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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니 미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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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니 미쓰사다(少弐 満貞, しょうに みつさだ)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무장으로 쇼니씨(少弐氏) 11대 당주이다.[3]

간략 정보 시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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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오에이 원년(1394년)、쇼니 사다요리(少弐貞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대 쇼군(将軍) ・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로부터 이름자 하나를 받아, 처음 이름은 요리미쓰(頼満)라 하였다.[1] 오에이 11년(1404년) 아버지 사다요리의 죽음으로 가독을 이었다.[4] 오에이 3년(1396년) 료슌에 이어 신임 규슈 단다이(九州探題)가 된 시부카와 미쓰요리(渋川満頼)와는 몇 번이나 전투를 벌였다.

오에이 26년(1419년)、미쓰요리가 단다이직을 사임하고 물러나고 미쓰요리의 아들 요시토시(義俊)가 새로이 규슈 단다이가 되었다. 그 해에 조선왜구의 본거지로 여겨지던 쓰시마(対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고(기해동정) 이때 쇼니 미쓰사다는 자신이 이를 맞아 싸웠음을[5] 막부에 보고하였다.[6] 오에이 30년(1423년)、하카타(博多)에서 단다이 요시토시와 싸워 그를 격파하였다.[7] 오에이 32년(1425년)에 요시토시의 반격을 물리쳤으나, 북부 규슈에서의 항쟁을 평정하고자 스오에서 내려온 오우치 모리하루(大内盛見)에게 패배[8]、하카타를 방기하는 수밖에 없었다.[9]

쇼니 미쓰사다를 쳐부순 모리하루는 쇼초(正長) 원년(1428년) 종형인 요시토시로부터 단다이직을 넘겨받은 시부카와 미쓰나오(渋川満直)를 도와 규슈로의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다. 에이쿄 3년(1431년)、미쓰사다는 지쿠젠국(筑前国)의 영유를 놓고 모리하루와 적대하던 오토모 모치타다(大友持直)와 함께 모리하루와 싸웠고, 모리하루는 전사하였다.[10][11]

에이쿄 5년(1433년) 3월 무로마치 막부는 미쓰사다에 대한 추토령을 냈고, 이 추토 명령을 받들어 규슈로 내려온 오우치 모치요(大内持世)와 전투를 벌였으나, 아리토모 산성(有智山城)에서 패하고, 지쿠젠의 아키쓰키 성(秋月城)에서 전사하였다.[12]

아들 스케쓰구(資嗣)는 비젠국(肥前国) 요카 장(与賀庄)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요시요리(嘉頼) ・ 노리요리(教頼)는 쓰시마로 달아나 소 씨(宗氏)에게 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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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의 관계

쇼니 미쓰사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독을 잇기 2년 전인 조선 태종 2년(1402년)에 소 사다시게와 함께 조선에 사자를 보냈고, 조선 조정은 쌀 10섬과 잣 2섬, 범 가죽 한 장을 하사하였다.[13] 이후 태종 12년(1412년)부터 쓰시마의 소 사다시게와 마찬가지로 해마다 사자를 조선에 보내어 토물을 바쳤다.[14] 쇼니 미쓰사다가 보낸 사신은 태종 14년(1414년) 소 사다시게나 이키, 휴가에서 조선으로 보낸 사신들과 함께 조선 조정이 그들이 요구했던 범종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란을 부리기도 했고,[15] 조선이 쓰시마 섬을 공격한 세종 원년/오에이 26년(1419년) 이듬해에는 조선에서 온 사신들에게 "지난 해에 조선이 우리 쓰시마 섬을 쳐들어 왔으니, 우리가 병선(兵船) 2, 3백 척을 청하여 조선의 해안 고을 몇 곳을 쳐부셔야 우리 마음이 쾌하겠다"[16]고 발언하기도 했다. 조선 조정은 이에 다시 한 번 쓰시마 정벌을 논의하였다가 중지했으며, 쇼니 미쓰사다가 오우치 모리하루에게 패한 뒤인 세종 10년(1428년)에는 쇼니도노에게 줄 몫의 물품을 오우치도노에게 내리도록[17] 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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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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