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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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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인장신라에서 사용되었던 인장(印章)을 가리킨다. 문무왕 때 관인을 주조하여 지방에 반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여러 점의 유물이 남아있다.

역사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남해 차차웅조(南解 次次雄條)에서 19년(남해 차차웅 16년),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인장을 찾아내어 남해 차차웅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이를 통해 신라시대 초기부터 국새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新羅本紀) 문무대왕조(文武大王條)에 따르면 675년(문무대왕 15년), “동(銅)으로 백사(百司) 및 주군인(州郡印)을 주조하여 반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가 청동으로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도장을 만들어서 업무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 1738년(조선 영조 14년)에 따르면, “강원감사가 오래된 인장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원주의 백성이 밭에서 고인(古印)을 발견했는데 인문(印文)에 동첨대종정사인(同簽大宗正事印)라 되어 있고, 뒷면에 천성(天成)이라 새겨져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천성은 곧 후당 명종연호로서 신라 경애왕 3년이다.”라고 하여, 신라 말기의 인장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 관인은 국가가 주조한 것으로 보인다.[1]

신라의 인장은 고구려백제에 비해 훨씬 많이 전해진다. 문자가 새겨진 도장, 문자가 아닌 문양으로 제작된 도장, 관직명이 적혀 있는 도장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인(木印)이나 석인(石印), 함안 성산산성, 이천 설봉산성 등에서 출토된 봉인(封印)은 당시 인장의 사용을 말해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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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신라시대 인장들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아래 표에서 분류된 신라 인장들은 아직 정식 명칭이 없으며, 대부분 사각형의 방인(方引)이다.

자세한 정보 출토 위치, 재질 ...

신라 인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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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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