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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레반트 지역에서 계속되는 군사적, 정치적 갈등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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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옛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영토 내의 영토와 자결권을 둘러싼 현재 진행 중인 군사적 및 정치적 분쟁이다.[28][29][30] 분쟁의 주요 측면에는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 점령 및 가자 지구, 예루살렘의 지위, 이스라엘 정착촌, 국경, 안보, 수자원 권리[31],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의 허가 제도, 팔레스타인인의 이동의 자유[32],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이 포함된다.
이 분쟁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시온주의가 부상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 운동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식민지화하여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33][34] 1882년 첫 유대인 정착민들이 오스만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것과 동시에 일어났다.[35] 시온주의 운동은 1917년 영국이 발행한 밸푸어 선언에서 제국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 선언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고향" 건설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옛 오스만 제국 영토에 대한 영국의 점령 이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은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설정되었다. 유대인 이민 증가로 인해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공동체 간 분쟁으로 번졌다.[36][37] 1936년, 아랍 봉기가 독립과 시온주의에 대한 영국의 지원 중단을 요구하며 발생했으나 영국에 의해 진압되었다.[38][39] 결국 긴장은 1947년 유엔이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채택하게 했고, 이는 내전을 촉발했다.
이어진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 동안, 위임통치령의 주된 팔레스타인 아랍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도주하거나 추방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스라엘은 옛 위임통치령 영토의 대부분에 설립되었고,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는 각각 이집트와 요르단이 통제했다.[40][41]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로 통칭되는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점령해왔다. 이스라엘과 그 점령에 대한 두 차례의 팔레스타인 봉기가 1987년과 2000년에 각각 제1차와 제2차 인티파다로 발발했다. 이스라엘의 점령은 이스라엘이 그곳에 불법 정착촌을 건설하게 했고, 그 점령 하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제도화된 차별 시스템인 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를 만들었다.[42] 이 차별에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권과 잃어버린 재산에 대한 권리를 이스라엘이 거부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스라엘은 또한 유엔의 비난을 받았으며, 팔레스타인인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43]
미국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국제사회는 1980년대부터 두 국가 해법을 기반으로 한 1967년 국경을 따르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위한 정의로운 해결책을 모색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데 합의해 왔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국제법을 기반으로 분쟁을 해결하기보다는 양자 협상을 선호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두 국가 해법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감소했으며, 이스라엘 정책은 분쟁의 영구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는 점령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2007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봉쇄를 강화하고 서안 지구로부터의 고립 정책을 공식화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와의 관계를 전시국제법의 관점에서 규정했으며, 점령국으로서의 지위보다는 전쟁법의 관점에서 규정했다. 2024년 7월 국제사법재판소 (ICJ)는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다고 판결했다. ICJ는 또한 이스라엘의 정책이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을 위반한다고 결정했다.
2006년 이후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2023년 10월 하마스 주도 무장 단체의 공격 이후 또 다른 전쟁이 이어져 가자 지구에 광범위한 파괴, 대규모 인구 이동, 인도주의적 위기 및 임박한 기근을 초래했다.[44][45]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에서의 행동은 국제법 전문가, 집단살해 연구자 및 인권 단체에 의해 집단살해로 묘사되었다.[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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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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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정치적 시온주의의 발전과 시온주의 정착민들의 팔레스타인 도착과 함께 시작되었다.[35][49] 20세기 초에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아랍 민족주의도 성장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영국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에서 팔레스타인에 독립적인 아랍 국가 설립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50] 대영 제국은 1916~1918년 아랍 반란에 많은 양의 무기를 공급했다.[51] 아랍 반란의 지원을 받아 대영 제국은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고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를 통제하게 되었다.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독립적인 아랍 국가 건설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1916년에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비밀리에 체결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52] 1920년 7월, 아랍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인 파이살 1세가 왕으로 있었고 영국이 용인했던 단명한 시리아 아랍 왕국은 현대 포병으로 무장한 프랑스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유대인 식민지화는 이 시기에 시작되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10년간 더 이데올로기적인 시온주의 이민자들이 도착하기까지는 오스만 팔레스타인의 지형이 크게 변하기 시작하지 않았다.[53] 토지 매입, 소작농 아랍인 농민의 축출, 유대인 준군사 부대와의 무력 대결은 모두 팔레스타인 주민의 영토 이탈 및 재산 박탈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41] 시온주의 운동 지도부는 초기부터 유대인 인구 다수를 확보하기 위해 아랍 팔레스타인 인구를 이 땅에서 "이전"(민족 청소의 완곡어)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54][55][56][57][58] 이스라엘 역사가 베니 모리스에 따르면 이전이라는 생각은 "필연적이고 시온주의에 내재되어 있었다."[59] 아랍 인구는 1880년대 첫 번째 알리야가 도착했을 때부터 이러한 위협을 느꼈다.[41] 하임 바이츠만이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구축하려는 노력은 결국 밸푸어 선언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7년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을 위한 민족적 고향" 건설을 지지하겠다고 발표한 공개 성명이었다.[60]
1920년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이 수립되면서 대규모 유대인 이민이 시작되었고, 외국 자본의 지원을 받는 별도의 유대인 통제 경제 부문이 발전했다.[61] 제2차 알리야의 더 열렬한 시온주의 이데올로그들은 1920년대부터 이슈브의 지도자가 되었고 유대인과 아랍 사회의 분리를 믿었다.[35]
영국 고등판무관 허버트 새뮤얼에 의해 예루살렘의 그랜드 무프티로 임명된 아민 알 후세이니는 즉시 유대 민족 운동과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민을 자신의 대의에 대한 유일한 적수로 규정했고,[62] 1920년 예루살렘과 1921년 야파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규모 폭동을 선동했다. 이러한 폭력의 결과로 유대인 준군사 조직인 하가나가 설립되었다. 1929년, 일련의 폭력적인 폭동으로 인해 유대인 133명과 아랍인 116명이 사망했으며, 헤브론과 사페드에서 상당수의 유대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헤브론과 가자에서 유대인들이 대피했다.[63]
1936년–1939년 아랍 봉기

1930년대 초,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 투쟁은 이즈 앗딘 알카삼과 같은 중동 전역의 많은 아랍 민족주의 무장 세력들을 끌어들였고, 그는 검은 손 무장 단체를 설립하고 팔레스타인 아랍 봉기 (1936년~1939년)의 기반을 다졌다. 1935년 말 알카삼이 영국군에 의해 사망한 후, 긴장은 1936년 아랍 총파업과 총불매운동으로 폭발했다. 파업은 곧 폭력으로 변질되었고, 아랍 봉기는 유대인 정착촌 경찰, 유대인 보조 경찰, 특수 야간 부대로 구성된 영국군의 도움으로 영국군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다.[64] 봉기 진압으로 인해 성인 남성 인구의 최소 10%가 사망, 부상, 투옥 또는 망명하게 되었다.[65] 많은 아랍 지도부의 추방과 경제 약화로 인해 팔레스타인인들은 성장하는 시온주의 운동에 맞서 싸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66]
봉기와 지속적인 공동체 간 분쟁과 관련된 비용 및 위험으로 인해 이 지역의 영국 정책이 전환되었고, 필 위원회가 임명되어 작은 유대 국가 창설을 권고했으며, 주요 시온주의 지도자들인 하임 바이츠만과 다비드 벤구리온은 나중에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를 수용했다.[67][68][69] 뒤이은 1939년 백서는 유대 국가를 거부하고 이 지역으로의 유대인 이민을 제한하려 했으며, 이는 영국 당국과 시온주의 운동 간 관계의 분기점이 되었다.[70]
1940년–1947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된 갱신된 폭력은 아랍 측에서 약 5,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영국과 유대인 측에서 총 700명의 사상자를 냈다.[71][72][73]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상황은 진정되었다. 이는 나샤시비 씨족의 지도 아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사이에서 보다 온건한 입장으로 전환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심지어 영국 지휘 아래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과 싸우는 유대-아랍 팔레스타인 연대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알-후세이니의 더 급진적인 망명 세력은 나치 독일과 협력하는 경향이 있었고, 아랍 세계 전역에서 친나치 선전 기계 설립에 참여했다. 이라크에서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패배와 이후 알-후세이니의 나치 점령 유럽으로의 이주는 팔레스타인에서의 현장 작전에 대한 그의 손발을 묶었지만, 그는 이탈리아와 독일에게 텔아비브를 폭격할 것을 정기적으로 요구했다.[63] 팔레스타인 유대인 에이전시와 팔레스타인 국민방위당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 청년들에게 영국군에 자원할 것을 촉구했다. 전쟁 중 30,000명의 팔레스타인 유대인과 12,000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영국군에 입대했으며, 1944년에는 유대인 여단이 창설되었다.[74]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유럽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운명을 둘러싼 위기는 이슈브와 위임통치 당국 간의 긴장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1944년까지 유대인 단체들은 영국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영국이 유대 국가 형성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유대인 반란으로 절정에 달했다. 영국 당국에 대한 시온주의 준군사 저항 운동과 유대인 난민의 불법 이민 증가, 그리고 1947년 유엔 분할안은 결국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게 만들었다.[75]
1947년 유엔 분할안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유대 국가, 그리고 예루살렘 시로 분할하는 계획의 채택과 이행을 권고하는 결의안 181(II)를[76] 채택했다.[77]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분할에 반대했다.[78] 시온주의자들은 분할을 수용했지만, 유엔이 할당한 것보다 이스라엘의 국경을 확장할 계획이었다.[79] 다음날, 팔레스타인은 폭력에 휩싸였고, 팔레스타인 전쟁의 첫 단계가 시작되었다. 4개월 동안 계속되는 아랍의 도발과 공격 속에서 이슈브는 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가끔 보복했다.[80] 아랍 연맹은 자원봉사자 기반의 아랍 해방군을 조직하여 압둘 카디르 알후세이니와 하산 살라마의 지도 아래 팔레스타인 아랍 성전군을 지원함으로써 아랍 투쟁을 지지했다. 유대인 측에서는 주요 지하 민병대인 하가나, 이르군, 레히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수많은 유대인 참전 용사들과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강화되어 내전을 관리했다. 1948년 봄이 되자 아랍군은 전면적인 붕괴 직전에 있었고, 이슈브군은 점점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여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대규모 난민 문제를 야기했다.[63]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 발표 후, 아랍 연맹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위해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옛 영국 팔레스타인으로 진격시켜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의 주요 단계가 시작되었다.[77] 약 15,000명의 사상자를 낸 전반적인 전투는 1949년 휴전 및 정전 협정으로 이어졌으며, 이스라엘은 옛 위임통치령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요르단은 서안 지구를 점령하고 나중에 합병했으며,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장악하여 1948년 9월 22일 아랍 연맹에 의해 전팔레스타인 정부가 선포되었다.[64] 1947–1948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내전과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 민족 청소를 초래했다.[40] 1950년 이스라엘은 귀환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유대인과 그 배우자가 이전에 그곳에 살지 않았더라도 투표권을 가진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56년 수에즈 위기
1950년대 내내 요르단과 이집트는 팔레스타인 페다인 무장 세력의 이스라엘 국경을 넘는 공격을 지원했으며, 이스라엘은 주최국에서 자체 보복 작전을 수행했다. 1956년 수에즈 위기는 가자 지구의 단기 이스라엘 점령과 전팔레스타인 정부의 망명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이스라엘 철수 후 다시 복원되었다. 전팔레스타인 정부는 1959년 이집트에 의해 완전히 포기되었고 아랍 연합 공화국에 공식적으로 합병되어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에 해를 끼쳤다. 가자 지구는 이집트 군정 행정관의 통제 아래 놓여 사실상 군사 점령지가 되었다. 그러나 1964년 야세르 아라파트에 의해 새로운 조직인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설립되었다.[77] 이 조직은 즉시 대부분의 아랍 연맹 정부의 지지를 얻었고 아랍 연맹에서 의석을 확보했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 동예루살렘, 가자 지구, 이집트 시나이반도, 시리아 골란고원 및 아카바만의 두 섬을 점령했다.
이 전쟁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PLO는 현장에서 통제력을 확립할 수 없었고 궁극적으로 요르단에 본부를 설립하여 소모전 (중동) 동안 요르단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1970년 요르단-팔레스타인 내전으로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기지가 붕괴되었고, 그 후 PLO는 남부 레바논으로 이전해야 했다.
1970년대 중반, 국제사회는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함으로써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틀에 합의했다. 이 "평화를 위한 땅" 제안은 국제사법재판소와 유엔의 지지를 받았다.[81]
1973년 욤키푸르 전쟁
1973년 10월 6일, 주로 이집트와 시리아로 구성된 아랍 연합군이 유대인의 성일인 욤키푸르에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양측 모두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쟁 종식 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결의안 242에 명시된 평화를 위한 토지 원칙을 확인하는 결의안 338을 통과시켜 중동 평화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아랍의 패배는 PLO가 분쟁의 협상 해결을 추구하려는 의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82][83]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이스라엘 점령 지역을 무력으로 무기한 점유할 수 없다고 믿기 시작했다.[84][85]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합의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주로 양국 간의 평화 조약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협정은 또한 이스라엘의 통제 하에 있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아랍 인구를 위한 "자치 정부"를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이 협정을 기반으로 한 평화 조약은 1979년에 체결되었고, 이는 이스라엘이 1982년까지 점령했던 이집트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이어졌다.[86][87]
1982년 레바논 전쟁
레바논 내전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은 레바논 내에서 상대방과 싸우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1978년 해안 도로 학살로 인해 이스라엘은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 이 작전은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축출하고 남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동맹 기독교 민병대가 통제하는 지역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작전은 남부의 상당 부분을 이스라엘의 대리인이 통제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 대리인은 결국 남레바논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이스라엘군은 결국 레바논에서 철수했다.[88][89][90][91]
1982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의 남부 국경을 확보한 후 레바논에서 PLO의 군사적, 정치적 세력을 해체하여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92] 목표는 레바논에 친이스라엘 정권을 수립하고 점령된 팔레스타인에서 정착 및 합병 정책을 계속하는 것이었다.[93][94][95] PLO는 이스라엘과의 최근 휴전을 준수하고 군사 작전보다 협상을 선호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PLO를 잠재적인 협상 파트너에서 제외하려고 했다.[96][97][98]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은 몇 주 안에 패배했고, 베이루트는 점령되었으며, PLO 본부는 야세르 아라파트의 결정에 따라 6월에 튀니지로 철수했다.[64]
제1차 인티파다 (1987년–1993년)

제1차 팔레스타인 봉기는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공격 확대, 정착촌 건설 및 집단 처벌 정책에 대한 대응으로 1987년에 시작되었다. 이 봉기는 주로 비폭력적인 시민 불복종과 시위로 이루어졌으며, 주로 풀뿌리 민중, 청년, 여성 위원회가 주도했다.[99][100] 1990년대 초, 제1차 인티파다라고 불리는 이 분쟁은 국제적 해결 노력의 초점이 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1982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의 성공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다. 결국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프로세스는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이어졌고, PLO가 튀니지에서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로 이동하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설립하도록 허용했다. 평화 프로세스는 또한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와 같은 팔레스타인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대에 부딪혔고, 이들은 즉시 이스라엘을 겨냥한 공격 캠페인을 시작했다. 수백 명의 사상자와 반정부 선전의 물결에 이어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 암살 사건|라빈은 평화 이니셔티브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극우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는 평화 프로세스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1996년 새로 선출된 이스라엘 정부는 어느 정도 프로세스에서 물러났다.[63]
제2차 인티파다 (2000년–2005년)

수년간의 실패한 협상 끝에, 2000년 9월 제2차 인티파다로 분쟁이 다시 발발했다.[64] 팔레스타인 국가 보안군과 이스라엘 방위군 사이의 공개적인 분쟁으로 격화된 폭력은 2004/2005년까지 지속되었고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2005년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정착민과 병력을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스라엘과 그 대법원은 점령 종료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가자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권이 없었다"고 말했다.[101] 그러나 유엔, 휴먼 라이츠 워치 및 기타 많은 국제 기구 및 NGO는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의 영공, 영해를 통제하고 항공 또는 해상을 통한 가자 지구 출입 인원 또는 물품의 이동을 통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여전히 가자 지구의 점령국이라고 간주하고 있다.[101][102][103]
파타-하마스 분열 (2006년–2007년)
2006년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는 44%의 다수를 얻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이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정을 수락하고 폭력을 포기하며 이스라엘의 존재권을 인정하지 않는 한 경제 제재를 시작할 것이라고 응답했고, 하마스는 이 모든 것을 거부했다.[104] 파타와 하마스 간의 팔레스타인 내부 정치 투쟁이 2007년 가자 전투로 확산된 후, 하마스는 이 지역을 완전히 통제했다.[105] 2007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해군 봉쇄를 가했고, 이집트와의 협력을 통해 이집트 국경을 지상 봉쇄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긴장은 2008년 말까지 고조되었고,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캐스트 리드 작전을 개시하여 수천 명의 민간인 사상자와 수십억 달러의 피해를 입혔다. 2009년 2월까지 국제 중재를 통해 양측 간 휴전이 체결되었으나, 점령과 소규모의 산발적인 폭력 사태는 계속되었다.
2011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유엔 정회원국 지위 획득 시도는 실패했다. 하마스가 통제하는 가자 지구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산발적인 로켓 공격과 이스라엘의 공습이 계속되었다.[106][107][108][109] 2012년 11월,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대표 지위는 비회원 옵서버 국가로 격상되었고, 임무 명칭은 "팔레스타인 (PLO 대표)"에서 "팔레스타인 국가"로 변경되었다. 2014년, 또 다른 전쟁이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 사이에 발발하여 70명 이상의 이스라엘인과 2,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 사상자를 냈다.[110]
2023년–현재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2014년 전쟁과 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 이후, 하마스는 이스라엘 공격을 계획하기 시작했다.[111] 2022년 네타냐후는 강경 극우 정부의 수장으로 복귀했고,[112] 이는 이스라엘의 더 큰 정치적 분쟁[113]과 팔레스타인 영토에서의 충돌[114]으로 이어졌다. 이는 2023년 10월 7일 하마스 주도 무장 단체가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남부를 기습 공격하여 1,195명 이상의 이스라엘 민간인, 군인, 기타 외국인이 사망하고 251명이 가자 지구로 인질로 잡혀가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115][116] 이스라엘군은 하마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가자 지구에 대규모 공습 캠페인을 수행했으며,[117] 이어서 하마스 파괴, 인질 석방, 가자 지구 안보 통제를 목표로 하는 대규모 지상 침공을 감행했다.[118]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이스라엘을 집단살해 혐의로 고발하고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했다.[119] 법원은 이스라엘에게 1948년 제노사이드 협약에 위배되는 어떠한 행위도 방지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명령했으나,[120][121][122] 이스라엘에게 군사 작전 중단을 명령하지는 않았다.[123]
이 전쟁은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이스라엘은 서안 지구의 지역 민병대, 헤즈볼라는 레바논과 이스라엘 북부, 그리고 다른 이란 지원 민병대는 시리아에서, 그리고 이란 자체와 충돌했다.[124][125][126][127] 이란 지원 민병대 또한 미국과 충돌했으며,[128] 후티 반군은 이에 항의하여 홍해를 봉쇄했고,[129] 미국은 예멘에 대한 공습으로 대응했다.[130]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도 공습이 있었다.[131] 이란 지원 민병대의 약화된 입장을 이용한 시리아 반군은 2024년 11월 공격을 개시하여 시리아 내전을 재점화했고, 이는 아사드 정권의 몰락과 옛 바트주의 정부 자리에 과도 정부 수립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스라엘은 직후 시리아와의 경계 지역을 침공했다.[132]
이 전쟁은 가자 지구에 광범위한 파괴, 인도주의적 위기 및 임박한 기근을 초래했고,[44][45] 인구 대부분이 강제 이주되었다.[44] 많은 인권 단체와 집단살해 연구 및 국제법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집단학살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하지만, 일부는 이를 반박한다.[46][47]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 6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그 중 거의 절반은 여성과 어린이였고, 14만 8천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133][134][135] 란셋의 한 연구는 2024년 6월까지 외상성 부상으로 인한 가자 지구 사망자 수를 64,260명으로 추정했으며, "간접적" 사망자를 포함하면 사망자 수가 더 많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136][137][138][139] 2025년 5월 현재, 외상성 부상 사망자 수는 93,000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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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
요약
관점
PLO의 외교 협상 참여는 테러리즘에 대한 완전한 포기와 이스라엘의 "존재권" 인정에 달려 있었다. 이 조건은 PLO가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를 되찾으려는 목표를 포기하고 1967년 이스라엘 군사 통제 하에 놓인 22%에 집중해야 함을 요구했다.[141] 1970년대 후반까지 점령 지역의 팔레스타인 지도부와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두 국가 해결책을 지지했다.[142] 1981년,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 연맹의 지지를 받아 두 국가 해결책을 기반으로 한 계획을 제시했다.[143] 이스라엘 분석가 아브너 야니브는 아라파트가 이 시기에 역사적인 타협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반면, 이스라엘 내각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존재에 계속 반대했다고 묘사한다. 야니브는 아라파트의 타협 의지를 "평화 공세"라고 묘사했는데, 이스라엘은 국제 외교적 압력을 피하기 위해 PLO를 잠재적인 협상 파트너에서 제외할 계획으로 이에 대응했다.[144] 이스라엘은 이듬해 레바논을 침공하여 PLO를 정치 조직으로서 약화시키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약화시키며 서안 지구를 대이스라엘로 합병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려고 했다.[94]
PLO는 1970년대 중반부터 이스라엘과 나란히 팔레스타인 국가를 추구하는 프로그램을 채택했지만,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선언은 이 목표를 공식적으로 확정했다. 이 선언은 1970년대와 1980년대 팔레스타인 민족 협의회 회의 결의안을 기반으로 했으며, 1967년 6월 5일 이전 1949년 정전선 국경 내에서 서안 지구,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으로 구성된 팔레스타인 국가의 창설을 옹호했다. 이 선언 이후 아라파트는 모든 형태의 테러리즘을 명시적으로 비난하고 PLO의 유엔 결의안 242 및 338 수용, 그리고 이스라엘의 존재권 인정을 확인했다. 헨리 키신저가 PLO와의 미국 협상을 위해 설정한 모든 조건이 이제 충족되었다.[145]
당시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샤미르는 PLO가 테러 조직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철수하거나 PLO를 인정하거나 협상하는 것, 특히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포함한 어떠한 양보에도 단호한 입장을 유지했다. 샤미르는 PLO와 대화하려는 미국의 결정을 기존 영토 현상 유지를 위협하는 실수로 보았다. 그는 PLO와 협상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므로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146]
평화 프로세스
"평화 프로세스"라는 용어는 분쟁 해결을 위한 단계별 접근 방식을 의미한다. 원래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국가들, 특히 이집트 간의 미국 중재 협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던 이 용어는 분쟁에 대한 포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협상 프로세스 자체를 강조하는 것과 연관되게 되었다.[147][148][149] 이 과정의 일환으로 국경, 자원 접근,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과 같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최종 지위" 회담으로 남겨졌다. 1991년 마드리드에서 논의된 바와 같은 이러한 "최종 지위" 협상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149]
1993년과 1995년의 오슬로 협정은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상과 1991년 마드리드 및 워싱턴 회담에서 확립된 점진적인 틀을 기반으로 했다. 타협을 위한 점진적인 접근 방식의 동기는 "신뢰 구축"이었지만, 최종 결과는 상호 신뢰의 극적인 감소였다. 각 단계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을 더욱 강화했으며, 이는 PA가 극단주의 단체의 폭력적인 공격을 억제하는 의무를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 이스라엘군과 협력하여 이루어졌다.[150]
전 예루살렘 부시장 메론 벤베니스티는 이 기간 동안 국가 폭력이 증가하고 팔레스타인 땅이 정착촌 확장으로 계속 압류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지적했다.[151][152][153][154] 이스라엘 외무장관 슐로모 벤-아미는 오슬로 협정을 "지도 제작 치즈보드"라고 불리는 서안 지구의 변형을 합법화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155]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창설 및 안보 협력
오슬로 협정의 핵심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창설과 이스라엘 군사 당국과의 안보 협력이었으며, 이는 점령의 "아웃소싱"으로 묘사되기도 했다.[141] 오슬로 협정 서명 직전, 이츠하크 라빈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우리보다 내부 안보를 더 잘 확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법원에 항소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인권 단체들이] 그곳의 조건을 비판하는 것을 막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156] 이러한 맥락에서 캠프 데이비드 2000 회담에 참여했던 벤-아미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오슬로의 의미 중 하나는 PLO가 결국 인티파다를 진압하고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한 진정한 민주적 투쟁을 단축시키는 이스라엘의 협력자였다는 것이다."[155]
PA와 이스라엘이 합의한 와이 리버 각서는 "테러와 폭력"에 대한 "무관용" 정책을 도입했다. 이 정책은 인권 침해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인권 단체들로부터 일률적으로 비판을 받았다.[157][158] 데니스 로스는 와이 각서가 폭력적인 시위와 비폭력적인 시위 모두를 성공적으로 줄였다고 설명하며, 이 두 가지 모두를 "와이 정신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159] 왓슨은 PA가 선동을 억제할 의무를 자주 위반했으며,[160] 와이 리버 각서에 따른 테러 억제 및 기타 안보 의무 이행 기록은 기껏해야 미흡했다고 주장한다.[161]
오슬로 협정 (1993년, 1995년)


1993년, 이츠하크 라빈이 이끄는 이스라엘 관리들과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로 알려진 평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는 이스라엘의 존재권을 인정한 아라파트의 서한이었다. 오슬로 프로세스의 비대칭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국가의 존재권을 인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실제로 인정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1993년 원칙 선언 (또는 오슬로 I)이 서명되었고, 이는 미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을 위한 틀을 제시했으며, 주요 문제들은 "최종 지위" 회담으로 남겨졌다. 오슬로 협정의 조항은 분쟁 해결을 위한 국제적 합의와 상충되었다.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이나 국가 지위를 옹호하지 않았고,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242호의 해석, 즉 전쟁으로 영토를 획득할 수 없다는 원칙을 폐지했다.[152] 토지 및 자원 접근과 관련하여 노엄 촘스키는 오슬로 협정을 "이스라엘이 거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으로 묘사했다.[162] 오슬로 프로세스는 섬세했으며, 들쑥날쑥하게 진행되었다.
이 과정은 1995년 11월 이츠하크 라빈 암살과 1996년 네타냐후의 당선으로 전환점을 맞았으며, 2000년 7월 아라파트와 에후드 바라크가 캠프 데이비드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2001년 타바에서 실패하면서 결국 해체되었다.[147][163] 오슬로가 지정한 과도기는 양측 간의 신뢰를 구축하지 못했다. 바라크는 과도기 협정의 추가 단계를 이행하지 못했고, 그의 짧은 임기 동안 정착촌은 10% 확장되었다.[164] 캠프 데이비드에서 양측 간의 불일치는 주로 국제적 합의의 수용(또는 거부)에 있었다.[165][166] 팔레스타인 협상가들에게 유엔 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연례 투표로 대표되는 국제적 합의는 협상의 출발점이었다. 이스라엘 협상가들은 미국 참가자들의 지원을 받아 국제적 합의를 해결의 기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167] 양측은 결국 클린턴 매개변수를 "유보적인 태도로" 수락했지만, 타바에서의 회담은 바라크에 의해 "중단"되었고 평화 프로세스 자체는 정체되었다.[163] 이스라엘 외무장관으로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 참여했던 벤-아미는 나중에 협상안에 대해 "클린턴 매개변수는... 아라파트가 정상 회담 제안을 거절한 것이 옳았다는 가장 좋은 증거이다"라고 묘사했다.[165]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2000년)
2000년 7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대통령과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 간의 평화 정상회담을 소집했다. 바라크는 미국을 통해 팔레스타인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협상의 기초"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3-4개 부분으로 나뉜 비무장 팔레스타인 국가로, 이미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78%를 포기한 후 서안 지구의 87-92%를 포함한다.[h] 따라서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 91%(팔레스타인 관점에서 서안 지구 5,538 km2는 86%에 불과함)[168]에 대한 제안은 아랍인 거주 동예루살렘 일부와 가자 지구 전체를 포함하며,[169][170] 서안 지구 유대인 정착민의 85%를 차지하는 69개 유대인 정착촌은 이스라엘에 할양되고, 이스라엘로의 귀환권은 없으며, 성전산이나 동예루살렘 핵심 지역에 대한 주권은 없고, 요르단 계곡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제는 계속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171][172]
아라파트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169] 팔레스타인 협상가들, 이스라엘 분석가들, 그리고 슐로모 벤-아미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이를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163][173] 팔레스타인 협상가들에 따르면 이 제안은 토지, 안보, 정착촌,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점령의 많은 요소를 제거하지 못했다.[174]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이후,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라크와 그의 외무장관 슐로모 벤-아미, 그리고 데니스 로스, 매들린 올브라이트 등 미국 관리들의 지지를 받아,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스라엘의 관대한 평화 제안을 거부하고 폭력적인 봉기를 선동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 이야기는 아라파트가 두 국가 해법에 관심이 없었고, 대신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 전체를 장악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했다. 이러한 견해는 미국과 이스라엘 대중의 여론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거의 모든 학자와 협상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및 미국 관리들은 이 이야기를 거부했다. 이들 중에는 저명한 이스라엘 협상가들, 이스라엘 방위군 참모총장, 이스라엘 방위군 정보국장, 신베트 국장 및 그들의 고문들도 포함된다.[175]
강력한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만한 해결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클린턴은 오랫동안 정상회담의 실패를 아라파트의 탓으로 돌렸다.[176] 정상회담 이후 몇 달 동안 클린턴은 전 미국 상원의원 조지 J. 미첼을 임명하여 평화 프로세스 복원 전략을 식별하는 사실 조사 위원회를 이끌게 했다. 위원회 조사 결과는 2001년에 발표되었는데, 기존 이스라엘 정착촌 해체와 팔레스타인의 무장 활동 단속이 한 가지 전략으로 제시되었다.[177]
캠프 데이비드 이후의 발전

정상회담 실패 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협상가들은 2000년 8월과 9월까지 소규모 그룹으로 만나 각자의 입장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은 미해결 문제 해결을 위한 자체 계획을 준비했다. 클린턴의 미국 제안 발표는 9월 말 제2차 인티파다의 발발로 연기되었다.[174]
2000년 12월 23일에 최종적으로 제시된 클린턴의 계획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의 94-96%에 주권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설립하고, 1967년 이전 이스라엘로부터 서안 지구의 1-3%에 해당하는 토지를 교환하는 것을 제안했다.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원칙은 아랍 지역은 팔레스타인에 속하고 유대인 지역은 이스라엘에 속한다"고 명시했다. 성지는 팔레스타인인이 성전산/고귀한 성소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이스라엘인이 통곡의 벽에 대한 주권을 가지는 것을 기반으로 분할될 예정이었다. 난민에 대해서는 재정적 보상, 팔레스타인 국가로의 귀환권, 그리고 1948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발생한 고통에 대한 이스라엘의 인정 등 여러 제안이 있었다. 안보 제안은 "비무장" 팔레스타인 국가와 국경 안보를 위한 국제군을 언급했다. 양측은 클린턴의 계획을 수용했고[174][178][179] 이는 이듬해 1월 타바 평화 정상회담의 기초가 되었다.[174]
타바 정상회담 (2001년)
이스라엘 협상단은 2001년 1월 타바에서 열린 타바 정상회담에서 새로운 지도를 제시했다. 이 제안은 "일시적으로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지역을 제거했고, 팔레스타인 측은 이를 추가 협상의 기초로 받아들였다. 이스라엘 선거가 임박하여 회담은 합의 없이 끝났지만, 양측은 그들이 이룬 진전을 증명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양측은 합의에 도달하는 데 이보다 더 가까웠던 적이 없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 선거 후 협상이 재개되면 남아있는 격차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공통된 믿음입니다." 다음 달 리쿠드 당 후보인 아리엘 샤론이 이스라엘 선거에서 에후드 바라크를 물리치고 2001년 2월 7일 이스라엘 총리로 당선되었다. 샤론의 새 정부는 고위급 회담을 재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174]
평화 로드맵 (2002년–2003년)

유럽 연합, 러시아, 유엔, 미국 4자 회담에서 2002년 9월 17일에 제시된 평화 제안 중 하나는 평화 로드맵이었다. 이 계획은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정착촌의 운명과 같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그 문제들을 프로세스의 후속 단계에서 협상하도록 남겨두었다. 이 제안은 첫 단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는데, 첫 단계의 목표는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폭력 모두를 중단하는 것이었다. 2015년 11월 현재 두 목표 모두 달성되지 못했다.[180][181][182]

애나폴리스 회의는 2007년 11월 27일 미국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 (메릴랜드주)의 미국 해군사관학교에서 개최된 중동 평화 회의였다. 이 회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평화 프로세스를 재개하고 "중동 평화 로드맵"을 이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83] 회의는 모든 당사자들의 공동 성명 발표로 끝났다. 애나폴리스 회의 이후 협상은 계속되었다. 마흐무드 압바스와 에후드 올메르트 모두 서로 경쟁적인 평화 제안을 제시했다. 궁극적으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84][185]
아랍 평화 구상 (2002년, 2007년, 2017년)

아랍 평화 구상(아랍어: مبادرة السلام العربية Mubādirat as-Salām al-ʿArabīyyah)은 사우디 구상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2002년 베이루트 정상회담에서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처음 제안했다. 이 구상은 아랍-이스라엘 분쟁 전반,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안되었다.[186] 이 구상은 2002년 3월 28일 베이루트 정상회담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2007년 리야드 정상회담에서 다시 합의되었다. 평화 로드맵과 달리,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이전에 수립된 유엔 국경을 기반으로 하는 "최종 해결" 국경을 명시했다. 이 구상은 점령된 모든 영토(골란고원 포함)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며,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위한 "정의로운 해결책"을 교환으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할 것을 제안했다.[187]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즉시 이 구상을 수용했다.[188] 그의 후계자인 마흐무드 압바스 또한 이 계획을 지지했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이를 중동 정책의 일부로 채택해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다.[189] 이슬람주의 정당인 하마스는 선출된 가자 지구 정부였으며, 하마스는 깊이 분열되어 있었고,[190] 대부분의 파벌은 이 계획을 거부했다.[191] 팔레스타인인들은 2020년 9월에 서명된 아랍에미리트-이스라엘 협정과 바레인과의 또 다른 협정을 아랍 평화 구상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고 "배신"으로 여긴다고 비판했다.[192]
아리엘 샤론이 이끄는 이스라엘 정부는 1967년 6월 이전 국경으로 이스라엘이 철수해야 한다는 요구 때문에 이 구상을 "논외"로 여겼다.[193][194] 2007년 아랍 연맹의 재승인 후, 당시 총리였던 에후드 올메르트는 이 계획에 대해 신중한 환영을 표했다.[195] 2015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 구상에 대해 잠정적인 지지를 표명했지만,[196] 2018년에는 팔레스타인과의 향후 협상 기초로 이를 거부했다.[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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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황
요약
관점
아파르트헤이트
2024년 7월,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의 정책이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을 위반한다고 결정했다.[198] 2022년 현재, 모든 주요 이스라엘 및 국제 인권 단체들은 이스라엘의 행동이 아파르트헤이트 범죄를 구성한다는 데 동의했다.[42] 2021년 4월, 휴먼 라이츠 워치는 "국경을 넘다"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책이 아파르트헤이트 범죄를 구성한다고 설명했다.[199]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 잔혹한 지배 시스템과 반인도적 범죄"라는 제목의 추가 보고서는 2022년 2월 1일 국제앰네스티에 의해 발표되었다.[200]
2018년 크네세트는 이스라엘의 법률 단체 아달라가 "아파르트헤이트법"이라고 별명을 붙인 국가-국민법을 통과시켰다. 아달라는 국가-국민법이 "유대인의 우월성과 유대인 민족의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국가 정체성을 헌법적으로 명문화"한다고 설명했다. 국가-국민법은 "준헌법적 지위"를 가진 기본법이며,[201] 이스라엘에서 국가 자결권을 행사할 권리가 "유대 민족에게만 고유하다"고 명시한다.[202]
팔레스타인 점령지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요르단강 서안 지구(동예루살렘 포함)와 가자 지구로 구성된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해왔으며, 이는 현대 역사상 가장 긴 군사 점령이다.[203] 2024년 국제사법재판소는 팔레스타인 영토가 하나의 정치적 단위이며,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과 이후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 및 천연자원 착취가 국제법상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또한 이스라엘이 점령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팔레스타인인에게 완전한 배상을 지불해야 한다고 판결했다.[204][205]
일부 팔레스타인인들은 서안 지구,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 전체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안보 문제와 당시 유효한 외교 협정의 부재로 인해 이 땅의 소유권과 경계가 논의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 모든 땅을 양도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한다.[206]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러한 주장의 어떤 축소도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심각한 박탈이라고 주장한다. 협상에서 그들은 이 땅의 경계를 줄이려는 어떤 움직임도 자신들의 핵심 이익에 대한 적대적인 움직임이라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이 땅을 분쟁 중인 땅으로 간주하며 협상의 목적은 최종 국경이 무엇이 될지를 정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인정하거나 어떠한 권리도 양보하지 않고" 1967년 국경에 기반한 팔레스타인 국가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207]
이스라엘 정착촌

국제사회는 이스라엘 정착촌이 국제법상 불법이라고 간주하지만,[208][209][210][211]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에 반대한다.[212][213][214][215] 정착촌의 합법성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제4차 제네바 협약의 2조와 49조 및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242호를 기반으로 한 주장을 사용한다.[216][더 나은 출처 필요] 정착촌의 확장은 종종 팔레스타인 토지 및 자원의 압류를 수반하며, 이는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이주를 초래하고 긴장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 정착촌은 종종 이스라엘군에 의해 보호되며,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폭력의 불씨가 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정착촌과 유대인 전용 우회 도로의 존재는 분열된 팔레스타인 영토를 만들고, 팔레스타인인의 경제 발전과 이동의 자유를 심각하게 저해한다.[217] 국제앰네스티는 이스라엘 정착촌이 경작지, 물 및 기타 자원과 같이 팔레스타인 마을에 필요한 자원을 전용하고 있으며, 안보 문제로 인해 정착촌이 팔레스타인인의 지역 도로를 통한 자유로운 이동 능력을 감소시킨다고 보고한다.[217]
2023년 현재, 서안 지구에는 약 50만 명의 이스라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동예루살렘에는 20만 명이 더 살고 있다.[218][219][220] 2023년 2월, 이스라엘 재무장관 베잘렐 스모트리치는 이스라엘 민정청의 대부분을 책임지게 되었고, 서안 지구의 민간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얻었다.[221][222] 2023년 상반기 동안 정착촌에는 13,000채의 주택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2022년 전체 건설량의 거의 세 배에 달한다.[223]
이스라엘 헌병대
국제앰네스티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 동안의 사건을 다룬 2014년 2월 발표 보고서에서 이스라엘군이 서안 지구에서 무모한 폭력을 사용했으며, 일부 경우에는 전쟁 범죄에 해당할 수 있는 의도적인 살해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수많은 사망자 외에도 국제앰네스티는 어린이 67명을 포함한 최소 261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의 실탄 사용으로 심각하게 부상당했다고 말했다. 같은 기간 동안 어린이 6명을 포함한 45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다. 국제앰네스티의 민간인 사망자 25명에 대한 검토 결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임박한 위협을 가했다는 증거는 어떤 경우에도 없었다. 동시에 8,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고무 코팅 금속 총알을 포함한 다른 수단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스라엘 방위군(IDF) 병사 중 단 한 명만이 이스라엘에 불법적으로 입국하려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병사는 강등되고 5개월 집행유예가 붙은 1년형을 선고받았다. IDF는 "최고의 전문 표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잘못된 행위가 의심되는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조사했다고 주장했다.[224][225]
가자 지구 봉쇄
봉쇄는 1991년 처음 부과된 이후 가자 지구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2000년 제2차 인티파다의 시작과 함께 더욱 심화되었다. 2005년 철수 이후, 그리고 2006년 하마스의 선거 승리 이후 봉쇄는 더욱 강화되었다.[226] 가자 지구의 노동력을 포함한 인구 이동뿐만 아니라 수입 및 수출에 대한 제한이 강화되었다. 가자 지구에 대한 전면 봉쇄는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부과되었으며, 가자 지구 인프라(특히 주택) 파괴와 식량, 물, 전기, 연료 공급 거부로 특징지어지는 분리 및 봉쇄 정책의 일환이었다.[227] 2023년 10월 9일,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가자 지구에 대한 봉쇄를 강화했다.[228]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 요아브 갈란트는 "전기도, 식량도, 연료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폐쇄된다. 우리는 인간 동물을 상대로 싸우고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라고 선언했다.[229][230]
봉쇄가 시작된 이래로 가자 지구 경제 성장의 주요 동력인 가자 지구 민간 부문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봉쇄 이전에 가자 지구는 제조업 투입물의 95%를 수입하고 완제품의 85%를 수출했다(주로 이스라엘과 서안 지구로). 2010년까지 이 부문의 고용은 4%로 떨어졌고, 이 시점의 전체 실업률은 40%였으며 인구의 80%는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했다.[231] 2009년까지 가자 지구로 허용된 상업 품목은 봉쇄 시작 전 4,000개 품목에 비해 40개 미만이었다. 연료 수입이 제한되어 가자 지구 산업 운영의 95%가 폐쇄되었고, 나머지는 용량에 훨씬 못 미치게 운영되었다. 총 120,000명의 민간 부문 고용자 중 100,000명이 봉쇄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다. 경제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자 지구로부터의 수출에 대한 거의 완전한 금지였다. 수출을 운반하는 트럭의 수는 봉쇄 이전 숫자의 2%로 떨어졌다. 유럽 시장으로의 수출만 허용되었는데, 이는 이스라엘과 서안 지구보다 가자 주민들에게 훨씬 덜 수익성이 있는 시장이었다. 수출 승인 품목은 주로 꽃과 딸기였다. 서안 지구 또는 이스라엘로의 첫 수출은 2012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매우 제한된 양으로만 이루어졌다. 가자 지구에서 제조된 가구 최대 4대 분량의 트럭이 암만 전시회를 위해 이스라엘을 통과하도록 허용되었다.[226]
이스라엘이 부과한 봉쇄 초기에조차 사업 비용 증가와 관련하여 무역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서안 지구, 가자 지구, 이스라엘 간에 운송되는 상품은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트럭에 실리고 국경에서 이스라엘 트럭으로 옮겨져야 했다. 심지어 50-100마일 거리에서도 그러했다. 이러한 비용 증가는 보안 검사, 통관, 보관 및 부패 비용뿐만 아니라 운송 비용 증가를 포함한다.[232]
이스라엘의 군사 법무감은 하마스가 "실질적인 통제 하에 있는 영토를 이스라엘 남부의 이스라엘 마을과 촌락에 대한 박격포 및 로켓 공격 발사대로 변모시켰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안보상의 이유로 적에게 봉쇄를 부과하는 것이 국제법상 정당하다고 말했다.[233] 언론 헤드라인은 유엔 위원회가 이스라엘의 봉쇄가 "합법적이고 적절하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보도했다.[234][235] 그러나 국제앰네스티는 이것이 "완전히 거짓"이며 인용된 유엔 보고서가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236] 유엔 인도주의 업무 조정 사무국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부의 지속적인 육상, 해상 및 공중 봉쇄는 주민에 대한 연좌와 다름없다.[237]
2008년 1월,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 지구에서 인도주의적 위기를 막기 위해 1인당 필요한 칼로리 수를 계산한 다음, 가자 주민의 "문화와 경험"을 고려하여 8%를 뺐다. 계산의 세부 사항은 이스라엘 인권 단체 기샤가 고등 법원에 신청한 후 공개되었다. 이 계획을 입안한 이스라엘 영토 정부 활동 조정관은 이 계획이 공식적으로 채택된 적이 없다고 밝혔으나, 기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38][239][240]
2010년 6월 20일, 가자 플로틸라 습격에 대응하여 이스라엘 안보 내각은 군사 또는 이중 용도 품목을 제외한 거의 모든 품목이 가자 지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봉쇄 시스템을 승인했다. 내각 성명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학교, 의료 기관, 물, 위생 등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승인을 받은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국제 감독 하에 있는 프로젝트를 위한 건설 자재의 이전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241] 육상 봉쇄 완화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해상을 통해 가자 지구로 향하는 모든 상품을 아슈도드 항구에서 계속 검사할 것이다.[242] 이러한 발표에도 불구하고 경제 상황은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았으며 수출에 대한 사실상의 완전한 금지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기증자 후원 프로젝트를 위한 일부 소비자 제품과 자재만 허용되었다.[243]

유엔과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

팔레스타인국을 승인한 국가
팔레스타인국을 승인하지 않은 국가
PLO는 유엔에서 팔레스타인국의 완전한 회원국 지위를 확보하고 1967년 국경을 인정받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244][245] 유엔 총회는 매년 1967년 국경에 기반한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요구하는 결의안에 거의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진다.[246] 미국과 이스라엘은 국제법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기보다는 양자 협상을 선호한다.[247][248]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직접 회담을 우회하려 한다고 비판했지만,[249] 아바스는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정착촌 건설이 두 국가 해법에 대한 "현실적인 잠재력을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50] 팔레스타인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 의해 완전한 회원국 지위를 거부당했지만,[251] 2012년 말 유엔 총회는 비회원국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주권 팔레스타인에 대한 사실상의 승인을 압도적으로 승인했다.[252]
선동
마찰을 억제하기 위한 규제 기관을 설립하기로 되어 있던 오슬로 협정 이후, 이스라엘과 유대인, 시온주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선동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내 정착촌 추구와 병행하여 계속되었으나,[253] 아부 마젠 하에서는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고되었다.[254] 선동 혐의는 상호적이었으며,[255][256] 양측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언론의 미디어 성명을 선동으로 해석했다.[254]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학교를 위해 발행된 교과서는 일방적인 서사와 때로는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조장한 것으로 밝혀졌다.[257][258][259][260][261][262] 이스라엘인 또는 팔레스타인인을 상대로 한 살인적인 공격의 가해자들은 정치인들의 다양한 수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동체 일부로부터 강력한 구두 지지를 얻는 경우가 많다.[263][264][265]
분쟁의 양 당사자는 상대방의 지역에 대한 역사적 유대 관계를 경시하고, 선전 지도를 가르치며, 자녀들을 언젠가 군대에 입대하도록 세뇌함으로써 자녀들에게 선동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제3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26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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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중점 사안
요약
관점
분쟁의 핵심 쟁점은 국경, 이스라엘 정착촌의 서안 지구 내 지위, 예루살렘의 지위,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 그리고 안보이다.[148][152][268][269] PLO가 1982년 이스라엘의 "존재권"을 인정함에 따라,[162] 미국과 이스라엘을 제외한[270][271] 국제사회는 국제법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틀에 대해 합의에 도달했다.[272] 다양한 유엔 기구와 국제사법재판소는 이러한 입장을 지지해 왔다.[272][148] 매년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제목의 결의안에 거의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진다. 이 결의안은 이스라엘 정착촌, 동예루살렘 합병, 전쟁을 통한 영토 획득 불허의 원칙의 불법성을 일관되게 확인한다. 또한 1967년 이후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이스라엘의 철수 필요성과 유엔 결의 194에 기초한 난민 문제의 공정한 해결 필요성을 강조한다.[246]
일방적인 전략과 강경파 정치 세력의 수사, 그리고 폭력은 상호적인 적대감과 평화적 해결 가능성에 대한 신뢰 상실을 조장했다. 협상 결렬 이후 안보는 고용, 부패, 주택 및 기타 시급한 문제에 뒤처져 이스라엘의 관심사에서 덜 중요한 역할을 했다.[273] 이스라엘 정책은 협상된 해결책에 도달하기보다는 분쟁과 팔레스타인 영토의 관련 점령 관리에 초점을 맞추도록 재조정되었다.[273][274][153][275][276] 서안 지구 내 이스라엘 정착촌 확장은 대다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이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안보를 제공하기 위해 이 영토에 대한 영구적인 통제를 확립하려는 의도라고 믿게 만들었다.[277]
예루살렘의 지위

1967년, 이스라엘은 국제법을 위반하여 동예루살렘을 일방적으로 합병했다. 이스라엘은 도시 동쪽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여 결국 도시 주변에 이스라엘 정착촌 장벽을 만들었고,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서안 지구와 고립시켰다.[278] 이스라엘의 도시 팔레스타인 지역 주변에 무성한 유대인 거주지를 건설하는 정책은 도시의 재분할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 다수를 위해 예루살렘의 인구 구성을 바꾸려는 추가적인 노력으로, 이스라엘은 정책적으로 유대인 존재를 장려하는 동시에 도시 내 팔레스타인인의 존재를 억제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거주지 건설에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한하고, 건축 허가를 지연 또는 거부하며, 주택 철거 명령을 내리는 정책을 도입했다.[279] 예루살렘의 긴장은 주로 이스라엘 당국과 유대인 극단주의자들이 도시 내 아랍인들에 대해 가하는 도발에 의해 야기된다.[280]
크네세트와 대법원을 포함한 이스라엘 정부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서예루살렘의 "신시가지"에 위치해 왔다. 이스라엘은 1967년 동예루살렘을 합병한 후 동예루살렘에 대한 완전한 행정 통제를 가정했다. 그 이후로 다양한 유엔 기구들은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통제를 무효라고 일관되게 비난해 왔다.[279] 1980년, 이스라엘은 "완전하고 통일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다"라고 선언하는 예루살렘법을 통과시켰다.[281][더 나은 출처 필요]
미국,[282] 러시아[283]를 제외한 많은 국가들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유엔 회원국과 대부분의 국제기구는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영유권 주장이나 1980년 예루살렘법 선포를 인정하지 않는다.[284] 국제사법재판소는 2004년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에 장벽 건설의 법적 결과"에 대한 권고 의견에서 동예루살렘을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로 기술했다.[285]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세 아브라함 종교는 예루살렘을 종교적, 역사적 서사의 중요한 배경으로 여긴다. 예루살렘은 성전산에 있던 유대인 성전의 옛 터이자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유대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도시다. 이슬람교도들에게 예루살렘은 이스라와 미으라즈 사건과 알아크사 모스크의 위치로 세 번째로 성스러운 장소다.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예수의 십자가형 장소이자 성묘교회가 있는 곳이다.
성지와 성전산
20세기 초부터 성지, 특히 예루살렘의 성지는 민족주의 정치인들에 의해 활용되었다.[286]
요르단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동예루살렘의 성지에 접근할 수 없었다.[287] 1975년부터 이스라엘은 유대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지는 요셉의 무덤에서 무슬림의 예배를 금지했다. 정착민들은 예시바를 설립하고 토라 두루마리를 설치했으며 미흐라브를 덮었다. 제2차 인티파다 동안 팔레스타인 시위대는 이 장소를 약탈하고 불태웠다.[288][289] 이스라엘 보안 기관은 공격을 계획하는 유대인 극단주의자들을 정기적으로 감시하고 체포하지만, 많은 심각한 사건들이 여전히 발생했다.[290] 이스라엘은 무슬림 종교 재산(와크프)에 성전산에 대한 거의 완전한 자율권을 허용했다.[279]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통제 하에 있는 기독교 및 무슬림 성지의 복지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291] 또한 일부 팔레스타인 옹호자들은 통곡의 벽 터널이 모스크 붕괴를 유발할 의도로 재개통되었다고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292]
팔레스타인 난민

팔레스타인 난민은 1948년 아랍-이스라엘 분쟁[293]과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294]의 결과로 집과 생계를 모두 잃은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에서 추방되거나 도피한 팔레스타인인의 수는 1949년에 711,000명으로 추정되었다.[295] 모든 난민(팔레스타인 난민뿐만 아니라)[296]의 후손들도 유엔에 의해 난민으로 간주된다. 2010년 현재 47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있다.[297]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동안 350,000명에서 400,000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이주했다.[294] 난민의 3분의 1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의 인정된 난민 수용소에 살고 있다. 나머지는 이러한 주최 국가의 도시와 마을 주변에 살고 있다.[293]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난민은 이스라엘 밖에서 태어났으며 어떤 역사적인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도 살 수 없다.[293][298]
이스라엘은 1948년부터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을 막아왔고, 제한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귀환을 허용하는 어떠한 합의도 거부했다.[162][299][300] 세계 인권 선언과 유엔 총회 결의 194호에 기초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은 1948년과 1967년에 추방되거나 망명했던 땅, 집, 마을로 돌아갈 난민의 권리를 주장한다. 아라파트 자신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국과 이스라엘 협상가들에게 자신이 실제로는 완전한 귀환권보다는 귀환권의 원칙이 수용되기를 주로 원한다고 반복해서 확신시켰다.[301]
팔레스타인 및 국제 학자들은 여러 가지 근거로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을 정당화해 왔다.[302][303][304] 광범위한 신역사가에 포함된 여러 학자들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하가나, 레히, 이르군 시온주의 준군사 조직의 행동으로 인해 도피하거나 쫓겨났거나 추방되었다고 주장한다.[305][306]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종 청소로 특징지었다.[307][308][309][310] 신역사가들은 아랍 지도자들이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들이 그 자리에 머물기를 바랐다는 징후를 인용한다.[311]

유대인 혈통의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이스라엘의 귀환법은 다른 민족, 특히 1948년 전쟁 중 추방되거나 도피한 영토에 대해 귀환법에 따라 시민권을 신청할 수 없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차별로 묘사되었다.[312][313][314]
1948년에 채택된 유엔 결의 194호에 따르면, "집으로 돌아가 이웃과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난민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렇게 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하며, 돌아가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의 재산과 국제법 또는 형평의 원칙에 따라 해당 정부 또는 당국이 보상해야 할 재산의 손실 또는 손해에 대해 보상이 지급되어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315] 유엔 결의 3236호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실향민이 되고 뿌리 뽑힌 고향과 재산으로 돌아갈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재확인하며, 그들의 귀환을 촉구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316] 유엔 결의 242호는 "난민 문제의 공정한 해결"의 필요성을 확인하지만, 결의 242호는 "공정한 해결"이 문자 그대로의 팔레스타인 귀환권의 형태여야 한다고 명시하지 않는다.[317]
역사적으로 1948년 팔레스타인 탈출의 원인의 상대적 영향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시온주의 및 이스라엘 군대의 폭력적인 추방이 주요 요인이었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있다. 다른 요인으로는 심리전과 아랍의 취약성 인식이 있다. 특히 역사가 베니 모리스는 팔레스타인 난민 70만 명 중 대부분이 "전쟁의 채찍" 때문에 도피했으며 성공적인 아랍 침공 직후 귀환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언급한다. 그는 아랍 지도자들이 하이파에서 발생했던 것처럼 전체 공동체의 대피를 권고한 사례를 기록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고립된 사건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305][318] 그의 후기 저서에서 모리스는 이주를 아랍인들 스스로 시작한 민족 갈등의 결과로 본다.[318] 2004년 하아레츠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탈이 벤구리온이 조장하고 군사 지도부가 이해했던 이주 분위기에서 주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인종 청소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상황이 있다"고 주장했다.[319]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견해를 바꾼 것처럼 보인다며 정치학자 노먼 핑컬스틴의 비판을 받았다.[320]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가 새로운 팔레스타인 국가로 귀환할 권리를 인정하지만, 이 인구가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로 귀환하는 것은 유대 국가의 안정성을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팔레스타인 난민의 유입은 유대인의 인구학적 다수가 유지되지 않을 것이므로 이스라엘 국가가 유대 국가로서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이다.[321][322][323]
이스라엘의 안보 우려

분쟁 내내 팔레스타인의 폭력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우려 사항이었다. 안보 우려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치적 의사 결정의 주요 동인이었으며, 종종 범위가 확대되고 국제법 및 팔레스타인 인권과 같은 다른 고려 사항보다 우선시되었다.[324][325][326] 서안 지구,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의 점령과 이들 지역의 정착촌 지속적인 확장은 안보상의 이유로 정당화되어 왔다.[327]
이스라엘[328]은 미국[329][더 나은 출처 필요] 및 유럽 연합과 함께 팔레스타인 단체의 모든 무력 사용을 테러적이고 범죄적인 것으로 간주한다.[330][331] 유엔 총회 결의 A/RES/45/130은 외국 점령 하에 있는 민족으로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점령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 투쟁을 사용할 정당성을 확인하는 국제적 합의(159개 투표 국가 중 113개국 찬성, 13개국 반대[332])를 반영한다.[333]
이스라엘에서는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범들이 민간 버스, 식당, 쇼핑몰, 호텔, 시장을 겨냥했다.[334] 1993년부터 2003년까지 303명의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범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1994년 바룩 골드슈타인이라는 미국계 이스라엘인 의사가 모스크에서 총격을 가해 29명을 살해하고 125명에게 부상을 입힌 헤브론 학살에 대한 대응으로 하마스는 첫 번째 치명적인 자살 공격을 시작했다.[335]
이스라엘 정부는 2003년 7월 수많은 자살 폭탄 테러와 테러 공격 이후 안보 장벽 건설을 시작했다. 이스라엘 연립 정부는 이스라엘과 서안 지구 사이의 녹색 선 북부에 안보 장벽을 승인했다. IDF에 따르면, 장벽 건설 이후 테러 행위는 약 90% 감소했다.[336] 공격 감소는 또한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군대의 팔레스타인 도시 내외부 상시 주둔과 IDF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간의 안보 협력 증가에도 기인할 수 있다.[337] 장벽은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을 거의 전적으로 통과하는 경로를 따랐으며, 전체 이웃 지역과 정착촌 블록을 포함하여 서안 지구의 10% 이상을 일방적으로 점령했고, 팔레스타인 마을을 절반으로 나누어 팔레스타인인의 이동의 자유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장벽은 일부 지역에서 농부들을 그들의 밭에서, 아이들을 그들의 학교에서 고립시켰으며,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이 서안 지구 내에서 이동하거나 이스라엘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을 제한했다.[338][339][340]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장벽 건설이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침해하고 제4차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며 이스라엘의 자위권 조치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341] 국제사법재판소는 나아가 이스라엘의 장벽 건설이 영구적인 시설이 되어 현 상태를 바꿀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고등 법원은 국제사법재판소의 결론이 사실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벳첼렘, 휴먼 라이츠 워치, 국제앰네스티 등 여러 인권 단체는 국제사법재판소의 우려에 공감했다. 이들은 장벽의 경로가 정착촌의 존재를 영구화하고 미래에 이스라엘에 합병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고안되었으며, 장벽은 이스라엘이 불법 정착촌에 사용되는 토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제안했다. 장벽의 정교한 구조 또한 그 영구성을 시사했다.[342]
2001년부터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이스라엘로 발사되는 카쌈 로켓의 위협은 이스라엘 국방 당국에 큰 우려를 제기해 왔다.[343] 2006년,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철수한 다음 해, 이스라엘 정부는 1,726발의 로켓 발사를 기록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2005년 발사된 총 로켓 수의 4배 이상이었다.[328][344] 2009년 1월 현재 8,600발 이상의 로켓이 발사되어[345][346] 광범위한 심리적 트라우마와 일상생활의 혼란을 야기했다.[347] 이러한 공격의 결과로 이스라엘 남부에 거주하는 이스라엘인들은 오랫동안 방공호에서 지내야 했다. 이 로켓에 실린 비교적 작은 탑재량, 이스라엘의 첨단 조기 경보 시스템, 미국이 제공한 미사일 방어 능력, 그리고 방공호 네트워크 덕분에 로켓은 거의 치명적이지 않았다. 2014년에는 가자 지구에서 발사된 4,000발의 로켓 중 이스라엘 민간인 6명만이 사망했다. 비교하자면, 이 로켓에 실린 탑재량은 이스라엘 전차 포탄보다 작으며, 2014년에 가자 지구에서 49,000발이 발사되었다.[348]
이스라엘 내에서는 국가의 안보 문제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상당한 논쟁이 있다. 옵션에는 군사 행동(테러리스트 요원의 표적 살해 및 주택 철거 포함), 외교, 평화를 향한 일방적인 제스처, 검문소, 도로 차단 및 안보 장벽과 같은 보안 조치 강화가 포함되었다. 위의 모든 전술의 합법성과 현명함은 다양한 논평가들에 의해 의문시되어 왔다.
2007년 6월 중순부터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 안보 문제를 다루는 주요 수단은 미국이 후원하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보안군의 훈련, 장비 제공, 자금 지원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하마스 서안 지구 지지자들을 진압하는 데 크게 성공했다.[349]
수자원
중동에서 수자원은 큰 정치적 관심사이다. 이스라엘은 물의 대부분을 그린 라인 아래로 이어지는 두 개의 큰 지하 대수층에서 얻기 때문에 이 물의 사용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서 대부분의 물을 끌어오지만, 서안 지구에는 연간 약 4천만 입방미터를 공급하여 서안 지구 팔레스타인 수자원의 77%를 차지하며, 이는 약 260만 명의 인구가 공유해야 한다.[350]

서안 지구 점령 이후 이스라엘의 물 소비량은 감소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을 소비하고 있다. 1950년대에는 이스라엘이 서부 대수층의 95%, 북동부 대수층에서 생산되는 물의 82%를 소비했다. 이 물은 전적으로 1967년 이전 국경의 이스라엘 측에서 끌어왔지만, 수원지는 서안 지구와 이스라엘 모두 아래에 있는 공유된 지하수 유역에서 비롯된다.[351]
오슬로 II 협정에서 양측은 "자원 활용의 기존 수량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서안 지구 내 이스라엘의 물 생산 합법성을 확립했으며, 이는 공동 수자원 위원회(JWC)의 감독을 받는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 협정에서 팔레스타인 생산을 보완하기 위해 물을 제공하고, 공동 수자원 위원회의 감독 하에 동부 대수층에서 추가적인 팔레스타인 시추를 허용하기로 합의했다.[352][353] 이스라엘이 받는 물은 주로 요르단강 시스템, 갈릴리해 및 두 개의 지하 수원지에서 나온다. 2003년 BBC 기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강 시스템에 접근할 수 없다.[354]
2008년 유엔식량농업기구 보고서에 따르면, 구르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위해 수자원이 몰수되었다. 요르단강의 팔레스타인 관개 펌프는 1967년 전쟁 이후 파괴되거나 몰수되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강 시스템의 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당국은 팔레스타인 농부들이 새로운 관개 우물을 시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에는 신선한 물을 공급하고 관개 목적의 우물 시추를 허용했다.[355]
2012년 8월 유엔에서 보고서가 발표되었으며,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 유엔 상주 및 인도주의 조정관인 맥스 가일라드는 이 간행물 발간식에서 "가자 지구는 2020년까지 50만 명의 인구가 더 늘어날 것이며, 경제는 느리게 성장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자 지구 주민들은 충분한 식수와 전기를 얻거나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가일라드는 유엔아동기금(UNICEF)의 장 고프와 근동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유엔 구호 사업 기구(UNRWA)의 로버트 터너와 함께 참석했다. 이 보고서는 가자 지구의 인구가 160만 명에서 2020년에는 210만 명으로 증가하여 평방 킬로미터당 5,800명 이상의 밀도를 초래할 것으로 예측한다.[356]
미래와 재정
수많은 외국과 국제 기구는 팔레스타인 및 이스라엘 수자원 당국과 양자 협약을 맺었다. 2003년부터 2015년까지의 계획 기간 동안 서안 지구에 약 11억 달러, 가자 지구 남부 지역에 8억 달러의 미래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되었다.[357]
2012년 말, 네덜란드 정부는 2,160만 달러의 기부를 발표했으며, 이 자금은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위해 UNRWA에 제공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엔 뉴스 웹사이트에 게시된 기사에는 "2,160만 달러 중 570만 달러는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를 위한 UNRWA의 2012년 긴급 호소에 할당될 것이며, 이는 악화되는 상황에 처한 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완화하기 위한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의 프로그램을 지원할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356]
농업권
분쟁은 시작부터 토지에 관한 것이었다.[358] 이스라엘이 1948년 전쟁 이후 국가가 되었을 때, 팔레스타인 토지의 77%가 국가 창설에 사용되었다.[359]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다른 나라로 난민이 되었고, 이 첫 번째 토지 위기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뿌리가 되었다.[360] 분쟁의 뿌리가 토지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은 팔레스타인의 농업에서 잘 나타난다.
팔레스타인에서 농업은 경제의 주요 지주이다. 농산물 생산은 인구의 생계 수요를 지원하고 팔레스타인의 수출 경제를 이끈다.[361] 유럽 팔레스타인 관계 위원회에 따르면, 농업 부문은 공식적으로 인구의 13.4%를 고용하고 비공식적으로 인구의 90%를 고용한다.[361] 지난 10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실업률은 증가했으며 농업 부문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빈곤한 부문이 되었다. 실업률은 2008년에 가자 지구에서 41%에 달하며 최고조에 달했다.[362]
팔레스타인 농업은 농장과 농부에 대한 이스라엘 군사 및 민간 공격, 농산물 수출 및 필수 투입물 수입 봉쇄, 자연 보호 구역뿐만 아니라 군사 및 정착민 사용을 위한 광범위한 토지 몰수, 우물 몰수 및 파괴, 서안 지구 내 물리적 장벽 등 수많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363]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 장벽

분리 장벽 건설로 이스라엘 국가는 지역 간 자유로운 이동을 약속했다. 그러나 국경 폐쇄, 통행 금지, 검문소는 팔레스타인의 이동을 크게 제한했다.[364][365] 2012년에는 99개의 고정 검문소와 310개의 이동 검문소가 있었다.[366] 국경 제한은 팔레스타인의 수출입에 영향을 미쳤고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통제로 인해 산업 및 농업 부문을 약화시켰다.[367] 팔레스타인 경제가 번성하려면 팔레스타인 토지에 대한 제한이 제거되어야 한다.[363] 가디언과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경제는 서안 지구에서만 이스라엘의 제한으로 인해 34억 달러(연간 GDP의 35%)의 손실을 입었다.[368]
이스라엘 외부의 팔레스타인 폭력
일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을 구실로 전 세계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저질렀다.[369]
1960년대 후반, PLO와 관련된 단체들은 국제 테러를 사용하는 것으로 점점 악명이 높아졌다. 1969년에만 이 단체들은 82대의 비행기를 납치했다. 엘알 이스라엘 항공은 정기적인 납치 표적이 되었다.[370][371] 팔레스타인 해방대중전선에 의한 에어 프랑스 139편 납치는 인질 구출 임무로 절정에 달했으며, 이스라엘 특수 부대는 대부분의 인질을 성공적으로 구출했다.
가장 잘 알려진 악명 높은 테러 행위 중 하나는 검은 9월단이 1972년 하계 올림픽 동안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납치하고 결국 살해한 사건이었다.[372]
팔레스타인 내부의 폭력

경쟁하는 팔레스타인 및 아랍 운동 간의 전투는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에 대한 이스라엘의 안보 정책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자체 정책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찍이 1930년대 팔레스타인 봉기에서 아랍군은 시온주의 및 영국군과도 교전하는 동시에 서로 싸웠고, 내부 갈등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제1차 인티파다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이스라엘 보안국의 정보원 및 협력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해 시작한 캠페인으로 천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협력자로 지목된 사람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거부했다는 인권 단체의 불만으로 인해 alleged 협력자 처우에 대해 강력히 비판받았다. 팔레스타인 인권 감시단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한 사람 중 45% 미만이 실제로 이스라엘을 위해 정보를 제공한 유죄였다.[373][더 나은 출처 필요]
최고 권한 및 국제적 지위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관할권은 PLO와 체결한 오슬로 협정에서 비롯되며,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 영토 내 도시(A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했고, 주변 시골 지역은 이스라엘 보안 및 팔레스타인 민정(B 지역) 또는 완전한 이스라엘 민정(C 지역) 하에 놓였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인이 A 지역의 팔레스타인 도시를 통과하지 않고 지역을 횡단할 수 있도록 추가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기 통제 지역은 다양하고 비연속적이다. 이 지역은 오슬로 II, 와이강, 샴 엘 셰이크를 포함한 후속 협상을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경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분리된 지역이 실현 가능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팔레스타인의 안보 요구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일부 B 지역에서 철수하는 데 동의하지 않아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할이 줄어들지 않았고, 이들 지역 간에 이스라엘 검문소 없는 안전 통과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안보 조치로서 팔레스타인 영토로 들어가는 모든 육상, 해상 및 항공 국경 검문소에 대한 통제권과 수입 및 수출 통제권을 설정할 권리를 주장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군사적 중요성이 있는 물품과 잠재적으로 위험한 인물의 영토 진입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팔레스타인 국가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목표로 하는 PLO의 행동은 이스라엘에게 오슬로 협정과 불일치하는 도발적인 "일방적" 행위로 간주된다.
경제 분쟁과 보이콧
가자 지구의 농업 시장은 이스라엘이 부과한 경제 보이콧과 국경 폐쇄 및 제한으로 고통받고 있다.[374]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의 승리 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375] 이 제재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폭력 행위를 부인하며, 오슬로 협정을 포함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간의 이전 합의를 수용하기를 거부한 결과였다.[376]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농업부 장관은 2006년 9월 이러한 안보 조치로 인해 약 12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추정한다. 그 결과, 2007년 기준[update]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16만 명 직원은 1년 이상 급여를 받지 못했다.[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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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 수
요약
관점

연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집계된 사상자 데이터를 제공한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1948년부터 1997년까지 이 분쟁으로 13,000명의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다.[380] 다른 추정치에 따르면 1948년부터 2009년까지 14,500명이 사망했다.[380][381] 1982년 레바논 전쟁 동안 이스라엘은 20,000명의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브라-샤틸라 학살에서 살해된 800-3,5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9]
벳첼렘에 따르면, 1987년부터 2000년까지 제1차 인티파다 동안 1,551명의 팔레스타인인과 421명의 이스라엘인이 목숨을 잃었다.[382] 유엔 인도주의 업무 조정 사무국 –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OCHAoPt)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23년 9월까지 가자 전쟁 이전에 이 분쟁으로 6,407명의 팔레스타인인과 308명의 이스라엘인이 사망했다.[378][379]
수치에는 서안 지구, 가자 지구,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이스라엘 민간인 및 보안군 사상자가 모두 포함된다. 모든 수치는 IDF 군사 작전, 포격, 수색 및 체포 작전, 장벽 시위, 표적 살해, 정착민 폭력 등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간의 직접적인 분쟁으로 인한 사상자를 나타낸다. 이 수치에는 불발탄 등 분쟁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이나 상황이 불분명하거나 논쟁 중인 사건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 수치에는 모든 연령과 성별의 보고된 모든 사상자가 포함된다.[383]
이스라엘 인권 단체 벳첼렘의 보고에 따르면, 2000년 9월 29일부터 2010년까지 총 7,454명의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이 이 분쟁으로 사망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인 6,371명 중 1,317명은 미성년자였으며, 사망 당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최소 2,996명이었다. 팔레스타인인은 1,083명의 이스라엘인을 살해했으며, 이 중 741명은 민간인이었고 124명은 미성년자였다.[384]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끄는 무장 단체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815명의 민간인을 포함한 1,195명의 이스라엘인과 외국인이 살해되었고, 251명이 인질로 잡혔다.[385] 가자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가자 지구에서는 52,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며,[i] 이 중 절반 이상은 여성과 어린이였고, 110,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부상당했다.[386][387][388] 란셋의 연구는 2024년 6월까지 외상으로 인한 사망자가 64,26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으며, "간접" 사망자를 포함하면 더 많은 잠재적 사망자 수를 기록할 것이라고 언급했다.[389][25]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봉쇄 강화는 기본적인 생필품 공급을 중단시켜 심각한 기아 위기를 초래했으며, 기근 위험은 2025년 5월 기준[update]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390][391][392]
사상자 통계 비판
이스라엘에 기반을 둔 국제 대테러 정책 연구소(ICT)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인권 단체가 민간인 사망자 비율을 과대평가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IDF는 사망한 많은 사람들을 잠재적 전투원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393][394]
캐스트 리드 작전 동안, 이스라엘 수치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사망자 수는 1,166명이었고, 그 중 60%는 이스라엘 관리들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불일치는 부분적으로 이스라엘이 적대 행위에 참여하지 않은 가자 경찰을 전투원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인권 단체들 사이의 광범위한 합의는 이 경찰들이 주로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대 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무장 단체의 일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상자 수치의 정확성은 사망한 어린이의 수를 바탕으로 더욱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스라엘은 89명의 팔레스타인 미성년자가 사망했다고 보고했지만, 인권 단체 벳첼렘은 252명의 16세 미만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다고 보고했으며, 거의 모든 경우에 출생 및 사망 증명서 및 기타 문서로 그 수치를 입증했다. 이스라엘 수치는 또한 미국 국무부가 보고한 "거의 1,400명의 팔레스타인인, 그 중 1,000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 수치와 대조된다.[395]
지뢰 및 불발탄
팔레스타인 영토에 대한 지뢰 및 전쟁 잔류 폭발물 (ERW) 사상자 데이터를 수집하는 포괄적인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396] 2009년 유엔 지뢰 대책 센터는 1967년부터 1998년까지 2,500건 이상의 지뢰 및 전쟁 잔류 폭발물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최소 794건의 사상자(127명 사망, 654명 부상, 13명 미상)가 발생했고, 가자 전쟁 이후 12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당했다고 보고했다.[396] 유엔 지뢰 대책 센터는 주요 위험이 "이스라엘 공중 및 포병 무기 시스템에 의해 남겨진 ERW 또는 이스라엘군이 표적으로 삼은 무장 단체의 은닉처"에서 비롯된다고 밝혔다.[396] 요르단과의 국경인 서안 지구에는 최소 15개의 확인된 지뢰밭이 있다. 팔레스타인 국가보안군은 지뢰밭 지도나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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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아랍-이스라엘 분쟁 참고문헌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어린이
- 가자 학살
- 가자-이스라엘 분쟁
- 이스라엘의 역사
- 팔레스타인의 역사
- 시온주의 역사
- 국제법과 아랍-이스라엘 분쟁
- 레바논-이스라엘 분쟁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
- 비디오 게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 헤브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
- 유대인 디아스포라
- 중동 평화 제안 목록
- 중동의 현대 분쟁 목록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개요
- 팔레스타인 학살 혐의
-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 로켓 공격
- 범아랍주의
- 피스 나우
- 홀로코스트와 나크바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타임라인
내용주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책임이 있다 (참조: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정부와 정치). 마흐무드 압바스 (2005년~현재) 행정부 하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이스라엘과 보안을 조율하고 반이스라엘 무장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다.[2]
-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영토 제안은 처음 보이는 것보다 덜 진보적이었다. 첫째, 91%의 토지 제안은 서안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의를 기반으로 했지만, 이는 팔레스타인 정의와 약 5%포인트 차이가 난다. 팔레스타인은 총 면적 5,854제곱킬로미터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노 맨스 랜드(라트룬 근처 50km2), 1967년 이후 동예루살렘(71km2), 사해 영해(195km2)를 제외하여 총 5,538 km2로 줄인다.
- 50,021명의 팔레스타인인이 2025년 3월 24일 현재 완전히 신원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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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Wikiwand -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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