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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

미국의 음악가, 피아니스트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빌리 조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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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마틴 "빌리" 조엘(본명: William Martin "Billy"Joel, 1949년 5월 9일 ~ )은 미국 싱어송라이터이자 피아니스트이다. 1973년 동명의 대표곡에서 따온 "피아노 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조엘은[4][5] 1970년대부터 솔로 아티스트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1971년부터 1993년까지 팝과 록 장르에 걸쳐 12개의 정규 음반을 발매했으며, 2001년에는 한정판 클래식 작곡 음반을 발매했다. 전 세계적으로 1억 6천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조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음악가 중 한 명이며,[6] 미국에서는 네 번째로 많은 음반을 판매한 솔로 아티스트이다.[7] 그의 1985년 컴필레이션 앨범 《Greatest Hits – Volume I & Volume II》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이다.[8]

간략 정보 빌리 조엘Billy Joel, 기본 정보 ...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나 롱아일랜드 힉스빌에서 자랐으며, 어머니의 권유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음악을 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밴드 더 해슬스아틸라에서 잠깐 활동했다. 이후 패밀리 프로덕션과 음반 계약을 맺고 1971년 데뷔 앨범 《Cold Spring Harbor》를 발매하며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1972년, 필라델피아에서 진행된 라디오 라이브 공연에서 부른 〈Captain Jack〉이 인기를 끌자 컬럼비아 레코드는 빌리 조엘에게 관심을 가진다. 이후 컬럼비아 레코드 사와 새로운 음반 계약을 맺고, 1973년에 2집 《Piano Man》을 발표했다. 1974년 《Streetlife Serenade》와 1976년 《Turnstiles》발매 이후, 1977년에 발매한 정규 음반 《The Stranger》는 좋은 평가를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좋은 기록을 달성했다. 이 음반은 컬럼비아 레코드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1천만 장 이상 판매되었고, 〈Just the Way You Are〉,〈Movin' Out (Anthony's Song)〉, 〈Only the Good Die Young〉, 〈She's Always a Woman〉 등 인기 있는 싱글을 배출했으며, 콘서트에서 주로 부르는 〈Scenes from an Italian Restaurant〉과 〈Vienna〉 등 빌리 조엘의 인기 곡들이 포함됐다.

1978년 발매된《52nd Street》는 빌리 조엘이 처음으로 빌보드 200 차트 1위에 달한 음반이었다. 1980년 《Glass Houses》는 록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히기 위한 시도였으며, 이 음반에는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빌리 조엘의 첫 빌보드 핫 100 1위 싱글), 〈You May Be Right〉, 〈Don't Ask Me Why〉, 〈Sometimes a Fantasy〉가 포함되어 있다. 1982년에 발매한 《The Nylon Curtain》은 서정적이고 멜로디적으로 더욱 야심찬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됐다. 1983년 발매된《An Innocent Man》은 1950년대의 리듬 앤 블루스두왑과 같은 빌리 조엘이 성장하면서 들었던 음악 장르에 대한 헌정의 의미를 담은 음반이었다. 이 음반에는 빌리 조엘의 유명한 곡인 〈Tell Her About It〉, 〈Uptown Girl〉, 〈The Longest Time〉이 포함되었다. 빌리 조엘은 1993년에 《River of Dreams》를 발매한 이후 스튜디오 음반 작업에서 은퇴했지만, 2001년에 그가 작곡하고 한국계 영국인 피아니스트 주형기가 연주한 클래식 작품들을 담은 클래식 음반《Fantasies & Delusions》를 발매했다. 1988년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올리버와 친구들》에서 더저 역의 목소리 연기를 맡아 〈Why Should I Worry?〉를 불렀고, 《행복한 인질》(1983), 《그들만의 리그》(1986), 《허니문 인 베가스》(1992) 등 여러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했다.[9] 이후 2024년 싱글 〈Turn the Lights Back On〉을 발표하며 다시 새로운 음악 작곡을 시작했다.

빌리 조엘은 전 세계적으로 라이브 공연 투어를 펼쳤다. 1987년에는 미국 록 가수 최초로 소련에서 록 투어를 개최했다. 빌리 조엘은 미국에서 33개의 Top 40 히트곡을 기록했으며,[10] 이 중〈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Tell Her About It〉, 〈We Didn't Start the Fire〉의 세 곡은 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그는 23개의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고, 《52nd Street》로 올해의 앨범상을 포함하여 6개의 상을 수상했다. 1992년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 199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11], 2006년 롱아일랜드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1년에는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에서 조니 머서 상을 받았고[12], 2013년 케네디 센터 아너스에서 표창을 받았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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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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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마틴 조엘은 1949년 5월 9일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14] 그가 한 살 때, 가족이 롱아일랜드오이스터 베이 타운에 있는 힉스빌로 이사했다. 빌리 조엘과 그의 부모가 입양한 사촌 주디와 함께 자랐고,[15] 근처 레빗타운의 주택들과 비슷한 평범한 집에서 자랐다.[16]

어머니 로잘린드(1922–2014)[17]브루클린에서 영국에서 이민 온 유대인 부모님 필립과 레베카 나이먼 사이에서 태어났다.[18] 아버지 하워드(본명 헬무트) 조엘(1923–2011)은 뛰어난 아마추어 클래식 피아니스트[19][20]이자 사업가로, 뉘른베르크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20] 상인이자 제조업자인 칼 암손 조엘의 외아들이었고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1928년, 할아버지 칼 조엘은 번성하는 우편 주문 섬유 회사인 조엘 마흐트 파브릭을 설립했고, 10년 내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회사가 되었다. 나치 독일 정권을 피해 칼과 그의 아내(빌리 조엘의 할머니), 어린 아들은 스위스로 이민을 갔다.[21] 유대인의 재산 및 사업 소유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된 후, 1938년 그는 자신의 회사를 요제프 네커만에게 실제 가치보다 값싼 가격에 팔아야 했다.[22] 1924년 이민법에 의해 독일 유대인들은 미국 직항 입국이 어려웠기 때문에, 가족들은 1939년 초에 쿠바에 도착하여 거의 2년 동안 머물다가 미국에 입국했다.[20][23] 미국에서 하워드는 엔지니어로 일했지만 항상 음악을 사랑했다.

부모님은 1942년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에서 길버트와 설리번의 희극 오페라 《The Pirates of Penzance》 제작에 참여하는 과정에 만났다.[24][25] 빌리 조엘은 부모님 둘 다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암울했던 시기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빌리 조엘이 아버지의 가족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로잘린드와 하워드 조엘이 1957년에 이혼한 후, 하워드는 미국을 좋아하지 않아 유럽으로 돌아갔다. 그는 미국인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물질주의적이라고 생각했다.[20] 하워드는 에 정착했고 나중에 재혼했다. 빌리 조엘에게는 영국에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이복형제 알렉산더 조엘이 있는데, 그는 유럽에서 클래식 지휘자가 되었고 2001년부터 2014년까지 슈타트테아터 브라운슈바이크의 수석 음악 감독을 맡았다.[26][27]

빌리 조엘은 4살 때 어머니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19] 그의 선생님 중에는 저명한 미국 피아니스트 모튼 에스트린[28]과 음악가 티모시 포드가 있었다. 빌리 조엘은 자신이 피아니스트보다 오르가니스트로서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29] 10대 시절에는 권투를 시작하여 아마추어 골든 글러브 서킷에서 웰터급으로 출전하기도 했다.[30] 그는 26번의 경기 중 22번을 이기고 코가 부러진 후 권투를 그만두었다.[31][32]

빌리 조엘의 부모님은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종교적으로 유대교에서 자라지 않았다. 조엘은 “나는 종교적인 방식으로 유대교에서 자라지 않았다. 내가 할례를 받은 것이 유대교적인 전부였다”라고 말했다.[33] 빌리 조엘은 친구들과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에 다녔다. 11살 때는 힉스빌의 무악기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지금은 유대인 무신론자로 정체성을 확립했다.[10][34][35][36][37]

빌리 조엘은 1967년까지 힉스빌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졸업하지 못했다. 빌리 조엘은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피아노 바에서 연주를 했고, 전날 밤 늦게 공연을 한 탓에 중요한 영어 시험을 놓치기도 했다.[19] 비교적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졸업반이 끝날 무렵 학점을 충분히 이수하지 못했다. 빌리 조엘은 졸업장을 따기 위해 여름 학교에 다니는 대신 음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들에게 ‘젠장, 컬럼비아 대학교에 가지 못한다면, 컬럼비아 레코드로 갈 거야. 거기서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 없거든’”이라고 말했다.[38] 이후 1992년, 이사회에 에세이를 제출했고, 이 에세이는 받아들여져 학교를 떠난 지 25년 만에 힉스빌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았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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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활동

요약
관점

1964년~1970년: 초기

빌리 조엘의 작곡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언급이 많이 담겨 있지만,[40] 그의 촘촘한 멜로디와 현실적인 작곡은 엘비스 프레슬리에벌리 브라더스를 포함한 초기 록앤롤리듬 앤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영향을 드러낸다.[41] 하지만 빌리 조엘은 에드 설리번 쇼에서 비틀즈의 공연을 본 후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다. 후에 빌리 조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42]

그 한 번의 공연이 내 삶을 바꿔 놓았다... 그 순간까지 나는 록 연주를 직업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할리우드 스타 공장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네 명의 남자들이 자신들의 노래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특히 존 레논의 얼굴에서 항상 '빌어먹을!'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보았을 때, 나는 말했다. '이 사람들을 안다, 이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 나는 이 사람들이다. 이것이 내가 할 일이다 바로 록 밴드에서 연주하는 것이.'

16세에 빌리 조엘은 브리티시 인베이전 커버곡을 전문으로 하는 그룹인 에코스에 합류했다.[43] 에코스는 1965년에 녹음을 시작했다. 빌리 조엘은 카마 수트라 프로덕션을 통해 발매된 여러 음반과 쉐도우 모튼이 제작한 녹음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더 샹그리라스의 주요 히트곡이 된 〈Leader of the Pack〉의 데모 버전에 참여했다.[44] 빌리 조엘은 1964년에 더 샹그리라스의 〈Remember (Walking in the Sand)〉 녹음에 참여했지만, 그것이 데모 버전인지 마스터 버전인지는 모른다고 말했다.[45] 발매된 싱글에는 아티 립이 공동 프로듀서로 표기되어 있다.[46] 아티 립은 훗날 빌리 조엘의 첫 번째 솔로 음반 《Cold Spring Harbor》의 프로듀싱을 맡았다.[47]

1965년 후반, 에코스는 잠시 에메랄즈로 이름을 바꿨다가, 다시 로스트 소울즈로 바꿨다.[48] 빌리 조엘은 1967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레코드와 계약한 롱아일랜드 그룹인 더 해슬스에 합류하기 위해 밴드를 탈퇴했다.[41] 1년 반 동안 그들은 4개의 싱글과 2개의 음반(The Hassles와 Hour of the Wolf)을 발매했지만, 모두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빌리 조엘은 더 해슬스에서 같이 연주했던 드러머 존 스몰과 1969년 더 해슬스를 떠나 듀오 아틸라를 결성했고, 1970년 7월에 동명의 데뷔 음반을 발매했다. 듀오는 이듬 해 10월, 빌리 조엘이 존 스몰의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와 불륜 관계를 맺으면서 해체되었다. 이 둘은 훗날 결혼했다.[49]

1970년~1974년: 《Cold Spring Harbor》과 《Piano Man》

빌리 조엘은 음반사 패밀리 프로덕션과 계약을 맺고,[19][50] 고향 롱아일랜드의 한 작은 마을인 콜드스프링하버의 이름을 딴 첫 솔로 정규 음반 《Cold Spring Harbor》를 녹음했다. 패밀리 프로덕션의 소유주인 아티 립은 빌리 조엘을 개발하는 데 45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밝혔다.[5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반이 너무 빠른 속도로 마스터링되어 기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다.[51] (음반이 빠른 속도로 마스터링 되면, 결과물의 재생 속도가 더 빨라지고 피치가 더 높아진다.)

빌리 조엘의 인기 곡 〈She's Got a Way〉와 〈Everybody Loves You Now〉는 원래 이 음반에 수록되었지만, 1981년에 《Songs in the Attic》 라이브 음반이 발매되기 전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컬럼비아 레코드는 1983년에 《Cold Spring Harbor》의 리마스터 버전을 발매했으며, 일부 곡은 재생 시간이 줄어들거나 재편곡되었다.[51]

빌리 은 1971년 가을 《Cold Spring Harbor》 투어를 시작하여 드러머 리즈 클락, 기타리스트 알 헤르츠버그, 베이시스트 래리 러셀로 구성된 밴드와 함께 미국 본토와 푸에르토리코 전역을 투어했으며, 더 제이 가일스 밴드, 비치 보이스, 배드핑거, 타지 마할과 같은 아티스트들의 오프닝 공연을 했다. 푸에르토리코 마르 이 솔 팝 페스티벌에서의 공연은 특히 좋은 반응을 얻었고, 녹음되었지만 빌리 조엘은 이를 마르 이 솔 컴필레이션 음반 《Mar Y Sol: The First International Puerto Rico Pop Festival》에 수록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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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 공연하는 빌리 조엘

1972년 4월 15일, 필라델피아의 WMMR-FM 라디오는 빌리 조엘의 12곡 라이브 공연 방송을 내보냈고, 이 때의 공연 녹음이 방송국 DJ 조나단 타키프의 심야 주말 쇼에서 여러 번 재방송 되었다. 그 결과 〈Captain Jack〉은 방송국 역사상 가장 많이 요청된 곡이 되었고, 정기적으로 방송된 후 곧 미국 동해안에서 언더그라운드 히트곡이 되었다.[53][54] 컬럼비아 레코드의 경영진 허브 고든은 빌리 조엘의 음악을 듣고 그를 사장 클라이브 데이비스에게 소개했다.[55] 빌리 조엘은 1972년 컬럼비아 레코드사와 음반 계약을 맺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3년 동안 살았다.[1][26] 빌리 조엘은 6개월 동안 윌셔 대로의 디 익스큐티브 룸 피아노 바에서 "빌 마틴"이라는 이름으로 일했다.[19] 그 기간 동안 그는 바에서 만난 손님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그의 대표곡 〈Piano Man〉을 작곡했다.[56]

빌리 조엘은 컬럼비아 레코드와 새로 계약을 체결했음에도, 법적으로 패밀리 프로덕션에 묶여 있었다. 이후 아티 립은 빌리 조엘의 첫 계약을 컬럼비아에 매각했다. 당시 CBS/컬럼비아 레코드의 사장이었던 월터 예트니코프는 1970년대 후반 빌리 조엘의 노래에 대한 권리를 다시 사들여서 생일 선물로 빌리 조엘에게 권리를 넘겨주었다.[57][58] 예트니코프는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플레이 앳 셰이》에서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아티 립을 협박해야 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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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Piano Man》의 빌리 조엘 홍보 사진

빌리 조엘이 컬럼비아 레코드와 함께한 첫 음반은 1973년에 발매된 《Piano Man》이었다. 평범한 판매량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의 타이틀곡은 빌리 조엘의 대표곡이 되어 거의 모든 콘서트에서 마지막 곡으로 불렸다. 같은 해, 빌리 조엘의 투어 밴드가 바뀌었다. 기타리스트 알 헤르츠버그는 돈 에반스로 교체되었고, 베이시스트 래리 러셀은 패트릭 맥도널드로 교체되었으며, 1974년 말에 더그 스테그마이어로 한 차례 더 교체되어 1989년까지 빌리 조엘과 함께했다. 리즈 클락은 드러머로, 톰 화이트호스는 밴조이스트 겸 페달 스틸 연주자로 돌아왔고, 조니 아몬드는 색소폰 겸 키보드 연주자로 합류했다. 이 밴드는 미국과 캐나다 전역을 광범위하게 투어하며 인기 음악 쇼에 출연했다. 빌리 조엘의 작곡은 더욱 주목받기 시작했다. 1974년, 헬렌 레디는 《Piano Man》의 수록곡 〈You're My Home〉을 커버했다.

1974년~1977년: 《Streetlife Serenade》와 《Turnstiles》

1974년, 빌리 조엘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컬럼비아 레코드의 두 번째 음반 《Streetlife Serenade》를 녹음했다. 당시 그의 매니저는 뉴욕의 베드퍼드-스터이베선트 지역 출신의 오랜 친구인 존 트로이였지만, 곧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로 교체되었다.[59] 《Streetlife Serenade》는 교외도심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다. 이 음반은 미국에서 차트 34위를 달성한 〈The Entertainer〉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Piano Man〉 싱글 버전이 길이가 라디오에서 방송되기 너무 길다는 이유로 단축된 것에 화가 난 빌리 조엘은 〈The Entertainer〉를 풍자적으로 작곡했다. "If you're gonna have a hit, you gotta make it fit, so they cut it down to 3:05." 《Streetlife Serenade》는 비평가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지만,[60][61]Los Angelenos〉와, 1970년대 라이브 공연에서 자주 연주했던 연주곡Root Beer Rag〉와 같은 주목할 만한 곡들이 수록됐다.

1975년 후반, 빌리 조엘은 보 디들리의 《The 20th Anniversary of Rock 'n' Roll》 올스타 앨범의 여러 트랙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실망한 빌리 조엘은 1975년 뉴욕시로 돌아와 1976년에 발매된 《Turnstiles》 녹음했는데, 이 음반은 그가 그와 함께 투어했던 음악가들과 함께 녹음한 첫 음반이었다. 《Turnstiles》는 처음에는 제임스 윌리엄 과르시오(당시 시카고의 프로듀서)가 프로듀싱하고 카리부 랜치에서 엘튼 존 밴드 멤버들과 함께 녹음되었다. 하지만 빌리 조엘은 결과에 만족하지 않아 다시 녹음하고 음반을 직접을 프로듀싱했다.

Say Goodbye to Hollywood〉는 로니 스펙터나이절 올슨이 커버한 마이너 히트곡이었다. 2008년 라디오 인터뷰에서 빌리 조엘은 높은 원곡 키로 부르면 성대가 "찢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 이 곡을 공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빌리 조엘은 2014년 5월 할리우드 볼에서 이 곡을 부르며 1982년 이후 처음으로 라이브로 연주했다. 〈New York State of Mind〉는 싱글로 발매된 적이 없지만 빌리 조엘의 가장 잘 알려진 곡 중 하나가 되었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커버했으며 토니 베넷은 《Playing with My Friends: Bennett Sings the Blues》에서 빌리 조엘과 듀엣으로 공연했다. 이 음반의 다른 주목할 만한 수록곡으로는 〈Summer, Highland Falls〉, 〈Miami 2017 (Seen the Lights Go Out on Broadway)〉, 그리고 콘서트에서 오프닝으로 자주 연주됐던 〈Prelude/Angry Young Man〉이 있다.

1977년~1979년: 《The Stranger》와 《52nd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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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2월, 공연하는 빌리 조엘

《Turnstiles》 투어 중, 빌리 조엘의 당시 매니저였던 아내 엘리자베스는 조지 마틴에게 전화하여 빌리 조엘의 차기 음반 프로듀서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조지 마틴은 글래스버러 주립 대학에서 공연하는 아티스트를 본 후 초대를 거절했다. 투어 전에 빌리 조엘은 아내에게 언젠가 필 라몬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필 라몬에게 연락했다. 1977년 6월 2일, 필 라몬은 뉴욕 카네기 홀에서 열린 빌리 조엘 콘서트에 참석했으며, 컬럼비아 레코드의 돈 드비토도 쇼를 녹음하기 위해 녹음 트럭을 가져왔다.[62] 그 후 필 라몬은 1977년부터 1986년까지 빌리 조엘의 모든 정규 음반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1977년 발매된 《The Stranger》는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빌보드 차트에서 톱 25 히트곡 4개를 배출했다. 〈Just the Way You Are〉 (3위), 〈Movin' Out (Anthony's Song)〉 (17위), 〈Only the Good Die Young〉 (24위) 그리고 〈She's Always a Woman〉 (17위). 빌리 조엘의 첫 톱 10 앨범인 《The Stranger》는 차트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멀티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고, 컬럼비아 레코드의 이전 페스트셀러 음반인 사이먼 &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63]을 제쳤다. 첫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를 위해 작곡한 〈Just the Way You Are〉[64]는 꿈에서 영감을 받았으며,[65]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상올해의 노래상을 수상했다.[66] 빌리 조엘은 파리 투어 중에 늦은 밤 호텔 방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43] 이 음반에는 빌리 조엘의 가장 잘 알려진 곡 중 하나인 AOR 클래식 〈Scenes from an Italian Restaurant〉도 수록되었다. 이 곡은 빌리 조엘이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곡 중 하나이며, 라이브 콘서트에서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67]Vienna〉 또한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이며,[68][69] 2022년 기준으로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곡 중 하나이다.[70] 《롤링 스톤》은 나중에 《The Stranger》를 역사상 70번째로 위대한 앨범으로 선정했다.[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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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52nd Street》의 빌리 조엘 홍보 사진

1978년 정규 음반 《52nd Street》를 발매했다. 음반 이름은 발매 당시 CBS/컬럼비아의 세계 본부였던 맨해튼의 52번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 음반은 700만 장 이상 판매되었으며, 〈My Life〉 (3위), 〈Big Shot〉 (14위), 〈Honesty〉 (24위)의 히트곡들로 차트 1위에 올랐다. 게리 베넷이 커버한 〈My Life〉는 시트콤 《블루문 특급》의 테마곡이 되었다. 《52nd Street》는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팝 보컬 퍼포먼스올해의 앨범상도 수상했다.

1978년, 빌리 조엘은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50회 이상의 공연 중 첫 공연을 열었다. 2025년, 빌리 조엘은 이 경기장에서 연주하는 것을 "꿈이 실현됐다"고 묘사했다.[72] 그는 현재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가장 많은 콘서트를 개최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73]

1979년, 빌리 조엘은 3월 2일부터 4일까지 열린 역사적인 아바나 잼 페스티벌에 참여하기 위해 쿠바 아바나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리타 쿨리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스티븐 스틸스, CBS 재즈 올스타즈, 트리오 오브 둠, 파니아 올스타즈, 빌리 스완, 보니 브램릿, 마이크 피네간, 웨더 리포트 등과 함께 공연했으며, 이라케레, 파초 알론소, 타타 구이네스, 오케스타 아라곤을 포함한 수많은 쿠바 아티스트들과도 함께했다.[74] 빌리 조엘의 공연은 에르네스토 후안 카스텔라노스의 다큐멘터리 《하바나 잼 '79》에 담겨 있다.

《52nd Street》는 1982년에 당시 신기술 콤팩트 디스크(CD) 형식으로 발매된 첫 상업적 음반이었다.[75]

1979년~1983년: 《Glass Houses》와 《The Nylon Curtain》

Just the Way You Are〉, 〈She's Always a Woman〉, 〈Honesty〉와 같은 피아노 중심 발라드가 성공하면서, 일부 비평가들은 빌리 조엘을 ‘발라드 가수’이자 ‘소프트 록 가수’로 낙인찍었다. 빌리 조엘은 이러한 꼬리표가 불공평하고 모욕적이라고 생각했고, 《Glass Houses》를 통해 비평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렬한 록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또한 당시 인기를 얻기 시작한 뉴 웨이브 록 음악 스타일을 때때로 모방하고 언급했다. 빌리 조엘은 가죽 재킷을 입고 그의 롱아일랜드 집 창문에 돌을 던지려는 모습이 담긴 음반 표지 사진이 ‘온화한 발라드 가수’라는 그의 이미지에 대한 반박으로 의도된 것이라고 말했다.[76]

《Glass Houses》는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6주 동안 1위를 차지했으며,[77]You May Be Right〉(1980년 5월, 7위),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1980년 7월, 1위), 〈Don't Ask Me Why〉(1980년 9월, 19위), 〈Sometimes a Fantasy〉(1980년 11월, 36위) 등의 히트곡을 담았다. 빌리 조엘은 또한 수록곡 〈Sometimes a Fantasy〉의 이름을 따 음악과 대화를 모두 포함한 동명의 15분짜리 홍보 영상을 직접 감독/제작했다.[78]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는 첫 번째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한 곡이었으며,[79] 톱 10에 11주 동안 머물렀고 그 해 9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이 되었다.[80]. 1980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5번의 매진 공연으로 1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하여 공연장의 골드 티켓 어워드를 수상했다.[81][82]

《Glass Houses》는 1981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록 보컬 퍼포먼스 남자 부문을 수상했다.[83] 또한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팝/록 부문에서 최우수 앨범상을 수상했다. 음반의 마지막 수록곡인 〈Through the Long Night〉(〈It's Still Rock & Roll to Me〉 싱글의 B면 곡)는 비틀즈의 〈Yes It Is〉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곡으로, 빌리 조엘이 직접 화음을 넣은 자장가이다. 빌리 조엘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녹음된 마스터 클래스에서 비틀즈에게 음악 산업을 시작하는 방법을 묻는 편지를 썼다고 회상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비틀즈 상품에 대한 팸플릿을 받았다. 이는 나중에 빌리 조엘이 전 세계에서 음악 산업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Q&A 세션을 진행하는 아이디어로 이어졌다.[84]

다음 음반인 《Songs in the Attic》은 초창기에 발매됐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의 라이브 공연으로 구성되었다. 이 음반은 1980년 6월과 7월에 미국 대형 경기장과 소규모 나이트클럽 공연에서 녹음되었다. 이 음반은 1977년 《The Stranger》가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 빌리 조엘을 알게 된 많은 팬들에게 초기 작품들을 소개했다.[85] 이 음반은 빌보드 차트 8위에 올랐고 〈Say Goodbye to Hollywood〉(17위)와 〈She's Got a Way〉(23위)의 히트 싱글 2개를 냈다. 3백만 장 이상 판매되었고, 전작 만큼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빌리 조엘은 성공작으로 여겼다.[52]

빌리 조엘의 다음 음악 활동은 《The Nylon Curtain》 녹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빌리 조엘은 〈Allentown〉과 〈Goodnight Saigon〉과 같은 매우 시사적인 곡들을 포함하여 작곡에 더 큰 야심을 품게 되었다. 빌리 조엘은 이 음반이 아메리칸 드림레이건 행정부 동안 미국 정치의 변화가 "갑자기 당신의 아버지가 가졌던 종류의 삶을 물려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86] 또한 더욱 야심차게 녹음 스튜디오를 사용했다. 빌리 조엘은 《The Nylon Curtain》에서 '음향적 걸작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전의 어떤 음반보다 더 많은 시간을 스튜디오에서 음반 사운드를 다듬는 데 보냈다.[86] 《The Nylon Curtain》 제작은 1981년 가을에 시작되었지만, 1982년 4월 15일 빌리 조엘이 심각한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후 몇 달 동안 지연되었다. 빌리 조엘은 롱아일랜드 교차로에서 빨간불을 무시하고 달려온 차에 부딪혀 뒤집히면서 왼쪽 엄지손가락 뼈가 부서지고 다른 손목이 탈골되었다.[87][88]

1982년 10월, 빌리 조엘은 앨범을 홍보하기 위해 짧은 투어를 시작했으며,[89] 12월 29일 뉴욕 유니언데일나소 베터런스 메모리얼 콜리시엄에서 첫 비디오 스페셜 《Live from Long Island》를 녹화했다. 녹화된 영상은 1983년 7월 24일 HBO에서 처음 방송되었고, 이후 VHS로 발매되었다.[90] 다음 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비디오 앨범 후보에 올랐다.[91][92]

《The Nylon Curtain》은 차트에서 7위에 올랐는데, 이는 러셀 멀케히가 감독한 〈Allentown〉과 〈Pressure〉의 뮤직 비디오가 MTV에서 많이 방영되었기 때문이었다.

1983년~1988년: 《An Innocent Man》과 《The Bridge》

빌리 조엘의 다음 앨범은 《The Nylon Curtain》의 진지한 주제에서 벗어나 훨씬 더 가벼운 분위기를 띠었다. 《An Innocent Man》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R&B두왑 음악에 대한 헌정작이었고, 1983년 여름, 음반의 첫 싱글로 발표된 두 번째 빌보드 1위 히트곡 〈Tell Her About It〉을 낳았다. 음반 자체는 미국 차트에서 4위, 영국에서는 2위에 올랐다. 또한 빌리 조엘의 음반 중 가장 많은 톱 30 싱글 6개가 수록되어 있다. 음반은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올뮤직의 선임 편집자인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빌리 조엘이 "다양한 스타일로 전염성 있고 기억에 남는 멜로디를 능숙하게 만들어내며 앨범 전체에서 최고의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고 평했다.[93]

음반 발매 당시 WCBS-FM은 정기적으로, 그리고 《Doo Wop Live》에서 〈Uptown Girl〉을 방송하기 시작했다.[94][95] 이 곡은 싱글로 발매되었을 때 전 세계적인 히트곡이 되었다. 원래 〈Uptown Girls〉라는 제목이었던 이 곡은 크리스티 브링클리, 휘트니 휴스턴, 엘 맥퍼슨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카리브 제도에서 모델 촬영 중이었는데, 호텔 바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던 빌리 조엘(휴가 중인 손님이었다)에게 다가갔다.[96][97] 뮤직 비디오에는 크리스티 브링클리가 롤스로이스를 타고 빌리 조엘이 일하는 주유소로 들어오는 상류층 여성 역할로 출연했다. 비디오 마지막에 빌리 조엘의 '기름때 묻은 정비공 (grease monkey)' 캐릭터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상류층 여성 (Uptown girl)'을 태우고 떠난다.[98] 크리스티 브링클리가 비디오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빌리 조엘을 만났을 때, 빌리 조엘이 문을 열면서 그녀에게 처음 한 말은 "저는 춤을 못 춰요"였다.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뮤직비디오에서 빌리 조엘이 하는 기본적인 동작들을 가르쳐주어야 했다. 뮤직 비디오 촬영 과정에서 둘의 협업을 계기로 두 사람 사이에 인연이 시작되었고, 1985년 결혼으로 이어졌다.

1983년 12월에 동명의 타이틀 곡이 싱글로 발매되어 1984년 초 미국에서 10위, 영국에서 8위를 기록했다. 1984년 3월, 〈The Longest Time〉이 싱글로 발매되어 핫 100에서 14위, 성인 컨템포러리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그 해 여름에는, 〈Leave a Tender Moment Alone〉이 발매되어 27위를 기록했고, 〈Keeping the Faith〉는 1985년 1월에 18위를 기록했다. 〈Keeping the Faith〉의 뮤직 비디오에는 크리스티 브링클리가 컨버터블 쉐보레의 승객으로 등장한다.[99] 《An Innocent Man》은 올해의 앨범 그래미 후보에 올랐지만, 마이클 잭슨의 《Thriller》에 밀려 수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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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월 〈We Are the World〉 녹음 현장에서 다른 뮤지션들과 함께한 빌리 조엘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빌리 조엘은 1985년 USA for Africa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An Innocent Man》 이후, 빌리 조엘은 가장 성공적인 싱글 음반 발매에 대한 요청을 받았다. 이 주제가 처음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빌리 조엘은 처음에 'Greatest Hits' 음반이 자신의 경력의 끝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동의하여, 네 면의 음반과 두 장의 CD 세트로 구성된 《Greatest Hits – Volume I & Volume II》를 발매했다. 곡들은 발매된 순서대로 수록되었다. 신곡 《You're Only Human (Second Wind)》와 《The Night Is Still Young》이 음반 홍보를 위해 싱글로 녹음 및 발매되었으며, 두 곡 모두 톱 40에 진입하여 각각 9위와 34위를 기록했다. 《Greatest Hits》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RIAA로부터 1150만 장 이상(2300만 유닛) 판매로 더블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았다. 이는 RIAA에 따르면 미국 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이다.

《Greatest Hits》 음반 발매와 동시에, 빌리 조엘은 1977년부터 그 시점까지 녹화한 홍보 비디오를 모아 놓은 두 권짜리 비디오 앨범을 발매했다. 빌리 조엘은 《Greatest Hits》 음반에 수록된 새 싱글 뮤직 비디오와 함께, 첫 히트곡 〈Piano Man〉의 뮤직 비디오도 녹화했다.

다음 음반인 《The Bridge》 (1986)는 이전 음반만큼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에어플레인! 감독들의 블랙 코미디 영화인 행복한 인질의 히트곡인 〈A Matter of Trust〉와 〈Modern Woman〉(모두 10위)을 만들어냈다. 발라드 곡 〈This is the Time〉도 차트에 올라 18위를 기록했다. 1986년 11월 18일, 〈Big Man on Mulberry Street〉의 확장(extended) 버전이 블루문 특급 시즌 3 에피소드에 사용되었다. 《The Bridge》는 빌리 조엘이 아티 립과의 관계를 끊은 후 Family Productions 로고를 사용한 마지막 앨범이었다. 빌리 조엘은 《The Bridge》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에 불만족스러웠지만, 음반 회사는 더 곡을 만들 시간을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100] 2008년 인터뷰에서 빌리 조엘은 이 음반에 대해 '좋지 않은 앨범 (not a good album)'이라고 묘사했다.[101]

1986년 10월, 빌리 조엘과 밴드는 소련 투어를 계획하기 시작했다.[102] 이는 다음 해 7월에 실현되었고, 빌리 조엘과 아내, 딸 알렉사, 투어 밴드와 함께 소련에 도착했다. 트빌리시에서의 즉흥 공연에 이어 빌리 조엘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실내 경기장에서 여섯 번의 콘서트를 열었으며, 총 1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모였다.[103][104] 여행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일행은 TV와 비디오로 촬영되었고, 콘서트는 전 세계 라디오를 통해 동시 방송되었다. 빌리 조엘의 러시아 투어는 소련 역사상 최초의 록 라이브 라디오 방송이었다.[105] 이 투어는 나중에 소련 최초의 풀 스테이지 팝 록 쇼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었지만, 실제로는 엘튼 존, 제임스 테일러, 보니 레잇을 포함한 다른 아티스트들도 이전에 이 나라에서 투어한 적이 있었다.[106]

대부분의 관객들은 빌리 조엘의 활기찬 쇼에 익숙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빌리 조엘이 공연했던 다른 나라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빌리 조엘에 따르면, 밝은 조명이 켜질 때마다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얼어붙었다. 또한 '과잉 반응'하는 사람들은 보안 요원에 의해 퇴장당했다.[107] 이 콘서트 동안, 밝은 조명에 격분한 빌리 조엘은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전기 피아노를 뒤집고 마이크 스탠드를 부러뜨렸다.[108][109] 빌리 조엘은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109]

러시아 콘서트는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공연을 한 후에 열렸고, 빌리 조엘은 낮 동안 인터뷰를 한 후, PA 시스템이 '기껏해야 2류'인 공연장에서 공연했다.[103] 빌리 조엘의 바람과 달리 1987년 10월에 발매된 투어 중 녹음된 라이브 더블 앨범 《КОНЦЕРТ》("콘서트"의 러시아어)에는 밥 딜런의 〈The Times They Are a-Changin〉과 비틀즈의 〈Back in the U.S.S.R.〉 커버 버전이 포함되었다. 후자는 싱글로 발매되었지만 미국 빌보드 핫 100에 진입하지 못했다. 이 음반은 빌리 조엘 음반 중 《Cold Spring Harbor》 이후 처음으로 골드 디스크 지위를 얻지 못했다.[110][111] 가수 피트 휴렛은 〈An Innocent Man〉 같이 보컬적으로 가장 어려운 곡에서 고음을 내기 위해 영입되었다. 빌리 조엘은 이 여행과 콘서트에서 100만 달러 이상을 손해 봤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곳에서 받은 호의가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말했다.

1988년~1993년: 《Storm Front》와 《River of Dreams》

빌리 조엘은 애니메이션 영화 《올리버와 친구들》 (1988)에서 아트풀 다저를 기반으로 한 냉소적인 잭 러셀 테리어인 다저의 성우 역할로 드물게 출연했다. 캐릭터의 디자인은 트레이드마크인 웨이페어러 선글라스를 포함하여 당시 빌리 조엘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다. 빌리 조엘은 캐릭터 곡 〈Why Should I Worry?〉를 불렀다.

1988년에 시작된 《Storm Front》 녹음은 빌리 조엘 경력에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으며, 사업에 있어서 심각한 격변의 시기였다. 1989년 8월, 음반 발매 직전에 빌리 조엘은 감사 결과 당시 매니저(이자 전 처남)였던 프랭크 웨버의 회계에서 큰 불일치가 발견되자 매니저를 해고했다. 이후 사기와 신탁 의무 위반을 주장하며 프랭크 웨버를 9천만 달러에 고소했고, 1990년 1월, 프랭크 웨버를 상대로 한 부분 판결에서 2백만 달러를 받았다. 4월에는 법원이 프랭크 웨버가 제기한 3천만 달러의 반소를 기각했다.[112]

음반의 첫 싱글인 〈We Didn't Start the Fire〉는 1989년 9월에 발매되었고, 이는 빌리 조엘의 세 번째이자 가장 최근의 미국 1위 히트곡이 되어 2주 동안 정상을 지켰다. 《Storm Front》는 10월에 발매되었고, 9년 전 《Glass Houses》 이후 조엘의 첫 1위 앨범이 되었다. 《Storm Front》는 《Turnstiles》 이후 필 라몬이 프로듀싱 하지 않은 첫 빌리 조엘 음반이었다. 빌리 조엘은 새로운 사운드를 원했고 포리너믹 존스와 함께 작업했다. 또한 빌리 조엘은 믹 존스의 1988년 셀프 타이틀 솔로 앨범에서 키보드 연주자 중 한 명으로 참여했으며, 믹 존스의 싱글 〈Just Wanna Hold〉의 공식 비디오에 출연했다. 빌리 조엘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당시 아내였던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그와 함께 키스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더불어, 빌리 조엘은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브라운, 색소폰 연주자 마크 리베라를 제외한 모든 밴드 멤버를 해고하고, 멀티 악기 연주자 크리스탈 탈리아페로를 포함한 새로운 인물들을 영입하여 밴드를 개편했다.

《Storm Front》의 두 번째 싱글인 〈I Go to Extremes〉는 1990년 초에 6위에 올랐다. 이 음반은 또한 1987년 투어 중 레닌그라드라는 소련 도시에서 만난 광대와의 만남 이후 쓰여진 〈Leningrad〉와 간신히 생계를 꾸려가는 롱아일랜드 어부들의 고충을 강조하기 위해 쓰여진 〈The Downeaster Alexa〉로도 유명하다. 또 다른 잘 알려진 싱글은 발라드 〈And So It Goes〉(1990년 후반 37위)이다. 이 곡은 원래 1983년 조엘이 《An Innocent Man》에 수록할 곡을 쓰고 있을 때 쓰여졌지만, 〈And So It Goes〉는 그 앨범의 복고풍 테마와 맞지 않아 《Storm Front》까지 보류되었다. 빌리 조엘은 1996년 피츠버그에서 열린 마스터 클래스 세션에서 《Storm Front》가 격동적인 음반이었고, 음반의 마지막 수록곡인 〈And So It Goes〉는 격렬한 폭풍우 뒤에 찾아오는 평온과 평화를 묘사한다고 말했다.

1992년 9월, 빌리 조엘은 그의 전 변호사 앨런 그루브먼을 사기, 신탁 의무 위반, 직무 유기, 계약 위반 등 광범위한 혐의로 9천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했다.[113][114] 이 사건은 1993년 가을에 소니 아메리카가 빌리 조엘에게 3백만 달러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법정 밖에서 합의되었는데, 이는 자회사 소니 뮤직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소니 뮤직은 그루브먼의 법률 사무소를 이용하는 다른 여러 아티스트들도 있었기 때문이다.[115][116]

1992년, 빌리 조엘은 R&B 듀오 샘 & 데이브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117] 또한 그 해 빌리 조엘은 《River of Dreams》 작업을 시작하여 1993년 초에 음반을 완성했다. 음반 표지 그림은 크리스티 브링클리가 그린 다채로운 그림으로, 음반의 각 노래 장면들을 담고 있다. 동명 타이틀 첫 싱글은 빌리 조엘이 지금까지 작곡한 마지막 톱 10 히트곡으로, 빌보드 핫 100에서 3위를 기록했으며 1993년 연말 차트에서 21위를 차지했다. 타이틀곡 외에도 음반에는 〈All About Soul〉(컬러 미 배드가 백 보컬로 참여)과 딸 알렉사 레이 조엘을 위해 쓰여진 〈Lullabye (Goodnight, My Angel)〉 등의 히트곡이 포함되어 있다. 〈All About Soul〉의 라디오 리믹스 버전은 《The Essential Billy Joel》 (2001)에 수록되어 있으며, 데모 버전은 《My Lives》 (2005)에 수록되어 있다.

〈The Great Wall of China〉라는 곡은 전 매니저인 프랭크 웨버에 대해 쓰여졌으며, 2006년 빌리 조엘 투어의 정기 세트리스트에 포함되었다. 〈2000 Years〉는 1999년 12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밀레니엄 콘서트에서 두드러지게 연주되었고, 〈Famous Last Words〉로 빌리 조엘은 10년 이상 이루어진 팝 작곡 활동을 마감했다.

1994년~2013년: 투어와 새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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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공연 중인 빌리 조엘

빌리 조엘은 1994년부터 엘튼 존과 함께 〈Face to Face〉 투어를 광범위하게 진행했으며, 이로써 그들은 팝 음악 역사상 가장 길고 성공적인 콘서트 듀오가 되었다.[118] 이 공연에서 빌리 조엘과 엘튼 존은 각자의 노래를 연주하고, 서로의 노래를 부르고, 듀엣으로 공연했다. 빌리 조엘과 엘튼 존은 2003년 매진된[119] 투어에서 24회 공연만으로 4천6백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2009년 3월에 Face to Face 투어를 재개했고[119] 2010년 3월 올버니, 뉴욕타임스 유니언 센터에서 막을 내렸다. 2010년 2월, 빌리 조엘은 2010년 여름 투어 일정을 취소했다는 언론 보도를 부인하며, 어떤 일정도 예약된 적이 없었고 그 해는 쉬고 싶다고 주장했다.[120] 빌리 조엘은 롤링 스톤에 "아마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와 함께 공연하는 것은 항상 즐겁다"고 말했다.[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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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공연 중인 빌리 조엘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1994년 4월 13일에 별거를 발표했고, 1994년 8월에 이혼했다. 둘은 이후 친구로 남았다.[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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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 중인 빌리 조엘, 1995c.

빌리 조엘의 《Greatest Hits Volume III》에는 〈To Make You Feel My Love〉(밥 딜런 커버)와 〈Hey Girl〉이 수록되었다. 1997년 센트럴 파크 콘서트에서 빌리 조엘은 1989년 〈Shameless〉 곡 녹음으로 1991년 빌보드 컨트리 차트 1위에 오른 가스 브룩스와 함께 공연했다. 1999년 3월 15일, 빌리 조엘은 레이 찰스에 의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연설에서 레이 찰스는 1986년 앨범 《The Bridge》에 수록된, 둘의 듀엣을 위해 빌리 조엘이 작곡한 듀엣곡 〈Baby Grand〉를 언급했다.[123]

빌리 조엘은 1999년 12월 31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했다. 당시 빌리 조엘은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투어이자 아마도 마지막 콘서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공연 중 〈We Didn't Start the Fire〉와 〈Scenes from an Italian Restaurant〉 두 곡은 ABC에서 새해 Y2K 특별 보도의 일부로 촬영되어 방송되었다. 이 콘서트(The Night of the 2000 Years로 명명됨)는 거의 4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나중에 《2000 Years: The Millennium Concert》로 발매되었다.[124]

2001년에는 빌리 조엘이 작곡하고 주형기가 연주한 고전 피아노 곡 모음 음반 《Fantasies & Delusions》를 발매했다. 빌리 조엘은 라이브 공연에서 이 곡들의 일부를 간주곡으로 자주 사용하며, 그 중 일부는 히트 쇼 《Movin' Out》의 악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음반은 클래식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빌리 조엘은 2001년 9월 21일 《America: A Tribute to Heroes》 자선 콘서트의 일환으로 〈New York State of Mind〉를 라이브로 공연했으며, 2001년 10월 2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더 콘서트 포 뉴욕 시티에서 〈Miami 2017 (Seen the Lights Go Out on Broadway)〉와 함께 공연했다. 그날 밤 엘튼 존과 함께 〈Your Song〉도 공연했다.

2003년, 빌리 조엘은 라이처스 브라더스를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며, 앨범 《52nd Street》에 수록된 곡 〈Until the Night〉가 그 듀오에게 바치는 헌정곡이라고 언급했다.

2005년, 콜럼비아는 데모, B-사이드, 라이브/대체 버전, 그리고 몇몇 톱 40 히트곡들로 주로 구성된 박스 세트 《My Lives》를 발매했다. 이 컴필레이션에는 사람들이 〈Zanzibar〉과 〈I Go to Extremes〉 라이브 버전을 리믹스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포함되어 있다. 《River of Dreams》 투어 DVD도 포함되어 있다.

2006년 1월 7일, 미국 투어를 시작했다. 13년 동안 새 곡을 발매하지 않았던 빌리 조엘은 주요 히트곡뿐만 아니라 〈Zanzibar〉과 〈All for Leyna〉와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포함하여 음악 경력 전반에 걸친 다양한 곡들을 선보였다.[125] 1월 23일부터 4월 24일까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12회 공연은 같은 투어 동안 한 아티스트의 연속 매진 콘서트 기록(이전 최고 기록은 2000년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세운 10회 공연)을 깼다. 이 업적으로 빌리 조엘은 경기장 역사상 비선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영구 결번(12번)을 받았다.[126][127] 같은 영예가 필라델피아엑스피니티 모바일 아레나(이전 웰스 파고 센터)에도 수여되었으며,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 색상의 배너가 빌리 조엘의 필라델피아 매진 공연 48회를 기념하고 있다. 2006년 6월 13일, 콜럼비아는 빌리 조엘의 2006년 투어 중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12번의 각각 다른 공연에서 32개의 라이브 녹음을 담은 더블 음반 《12 Gardens Live》를 발매했다.

빌리 조엘은 2006년 투어의 유럽 투어의 일환으로 오랜만에 영국과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2006년 7월 31일, 빌리 조엘은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로마에서 무료 콘서트를 열었다.[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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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잭슨빌에서 공연 중인 빌리 조엘

빌리 조엘은 2006년 후반에 남아프리카, 호주, 일본, 하와이를 투어했고, 이어서 2007년 2월과 3월에 미국 남동부를, 2007년 봄에는 중서부를 투어했다. 2007년 2월 27일, 〈All My Life〉라는 제목의 새 싱글을 발매했다 (두 번째 트랙은 〈You're My Home〉으로, 2006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투어 라이브 버전).[129] 2월 4일, 빌리 조엘은 슈퍼볼 XLI에서 국가를 불렀으며, 에런 네빌에 이어 슈퍼볼에서 두 번 국가를 부른 두 번째 가수가 되었다.

2007년 12월 1일, 빌리 조엘은 신곡 〈Christmas in Fallujah〉를 초연했다.[130] 이 곡은 롱아일랜드 출신 신인 음악가 캐스 딜런이 불렀는데, 이는 빌리 조엘이 이 노래를 병사 연령대의 사람이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비록 그 자신도 콘서트에서 이 곡을 가끔 불렀지만). 이 트랙은 이라크에 주둔한 군인들에게 헌정되었다. 빌리 조엘은 2007년 9월 이라크 주둔 미군으로부터 받은 수많은 편지를 읽고 이 곡을 썼다. 〈Christmas in Fallujah〉는 1993년의 《River of Dreams》 이후 조엘이 발표한 두 번째 팝/록 노래이다. 이 곡의 수익금은 Homes For Our Troops 재단에 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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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현재 필라델피아 엑스피니티 모바일 아레나에 걸린 배너. 빌리 조엘의 필라델피아 경기장에서 48회 연속 매진 콘서트를 기념한다.

2008년 1월 26일, 빌리 조엘은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함께 음악 아카데미 151주년 기념 공연을 가졌다. 빌리 조엘은 클래식 음반 《Fantasies & Delusions》의 〈Waltz No. 2 (Steinway Hall)〉를 브래드 엘리스 편곡으로 연주했다. 또한 브래드 엘리스가 편곡한 완전한 오케스트라 반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많이 연주했는데, 여기에는 거의 공연되지 않은 《Nylon Curtain》 앨범 수록곡 〈Scandinavian Skies〉와 〈Where's the Orchestra?〉도 포함되었다.

2008년 3월 10일, 빌리 조엘은 친구 존 멜런캠프를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

빌리 조엘은 2008년 5월부터 7월까지 코네티컷 언캐스빌에 있는 모히건 선 카지노에서 10번의 콘서트를 매진시켰다. 카지노는 그의 이름과 10이라는 숫자가 적힌 배너를 경기장에 걸어 그를 기념했다. 2008년 6월 19일, 빌리 조엘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윈저에 있는 시저스 윈저(이전 카지노 윈저)의 재개장 콘서트에서 카지노 VIP를 위한 초대 전용 공연을 가졌다. 그의 기분은 가볍고 농담으로 가득했으며, 자신을 "빌리 조엘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여러분은 뚱뚱하고 대머리 남자를 보기 위해 너무 많은 돈을 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캐나다 포크 팝 음악가 고든 라이트풋이 〈She's Always A Woman〉의 음악적 영감이었다고 인정했다.[131]

2008년 7월 16일과 18일, 빌리 조엘은 셰이 스타디움 철거 전 마지막 콘서트를 열었다. 공연에는 토니 베넷, 돈 헨리, 존 메이어, 존 멜런캠프, 스티븐 타일러, 로저 돌트리, 가스 브룩스, 폴 매카트니가 게스트로 참가했다. 이 콘서트는 2010년 다큐멘터리 영화 《Last Play at Shea》에 실렸다. 이 영화는 2011년 2월 8일 DVD로 발매되었다. 공연의 CD와 DVD인 《Live at Shea Stadium: The Concert》는 한 달 뒤인 3월 8일 발매되었다.

2008년 12월 11일, 빌리 조엘은 시드니의 아세르 아레나 콘서트에서 자신이 부른 〈Christmas in Fallujah〉 버전을 녹음하여 호주에서만 라이브 싱글로 발매했다. 이는 빌리 조엘이 〈Christmas in Fallujah〉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유일한 버전이며, 2007년 스튜디오 녹음과 2007년에 몇 차례 라이브로 연주했을 때는 캐스 딜런이 불렀다. 빌리 조엘은 2008년 12월 호주 투어 내내 이 곡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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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빌리 조엘

2009년 5월 19일, 빌리 조엘의 전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는 빌리 조엘과 소니 뮤직이 자신에게 10년 넘게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뉴욕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리버티 드비토는 빌리 조엘의 어떤 곡에서도 작곡 또는 편곡 크레딧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Only the Good Die Young〉을 포함한 일부 곡 편곡에 자신이 참여했다고 주장했다.[132] 이후 2010년 4월, 빌리 조엘과 리버티 드비토가 소송을 원만하게 해결했다고 발표되었다.[133]

빌리 조엘의 데뷔 앨범 《Cold Spring Harbor》 발매 40주년을 기념하여, 공식 웹사이트에서 콜럼비아/레거시 레코딩스가 "새롭게 복원 및 확장된 레거시 에디션으로 조엘의 전체 카탈로그, 금고에서 새로 선별된 희귀곡 모음, 이전에 공개되지 않은 스튜디오 트랙 및 라이브 공연, 홈 비디오 발매 등"을 포함한 "결정적인 재발매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고 발표되었지만, 이 프로젝트는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134]Piano Man》은 2011년 11월에 두 장의 디스크로 된 레거시 에디션으로 재발매되었으며, 두 번째 디스크에는 1972년 필라델피아 WMMR-FM 라이브 라디오 콘서트가 포함되었다.[134][135]

2012년, 빌리 조엘은 유니버설 뮤직 퍼블리싱 그룹(UMPG)과 자회사 Rondor Music International과 독점적인 전 세계 출판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에 따라 UMPG와 Rondor는 미국 외 지역에서 빌리 조엘의 카탈로그를 관리하던 EMI Music Publishing을 대체하게 되었다. 또한 이 계약은 1980년대에 빌리 조엘이 자신의 출판권을 되찾은 이후 처음으로 미국 내 카탈로그 관리를 위해 관리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이 계약의 초점은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및 광고에서 빌리 조엘 음악 사용을 늘리는 데 있다.[136]

2012년 12월 12일, 빌리 조엘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허리케인 샌디 피해자를 위한 콘서트인 12-12-12: 더 콘서트 포 샌디 릴리프의 일환으로 공연했다. 그는 〈Miami 2017 (Seen the Lights Go Out on Broadway)〉의 가사를 샌디로 인한 모든 피해와 관련되도록 바꾸어 불렀다.

2013년 5월, 빌리 조엘이 11월 1일 더블린의 O2에서 생애 첫 아일랜드 실내 콘서트를 개최할 것이라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빌리 조엘은 이후 10월과 11월에 영국으로 돌아와 공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빌리 조엘은 맨체스터버밍엄뿐만 아니라 런던의 해머스미스 아폴로에서도 공연했다.[137][138] 10월에는 빌리 조엘이 롱아일랜드의 파라마운트(헌팅턴)에서 롱아일랜드 케어스를 위한 깜짝 콘서트를 개최했다. 1,555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에서 개최됐으며, 5분 만에 매진되었다. 빌리 조엘은 2013년 12월 31일 브루클린의 바클레이스 센터에서 뉴욕시에서 2006년 이후 처음으로 단독 아레나 콘서트의 헤드라이너로 공연했다.

2013년 12월, 빌리 조엘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첫 번째 음악 '프랜차이즈'로 선정될 예정이다.[73] 이 영예로 빌리 조엘은 뉴욕 닉스, 뉴욕 레인저스, 뉴욕 리버티와 함께 오리지널 매디슨 스퀘어 가든 프랜차이즈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73][139]

2014년~2025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정기 공연, 〈Turn the Lights Back On〉, 건강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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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 중인 빌리 조엘

빌리 조엘은 2014년 1월 27일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무기한으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40] 첫 MSG 쇼에서는 《Billy Joel in Concert》 투어도 진행되었는데, 이 투어는 올랜도암웨이 센터에서 이어졌고, 이 투어에서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Your Song〉, 빌리 프레스턴의 〈You Are So Beautiful〉(조 코커에게 바치는 곡), 비틀즈의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 〈Can't Buy Me Love〉, 〈When I'm 64〉, 로버트 번스의 〈Auld Lang Syne〉, AC/DC의 〈You Shook Me All Night Long〉(브라이언 존슨과 함께) 등 여러 커버 곡을 불렀다. 또한 빌리 조엘은 1974년 음반 《Streetlife Serenade》의 수록곡 〈Souvenir〉를 포함하고 〈We Didn't Start the Fire〉를 제외하는 등 이례적인 세트리스트를 선보였다.[141]

2015년 1월, 빌리 조엘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3번째 연속 공연을 한 후 자신이 2006년에 세웠던 최다 연속 공연 기록을 경신했으며, 이로 인해 매디슨 스퀘어 가든 천장에 새로운 배너가 걸리게 되었다.[73] 2015년 내내 빌리 조엘은 매달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상주 공연 외에 21번의 콘서트를 열었다. 2015년 8월 4일 나소 콜리시엄에서의 공연은 2억 6천 1백만 달러의 리노베이션을 앞둔 경기장에서의 마지막 콘서트였다.[142] 빌리 조엘은 2017년 4월 5일, 새로 리노베이션된 경기장에서 첫 콘서트를 하기 위해 나소 콜리시엄으로 돌아왔다.[143] 같은 달 말, 애틀랜타의 새 선트러스트 파크(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교외 홈구장)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다.[144] 6월 24일, 빌리 조엘은 동기들이 졸업장을 받은 지 50년 만에 힉스빌 고등학교로 돌아와[145] 명예 졸업 연설을 했다. 이 해는 해당 고등학교에서 자신이 졸업장을 받은 지 25주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2016년 10월 7~8일, 콜로라도스프링스콜로라도 칼리지는 빌리 조엘에 대한 첫 학술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행사는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빌리 조엘의 음악과 가사"라는 제목으로 대중에 공개되었으며, 빌리 조엘은 300명의 참석자들을 위해 한 시간 동안 전화 인터뷰를 제공하여 참여했다.[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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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 중인 빌리 조엘

2019년, 빌리 조엘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홈구장인 캠든 야즈에서 콘서트를 개최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이는 야구 경기장에서 열리는 첫 콘서트였다.[147] 빌리 조엘은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2020년 3월부터 2021년 8월까지 콘서트를 연기했다.

빌리 조엘과 스티비 닉스는 2023년 미국 전역에서 콘서트를 함께 개최할 계획을 발표했으며, 잠정적으로 3월 10일 로스앤젤레스 외곽의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시작할 예정이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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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브리티시 썸머 타임 콘서트에서 공연 중인 빌리 조엘

2023년 6월 1일, 빌리 조엘은 2024년 7월 즉, 매디슨 스퀘어 가든 상주 공연 시리즈의 104번째 공연이자 그곳에서의 150번째 공연 메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을 마칠 것이라고 발표했다.[149] 2024년 1월 22일, 빌리 조엘은 오랜만에 (20여 년 만에 두 번째 팝송인) 첫 번째 새 팝 싱글 〈Turn the Lights Back On〉을 발표했으며, 2월 1일에 발매되었다.[150][151]

2025년 5월 23일, 빌리 조엘은 정상압 수두증 진단을 받고 모든 예정된 콘서트를 취소했다.[152] 2025년 7월까지 빌리 조엘은 피플빌 마에게 자신이 더 나아졌다고 말했다.[153][154]

2025년 7월 18일과 25일, 빌리 조엘은 HBOHBO 맥스에서 방영된 2부작 다큐멘터리 《Billy Joel: And So It Goes》에 출연했다.[155][156][157][158] 다큐멘터리와 함께 155곡의 사운드트랙이 발매되었다.[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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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활동

빌리 조엘은 오랫동안 보트를 좋아하며 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1996년에 롱아일랜드 보트 사업가 피터 니덤과 함께 롱아일랜드 보트 회사를 설립했다.[160][161]

2010년 11월, 빌리 조엘은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에 빈티지 오토바이 맞춤 제작 사업체 겸 박물관 20세기 사이클스를 열었다.[162][163]

2011년 빌리 조엘은 프레드 슈루어스와 함께 쓴 자서전 《The Book of Joel: A Memoir》을 출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책은 원래 하퍼콜린스 사를 통해 2011년 6월에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2011년 3월 책 출판을 취소하고 하퍼콜린스와의 계약을 공식적으로 해지했다. 롤링 스톤은 "하퍼콜린스는 2008년에 이 책 프로젝트를 3백만 달러에 인수했다. 빌리 조엘은 그 금액의 선불금을 출판사에 반환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언급했다.[164] 빌보드에 따르면 "하퍼콜린스의 책은, 음악계의 전설과 크리스티 브링클리와의 실패한 결혼 생활과 약물 남용과의 싸움을 자세히 다룬 '감정적인 여정'으로 홍보되었다."고 한다.[165] 책 출간 취소 결정에 대해 빌리 조엘은 "책을 쓰는 작업을 하면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 삶의 기복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여전히 내 음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166] 2014년, 슈루어스는 빌리 조엘과의 광범위한 개인 인터뷰를 바탕으로 단순히 《빌리 조엘》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했다.[167]

사생활

요약
관점

결혼 및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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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알렉사 레이 조엘

빌리 조엘의 첫 번째 아내는 엘리자베스 웨버 스몰이었다. 둘의 관계가 시작된 때는, 엘리자베스 웨버는 빌리 조엘이 잠깐 활동했던 듀오 아틸라의 파트너 존 스몰과 결혼하여 아들이 있던 상황이었다. 불륜 사실이 밝혀지자 엘리자베스 웨버는 두 남자와 모두 관계를 끊었다. 엘리자베스 웨버와 빌리 조엘은 나중에 화해하고 1973년에 결혼했으며, 그녀는 그의 매니저가 되었다. 둘은 1982년 7월 20일에 이혼했다.[168]

이후 1985년 3월 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169] 그들의 딸, 알렉사 레이 조엘은 1985년 12월 29일에 태어났다.[169][170] 빌리 조엘은 자신의 음악적 우상 중 한 명인 레이 찰스의 이름을 따서 알렉사에게 "레이"라는 미들 네임을 지어주었다.[171]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는 1994년 8월 26일에 이혼했다.[172] 이후 둘은 친구 관계로 지내고 있으며, 빌리 조엘은 크리스티 브링클리의 두 막내 자녀인 잭과 세일러 브링클리 쿡대부이다.[173][174]

2004년 10월 2일, 빌리 조엘은 세 번째 아내인 셰프 케이티 리와 결혼했다.[175] 결혼 당시 케이티 리는 23세, 빌리 조엘은 55세였다. 당시 18세였던 빌리 조엘의 딸 알렉사 레이가 들러리를 맡았다. 두 번째 아내 크리스티 브링클리도 결혼식에 참석하여 커플에게 축복을 빌었다. 그러나 2009년 6월 17일, 둘은 별거를 발표했다.[176]

2015년 7월 4일, 빌리 조엘은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 베이 자택에서 마장마술 선수이자 전 모건 스탠리 임원이었던 알렉시스 로더릭과 네 번째 결혼을 했다. 당시 빌리 조엘은 66세였고, 아내는 33세였다.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가 주례를 맡았다.[177] 두 사람은 2009년부터 관계를 맺어왔다.[178] 2015년 8월 12일, 부부는 딸 델라 로즈 조엘을 얻었다.[179] 2017년 10월 22일에는 그들의 둘째 딸 레미 앤 조엘이 태어났다.[180] 두 어린 딸은 현재 가족이 살고 있는 플로리다의 학교에 다닌다.[181][182]

부동산

딸 알렉사가 태어난 후, 1986년 빌리 조엘과 아내 크리스틴 브링클리는 아마간세트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는데,[183][184] 보도에 따르면 290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185] 2002년, 빌리 조엘은 그 부동산을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드에게 3,250만 달러 (당시 뉴욕주 역사상 가장 비싼 주택 구매)에 팔았다.[186]

2002년, 빌리 조엘은 오이스터 베이 타운의 센터 아일랜드에 2,200만 달러를 주고 부동산을 구입했다. 새그 하버에도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187] 2023년, 빌리 조엘은 오이스터 베이 주택을 4,900만 달러에 시장에 내놓았다.[188] 매인 주택이 개조 공사중이었던 까닭에 매물은 철회되었다. 게스트 하우스, 수영장, 해변, 헬리콥터 착륙장을 갖춘 26 에이커(105,218 m2) 면적의 이 저택은 2024년 9월에 4,990만 달러에 다시 매물로 나왔다.

2015년, 빌리 조엘은 플로리다 마날라판에 있는 집을 구입했다. 이 해안가 주택은 2015년 11월 1,950만 달러에 시장에 나왔으나[189] 매물에서 철회되었다가 2017년에 1,850만 달러의 호가로 다시 등록되었다.[190] 2018년에는 이 부동산의 가격이 1,690만 달러로 더욱 인하되었다.[189] 2020년 1월, 13,200평방피트의 이 주택은 1,030만 달러에 매각되었다.[191]

10대 시절 채취선에서 일했던 빌리 조엘은 해양 문제에 대한 오랜 관심을 가지고 있다. 2009년에는 전업 선장이 감독하는 작은 선단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여러 척의 배는 빌리 조엘의 대략적인 디자인을 기반으로 했으며, 오이스터 베이에서 맨해튼까지 통근하기 위해 제작된 50 mph (80.5 km/h)의 최고 속도를 가진 57 ft (17.4 m) 보트도 포함되어 있었다.[192]

건강

1970년, 경력 쇠퇴와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빌리 조엘은 깊은 우울증을 겪었다. 2025년 다큐멘터리 《Billy Joel: And So It Goes》에서 그가 두 차례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193] 빌리 조엘이 엘리자베스 웨버 스몰과 불륜을 저질러 아틸라가 해체되고 가장 친한 친구 존 스몰과 소원해진 후, 빌리 조엘은 존 스몰의 집에서 쫓겨났다.[194] 빌리 조엘은 “나는 살 곳이 없었다. 나는 빨래방에서 자고 있었고, 거의 정신병에 걸릴 정도로 우울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194] 빌리 조엘의 여동생 주디 몰리나리(당시 의료 보조원)는 이전에 그에게 수면을 돕기 위해 수면제를 주었다.[193] 빌리 조엘은 가지고 있던 모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함으로써 자살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며칠 동안 혼수 상태에 빠졌다.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빌리 조엘은 자신의 시도가 실패한 것에 실망했고, 두 번째 시도에서는 "제대로 할 것"이라고 맹세했다.[194] 이에 유서를 남기고 가구 광택제를 마셔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빌리 조엘은 나중에 "표백제보다 맛있어 보여 가구 광택제를 마셨다."라고 말했다.[195] 존 스몰이 그를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다. 빌리 조엘은 메도브룩 병원에 입원하여 자살 감시를 받으며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196] 빌리 조엘은 이후 〈Tomorrow Is Today〉를 작곡했는데, 그는 이 곡을 유서라고 표현했다.[52]

1985년, 빌리 조엘은 10대 자살 예방 메시지를 내기 위해 〈You're Only Human (Second Wind)〉을 작곡·녹음했다.[197]

2002년에는 코네티컷주 뉴캐넌에 있는 실버 힐 병원에 입원하여 10일 동안 약물 남용정신건강의학 치료를 받았다.[198] 2005년 3월, 빌리 조엘은 베티 포드 센터에 입원하여[199] 30일 동안 알코올 의존증 치료를 받았다.[200]

2025년, 정상압수두증 진단을 받았다.[152], 이로 인해 청력, 시력, 균형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 진단으로 빌리 조엘은 예정된 모든 콘서트를 취소했다.[201] 2025년 7월, 그는 피플과의 인터뷰와 빌 마의 팟캐스트에서 자신의 상태가 치료 가능하며 호전되고 있다고 말했다.[154][153]

빌리 조엘은 알코올 중독 이력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결국 술을 끊었고 음주 운전 체포와 같은 그의 알코올 중독에 대한 일부 세부 사항은 과장되었다고 말했다.[154][157]

정치적 견해 및 참여

빌리 조엘은 민주당 후보에게 금액을 후원한 적은 있지만,[202] 공개적으로 민주당에 가입한 적은 없다. 빌리 조엘은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2008년 버락 오바마의 대선 캠페인 기금을 모으기 위해 그의 친구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함께 자선 공연을 했다.[203] 빌리 조엘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기금 모금 자선 콘서트에서 공연했다. 그러나 유명인들이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티켓 값을 내는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에게 투표할지, 어떻게 투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204]

2016년, 당시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에게 〈The Entertainer〉를 헌정하며 풍자했는데,[205] 이것이 도널트 트럼프에 대한 지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자, 뉴욕 데일리 뉴스에 이메일로 자신이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206]

2025년 뉴욕 시장 선거에서 앤드루 쿠오모의 출마를 지지했다.[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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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목록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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