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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

미국의 음악가, 피아니스트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빌리 조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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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마틴 "빌리" 조엘(본명: William Martin "Billy"Joel, 1949년 5월 9일 ~ )은 미국 싱어송라이터이자 피아니스트이다. 1973년 동명의 대표곡에서 따온 "피아노 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조엘은[1][2] 1970년대부터 솔로 아티스트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1971년부터 1993년까지 팝과 록 장르에 걸쳐 12개의 정규 음반을 발매했으며, 2001년에는 한정판 클래식 작곡 음반을 발매했다. 전 세계적으로 1억 6천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조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음악가 중 한 명이며,[3] 미국에서는 네 번째로 많은 음반을 판매한 솔로 아티스트이다.[4] 그의 1985년 컴필레이션 앨범 《Greatest Hits – Volume I & Volume II》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이다.[5]

간략 정보 빌리 조엘Billy Joel, 기본 정보 ...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나 롱아일랜드 힉스빌에서 자랐으며,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음악을 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밴드 더 해슬스아틸라에서 잠깐 활동했다. 이후 패밀리 프로덕션과 음반 계약을 맺고 1971년 데뷔 앨범 《Cold Spring Harbor》를 발매하며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1972년, 필라델피아에서 진행된 라디오 라이브 공연에서 부른 〈Captain Jack〉이 인기를 끌자 컬럼비아 레코드는 빌리 조엘에게 관심을 가진다. 이후 컬럼비아 레코드 사와 새로운 음반 계약을 맺고, 1973년에 2집 《Piano Man》을 발표했다. 1974년 《Streetlife Serenade》와 1976년 《Turnstiles》발매 이후, 1977년에 발매한 정규 음반 《The Stranger》는 좋은 평가를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좋은 기록을 달성했다. 이 음반은 컬럼비아 레코드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1천만 장 이상 판매되었고, 〈Just the Way You Are〉,〈Movin' Out (Anthony's Song)〉, 〈Only the Good Die Young〉, 〈She's Always a Woman〉 등 인기 있는 싱글을 배출했으며, 콘서트에서 주로 부르는 〈Scenes from an Italian Restaurant〉과 〈Vienna〉 등 빌리 조엘의 인기 곡들이 포함됐다.

1978년 발매된《52nd Street》는 빌리 조엘이 처음으로 빌보드 200 차트 1위에 달한 음반이었다. 1980년 《Glass Houses》는 록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히기 위한 시도였으며, 이 음반에는〈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빌리 조엘의 첫 빌보드 핫 100 1위 싱글), 〈You May Be Right〉, 〈Don't Ask Me Why〉, 〈Sometimes a Fantasy〉가 포함되어 있다. 1982년에 발매한 《The Nylon Curtain》은 서정적이고 멜로디적으로 더욱 야심찬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됐다. 1983년 발매된《An Innocent Man》은 1950년대의 리듬 앤 블루스두왑과 같은 빌리 조엘이 성장하면서 들었던 음악 장르에 대한 헌정의 의미를 담은 음반이었다. 이 음반에는 빌리 조엘의 유명한 곡인 〈Tell Her About It〉, 〈Uptown Girl〉, 〈The Longest Time〉이 포함되었다. 빌리 조엘은 1993년에 《River of Dreams》를 발매한 이후 스튜디오 음반 작업에서 은퇴했지만, 2001년에 그가 작곡하고 한국계 영국인 피아니스트 주형기가 연주한 클래식 작품들을 담은 클래식 음반《Fantasies & Delusions》를 발매했다. 1988년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올리버와 친구들》에서 더저 역의 목소리 연기를 맡아 〈Why Should I Worry?〉를 불렀고, 《행복한 인질》(1983), 《그들만의 리그》(1986), 《허니문 인 베가스》(1992) 등 여러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했다.[6] 이후 2024년 싱글 〈Turn the Lights Back On〉을 발표하며 다시 새로운 음악 작곡을 시작했다.

빌리 조엘은 전 세계적으로 라이브 공연 투어를 펼쳤다. 1987년에는 미국 록 가수 최초로 소련에서 록 투어를 개최했다. 빌리 조엘은 미국에서 33개의 Top 40 히트곡을 기록했으며,[7] 이 중〈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Tell Her About It〉, 〈We Didn't Start the Fire〉의 세 곡은 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그는 23개의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고, 《52nd Street》로 올해의 앨범상을 포함하여 6개의 상을 수상했다. 1992년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 199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8], 2006년 롱아일랜드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1년에는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에서 조니 머서 상을 받았고[9], 2013년 케네디 센터 아너스에서 표창을 받았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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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윌리엄 마틴 조엘은 1949년 5월 9일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11] 그가 한 살 때, 가족이 롱아일랜드오이스터 베이 타운에 있는 힉스빌로 이사했다. 빌리 조엘과 그의 부모가 입양한 사촌 주디와 함께 자랐고,[12] 근처 레빗타운의 주택들과 비슷한 평범한 집에서 자랐다.[13]

어머니 로잘린드(1922–2014)[14]브루클린에서 영국에서 이민 온 유대인 부모님 필립과 레베카 나이먼 사이에서 태어났다.[15] 아버지 하워드(본명 헬무트) 조엘(1923–2011)은 뛰어난 아마추어 클래식 피아니스트[16][17]이자 사업가로, 뉘른베르크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17] 상인이자 제조업자인 칼 암손 조엘의 외아들이었고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1928년, 할아버지 칼 조엘은 번성하는 우편 주문 섬유 회사인 조엘 마흐트 파브릭을 설립했고, 10년 내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회사가 되었다. 나치 독일 정권을 피해 칼과 그의 아내(빌리 조엘의 할머니), 어린 아들은 스위스로 이민을 갔다.[18] 유대인의 재산 및 사업 소유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된 후, 1938년 그는 자신의 회사를 요제프 네커만에게 실제 가치보다 값싼 가격에 팔아야 했다.[19] 1924년 이민법에 의해 독일 유대인들은 미국 직항 입국이 어려웠기 때문에, 가족들은 1939년 초에 쿠바에 도착하여 거의 2년 동안 머물다가 미국에 입국했다.[17][20] 미국에서 하워드는 엔지니어로 일했지만 항상 음악을 사랑했다.

부모님은 1942년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에서 길버트와 설리번의 희극 오페라 《The Pirates of Penzance》 제작에 참여하는 과정에 만났다.[21][22] 빌리 조엘은 부모님 둘 다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암울했던 시기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빌리 조엘이 아버지의 가족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로잘린드와 하워드 조엘이 1957년에 이혼한 후, 하워드는 미국을 좋아하지 않아 유럽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국인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물질주의적이라고 생각했다.[17] 하워드는 에 정착했고 나중에 재혼했다. 빌리 조엘에게는 영국에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이복형제 알렉산더 조엘이 있는데, 그는 유럽에서 클래식 지휘자가 되었고 2001년부터 2014년까지 슈타트테아터 브라운슈바이크의 수석 음악 감독을 맡았다.[23][24]

빌리 조엘은 4살 때 어머니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16] 그의 선생님 중에는 저명한 미국 피아니스트 모튼 에스트린[25]과 음악가 티모시 포드가 있었다. 빌리 조엘은 자신이 피아니스트보다 오르가니스트로서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26] 10대 시절에는 권투를 시작하여 아마추어 골든 글러브 서킷에서 웰터급으로 출전하기도 했다.[27] 그는 26번의 경기 중 22번을 이기고 코가 부러진 후 권투를 그만두었다.[28][29]

빌리 조엘의 부모님은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종교적으로 유대교에서 자라지 않았다. 조엘은 “나는 종교적인 방식으로 유대교에서 자라지 않았다. 내가 할례를 받은 것이 유대교적인 전부였다”라고 말했다.[30] 빌리 조엘은 친구들과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에 다녔다. 11살 때는 힉스빌의 무악기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지금은 유대인 무신론자로 정체성을 확립했다.[7][31][32][33][34]

빌리 조엘은 1967년까지 힉스빌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졸업하지 못했다. 빌리 조엘은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피아노 바에서 연주를 했고, 전날 밤 늦게 공연을 한 탓에 중요한 영어 시험을 놓치기도 했다.[16] 비교적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졸업반이 끝날 무렵 학점을 충분히 이수하지 못했다. 빌리 조엘은 졸업장을 따기 위해 여름 학교에 다니는 대신 음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들에게 ‘젠장, 컬럼비아 대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컬럼비아 레코드로 갈 거야. 거기서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 없거든’”이라고 말했다.[35] 이후 1992년, 이사회에 에세이를 제출했고, 이 에세이는 받아들여져 학교를 떠난 지 25년 만에 힉스빌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았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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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활동

요약
관점

1964년~1970년: 초기

빌리 조엘의 작곡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언급이 많이 담겨 있지만,[37] 그의 촘촘한 멜로디와 현실적인 작곡은 엘비스 프레슬리에벌리 브라더스를 포함한 초기 록앤롤리듬 앤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영향을 드러낸다.[38] 하지만 빌리 조엘은 에드 설리번 쇼에서 비틀즈의 공연을 본 후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다. 후에 빌리 조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39]

그 한 번의 공연이 내 삶을 바꿔 놓았다... 그 순간까지 나는 록 연주를 직업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할리우드 스타 공장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네 명의 남자들이 자신들의 노래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특히 존 레논의 얼굴에서 항상 '빌어먹을!'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보았을 때, 나는 말했다. '이 사람들을 안다, 이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 나는 이 사람들이다. 이것이 내가 할 일이다 바로 록 밴드에서 연주하는 것이.'

16세에 빌리 조엘은 브리티시 인베이전 커버곡을 전문으로 하는 그룹인 에코스에 합류했다.[40] 에코스는 1965년에 녹음을 시작했다. 빌리 조엘은 카마 수트라 프로덕션을 통해 발매된 여러 음반과 쉐도우 모튼이 제작한 녹음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더 샹그리라스의 주요 히트곡이 된 〈Leader of the Pack〉의 데모 버전에 참여했다.[41] 빌리 조엘은 1964년에 더 샹그리라스의 〈Remember (Walking in the Sand)〉 녹음에 참여했지만, 그것이 데모 버전인지 마스터 버전인지는 모른다고 말했다.[42] 발매된 싱글에는 아티 립이 공동 프로듀서로 표기되어 있다.[43] 아티 립은 훗날 빌리 조엘의 첫 번째 솔로 음반 《Cold Spring Harbor》의 프로듀싱을 맡았다.[44]

1965년 후반, 에코스는 잠시 에메랄즈로 이름을 바꿨다가, 다시 로스트 소울즈로 바꿨다.[45] 빌리 조엘은 1967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레코드와 계약한 롱아일랜드 그룹인 더 해슬스에 합류하기 위해 밴드를 탈퇴했다.[38] 1년 반 동안 그들은 4개의 싱글과 2개의 음반(The Hassles와 Hour of the Wolf)을 발매했지만, 모두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빌리 조엘은 더 해슬스에서 같이 연주했던 드러머 존 스몰과 1969년 더 해슬스를 떠나 듀오 아틸라를 결성했고, 1970년 7월에 동명의 데뷔 음반을 발매했다. 듀오는 이듬 해 10월, 빌리 조엘이 존 스몰의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와 불륜 관계를 맺으면서 해체되었다. 이 둘은 훗날 결혼했다.[46]

1970년~1974년: 《Cold Spring Harbor》과 《Piano Man》

빌리 조엘은 음반사 패밀리 프로덕션과 계약을 맺고,[16][47] 고향 롱아일랜드의 한 작은 마을인 콜드스프링하버의 이름을 딴 첫 솔로 정규 음반 《Cold Spring Harbor》를 녹음했다. 패밀리 프로덕션의 소유주인 아티 립은 빌리 조엘을 개발하는 데 45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밝혔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반이 너무 빠른 속도로 마스터링되어 기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다.[48] (음반이 빠른 속도로 마스터링 되면, 결과물의 재생 속도가 더 빨라지고 피치가 더 높아진다.)

빌리 조엘의 인기 곡 〈She's Got a Way〉와 〈Everybody Loves You Now〉는 원래 이 음반에 수록되었지만, 1981년에 《Songs in the Attic》 라이브 음반이 발매되기 전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컬럼비아 레코드는 1983년에 《Cold Spring Harbor》의 리마스터 버전을 발매했으며, 일부 곡은 재생 시간이 줄어들거나 재편곡되었다.[48]

빌리 은 1971년 가을 《Cold Spring Harbor》 투어를 시작하여 드러머 리즈 클락, 기타리스트 알 헤르츠버그, 베이시스트 래리 러셀로 구성된 밴드와 함께 미국 본토와 푸에르토리코 전역을 투어했으며, 더 제이 가일스 밴드, 비치 보이스, 배드핑거, 타지 마할과 같은 아티스트들의 오프닝 공연을 했다. 푸에르토리코 마르 이 솔 팝 페스티벌에서의 공연은 특히 좋은 반응을 얻었고, 녹음되었지만 빌리 조엘은 이를 마르 이 솔 컴필레이션 음반 《Mar Y Sol: The First International Puerto Rico Pop Festival》에 수록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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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 공연하는 빌리 조엘

1972년 4월 15일, 필라델피아의 WMMR-FM 라디오는 빌리 조엘의 12곡 라이브 공연 방송을 내보냈고, 이 때의 공연 녹음이 방송국 DJ 조나단 타키프의 심야 주말 쇼에서 여러 번 재방송 되었다. 그 결과 〈Captain Jack〉은 방송국 역사상 가장 많이 요청된 곡이 되었고, 정기적으로 방송된 후 곧 미국 동해안에서 언더그라운드 히트곡이 되었다.[50][51] 컬럼비아 레코드의 경영진 허브 고든은 빌리 조엘의 음악을 듣고 그를 사장 클라이브 데이비스에게 소개했다.[52] 빌리 조엘은 1972년 컬럼비아 레코드사와 음반 계약을 맺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3년 동안 살았다.[53][23] 빌리 조엘은 6개월 동안 윌셔 대로의 디 익스큐티브 룸 피아노 바에서 "빌 마틴"이라는 이름으로 일했다.[16] 그 기간 동안 그는 바에서 만난 손님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그의 대표곡 〈Piano Man〉을 작곡했다.[54]

빌리 조엘은 컬럼비아 레코드와 새로 계약을 체결했음에도, 법적으로 패밀리 프로덕션에 묶여 있었다. 이후 아티 립은 빌리 조엘의 첫 계약을 컬럼비아에 매각했다. 당시 CBS/컬럼비아 레코드의 사장이었던 월터 예트니코프는 1970년대 후반 빌리 조엘의 노래에 대한 권리를 다시 사들여서 생일 선물로 빌리 조엘에게 권리를 넘겨주었다.[55][56] 예트니코프는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플레이 앳 셰이》에서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아티 립을 협박해야 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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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Piano Man》의 빌리 조엘 홍보 사진

빌리 조엘이 컬럼비아 레코드와 함께한 첫 음반은 1973년에 발매된 《Piano Man》이었다. 평범한 판매량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의 타이틀곡은 빌리 조엘의 대표곡이 되어 거의 모든 콘서트에서 마지막 곡으로 불렸다. 같은 해, 빌리 조엘의 투어 밴드가 바뀌었다. 기타리스트 알 헤르츠버그는 돈 에반스로 교체되었고, 베이시스트 래리 러셀은 패트릭 맥도널드로 교체되었으며, 1974년 말에 더그 스테그마이어로 한 차례 더 교체되어 1989년까지 빌리 조엘과 함께했다. 리즈 클락은 드러머로, 톰 화이트호스는 밴조이스트 겸 페달 스틸 연주자로 돌아왔고, 조니 아몬드는 색소폰 겸 키보드 연주자로 합류했다. 이 밴드는 미국과 캐나다 전역을 광범위하게 투어하며 인기 음악 쇼에 출연했다. 빌리 조엘의 작곡은 더욱 주목받기 시작했다. 1974년, 헬렌 레디는 《Piano Man》의 수록곡 〈You're My Home〉을 커버했다.

1974년~1977년: 《Streetlife Serenade》와 《Turnstiles》

1974년, 빌리 조엘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컬럼비아 레코드의 두 번째 음반 《Streetlife Serenade》를 녹음했다. 당시 그의 매니저는 뉴욕의 베드퍼드-스터이베선트 지역 출신의 오랜 친구인 존 트로이였지만, 곧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로 교체되었다.[57] 《Streetlife Serenade》는 교외도심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다. 이 음반은 미국에서 차트 34위를 달성한 〈The Entertainer〉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Piano Man〉 싱글 버전이 길이가 라디오에서 방송되기 너무 길다는 이유로 단축된 것에 화가 난 빌리 조엘은 〈The Entertainer〉를 풍자적으로 작곡했다. "If you're gonna have a hit, you gotta make it fit, so they cut it down to 3:05." 《Streetlife Serenade》는 비평가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지만,[58][59]Los Angelenos〉와, 1970년대 라이브 공연에서 자주 연주했던 연주곡Root Beer Rag〉와 같은 주목할 만한 곡들이 수록됐다.

1975년 후반, 빌리 조엘은 보 디들리의 《The 20th Anniversary of Rock 'n' Roll》 올스타 앨범의 여러 트랙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실망한 빌리 조엘은 1975년 뉴욕시로 돌아와 1976년에 발매된 《Turnstiles》 녹음했는데, 이 음반은 그가 그와 함께 투어했던 음악가들과 함께 녹음한 첫 음반이었다. 《Turnstiles》는 처음에는 제임스 윌리엄 과르시오(당시 시카고의 프로듀서)가 프로듀싱하고 카리부 랜치에서 엘튼 존 밴드 멤버들과 함께 녹음되었다. 하지만 빌리 조엘은 결과에 만족하지 않아 다시 녹음하고 음반을 직접을 프로듀싱했다.

Say Goodbye to Hollywood〉는 로니 스펙터나이절 올슨이 커버한 마이너 히트곡이었다. 2008년 라디오 인터뷰에서 빌리 조엘은 높은 원곡 키로 부르면 성대가 "찢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이 곡을 공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빌리 조엘은 2014년 5월 할리우드 볼에서 이 곡을 부르며 1982년 이후 처음으로 라이브로 연주했다. 〈New York State of Mind〉는 싱글로 발매된 적이 없지만 빌리 조엘의 가장 잘 알려진 곡 중 하나가 되었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커버했으며 토니 베넷은 《Playing with My Friends: Bennett Sings the Blues》에서 빌리 조엘과 듀엣으로 공연했다. 이 음반의 다른 주목할 만한 수록곡으로는 〈Summer, Highland Falls〉, 〈Miami 2017 (Seen the Lights Go Out on Broadway)〉, 그리고 콘서트에서 오프닝으로 자주 연주됐던 〈Prelude/Angry Young Man〉이 있다.

1977년~1979년: 《The Stranger》와 《52nd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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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2월, 공연하는 빌리 조엘

《Turnstiles》 투어 중, 빌리 조엘의 당시 매니저였던 아내 엘리자베스는 조지 마틴에게 전화하여 빌리 조엘의 차기 음반 프로듀서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조지 마틴은 글래스버러 주립 대학에서 공연하는 아티스트를 본 후 초대를 거절했다. 투어 전에 빌리 조엘은 아내에게 언젠가 필 라몬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필 라몬에게 연락했다. 1977년 6월 2일, 필 라몬은 뉴욕 카네기 홀에서 열린 빌리 조엘 콘서트에 참석했으며, 컬럼비아 레코드의 돈 드비토도 쇼를 녹음하기 위해 녹음 트럭을 가져왔다.[60] 그 후 필 라몬은 1977년부터 1986년까지 빌리 조엘의 모든 정규 음반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1977년 발매된 《The Stranger》는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빌보드 차트에서 톱 25 히트곡 4개를 배출했다. 〈Just the Way You Are〉 (3위), 〈Movin' Out (Anthony's Song)〉 (17위), 〈Only the Good Die Young〉 (24위) 그리고 〈She's Always a Woman〉 (17위). 빌리 조엘의 첫 톱 10 앨범인 《The Stranger》는 차트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멀티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고, 컬럼비아 레코드의 이전 페스트셀러 음반인 사이먼 &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61]을 제쳤다. 첫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를 위해 작곡한 〈Just the Way You Are〉[62]는 꿈에서 영감을 받았으며,[63]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상올해의 노래상을 수상했다.[64] 빌리 조엘은 파리 투어 중에 늦은 밤 호텔 방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40] 이 음반에는 빌리 조엘의 가장 잘 알려진 곡 중 하나인 AOR 클래식 〈Scenes from an Italian Restaurant〉도 수록되었다. 이 곡은 빌리 조엘이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곡 중 하나이며, 라이브 콘서트에서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65]Vienna〉 또한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이며,[66][67] 2022년 기준으로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곡 중 하나이다.[68] 《롤링 스톤》은 나중에 《The Stranger》를 역사상 70번째로 위대한 앨범으로 선정했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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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52nd Street》의 빌리 조엘 홍보 사진

1978년 정규 음반 《52nd Street》를 발매했다. 음반 이름은 발매 당시 CBS/컬럼비아의 세계 본부였던 맨해튼의 52번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 음반은 700만 장 이상 판매되었으며, 〈My Life〉 (3위), 〈Big Shot〉 (14위), 〈Honesty〉 (24위)의 히트곡들로 차트 1위에 올랐다. 게리 베넷이 커버한 〈My Life〉는 시트콤 《블루문 특급》의 테마곡이 되었다. 《52nd Street》는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팝 보컬 퍼포먼스올해의 앨범상도 수상했다.

1978년, 빌리 조엘은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50회 이상의 공연 중 첫 공연을 열었다. 2025년, 빌리 조엘은 이 경기장에서 연주하는 것을 "꿈이 실현됐다"고 묘사했다.[70] 그는 현재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가장 많은 콘서트를 개최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71]

1979년, 빌리 조엘은 3월 2일부터 4일까지 열린 역사적인 아바나 잼 페스티벌에 참여하기 위해 쿠바 아바나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리타 쿨리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스티븐 스틸스, CBS 재즈 올스타즈, 트리오 오브 둠, 파니아 올스타즈, 빌리 스완, 보니 브램릿, 마이크 피네간, 웨더 리포트 등과 함께 공연했으며, 이라케레, 파초 알론소, 타타 구이네스, 오케스타 아라곤을 포함한 수많은 쿠바 아티스트들과도 함께했다.[72] 빌리 조엘의 공연은 에르네스토 후안 카스텔라노스의 다큐멘터리 《하바나 잼 '79》에 담겨 있다.

《52nd Street》는 1982년에 당시 신기술 콤팩트 디스크(CD) 형식으로 발매된 첫 상업적 음반이었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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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활동

빌리 조엘은 오랫동안 보트를 좋아하며 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1996년에 롱아일랜드 보트 사업가 피터 니덤과 함께 롱아일랜드 보트 회사를 설립했다.[74][75]

2010년 11월, 빌리 조엘은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에 빈티지 오토바이 맞춤 제작 사업체 겸 박물관 20세기 사이클스를 열었다.[76][77]

2011년 빌리 조엘은 프레드 슈루어스와 함께 쓴 자서전 《The Book of Joel: A Memoir》을 출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책은 원래 하퍼콜린스 사를 통해 2011년 6월에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2011년 3월 책 출판을 취소하고 하퍼콜린스와의 계약을 공식적으로 해지했다. 롤링 스톤은 "하퍼콜린스는 2008년에 이 책 프로젝트를 3백만 달러에 인수했다. 빌리 조엘은 그 금액의 선불금을 출판사에 반환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언급했다.[78] 빌보드에 따르면 "하퍼콜린스의 책은, 음악계의 전설과 크리스티 브링클리와의 실패한 결혼 생활과 약물 남용과의 싸움을 자세히 다룬 '감정적인 여정'으로 홍보되었다."고 한다.[79] 책 출간 취소 결정에 대해 빌리 조엘은 "책을 쓰는 작업을 하면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 삶의 기복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여전히 내 음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80] 2014년, 슈루어스는 빌리 조엘과의 광범위한 개인 인터뷰를 바탕으로 단순히 《빌리 조엘》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했다.[81]

사생활

요약
관점

결혼 및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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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알렉사 레이 조엘

빌리 조엘의 첫 번째 아내는 엘리자베스 웨버 스몰이었다. 둘의 관계가 시작된 때는, 엘리자베스 웨버는 빌리 조엘이 잠깐 활동했던 듀오 아틸라의 파트너 존 스몰과 결혼하여 아들이 있던 상황이었다. 불륜 사실이 밝혀지자 엘리자베스 웨버는 두 남자와 모두 관계를 끊었다. 엘리자베스 웨버와 빌리 조엘은 나중에 화해하고 1973년에 결혼했으며, 그녀는 그의 매니저가 되었다. 둘은 1982년 7월 20일에 이혼했다.[82]

이후 1985년 3월 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83] 그들의 딸, 알렉사 레이 조엘은 1985년 12월 29일에 태어났다.[83][84] 빌리 조엘은 자신의 음악적 우상 중 한 명인 레이 찰스의 이름을 따서 알렉사에게 "레이"라는 미들 네임을 지어주었다.[85]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1994년 8월 26일에 이혼했다.[86] 이후 둘은 친구 관계로 지내고 있으며, 빌리 조엘은 크리스티 브링클리의 두 막내 자녀인 잭과 세일러 브링클리 쿡대부이다.[87][88]

2004년 10월 2일, 빌리 조엘은 세 번째 아내인 셰프 케이티 리와 결혼했다.[89] 결혼 당시 케이티 리는 23세, 빌리 조엘은 55세였다. 당시 18세였던 빌리 조엘의 딸 알렉사 레이가 들러리를 맡았다. 두 번째 아내 크리스티 브링클리도 결혼식에 참석하여 커플에게 축복을 빌었다. 그러나 2009년 6월 17일, 둘은 별거를 발표했다.[90]

2015년 7월 4일, 빌리 조엘은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 베이 자택에서 마장마술 선수이자 전 모건 스탠리 임원이었던 알렉시스 로더릭과 네 번째 결혼을 했다. 당시 빌리 조엘은 66세였고, 아내는 33세였다.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가 주례를 맡았다.[91] 두 사람은 2009년부터 관계를 맺어왔다.[92] 2015년 8월 12일, 부부는 딸 델라 로즈 조엘을 얻었다.[93] 2017년 10월 22일에는 그들의 둘째 딸 레미 앤 조엘이 태어났다.[94] 두 어린 딸은 현재 가족이 살고 있는 플로리다의 학교에 다닌다.[95][96]

딸 알렉사가 태어난 후, 1986년 빌리 조엘과 아내 크리스틴 브링클리는 아마간세트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는데,[97][98] 보도에 따르면 290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99] 2002년, 빌리 조엘은 그 부동산을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드에게 3,250만 달러 (당시 뉴욕주 역사상 가장 비싼 주택 구매)에 팔았다.[100]

2002년, 빌리 조엘은 오이스터 베이 타운의 센터 아일랜드에 2,200만 달러를 주고 부동산을 구입했다. 새그 하버에도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101] 2023년, 빌리 조엘은 오이스터 베이 주택을 4,900만 달러에 시장에 내놓았다.[102] 매인 주택이 개조 공사중이었던 까닭에 매물은 철회되었다. 게스트 하우스, 수영장, 해변, 헬리콥터 착륙장을 갖춘 26 에이커(105,218 m2) 면적의 이 저택은 2024년 9월에 4,990만 달러에 다시 매물로 나왔다.

2015년, 빌리 조엘은 플로리다 마날라판에 있는 집을 구입했다. 이 해안가 주택은 2015년 11월 1,950만 달러에 시장에 나왔으나[103] 매물에서 철회되었다가 2017년에 1,850만 달러의 호가로 다시 등록되었다.[104] 2018년에는 이 부동산의 가격이 1,690만 달러로 더욱 인하되었다.[103] 2020년 1월, 13,200평방피트의 이 주택은 1,030만 달러에 매각되었다.[105]

10대 시절 채취선에서 일했던 빌리 조엘은 해양 문제에 대한 오랜 관심을 가지고 있다. 2009년에는 전업 선장이 감독하는 작은 선단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여러 척의 배는 빌리 조엘의 대략적인 디자인을 기반으로 했으며, 오이스터 베이에서 맨해튼까지 통근하기 위해 제작된 50 mph (80.5 km/h)의 최고 속도를 가진 57 ft (17.4 m) 보트도 포함되어 있었다.[106]

건강

1970년, 경력 쇠퇴와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빌리 조엘은 깊은 우울증을 겪었다. 2025년 다큐멘터리 《Billy Joel: And So It Goes》에서 그가 두 차례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107] 빌리 조엘이 엘리자베스 웨버 스몰과 불륜을 저질러 아틸라가 해체되고 가장 친한 친구 존 스몰과 소원해진 후, 빌리 조엘은 존 스몰의 집에서 쫓겨났다.[108] 빌리 조엘은 “나는 살 곳이 없었다. 나는 빨래방에서 자고 있었고, 거의 정신병에 걸릴 정도로 우울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108] 빌리 조엘의 여동생 주디 몰리나리(당시 의료 보조원)는 이전에 그에게 수면을 돕기 위해 수면제를 주었다.[107] 빌리 조엘은 가지고 있던 모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함으로써 자살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며칠 동안 혼수 상태에 빠졌다.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빌리 조엘은 자신의 시도가 실패한 것에 실망했고, 두 번째 시도에서는 "제대로 할 것"이라고 맹세했다.[108] 이에 유서를 남기고 가구 광택제를 마셔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빌리 조엘은 나중에 "표백제보다 맛있어 보여 가구 광택제를 마셨다."라고 말했다.[109] 존 스몰이 그를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다. 빌리 조엘은 메도브룩 병원에 입원하여 자살 감시를 받으며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110] 빌리 조엘은 이후 〈Tomorrow Is Today〉를 작곡했는데, 그는 이 곡을 유서라고 표현했다.[49]

1985년, 빌리 조엘은 10대 자살 예방 메시지를 내기 위해 〈You're Only Human (Second Wind)〉을 작곡·녹음했다.[111]

2002년에는 코네티컷주 뉴캐넌에 있는 실버 힐 병원에 입원하여 10일 동안 약물 남용정신건강의학 치료를 받았다.[112] 2005년 3월, 빌리 조엘은 베티 포드 센터에 입원하여[113] 30일 동안 알코올 의존증 치료를 받았다.[114]

2025년, 정상압수두증 진단을 받았다.[115], 이로 인해 청력, 시력, 균형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 진단으로 빌리 조엘은 예정된 모든 콘서트를 취소했다.[116] 2025년 7월, 그는 피플과의 인터뷰와 빌 마의 팟캐스트에서 자신의 상태가 치료 가능하며 호전되고 있다고 말했다.[117][118]

빌리 조엘은 알코올 중독 이력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결국 술을 끊었고 음주 운전 체포와 같은 그의 알코올 중독에 대한 일부 세부 사항은 과장되었다고 말했다.[117][119]

정치적 견해 및 참여

빌리 조엘은 민주당 후보에게 금액을 후원한 적은 있지만,[120] 공개적으로 민주당에 가입한 적은 없다. 빌리 조엘은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2008년 버락 오바마의 대선 캠페인 기금을 모으기 위해 그의 친구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함께 자선 공연을 했다.[121] 빌리 조엘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기금 모금 자선 콘서트에서 공연했다. 그러나 유명인들이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티켓 값을 내는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에게 투표할지, 어떻게 투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122]

2016년, 당시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에게 〈The Entertainer〉를 헌정하며 풍자했는데,[123] 이것이 도널트 트럼프에 대한 지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자, 뉴욕 데일리 뉴스에 이메일로 자신이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124]

2025년 뉴욕 시장 선거에서 앤드루 쿠오모의 출마를 지지했다.[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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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목록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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