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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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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변씨(原州邊(邉)氏)는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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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변씨(邊氏)는 은(殷)나라(동이족(東夷族)) 왕족 미중(微仲)의 후예이다. 송(宋)나라 평공(平公) 시대에 어융(御戎)의 자(字)가 변(邊)이었는데 후손이 어융의 자(字)를 성(姓)으로 삼았다. 어융의 성씨는 자(子)씨였다. 은(殷)나라 29대 왕 제을 아들인 미중(微仲) 후손이 어융(禦戎)이다. 미중(微仲)은 상나라의 왕족이자, 서주의 제후국인 송나라의 제2대 공작이다. 성(姓)은 자(子), 씨(氏)는 송(宋), 이름은 연(衍)이다. 미중(微仲)은 미(微)나라에 봉해졌고 호는 중사(仲思)이다. 공자의 15세조이다. 미자의 동생이고, 제을의 아들이다. 상나라의 형제상속제 따라 미중(微仲)이 왕위를 이었다. 참고로 고대 동아시아 대륙에서 중국 한족 이외의 동쪽에 거주하는 민족을 중국 한족이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렀다. 동이족(東夷族)의 갈래로는 구이(九夷)가 있다고도 했고 예맥족(濊貊族), 말갈족(靺鞨族), 한족(韓族), 왜족(倭族), 일본(日本) 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일본과 왜는 701년 이전에는 다른 나라였다. 동아시아 인물들인 치우(蚩尤), 공자(孔子), 순(舜)임금 등은 모두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개념은 불변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역사 시기에 따라 변화해온 '역사적 개념'이었다. 하지만, 한국 역사의 왕조 국가는 동이족(東夷族)의 왕조 국가와 일치한다.
동아시아 대륙에서 변씨가 어떠한 민족에 속하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기록은 은(殷)나라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동이족(東夷族)과의 관련성은 추정될 뿐 확증할 근거는 없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초기, 중국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제국주의 지배를 받던 민족의 해방을 지지하였고, 모택동(毛澤東)은 ‘각 성 인민의 자결권’을 주장하며 중국을 27개 독립국가로 분할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1949년 당시의 인구 분포를 보면, 만주족·몽골족·한족의 규모는 대체로 유사하였으나, 전체 인구의 약 80%가 민족적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였고, 중국 공산당은 국가적 결속을 목적으로 이들을 ‘한족’으로 통합하였다. 즉, 통계상 중국 인구의 91%를 차지하는 한족 중 다수는 1948년 이후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범주로, 본래 한족은 아니다. 그 결과 오늘날 한족이 절대 다수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변씨의 민족적 기원을 규명하는 일은 더욱 난해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다만, 역사적·장기적 관점에서 중국 한족과 한국인이 ‘종족’을 바라보는 기준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한국에서는 종족 개념이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로 혈연과 조상과의 연계를 중심으로 판단되며, 같은 조상을 공유하거나 먼 친척 관계에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반면 중국 한족 입장에서는 종족을 오랫동안 문화적 공유와 지역적 정체성을 근거로 정의해 왔다. 누구나 문화만 공유하면 한족이 될수 있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20년간 부산에서 태어나 살다가 이후 서울에서 25년간 생활했다면,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부산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중국 한족의 관점에서는 서울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동일한 개인이라도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종족’의 판단이 달라지므로, 한국과 중국 한족의 전통적 종족 개념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따라서 현재 위구르 지역에 한족을 이주시키고 ‘한족화’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중국 한족의 종족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전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오히려 위구르 지역으로 이주한 중국 한족도 위구르족이 되어야 한다.
조선 사회의 경우, 조선 후기 특히 임진왜란 이후 국가 재정의 곤란과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 속에서 매관매직·납속을 통한 관직 및 신분 매매, 족보 위조, 금전 지불을 통한 족보 등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양반 신분과 성씨를 획득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이는 곧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본래 성씨를 보유하지 않았던 계층이 인위적으로 성씨를 구입하여 신분 상승을 도모한 사례로 규정될 수 있다. 이에 반해 1948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는 공산당 주도의 국가적 통합 전략의 일환으로, 원래 10% 미만에 불과하던 한족 비율을 90% 이상으로 인위적으로 조정한 사례와 비교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래 전체 인구의 약 2%만이 성씨를 보유하던 조선 사회는 점차 성씨 보유율이 확대되어 65%에 이르렀으며, 이는 오늘날 남한 인구의 약 40%가 김·이·박 성을 공유하는 현상으로 귀결되었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 성씨인 김·이·박을 포함한 주요 성씨 집단의 95% 이상은 18세기 전후 새롭게 형성된 계통에 속하며, 18세기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 성씨 집단과는 직접적인 계보적 연속성을 결여하고 있다.
다음은 '원주변씨(原州邊(邉)氏)첨추공파(僉樞公派) 거촌문중보(巨村門中譜)’. 열화당, 2020. ISBN 9788930106818'에 기록된 내용이다. "변씨 조상의 고향은 감숙성(甘肅省) 정서(定西) 농서(隴西)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한시대(前漢 時代 202 BC-25 AD)에는 변통(邊通)이라는 사람이 유명하다. 동한시대(東漢 時代 25-220)에는 경조윤 변봉(京兆尹 邊鳳), 구강태수 변양(九江 太守 邊讓), 상서령 변소(尙書令 邊韶)가 모두 진류군(陳留郡) 출신이다. 진류군(陳留郡)은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河南省 開封市) 동남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동탁전(箽卓傳)에 나오는 변장(邊章)도 감숙성 금성(甘肅省 金城)의 출신이다. 위 진 남북조(魏 晉 南北朝 221-589) 시대에는 금성에 거주하는 변씨가 많아졌으며, 금성군과 이웃하고 있는 농서군(聾西郡)으로 옮겨 사는 자들도 생겨났다. 구강태수 변양(九江 太守 邊讓)은 한(漢)나라에서 구강(九江)이라는 지역에서 태수(太守)를 지냈다. 변양(邊讓)의 전(傳 story)에 따르면 변양은 뛰어나서 조조(曺操, 155-220, 후한-위나라)가 시기해서 그를 죽였다고 한다. 변양이 구강(九江)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자字(Courtesy name)을 구강(九江)의 태수(太守)라 한다. 잡록(雜錄)에서는 한(漢)나라의 선조(宣祖) 시기에 예부 상서 변기후가 말하기를 “동아시아 대륙과 동아시아대륙 이외에 있는 변씨는 모두 변양(邊讓)의 후손이다. 그리고, 변순(邊順)도 역시 변양(邊讓)의 후손입니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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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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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변안렬(안열)(邊(邉)安烈)은 원나라 심양(瀋陽) 출신이나 공민왕을 따라서 고려로 들어온 뒤 홍건적을 격퇴하여 경성수복 1등공신이 되었고, 왜구를 격퇴하여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판삼사사(判三司事)와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이르렀다.[1]
변안렬(안열)(邊(邉)安烈)은 변안렬(안열)의 형인 변안백(邊(邉)安伯)의 아들인 변숙(邊(邉)肅)과 변안렬(안열)의 동생(변안열의 아버지, 량,의 두번째 부인의 아들)인 변안서(邊(邉)安緖)과 함께 원에서 노국공주를 수행하고 고려로 왔다. 이때 3명의 대장군과 8명의 관료도 같이 고려로 왔다.
변안렬(안열)은 원주 원씨(原州元氏)와 혼인하여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변현(邊(邉)顯)은 봉상시사(奉常寺事), 차남 변이(邊(邉)頤)는 도총제(都摠制), 삼남 변예(邊(邉)預)는 훈련원사(訓鍊院事)를 역임하였다. 변이의 아들 중 변상복(邊(邉)尙服)이 덕천옹주(德川翁主)와 혼인하여 원주위(原州尉)에 봉해졌고, 변상회(邊(邉)尙會)는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변상회의 아들 변수(邊(邉)修)는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천군(原川君)에 봉해졌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원주 변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2명을 배출하였다.
한국 역사의 변씨의 역사는 고려시대 변유영을 시조로 하는 장연 변씨(함경도 1100년경)로 시작하였다. 변려(邊(邉)呂)는 장연 변씨 5세대이며, 변려를 시조로 하는 황주 변씨(황해도 1200년경)로 이어진다. 그리고 변안렬(안열)은 황주 변씨 8세대이며, 변안렬(안열)을 시조로 하는 원주 변씨(강원도 1300년경)로 이어진다. 변안렬(안열)의 조부,변순(邊(邉)順),부터 변안렬(안열)까지 원나라에서 관직을 하며 거주하다가 황주 변씨 8세대인 변안렬(안열)이 고려로 이주하게된다. 장연 변씨 시조인 변유영의 부는 변연, 조부는 변중량, 증조부는 변경, 고조부는 변앙이다. 변앙은 송나라의 대도사, 변경은 송나라 문하시습과 신라의 대아찬, 변중량은 송나라 평장사, 변연은 송나라 병부상서를 지냈다. 변유영은 송나라 판동서와 고려의 중문지후를 지냈다. 당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고려, 송, 거란 중 가장 높은 외교적 위상을 갖게 되었다. 기록 (원주변씨 족보와 전서공파 가승)에 따르면, 황주변씨 시조 변려는 금나라를 피해 송나라에서 고려로 이주하였으며, 그 지역은 오늘날의 한반도가 아닌 중국 상해 남쪽의 절강성(저장성浙江省), 청서(靑嶼)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변려가 송에서 고려로 이주하던 1100년경에는 고려의 영토가 오늘날 알려진 한반도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중국 동부 지역까지 포함되어 기록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으로 송나라는 가짜 물품의 범람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고려 물품의 높은 품질을 선호했다. 현재는 대다수 물품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산 제품은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다만, 대부분의 중화인민공화국산 제품의 일회용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의도적인 상업 전략일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변씨 가문의 이주 양상을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동아시아의 강대국을 지향하는 경향을 보인다. 원주변씨의 시조인 변안열의 조부 변순은 고려보다 국력이 강성했던 원나라로 이주하여 원나라의 관직을 하며 살았으며, 원이 쇠퇴하던 시기에 변안열은 고려로 귀향하였다. 또한 장연변씨의 변유영과 황주변씨의 변려 역시 당시 송나라보다 국력이 우세했던 고려로 이주하여 고려의 관직에 하고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조상이 조선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하지 않은 이유는, 이전에 송에서 강대국이었던 고려로, 또 고려에서 강대국이었던 원으로 옮긴 것과 달리, 당시의 명이나 청을 조선보다 우월한 강대국으로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상에게는 굳이 이주할 만한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상이 정착하던 시기의 고려와 송의 국력 차이는 역사 드라마 포청천을 통해 잘 드러난다. 한편 역사적으로 송나라 시기에는 가짜 물품이 범람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품질이 뛰어난 고려산 제품이 더욱 선호되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제품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이들 제품은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중화인민공화국산 제품들이 일회용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이를 의도된 상업 전략으로 해석하지만, 보다 설득력 있는 이유는 ‘사용자의 피해보다 생산자의 이익을 앞세우고, 장인정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도덕적 결여의 생산 태도’에 있다는 것이다.
원주변씨의 조상들은 고려가 국력을 떨치던 시기에 이주하였으나, 고려의 멸망과 함께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자 더 이상 강대국 관료로서의 위상을 이어가지 못하고,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조선에서 계보를 이어가게 되었다. 조선은 건국 명분이 충분히 확립되지 못한 채 출발하여 다각적 외교를 펼치지 못하고, 건국 과정에서 도움을 준 명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외세의 침략을 거듭 겪었고, 그 결과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조선은 실질적 이익보다 형식적 명분을 앞세우고, 관료들은 사리사욕을 일삼아 구조적 한계를 심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씨 후손들은 임진왜란 (1592-1598 일본의 침략)과 병자호란 (1527 여진족의 침략) 등에서 공훈을 세웠으며, 이어 경신대기근 (1670-1671)과 을병대기근 (1695-1699)의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대를 이어 삶을 지켜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원주 변씨의 조상들은 대부분 조선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조선 시대의 역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기에 앞서, 더 넓은 맥락에서 동아시아 대륙의 역사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일부 선조들은 고려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고려의 역사도 중요한 참고 대상이 된다. 다만, 고려 시대의 역사 기록은 조선 초기에 정치적 목적에 따라 모두 폐기되었고, 조선의 시각에서 재편집된 역사서만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따라서 오늘날 전해지는 고려 시대의 역사서는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려 시대에 편찬된 고려사는 이성계의 명에 따라 폐기되었고, 이후 조선의 시각에서 재편찬된 고려사는 사실과 해석이 왜곡된 측면이 있다. 이 고려사는 이성계부터 정종, 태종, 세종을 거쳐 문종 원년(1451년)에 완성되었으며, 세종 대에는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을 주도하였다. 즉 이성계, 이방언, 세종이 역사왜곡에 공헌한 면이 있다.
동아시아 대륙은 예로부터 서로 다른 역사를 지닌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 온 공간이었다. 한국사와 달리, 같은 나라나 민족의 역사가 연속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새로운 나라들이 세워졌다가 멸망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는 여러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한 유럽의 역사와 유사한 구조였다. 다만 유럽은 나라가 여러 개로 분리되었을 때 현대 나라의 개념이 확립되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최종적인 단계에서 동아시아 대륙을 하나로 통합한 나라가 세워졌다. 그 나라는 만주 지역에서 출발한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였다. 만약 로마 제국이 전성기 최대 영토를 유지한 채 근대 시대로 접어들었다면, 유럽과 북아프리카 일부 지역은 청나라처럼 단일한 로마 국가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제국의 영토에는 현재의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영국 남부, 포르투갈, 그리스, 터키, 알바니아,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역사 왜곡의 예는 다음과 같다. 원주변씨의 시조는 고려 시대에 원나라에서 고려로 이주하였다. 일부 기록에서는 원나라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기도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려의 사료에 따르면 1271년 이전에는 ‘몽골’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으며, 1271년 이후 ‘원나라’로 국호가 변경되었다. 따라서 원나라는 본질적으로 몽골이라는 국가가 단지 국호만 변경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중국의 역사를 청나라부터 이어온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오히려 송나라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겠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마치 아메리카 원주민의 피가 섞인 후손들이 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의 고대 역사가 곧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중국(中國)"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실제로 "중국(中國)"과 "중원(Center)"은 본래 같은 의미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국호 "중국"은 원래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었다. 국가 명칭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청나라 시기로, 당시 의미는 현대적 의미의 영토 국가가 아니라 “세계의 중심”을 뜻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동아시아는 세계 그 자체였으며, 그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졌다.
고려는 스스로를 황제국으로 여기고 여러 제후국을 두어 국가를 운영하였다. 반면, 조선은 건국 과정에서 명나라의 지원을 받았기에 그 은혜를 갚고자 명나라를 동아시아의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세계관을 형성하고, 그 질서 속에 자신을 포함시키며 한편으로는 명나라에 의존하는 국가 체제를 유지하였다. 동시에 조선은 다른 강대국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조선은 더 이상 대륙 중심 질서에 속할 수 없게 되었고, 한반도 내에서 스스로를 동아시아내의 중심국으로 자처하며 국가 정체성을 이어가려 했다. 이러한 국가 운영 방식은 조선을 고려에 비해 자주성이 결여된 국가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일본의 침략과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오점을 초래했다. 따라서 조선의 이러한 선택과 태도는 한국 역사에 깊은 아쉬움을 남기며, 국가 운영의 한계와 외교적 의존의 문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객관적으로 볼 때, 시대적 운이 따른 덕분에 조선은 20세기 초 일본의 침략으로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경험을 겪을 수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국민들의 독립 의지와 활동을 통해 국가적 독립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사건이 500년 전 발생했더라면, ‘강점’이나 ‘독립’과 같은 근대적 개념은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며, 조선은 일본의 통치 하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조선 이전의 역사 또한 기록과 사회적 기억 속에서 소멸했을 가능성이 크며, 한국 역사를 사실상 말살하는 왕조가 되었을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와 조선이 치른 전쟁들은 모두 중국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고조선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들과의 전쟁이었다. 쉽게 말해, 같은 조상을 둔 먼 후손들, 다시 말해 일종의 먼 친척들끼리 벌인 싸움이라해도 무리가 없다. 다만, 홍건적(紅巾賊) - 붉은 띠를 두른 도적 무리 - 이 세운 명나라가 등장한 초기에 한족 세력과의 전쟁이었다. 동아시아 대륙에서 한족이 세운 왕조국가들은 서로 역사적 연속성이 없다. 당시에는 현대처럼 ‘식민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 세워진 왕조는 이전과 단절된, 다른 민족 또는 다른 나라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
한국 역사에서는, 반란으로 정당한 명분 없이 조선을 세운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왕조가 고려의 영토를 실제보다 축소하여 기록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이러한 왜곡이 더욱 심화되어, 동아시아 대륙의 역사를 지우고 한반도 중심으로 제한되었다. 문제는, 일제 시기에 형성된 이러한 왜곡된 역사관을 학습한 세대가 오늘날까지도 한국사 이해의 주류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5년 현재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알려진 문화 대부분이 조선을 기반으로 한 것이며, 한국 역사 왕조들 중 조선보다 모든 왕조가 더 찬란했는데도 조선 문화가 대표적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 역사에서 원주 변씨의 계보는 고려 시대부터 시작되므로, 그 이전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흔히 한 나라의 역사는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기록된다고 하지만, 이 관점은 매우 제한적이며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간헐적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가 한반도와 동아시아 동부 대륙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들 국가를 소수민족 집단이나 지방정권으로 규정함으로써, 본래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다른 독립적 역사와 정체성을 지닌 국가였다는 점을 은폐하고, 이를 대외적으로는 선전 도구로, 대내적으로는 국민 통제와 사상 주입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방정권’이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독자적 민족성과 역사 전통을 가진 국가의 성격을 설명하기에 부적절하다. 실제로 고구려와 백제는 700년 이상 존속하며 동아시아 정치 질서의 핵심적인 축을 형성하였으나, 동시대 대륙의 예외없이 모든 국가들은 3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단명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10년에서 20년에 불과한 국가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른바 지방정권론은 영토적 귀속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정치적·학술적 담론일 뿐, 역사적 실체를 왜곡하는 개념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원주 변씨는 직계 후손이 없을 경우에도 입양을 통해 가문을 이어왔다. 현대의 관점에서, 입양된 부모를 진정한 부모로 볼 것인지, 혹은 유전자를 제공한 생물학적 부모를 진정한 부모로 볼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그러나 만약 입양한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족보 속 조상이 실제와 다를 가능성이 있으며, 그로 인해 족보 자체의 의미가 흔들릴 수 있다.
한국의 역사는 고조선부터 시작된다. 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했고,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를 계승했으며, 신라의 계승 국가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는 신라의 영토와 백성을 이어받았지만, 스스로는 고구려의 계승을 자처하였다. 반대로 여진족의 국가, 청나라는 신라를 계승했다고 주장하였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중화민국)은 청나라를 계승한 국가이다. 흠정만류고, 청나라 역사서, 에 의한 신라계승설 또는 왕족이 신라인으로 묘사한다. 왕조국가에서는 백성보다는 왕족의 뿌리가 중요했다. 동아시아 대륙의 한족의 국가로 왕족이 한족일뿐 백성은 한족이 아닌 백성이 많았다. 흠정만류고 기준으로만 판단하면 지금의 중국은 신라의 후손인것이다. 조선은 고려를 계승하였으며, 현대 한국은 조선을 이어받았다. 신라후기는 고구려의 일부 영토와 백제의 영토를 차지했고 신라인은 신라초중기의 백성, 백제 백성, 그리고 일부 고구려인들로 구성되었다. 신라 다음의 국가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은 신라의 후손이지만, 동시에 고구려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은 후손이기도 하다. 즉, 한국은 신라와 고구려 양쪽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족보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라의 후손이라기보다는 고구려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한나라(漢)"의 '한'과 "한국(韓)"의 '한'은 발음은 같지만, 그 의미와 기원은 전혀 다르다. "한나라"의 '한(漢)'은 중국의 국가 이름을 나타내는 글자이며, "한국"의 '한(韓)'은 고유한 한국어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된 글자로, 본래 뜻은 '칸(Khan)' 또는 '한(Han)', 즉 군주나 제왕을 의미하는 칭호였다. 또한 '한'은 '크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한강'은 '크고 넓은 강'을 뜻하며, 여기서 '한(漢)'은 '크다'는 뜻을 지닌 한자어이다. 이처럼 '한'은 규모나 위엄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인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도 '큰 나라'를 뜻하는 '대한(大韓)'과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뜻하는 '민국(民國)'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다른 주제로 한국인에게 한자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한국역사에서 한자는 오래전부터 고유언어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한 글자이다. 한자문화권인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한국, 일본은 서양과 교류하기전에는 동아시아대륙이 그들의 세계였다. 단, 대만(자유중국)은 명나라이전에는 한자문화권이 아니다. 서양문화에서 알파벳을 사용하여 자기 고유언어를 표기한 것처럼, 동아시아에서 서로 역사가 다른 모든 국가들은 자기 고유의 언어를 알파벳처럼 한자를 이용하여 표기했다. 비록 같은 글자를 사용했더라도, 한국의 조상과 일본의 조상은 각기 다른 문법과 어순으로 자기 언어를 표현했다. 현재 중국은 ‘한쯔(汉字)’, 한국은 ‘한자(漢字)’, 일본은 ‘칸지(漢字)’, 베트남은 ‘한뜨(Chữ Hán)’라 부르는데, 어느 나라도 그것을 ‘중국 글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각 나라가 자기 언어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한 고유한 문자 체계였기 때문이다. 물론 베트남은 1945년 이후 한뜨 대신 알파벳을 도입했고, 한국은 1970년대 중반부터 한자 교육을 축소하면서 한글 중심의 표기 체계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자는 여전히 한국인의 역사와 조상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문자이며, 한글 어휘의 60% 이상이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한자는 한국인의 언어와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현대의 젊은 세대에게도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의 문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마다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미와 전통을 이어받는 ‘승계’를 중시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 입양된 아이는 입양한 부모의 가족 전통과 풍습을 이어받으며, 경우에 따라 혈연보다 이러한 승계가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결국, 역사를 바라볼 때 승계를 중시할지, 혈통을 중시할지는 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다. 오랜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나 신념 때문에 전쟁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에도 이념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믿음과 승계는 인간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이는 인간 역사의 본질을 보여준다.
황주 변씨(1200년경)와 원주 변씨(1300년경)는 같은 혈통에서 갈라진 직계 후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장연 변씨의 시조 변유영과 황주 변씨의 시조 변려는 다른 경우이다. 변유영은 송나라에서 고려로 와 정착했으며, 그 후손들은 고려에 터를 잡고 살았다. 반면 변려는 변유영의 후손으로 전해지지만, 송나라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해 황주 변씨의 시조가 되었기에, 장연 변씨 계통과 직접 연결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다음은 변(邉)이라는 성의 글자에 관한 것이다. 변(邉)은 변(邊)의 이체자(異體字)라고 하고 동아시아에서는 이체자(異體字)를 쓰이는 것이 평범하다고 한다. 변(邊)의 뜻은 가장자리 또는 측면이라는 뜻이며, 또한 성씨로도 사용을 한다. 이체자(異體字)를 쓰는 이유는 어떤 글자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때, 그 중에서 어떤 의미를 강조하고자 할 때 사용한다고 한다. 성변 (邉) 은 다음과 같이 4개의 글자로 이루어져있다. 흰 백(白)은 '하얀 색'(또는 스스로 자自), 민갓머리(冖)는 '뚜렷한 모양을 나타내는 상징물', 인(儿)은 '어린아이의 모습', 그리고 입구(口)는 '입구나 입'이다. 책받침(辶)는 부수(部首)이며, 한자를 정리·배열하기 위한 방법이어서 의미가 없다. 이 네 가지 한자를 합치면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의미하는 글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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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파
요약
관점
분파는 각 후손의 관직으로 분파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전서공파(典書公派)는 변숙(邊(邉)肅)의 관직인 고려시대 가정대부(嘉靖大夫) 호부전서(戶部典書)이고, 첨지공파(僉知公派)는 변량보(양보)(邊(邉)良輔)의 관직인 조선시대 첨중추(僉中樞)이다. 2023년 전서공파(典書公派)는 23세대까지, 첨지공파(僉知公派)는 18세대를 이어가고 있다.
원주 변씨 전서공파인 숙(肅)과 원주 변씨 사령공파인 안서(安緖)는 원주변씨 시조 안열의 명을 받아 원주변씨가 되었지만, 안열의 직계 후손이 아닌 안열의 조카와 동생이기 때문에 황주변씨 세대로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전서공파(典書公派)인 숙(肅)의 후손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전까지 황해도 연백 또는 개성 또는 개풍에서 거의 600년간을 살았다. 원주 변씨 전서공파의 후손들은 1세대부터 20세대인 변희풍(邊(邉)熙豊)까지 연백 또는 개성 또는 개풍에 살았으나 한국전쟁으로 변희풍(邊(邉)熙豊)은 연백 또는 개성 또는 개풍에서 서울로 이주했다. 오른쪽 사진의 변희풍(邊(邉)熙豊, 전서공파 20대)으로 그의 고향인 연백 또는 개성 또는 개풍은 38선이 남북한의 경계였을 당시에는 남한의 영토였지만,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이 남북을 나누면서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 그는 한국 전쟁 때 형제들과 함께 연백 또는 개성 또는 개풍에서 서울로 이주하여 남한에서 원주 변씨 전서공파 및 첨지공파의 후손으로 세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전서공파 가훈을 후손에게 다음과 같이 남겼다. “변씨 가문에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의 뜻과 사람의 마음을 잘 어울려서 행동하고, 주위의 모든 일을 살피면서, 마음에 가진 뜻을 최선을 다해 이루면, 변씨 집안에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邊門堂中慶雲起. 應天順人智盧新. 周到凡事心氣活. 一展大志聲四隣).”
변숙의 묘소는 연안군 동면, 변이진은 황해도 배천군 유천면, 변환부터 변문까지는 풍덕군 서면 중련, 변한국부터 변지현까지는 풍덕군 중련리 행수동 방화교, 변석연은 풍덕군 중련리 용미동 방화교, 변승필과 변형식은 풍덕군 중련리 자책동, 변희풍은 대지공원(충북 음성군 생극면), 그리고 변응주는 국립 이천 호국원에 묘소가 있다.
별좌공파(別坐公派)인 현(顯)의 첫째, 극충(克忠, 1434- ?)는 원주 변씨 시조인 변안열(安烈)부터 경기도 양주(楊州)에 살았다. 원주 변씨 4세대 변처령(處寧)부터 인천(仁川)에서 살았다. 참의공파(參議公派)인 현(顯)의 둘째, 극민(克愍)은 평안도 태천에서 살았다. 원주 변씨 4세대 변재중(載重)부터 평북 태인(泰仁)에서 살았다.
첨추공파(僉樞公派)인 이(㶊)의 첫째, 차희(次憙, 1392-1462)는 경북 안동 금계, 예천, 용문, 봉화 거촌에서 살았다. 원주 변씨 5세대 변희리(希李, 1435-1506)가 연산군 무오사화(1498년) 때 경북 예천으로 옮겨가 살았다. 변희리의 후세인 원주 변씨 7세대 변영순(永淳)부터 안동의 금계, 봉화, 군위 등지에 살았다. 원주 변씨 6세대 변점(店)부터 강원도 원주에 살았다.
전주 변씨는 이(㶊)의 셋째아들 상근의 후손인 호군공파이다. 위키피디의 전주 변씨는 잘못된 정보이다.
훈련공파(訓鍊公派)인 제주에 살고 있는 원주 변씨는 변안열의 셋째 예(預)의 후손이다.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인 예(預)의 막내 손자인 세청(世淸)과 후손들은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이다. 세청(世淸)은 1405년(태종 5) 정국이 혼란하자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피신해 제주에 입도하였다.
오른쪽 그림은 안열의 후손은 H7-2, 안서의 후손은 H7-3, 숙의 후손은 H7-1-2로 표시되어 있다. H7-2는 황주변씨 7세대, 변량의 둘째아들의 의미이다.
- 변숙, 안열의 조카 또는 안열 형의 아들, 후손 -
- 전서공파(典書公派) 변숙(邊(邉)肅)
변숙의 5대 후손
- 첨지공파(僉知公派) 변량보(양보)(邊(邉)良輔) 첨지공파 직계 찾기
- 갑산공파(甲山公派) 변량좌(양좌)(邊(邉)良佐)
- 목사공파(牧使公派) 변량우(양우)(邊(邉)良佑)
-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변량언(양언)(邊(邉)良彦)
- 정의공파(貞毅公派) 변량걸(양걸)(邊(邉)良傑)
- 변안서, 안열의 동생, 후손 -
- 변안열 후손 -
1. 안열 첫째, 현의 아들
- 별좌공파(別坐公派) 변극충(邊(邉)克忠)
- 참의공파(參議公派) 변극민(邊(邉)克愍)
2. 안열 둘째, 이의 아들
- 첨추공파(僉樞公派) 변차희(邊(邉)次熹),
- 남부령공파(南部令公派) 변상조(邊(邉)尙朝)
- 호군공파(護軍公派) 변상근(邊(邉)尙覲)
- 참판공파(參判公派) 변상회(邊(邉)尙會)
- 감찰공파(監察公派) 변상동(邊(邉)尙同)
- 군수공파(郡守公派) 변상빙(邊(邉)尙聘)
- 부마공파(駙馬公派) 변상복(邊(邉)尙服)
3. 안열의 셋째, 예
- 훈련공파(訓鍊公派): 변예(邊(邉)預)
안열 셋째, 예의 아들
- 사용공파(司勇公派) 변영청(邊(邉)永淸)
-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변세청(邊(邉)世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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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항렬자
항렬자는 5세대부터 사용하였다. 6, 8, 10, 12세대는 이름이 한 글자(외자)라서 항렬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16 세대부터 5행을 따라 항렬자를 만들었다. 항렬자의 부수가 5행(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이다. '항렬자'는 세대별로 번갈아가며 첫번째 글자로 두번째 글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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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1985년 39,605명
- 2000년 37,505명
- 2015년 47,804명
문화재
- 원주 변씨 간재 종택 및 간재정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원천군 변수 영정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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