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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호테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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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호테프 2세(Amenhotep II)는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제7대 파라오이다. 아메노피스 2세(Amenophis II)라고도 한다.
한 때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를 역사에서 지우고 그녀의 기념물들을 파괴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현재는 아멘호테프 2세가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멘호테프 2세는 자신의 왕비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으며, 아문의 신의 아내와 같은 칭호를 폐지하고, 여성의 강력한 직함과 공적 역할과 지위들을 없앴던 것으로도 확인되었다. 이집트 학자들은 그가 여성의 직함 등으로 인해 여성들이 너무 강력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가 없앤 여성과 관련한 직함들 중 일부는 그의 아들인 투트모세 4세의 치세 동안에 회복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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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승계 과정
투트모세 3세는 말년에 이르자 아들 아멘호테프 2세가 자신처럼 섭정의 굴욕을 당하지 않고[3] 또 후계 체제를 확고하게 세우기 위해 공동 통치를 추진한 뒤에 사망했다.
성경과의 연관성
요약
관점
아멘호테프 2세는 재위 3년차에 아시아로 1차 원정을 떠났고,[4] 재위 9년차인 기원전 1416년에는 마지막 원정을 떠났는데[5]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아멘호테프가 이 원정에서 101,128명의 노예들을 잡아왔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6][7] 학계는 아니지만 종교계에서는 아멘호테프 2세가 람세스 2세와 함께 출애굽의 파라오로 주장되곤 한다.[8][9][10] 이 노예들 중 일부가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도망쳤을 수도 있다고 보아 출애굽이 그의 치세 동안에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기도 하다.
기원전 14세기의 기록인 아마르나 문서/서신(Amarna Letters)에서는 가나안에서 반란, 전쟁 등을 일으키는 하비루(히브리; Habiru)/아피루(Apiru)를 기록하는데, 출애굽을 그의 치세로 보는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삼는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기원전 1200년경 무렵, 기후 변화와 사회 변화로 인해 고원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도시인들에게서 곡물을 사먹던 유목민들이 도시들이 쇠락하자 곡물을 자체적으로 생산해야 해서 정착 생활로 바꾸어 정착하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시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11], 유목민이 주류였지만, 가나안의 도시 왕국들에서 이탈한 사회 하층민 계층("하비루 Habiru / 아피루 Apiru"는 사회적 하층민을 가리키는 명칭) 역시 초기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하비루가 초기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출애굽을 그의 시기로 특정할 수는 없으며, 대부분의 학자들 역시 이를 근거로 출애굽이 아멘호테프 2세의 치세 때 있었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사사기와 여호수아에서 자주 언급되듯이 이스라엘은 가나안 내에서 소수 세력으로 묘사되며, 가나안인들과 혼인하고 그들의 세력에 동화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또, 여호수아에서는 기브온의 주민들이 이스라엘에게 투항하여 이스라엘에 흡수되는 것 역시 묘사되기에 하비루를 이러한 가나안 토착민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애초에 특정 계층(하층민, 부랑자, 도적)을 가리키는 이름이 하비루이기에 하비루가 이스라엘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이들은 초기 이스라엘과 연합하거나 한데 어우러져 섞여 살던 가나안의 토착민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출애굽이 아멘호테프 2세의 치세 때 일어난 사건이거나 출애굽이 역사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신왕국 시대 동안 지속적으로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셈족 노예들의 탈출을 고려하면, 아멘호테프 2세 때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도망친 소수의 셈족 노예 집단이 후에 초기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을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출애굽을 그의 치세가 아니라 더 이전으로 보는 학자들도 존재한다. 데이비드 롤은 출애굽을 중왕국 시대의 사건이라 주장하였었다.[12]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기원전 17세기로 보는 사마리아인들의 연대기에 부합하기는 하지만,[13] 성서의 전통적 연대기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과 해당 가설이 수정 연대기를 통하여 중왕국 시대를 기원전 15세기로 보았다는 문제점이 있으며, 이집트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거부되는 가설이다.[14]
출애굽을 고왕국 시대의 사건으로 보는 이들 역시 존재한다.[15] 수정연대기[16]를 사용하여 고왕국 시대를 기원전 15세기까지 낮추거나 출애굽부터 성전의 건립일까지의 기간이 480년이 아니라 1480년[17]이나 그 이상으로 보아 출애굽을 기원전 26-25세기 무렵, 즉, 고왕국 시대의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해당 설에서는 예리코와 아이(Et Tell)가 기원전 26-25세기에 파괴를 경험했다는 것,[18][19] 하솔이 기원전 2500년 무렵부터 기원전 2300-2200년까지 버려져 있었다는 것,[20] 그리고 MacGregor plaque, 제1왕조의 파라오 카아의 Abydos ivory tablet를 통해 고왕국 시대 이전부터 셈족 유목민들이 이집트로 노예나 포로로 끌려왔었다는 것 등이 근거로써 작용한다. 베냐민 부족(Binu-Jamina)이 이집트 제11-12왕조 시절인 고바빌로니아 왕국 시절(기원전 2000-1595년) 초기의 기록에서 메소포타미아를 위협하는 강렵한 유목민 부족으로 등장하고 심지어 우루크의 왕인 신카시드 왕(기원전 1801년 ~ 기원전 1771년)이 해당 부족 출신으로 기록된다는 것[21]은 적어도 출애굽이 기원전 2000년대 무렵보다는 이전에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들은 요셉은 제3왕조의 파라오 조세르의 재상이자 최초의 피라미드를 세운 임호텝과 동일시한다. 참고로, 아랍 전통에서는 출애굽 당시 바로의 신하의 이름을 하만으로 언급하며, 그는 주로 기원전 26세기의 파라오인 제4왕조의 쿠푸의 신하이자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세운 건축가 헤몬/헤미우누(Hemon/Hemiunu)로 식별되곤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보면, 출애굽은 쿠푸의 치세 동안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22] 또한, 제3왕조와 제4왕조 모두 아직 이집트에 전차나 말이 없었던 시절이지만, 성서 속 전차, 병서, 말 등에 대한 언급은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의 성서 명화에서 성서 속 인물들이 유럽인의 복장이나 아랍인의 복장 등 당시의 복장과 물건들과 함께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로 볼 수 있다. 구전되던 전승이 사본에 적히게 되거나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사본이 새로운 사본으로 옮겨지던 과정에서 시대에 맞춰 독자들과 청자들을 위해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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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ML; Bierbrier. The Tomb-builders of the pharaohs. British Museum Press:London(1989)).
- James Bakie A. History of Egypt. NY:Macmillan Company (1929) 236).
- Hayes, ‘Internal Affairs’ in Cambridge Ancient History, 2.1, 333-34).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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