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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야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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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야긴(히브리어: יְכָנְיָה Yəḵānəyāh [jəxɔnˈjɔː], 그리스어: Ιεχονιας; 라틴어: Iechonias, Jechonias), 혹은 고니야, 여호아긴(히브리어: יְהֹויָכִין [jəhoːjɔːxiːn]; 라틴어: Ioachin, Joachin)은 여호아김과 예루살렘 출신 엘나탄의 딸 느후스타의 아들이자 유다 왕국의 19대 왕으로, 바벨론 왕에 의해 폐위당하고 포로로 끌려간 왕이다. 여호아긴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구약성경의 기록에 의존하나, 성경 외에도 이라크에서 발견된 '여호야긴의 식량배분 석판'을 통해 실존이 증명되었다. 이 석판은 바벨론의 이슈타르의 문 근처에서 발견된 것으로 기원전 592년에 설형문자로 기록된 것인데, 여호야긴("Ia-'-ú-kinu")과 그의 다섯 아들[1]을 바벨론에서 식량배분을 받는 사람으로 기록한다. 바벨론측의 기록과 히브리어 성경기록을 비교하여 그의 포로생활의 길이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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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인 여호아김때 바벨론이 유다 왕국을 침략해왔는데, 597년의 예루살렘 공성전 도중 여호아김이 죽고 그의 뒤를 이어 18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3달 만에 예루살렘은 결국 바빌론 제국에게 함락당했고 당시 바벨론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예루살렘의 기물들을 약탈하고 그를 폐위시켜 백성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고 갔으며 그의 삼촌이었던 시드키야를 유다 왕국의 다음 왕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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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통치

여호야긴은 기원전 598년 12월 9일부터 3개월 10일을 통치했다. 아버지 여호야김이 아람과 모압 등의 군대의 급습으로 성 안에서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2] 여호야킴의 죽음에 대해 학자들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대해 일으킨 여호야킴의 반항에 대한 응징이었다고 본다. 여호야긴이 즉위하고 3개월 10일이 지난 뒤인 기원전 597년 3월 15-16일,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여고니아와 그의 가솔들 및 유다의 귀족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3][4][5]:217
역대기하 36장의 마소라 본문은 여호야긴이 8세에 통치를 시작했다고 말하나, 열왕기하 24장 8절에서는 18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6][7] 현대의 학자들은 사본을 제작할 때 발생한 오류로 본다.[8]
바빌론 유수
여호야긴이 폐위된 후, 그 숙부 시드키야가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임명되어 유다를 다스리게 되었다. 시드키야는 요시아의 아들이다.[9] 에제키엘서에서 저자는 여호야긴을 왕으로 부르며, 그가 바빌론으로 유배된 해를 기준으로 사건들에 날짜를 부여한다.[10]
유수에서 풀려나다
열왕기하 25장 27절-30절에 따르면, 여호야긴은 바빌론 왕 에윌므로닥가 왕위에 오른 해인 유수 37년에 감옥에서 풀려나 지위를 부여받았다. 열왕기사가와 신명기사가가 여호야긴의 석방으로 끝이 났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에윌므로닥은 기원전 562년 10월에 그의 통치를 시작했다. 열왕기하 25장 27절에 따르면, 여호야긴은 12월 27일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히브리력의 디스리월에 기반하자면 포로가 된 첫 해가 기원전 598/597년임을 나타낸다.[11] 따라서 유대인들의 계산에 따르면, 37번째 포로년도는 562년 디스리월에서 시작된 해로, 바빌로니아 기록에서 주어진 에윌므로닥의 원년과 일치한다. 이로써 바빌로니아의 기록과 열왕기의 기록이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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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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