 그의 그림은 주전(主殿)이나 광대한 대공간에서 천하인과 가신들이 그림 속 자연과 일체가 되어,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듯한 연출을 담당했다.[61] 그런 의미에서 장벽화는 뛰어난 정치적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에이토쿠는 암수 한 쌍의 사자를 그린 <당사자도 병풍>, 노부나가가 우에스기 겐신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 <겐지모노가타리 병풍>과 <낙중낙외도 병풍>, 그리고 <히노키도 병풍>, <화조도> 등 많은 걸작을 남겨 가노파 전성의 기초를 닦았다. 에이토쿠와 그의 문하 화가들은 안즈츠성, 오사카성, 주라쿠다이의 장벽화를 맡았으나, 에이토쿠 자신의 필적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61] 그가 안즈츠성 천수각 2층부터 7층 각각에 그린 장벽화의 주제를 적은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수는 방대하며 불화 계통의 주제, 유교적 화제뿐만 아니라, 인물과 화조, 봉황, 용과 호랑이,사자 등 신성한 동물(영수, 霊獣)을 소재로 한 작품이 특히 많았다.[4][7]
히데요시의 소년 시종에서 에이토쿠의 문하가 된 가노 산라쿠는 에이토쿠의 양자가 되어 그의 화풍을 계승했다. 산라쿠의 작품으로는 장식성이 높은 금벽 장벽화인 <모란도> 그리고 수묵화 <송매도>가 특히 유명하며, 모두 다이가쿠지에서 소장하고 있다. 에이토쿠의 후계자 중 에도 막부에 봉직한 가노파는 에도 가노(江戸狩野)라 불렸고, 교토에 남은 산라쿠의 계통은 교 가노(京狩野)라고 불렸다.[63]


가이호파의 시조로 알려진 가이호 유조는 북오미 지역의 센고쿠 다이묘였던 아자이씨를 섬긴 가문 출신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오타니성 공략으로 일족이 멸문했으나, 어린 시절 출가해 교토 도후쿠지에 있던 유조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중국 남송의 양해와 안휘의 화풍과 무로마치 수묵화를 체득했고 가노 에이토쿠 등으로부터 다양한 화풍을 익혔다.[64] 유조는 짙은 채색을 활용한 장식적 작품뿐 아니라 특히 수묵화에서 개성이 강하고 뛰어난 작품을 다수 남겼다. 겐닌지 대방장에 그린 산수도, 그리고 같은 절에 남아 있는 죽림칠현도, 금기서화도, 운룡도, 화조도 등 방대한 작품군이 대표적이다. 화훼도, 삼산·한산습득도, 금기서화도 등은 묘신지에 보관되어 있다. 이후 2대인 가이호 유세츠부터 가이호파는 궁중 어용화가로 활동하게 되었다.[64]
하세가와파의 시조 하세가와 도하쿠 역시 아들 하세가와 규조와의 합작으로, 치샤쿠인에 다수의 금벽화를 남겼다. 대표작 단풍도는 거대한 단풍나무 아래에서 꽃들이 솟아오르듯 피어나는 장면을 비롯해, 가노파라면 생략했을지도 모를 섬세한 세부 묘사, 금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공간 구성, 잔향을 남기는 배경 등 다양한 표현 기법을 집대성한 걸작으로 평가된다.[60] 노토에서 태어나 사카이의 상인 문화와 접촉하며 교토에서 수묵화 기량을 갈고닦은 도하쿠는 수묵화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다수 남겼다.[65] 치샤쿠인의 후스마 그림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송림도병풍은 화려한 모모야마 회화 속에서도 드물게 고요하고 세련된 맛을 담은 수묵화의 걸작으로 꼽히며, 높은 조형적 완성도와 풍부한 서정미로 유명하다.[65] 도하쿠는 셋슈의 제자였던 도슈에게 배웠고, 말년에는 자신의 작품에 ‘셋슈 5대’라고 적어 스스로가 셋슈의 계보를 잇는 인물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주라쿠다이 내부 장식에서 가노파와 작업을 분담했으나, 가노파와 충돌해 에이토쿠를 비난한 탓에 그 이후 궁정 건축 관련 제작에서는 배척되었다.[60]
모리씨를 섬긴 무인 화가 운고쿠 도간 또한 당대 명망 있는 화가로, 수묵화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본성은 하라였으며, 히젠국 후지쓰군 노고미의 성주 하라 나오이에의 차남으로 태어나 마쓰우라씨를 섬겼다. 아버지가 전사한 뒤 모리 데루모토에게 넘겨졌고, 거기서 셋슈의 걸작 산수장권을 모사했는데 그 뛰어난 솜씨에 데루모토가 크게 감탄했다고 전해진다.[64] 1593년, 데루모토는 도간에게 녹 100석과 장권을 하사하고, 야마구치에 있던 셋슈의 거처였던 운고쿠안의 관리를 맡겼다. 도간은 스스로를 ‘셋슈 말손(末孫)’이라 칭하며 셋슈파의 정통을 자처했고, 하세가와 도하쿠와 겨루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다이토쿠지 황매원 장벽화, 도후쿠지 후몬인 장벽화 등이 있다.[64]
풍속화

모모야마 시대에는 종래의 종교화에서 벗어나 도시와 서민의 생활·풍속을 소재로 한 낙중낙외도, 제례도 등 풍속화가 활발히 그려졌으며, 남만인을 화제로 한 남만병풍도 제작되었다. 모리야는 풍속화는 넓은 의미에서는 고대부터 존재해 왔지만 근대적 의미의 풍속화의 효시로 관풍도(観楓図)를 꼽았다.[66]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이르러 <월차풍속도>(月次風俗図) 등에서 보이던 화면 속의 부수적 배경이 아니라, 풍속 그 자체가 독립된 주제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모모야마 시대에는 화조화 등에서도 자연의 맥락에서 분리하여 꽃·새·사물만을 화제로 삼는 표현이 이루어졌으며, 인물화에 있어서도 종래처럼 고상한 인물에 한정되지 않고, 야로·와카슈·유나 등 서민에게 친숙한 사람들이 묘사되기에 이르렀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 배경을 거의 그리지 않고 인물만을 묘사한 작품도 나타났다.[67]

〈낙중낙외도병풍〉은 다이에이 5년(1525년)의 레키하쿠 갑본을 가장 이른 예로 하여, 약 60종 70여 점이 전해지며, 다수의 화가들에 의해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 초기까지 제작되었다.[68] 16세기 작품인 <월차풍속도병풍>(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은 공가·무가·서민의 생활을 12개월의 연중 행사로 나누어 생동감 있게 묘사한 팔곡 일쌍의 병풍화이다. 이 작품은 가노파가 풍속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초기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되나, 시대적으로는 아시카가 쇼군가의 쇠퇴가 두드러지던 시기와 겹친다.[69]
풍속도는 후원층의 요구에 부응하여 다양한 화면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나,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병풍 형식이었다. 병풍은 후스마나 벽에 그려진 회화와 달리, 기본적으로는 가구의 한 종류로서 이동이 가능하고, 자유롭게 연출할 수 있으며, 간편하게 철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가 생겼을 때 즉각적으로 담소와 교류의 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시대에 병풍화는 유흥과 사교의 도구로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다.[51] 또한 가노파 화가들도 다수의 풍속화를 제작하였다. [69]
주요 작품
- 가노 에이토쿠 <화조도병풍>
- 가노 에이토쿠 <선인고사도병풍>
- 가노 에이토쿠 <낙중낙외도병풍>
- 가노 에이토쿠 <현종·양귀비 유원도 병풍>
- 가노 에이토쿠 <유도 후스마>
- 가노 에이토쿠 <허유소부도>
- 가노 산라쿠 <모란도 후스마>
- 가노 산라쿠 <홍매도 후스마>
- 가노 산라쿠 <용호도병풍>
- 가이호 유쇼 <죽림칠현>
- 가이호 유쇼 <화조도>
- 가이호 유쇼 <달마도>
- 하세가와 도하쿠 <풍도>
- 하세가와 도하쿠 <송추초도>
- 하세가와 도하쿠 <송림도병풍> 좌측
- 하세가와 도하쿠 <송림도병풍> 우측
- 마쓰다 모토요시의 비단 바탕 채색 자화상
- 가노 나가노부 <화하유락도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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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조각 분야에서는 불상 조각이 쇠퇴하고, 대신 저택의 문짝이나 난간 위쪽 공간(란마)에 장식하는 조각이 활발해졌다.[70] ‘란마(欄間)’란 문이나 장지를 떠받치는 가로목(가모이)과 천장 사이의 공간에 채광과 통풍을 위해 끼워 넣은 판재를 말한다. 성곽이나 저택 내부를 장식한 란마 조각에는 투조(透し彫) 기법도 사용되었다.[70] 또한 건물 외관을 장식하는 파부(破風)에도 다양한 형태적 장치와 조각이 더해졌다. 현실성과 실용성을 중시한 도요토미·모모야마 시대에는, 조각이 천평 문화나 가마쿠라 문화에서처럼 독립된 작품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조각은 저택 건축의 부속물이라는 성격이 분명했으며, 일상생활과 가장 밀착한 조각 작품들이 탄생한 것이다.[70] '노'와 같은 새로운 문화 예술이 발달함에 따라 노에 사용되는 가면을 조각하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이 시기 불상의 경우 보다 현실적이거나 역동적인 자세를 취한 불상이 다수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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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
요약
관점
자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유약을 바른 시유 도기의 산지였던 세토 가마와 미노 가마를 중심으로, 유약을 바르지 않은 무유 도기의 산지로 발전해 온 비젠·시가라키·탄바·이가의 각 가마, 그리고 조금 뒤늦게 가라쓰에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가 만들어졌다.[71][72] 니키는 종래 고급 관료들이 쇼인에서 다도를 행하며 자기를 덴모쿠 찻잔이나 청자 찻잔과 같은 이른바 ‘가라모노’(唐物)로 인식했던 것과 달리 와비차의 유행으로 인해 다도가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선과 일체가 되어 인간 형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다구 또한 수수하고 불완전한 ‘조소의 미(粗相の美)’를 지닌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73]
16세기 후반에는 특히 미노 가마의 발전이 두드러져, 기종이 다양화되고 풍부한 색채 감각을 지닌 작품이나 철화 문양을 그린 작품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장석만으로 백유를 만들어 낸 시노야키는 다른 색의 첨가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보이며, 기면의 장식과 색조에 따라 무지 시노, 에시노, 네리아게 시노, 네즈미 시노, 슈 시노, 베니 시노 등으로 구분된다.[71]
한편 비젠·시가라키·단바·이가 등 무유 도기의 산지로 발전해 온 각 가마에서도 일상용품뿐 아니라 다도용 도기가 제작되었다. 라쿠야키는 가장 오래된 교야키의 하나로, 모모야마 시대에 교토의 도공 조지로(長次郎)가 시작한 저화도 소성의 다도용 도기이다. 이 시기에는 종래 일본에 없던 지상식 연방식 노호리 가마에서 제작된 시유 도기로서 히젠의 가라쓰 도기가 등장하였다.[74]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본에 끌려간 도공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조선과 유사한 자기가 만들어졌고,[75] 17세기 초에는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76]
칠장
장식용 마키에(蒔絵)가 시문된 가구·조도품에서도 장식성이 강한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기타노만도로코(北政所, 고다이인)가 창건한 고다이지가 소장한 마키에, 이른바 「고다이지 마키에」는 모모야마 시대를 대표하는 마키에 작품군이다. 히다카는 고다이지 마키에를 가을풀 표현에서 드러나는 서정성, 화면 구성의 너그러움, 평이하면서도 세련된 모티프의 묘사, 힘과 유연함을 함께 보여 주는 필선 등에서 고다이지 마키에는 동시대 회화와 통하는 여러 특징을 지니며, 혁신성과 더불어 강한 회화성을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77]
염직물

복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섬유 제품에는, 실을 염색한 뒤 직조하여 천을 만드는 경우와 염색하지 않은 실로 직조한 뒤 천을 염색하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전자를 직물, 후자를 염색 작품(염물)이라 부른다.[78] 무로마치 시대 말기 무렵인 16세기 중반부터 일본의 염직 공예는 해외 염직품의 영향을 받아 소재와 기법이 점차 다양화되었다. 중국에서 수입된 자수 작품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고소데 등에 정교한 자수가 시작되었으며, 자수와 금박을 병용한 ‘누이하쿠'(縫箔)라는 장식 기법도 등장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쓰지가하나’로 불리는 홀치기 염색을 주로 한 일련의 염물이 나타나 큰 유행을 이루었다. 이는 전국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번성하였다가 이후 급속히 사라진 기법으로, 현존 유물 수가 300점에도 미치지 않을 만큼 적다.[79]
쓰지가하나는 바느질 조임 홀치기 염색을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가키에(描絵), 자수, 스리하쿠(摺箔) 등의 장식을 더한 염색 기법이다. 바탕 천으로는 이 시대에 특징적인 네리누키지(練貫地)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경사에 생사(生糸)를, 위사에 정련한 비단실(練糸)을 사용해 짠 직물이다. 제작된 제품의 종류로는 고소데와 도후쿠(胴服)가 대부분을 차지한다.[79]
노 관련 도구들
노멘(能面) 분야에서는, 모모야마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제일'의 호칭을 내린 가면의 명인 데메젠 칸요시미쓰가 에치젠에 등장하였다.[80] '천하제일'이라는 칭호는, 히데요시가 부하 무장의 전공을 치하할 때 당초에는 센노 리큐에게 감정하게 한 다구를 하사하던 것에서 출발하였으나, 이후에는 노멘을 포상으로 수여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 시대에는 제칸 일문 외에도 손지로(孫次郎), 가와치 이에시게(河内家重) 등 ‘명인’으로 불린 노 가면 장인들이 배출되어 오늘날의 노 가면의 기본 구성이 확립되었으며, 더 나아가 노 가면 자체가 예술성이 높은 공예 작품으로 승화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81]
노(能) 의상 또한 시대의 취향을 반영하여 화려하고 찬란한 양식이 나타났다.[81] 한편 배역의 성격 등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의상이 제작되었으며, 장식 기법과 문양 또한 매우 다양하였다. 상반신을 덮는 의복에는 우와기(表着)와 기쓰케(着付)가 있었는데, 기쓰케는 우와기와 속옷 사이에 착용되었다. 우와기에는 여역이 착용하는 가라오리(唐織), 남역의 카리기누(狩衣) 등이 있으며, 기쓰케에는 여역의 스리하쿠(摺箔), 남역의 아쓰이타(厚板), 그리고 남녀 공용의 누이하쿠(縫箔) 등이 있었다. 히타타레(直垂), 카리기누, 노오시(直衣) 등은 노 의상과 일반 복식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는 명칭이지만, 초켄(長絹)이나 미즈고로모(水衣)처럼 노 의상에 특유한 명칭도 존재한다.[82] 또한 가라오리, 스리하쿠, 누이하쿠 등은 염직 기법의 명칭이 그대로 의상 명칭으로 사용된 사례이다. 중국의 가라오리 직물 기법은 일본에서 정착하여, ‘가라오리’는 직물의 명칭이라기보다 의상의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81] 형태적으로 보면 가라오리, 스리하쿠, 아쓰이타, 누이하쿠 등은 고소데형인 반면, 초켄, 미즈고로모, 카리기누 등은 광소매형의 형태를 띤다. 또한 모모야마 시대의 가라오리 고소데는 몸판 폭에 비해 소매 폭이 현저히 좁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82]
무기 제작
남만무역을 통해 철포가 전래됨에 따라, 전투의 양상과 도검의 형태는 급속히 변화하였다. 철포에 대응하기 위해 갑옷이 강화되었고, 대규모 전투가 증가하면서 도검 역시 장시간의 전투에 견딜 수 있도록 종래의 한 손으로 쥐는 형태에서 양손으로 자루를 잡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신폭이 넓고, 두께가 두꺼우며, 대절선(大切先)을 지닌 도검이 등장하였다. 이는 ‘게이초 신도’를 낳는 기반이 되었다.[83] 한편 대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식별하기 위한 변형 투구인 가와리카부토가 무장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84]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우치가타나를 다치처럼 칼날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허리에 차는 반다치 고시라에(半太刀拵)의 양식이 채택되었다. 이는 다치에서 우치카타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도 여겨진다. 허리에 고정하는 구리카타(栗型)는 우치가타나 양식인 반면, 칼집의 도장 금구(刀装金具)에는 다치 양식이 혼재하는 등, 고시라에 역시 우치가타나와 다치의 절충형을 이루는 사례가 많다.[85]
갑주 분야에서는 철포의 사용과 전법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보다 기동성이 뛰어나고 간편하며, 경량이면서도 견고한 갑주가 요구되었다. 이렇게 성립한 근세 초기 이후의 갑주를 당세구족(当世具足)이라 한다. 무로마치 시대까지의 전통적인 갑주는 소자네로 구성되었으나, 당세구족에서는 소자네를 가로로 연결하는 대신, 한 장의 길고 좁은 철판을 띠 모양으로 두드려 만든 이타자네(板札)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86]
남북조 시대부터 사용된 대형 창인 대신창은 무로마치 시대 말기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군기류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87] 남북조 시대에 대타치의 개량형인 나가마키가 등장하였는데, 모모야마 시대까지 널리 사용되었다.[88]
금속 공예
금공 분야에서는 전대에 이어 도검과 갑주는 물론, 솥과 등롱 등 다양한 작품이 제작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일본 거울의 명품으로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한 「오동·대나무무늬 거울」이 잘 알려져 있다.[89] 지름 22.1센티미터의 백동 주조품으로, 뒷면 외구 하부에 '천하일 아오야 덴쇼 16'(天下一青家次天正十六)이라는 주조 명문이 새겨져 있어, 덴쇼 16년(1588년)에 아오야 이에쓰구(青家次)가 주조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에쓰구를 당주로 한 아오야 가문은 대대로 교토 데라마치 이치조에 거주하며 궁중 어용 거울 장인(禁裏御用鏡師)을 맡아 온 집안이었다.[89] 거울의 뉴(鈕)는 큰 거북등무늬를 중심으로 꼬리·머리·사지가 여섯 방향으로 뻗은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문양은 이를 중심으로 오동나무 가지와 대나무를 화면 전체에 흩뿌리듯 배치하고 있다. 주조된 살집의 볼륨이 높고 각이 살아 있어 극히 입체감이 뛰어난 명품으로 평가되며, 고요제이 천황의 소장품이었다고 전해진다.[89]
모모야마 시대 공예품
- 가을풀 마키에 쓰노다라이(도쿄국립박물관)
- 가와리가부토
- 시가라키야키
- 시노 스이츄
- 네즈미시노 쿠사카몬 요호코즈케
- 가라오리의 노 복장
- 오동나무와 대나무무늬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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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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