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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베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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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베네토(이탈리아어: Vittorio Veneto)는 이탈리아 베네토주의 트레비소도에 위치한 코무네(지방자치단체)이다. 피아베강과 리벤차강 사이에 위치했다.
알파고, 벨루노, 카펠라마조레, 콜레움베르토, 코넬리아노, 프레고나, 리마나, 레비네라고, 산피에트로디펠레토, 타르초 등과 지자체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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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비토리오베네토는 1866년에 체네다(Cèneda)와 세라발레(Serravalle) 등 지자체들이 하나의 지자체로 통합되면서 생겼으며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1918년 11월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가 보통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로 알려져 있으며, 도시의 명칭은 1923년 7월에 공식적으로 바뀐 것이다.[1][2] 19세기 말을 시작으로, 현재 비알레델라비토리아와 연결되던 도로를 주변으로 외각 지대가 만들어졌으며, 이에 따라 통합은 물리적인 차원에서도 이루어졌고, 시청 건물 자체가 정확히 중간 지점에 배치되었다.[3] 그럼에도 이 도시는 여전히 일정한 이중성을 보이고 있으며, 실제로 서로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네다와 세라발레는 매우 뚜렷하게 구분되는 역사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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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비토리오베네토에서 북쪽으로 불과 10km 거리에 있는 라피시나 계곡 (Lapisina)에 수원이 위치한 메스키오강이 세라발레에서 시작해 메스키오 구를 거쳐 도시를 통과한다. 비토리오베네토 북쪽은 커다란 비센틴산을 포함해 산맥들이 펼쳐져 있다. 동쪽에는 피초크산을 정산으로 하고 있는 칸실로 국립공원 및 숲이 위치해 있으며 서쪽에는 발도비아데네를 포함한 구릉 지대가 펼쳐지는데 이곳에서 프로세코 포도주가 제조된다. 남쪽에는 상업 도시 코넬리아노가 있다.
역사
요약
관점
고대
고대 시대에 이 지역에는 베네티족과 추정 상 켈트족이 거주했을 것이다. 알타레산(Altare)은 베네티족, 켈트족, 로마인들이 성소로 사용하곤 했었다.
기원전 1세기 기간 아우구스투스가 벨루놈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에 '카스트룸 케네텐세'(Castrum Cenetense)를 건설했으며 현재 세라발레의 중심부가 있는 곳으로 오피테르기움 및 베네토 평야 남쪽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카스트룸 남쪽 가까운 곳에서 '비쿠스'라 불리는 취락을 세웠으며 현재 체네다와 메스키오가 위치한 곳이다. 정확한 경로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포스투미아 가도에서 북쪽 클라우디아 알티나테로 이어지는 도로가 카스트룸과 비쿠스의 동쪽 측면을 따라 지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전형적인 로마의 토지 측량 (켄투라티오)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카르디네스'는 오늘날의 Via Rizzera와 Via Cal Alta (카펠라마조레)에 해당하며, '데카마누스'는 Via Cal de Livera로 확인된다.[5] 이는 체네타가 로마 시대에 단순한 비쿠스 이상이었음을 암시한다.
고대 후기
세라발레 남쪽 끝이자, 비토리오베네토의 북동쪽에 있는 오래된 성당 Pieve di Sant'Andrea in Bigonzo는 4세기 무렵 이 지역에 기독교가 존재했음을 확인해준다.
5세기 초, 호노리우스 황제는 체네타(Ceneta)의 백작(comes)으로 마르켈루스라는 인물을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체네타와 세라발레는 아틸라에게 초토화 된 베테티아의 거점들이었으나, 이후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통치 때 재요새화가 이뤄졌다.[6]
비잔티움 시대 작가 아가티아스 스콜라스티쿠스(Agathias Scholasticus)[7]와 더불어 인접한 발도비아데네 출신의 라틴어 시인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8] 등은 6세기에 체네타의 존재를 목격한 이들이다. 아가티아스는 유스티아누스의 고트 전쟁 기간에 체네타가 동고트족, 프랑크족, 비잔티움 사이에 어떻게 넘어가게 되었는가를 기술했다.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은 동고트족으로부터 베네티아를 장악한 뒤,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의 정복으로 관심을 돌렸다. 553년 봄, 나르세스가 동고트족과 교전하는 동안, 레우타리 부켈린 형제가 이끄는 프랑크 군대가 베네티아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체네타로 이동해 554년 봄 어느 시기까지 그곳을 점거하고 있었다.
568년,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체네다는 별 수 없이 비잔티움으로부터 이들에게 점령당했다. 랑고바르드 사회 및 군사 식민지인 '파라'(fara)가 체네다 북쪽 및 파라디솔리고 서쪽에 있는 파라달파고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무렵이었거나, 혹은 그보다 다소 뒤의 시기에 체네다(Ceneda)는 랑고바르드의 36개 공국 가운데 하나의 공작좌로 지정되었을 것이다. 랑고바르드족은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전략적 지점의 산에 있는 체네다의 중심부 인근에 있는 '산 마르티노 성'이라 불리는 성을 세웠다. 667년경, 체네다 공작령이 분명히 존재했었고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에 따르면 랑고바르드족에 오데르초가 유린 당하고 나서 오데르초의 일부가 체네다에 합해지면서 규모가 커졌다.[9]
685년에, 랑고바르드의 왕 그리모알트 1세는 체네다를 하나의 교구로 조직하고, 폐지된 오데르초 교구가 관할하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그에 속하도록 배정하였다. 체네다 교구는 아퀼레이아 총대주교구의 광역 광할권 하에 있었다. 공작의 성이 세워졌던 바로 그 고지의 기슭에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현재 대성당에 성물이 안치되어 있는 오데르초 주교 성 티치아노는 세라발레 출신의 동정 순교자 성 아우구스타*와 함께 교구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어 있다.
카롤링거 시대
774년 랑고바르드족이 패퇴하면서, 체네다는 프랑크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체네다 공작은 다음 해에 치비달레, 트레비소, 비첸차 등 랑고바르드 공작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때도 샤를마뉴에 대한 충성을 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중세

994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3세는 체네다 주교에게 백작의 작위와 특권 및 체네다의 임시 영주라는 권한을 부여했다. 12~14세기 초까지는 체네다와 세라발레에 있어 격동의 시기이었다. 이 시기에, 체네다 주교는 백작의 역할을 강제 받았고, 이에 따라 북부 이탈리아의 정치에 관여를 하였고 심지어는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는 롬바르디아 동맹에 가담하기도 했다. 체네다는 또한 인근 지역들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고 1147년에는 트레비소의 공격을 받았다. 교황의 중재로 성 티치아노의 성물을 포함해 도난당했던 물품들을 반환 받을 수 있었다. 1174년, 세라발레가 다 카미노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체네다와 세라발레는 이후 다 로마노 가문과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들 사이에서 지배권을 둘러싸고 다투어지게 되었다. 1328년, 이 지역 일대는 스칼리제리의 손에 들어갔다.[6]
1307년, 프란체스코 람포니 주교는 코르바네세, 아르판타, 콜마오르, 프라타 등을 포함한 타르초 백작령 (카스텔누오보)를 대가로 포르토부폴레 지역을 톨베르토 다 카미노에게 양도했다.
베네치아 시대

1389년 12월 19일, 체네다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평화적으로 합병되었다. 체네다의 주교는 여전히 백작으로서 권한을 유지했다. 그렇지만, 1447년과 1514년에 주교였던 프란체스코와 올리비에로 등은 베네치아 공화국에 체네다 지역 내 세속적 임명권을 양도하고 체네다 자체와 몇몇 저택에 대한 권한을 자신들과 그 후임자들을 위해 확보했다. 백작으로서 체네다 주교들의 특권은 1768년에 공화국에 의해 최종적으로 박탈되었다.
베네치아 통치 시기, 체네다 도심 개발은 대성당을 주변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 지역은 주로 농업 중심으로 남아 있었으며, 주택들은 널리 흩어져 있거나, 때로는 아주 작은 집단을 이루어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1337년에 베네치아의 지배에 들어간 세라발레는 치하에서 가장 큰 번영을 이루었고, 경제적·도시적 발전 면에서는 체네다를 능가하기까지 했다.
1411년, 피포 스파노가 이끄는 헝가리 군대가 체네다를 공격하여 교회 문서고를 파괴했다. 체네다와 세라발레 모두 캉브레 동맹 전쟁의 피해를 겪었다.
베네치아 시대에 거쳐 체네다에서 사당한 유대인 공동체가 성장했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대본 작가 로렌초 다 폰테가 체네다 출신의 유대인이었으며, 천주교로 세례를 받았을 때 당시 체네다의 주교 이름을 썼다.
나폴레옹 시대
1797년 3월, 앙드레 마세나의 프랑스군이 이곳에 들어오며 베네치아 통치를 끝냈다.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따라,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1805년부터 1814년까지 체네다와 세라발레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오스트리아 시대
나폴레옹 몰락 이후, 이 지역은 베네티아 나머지 지역과 함께 오스트리아 제국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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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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