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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필 (16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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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필(李廷弼, 1672년 ~ 1735년 9월 21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태보(台甫) ‧ 양보(良甫)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간략 정보 이정필(李廷弼),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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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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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7년(1691년) 증광시에 진사 1등 3위로 합격하였고, 숙종 35년(1709년) 성균관 유생들이 보는 시험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1710년) 증광시에서 병과 3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경종 4년(1724년) 2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는데, 윤용(尹容)이 이사상(李師尙)을 탄핵하였을 때,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아 윤용을 탄핵하고 관직을 빼앗을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사관은 이정필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명성을 좇아 김일경에게 붙었으니 책망할 가치도 없다"고 비난하였다. 5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7월에는 사헌부집의 이진순(李眞淳)로부터 '시전(市廛) 사람을 강제로 가두고 그들이 가진 베를 속공(屬公)하였으며, 관아에 출근하지 않고 하리(下吏)만 내보내 불법행위를 단속하는 등의 물의를 일으켰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0월 12일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영조가 즉위하고 영조 3년(1727년) 7월 세자시강원필선이 되었고 11월 승정원승지가 되었다.

무신란에서의 행적

영조 4년(1728년) 청의(淸議)에 죄를 지어 합천군수로 좌천되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안 가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 이인좌에 부응하여 영남에서 정희량(鄭希亮)이 합세하였을 때 정희량의 군세가 규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고 3월 22일 진주(晉州)로 물러났고, 그 사이에 합천은 반군에 점령당하였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전후 상황은 다음과 같다. 고을 사람 조성좌(曹聖佐)가 정희량에게 호응하려고 먼저 군수 이정필에게 안음에서의 반란군의 상황을 크게 부풀리며 위협하였는데, 이정필은 나중에야 그가 반란군에 가담했음을 알고 그 형제를 체포해 가둬 버리고 군사를 객사(客舍) 바깥에 포진하여 방비하였다.

이때 합천의 좌수(座首)로 일찌감치 조성좌와 내통하고 있던 정상림(鄭商霖)이 이정필에게 "안음과 거창의 병세가 성대해서 승산이 없고 조성좌 형제에게도 거느린 가동(家僮)이 수백 명이나 된다"며 진주로 가서 우병영(右兵營)에 구원을 청하자고 하여, 이정필이 그 말에 따라 새벽에 합천을 나가 병영으로 향하였다. 그 사이에 정상림은 즉시 옥문을 열어 조성좌 등을 석방하고, 군중(軍中)에 들어가 장교(將校)와 이졸(吏卒)을 거느리고 조성좌에게 절을 올렸다. 그날 합천이 정희량군에 함락되었다.[2] 앞서 정희량군에 함락된 안음과 거창의 수령인 오수욱과 신정모도 이정필과 마찬가지로 진주로 와서 우병영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경상우병사 이시번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며 구원에 응하지 않았다.

합천이 탈환된 것은 《영조실록》에 따르면 3월 30일, 경상감사 황선 휘하의 우방장 이보혁(성주목사)에 의해서였다.[3] 전날 밤인 29일 밤에 이보혁은 합천에서 5리 떨어져 있는 금양역(金陽驛)에 주둔하였다. 반란군의 군교(軍校) 하세호(河世浩)가 와서 도전(挑戰)하였는데, 이보혁이 앞서 오명항이 안성·죽산의 적을 격파했음을 전하는 관문(關文)을 내보였고, 도전하면서 관군의 기세를 엿보려 했던 하세호는 크게 놀라 이보혁 휘하 성주의 장교들과 사사로이 적을 잡아 공을 세우겠다고 약속하고는 돌아갔다. 앞서 첩자로 "왕사(관군)의 형세가 매우 성하다"고 떠들게 하여 합천의 반군을 동요시키는 임무를 띠고 보냈던 해인사 승려 해림(海林)도 돌아와 수괴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상황을 보고하였다.[3]

합천 성내에서는 하세호와 동조하여 이보혁의 관군과 호응하기로 한 반란군의 장교 함만중(咸萬重)이 인리(人吏) 이소경(李召卿)과 함께 모의하고 조성좌 등을 속여 밤에 몰래 객사를 나와 빙고현(氷庫峴)[주 1]에다 진을 치게 권했고[3] 30일 새벽에 하세호·김계(金洎)·함만중은 조성좌·조정좌(曹鼎佐)·허택(許澤)이 있던 장막(帳幕)의 죽삭(竹索)을 끊어버리고 그들을 덮쳐 생포하는데 성공했다.[3]

이보혁에 따르면 30일 새벽에 하세호가 '장교가 적을 사로잡았다'는 글을 가져왔고, 이보혁은 '결박하여 군전(軍前)에 보내라.'는 취지로 답장한 다음 가쉬(假倅, 가영장) 김진옥(金振玉)에게 죄인을 압송할 함거(檻車)를 준비하여 기다리게 하였는데, 날이 새도록 합천 쪽에서 아무 소식이 없었고, 무슨 일이 있나 의심하여 경기(輕騎)로 다가가서 보니, 합천쉬(陜川倅, 이정필)가 이미 진중(陣中)에 좌정(坐定)하여 사로잡은 적의 목을 벤 뒤였더라고 하였다.[4] 이정필은 경상우병사 이시번에게 자신이 처형한 조성좌 등의 목을 보냈다.[3]

이에 경상감사 황선은 "이정필이 전에 이미 제 목숨 보전하겠다며 군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이제는 또 제멋대로 적괴를 처형했다"고 조정에 치계하고 그를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3] 4월 1일 저녁에 이보혁을 따르던 가영장(假營將) 김진옥이 경상감사의 전령(傳令)이라 하여 이정필을 5리 밖에서 잡아들여 순영(巡營)으로 결박지워 압송하였다. 어사(御史)였던 이종성(李宗城)은 가영장 주제에 어디 전직 승지(承旨)였던 사람을 체포, 연행할 수 있느냐며 김진옥에게 장 다섯 대를 쳤다.[5]

이정필은 자신은 도망친 것이 아니라 경상우병영에 증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3월 26일 진주로 갔던 것이 길이 엇갈린 것이라 해명하였으나, 성주목사 이보혁(李普赫)과 당시 영남안무사 박사수(朴師洙) 등과의 진술 내용이 엇갈리면서 종신토록 벼슬길이 막히게 되었다. 또한 난이 진압된 직후인 4월 11일에 경상감사 황선이 돌연 급서하였는데, 박사수가 황선의 죽음에 이정필이 혐의가 있다고 보고하기까지 하였다.[6]

황선이 급서한 날 이보혁은 이정필이 갇혀 있는 곳으로 찾아가 이정필을 만났다. 이보혁을 본 이정필은 자신에 대한 혐의, 즉 "고을을 버리고 적을 풀어 주었다"는 말이 이보혁에게서 나온 말인 줄로 의심하고 화를 냈는데, 이에 이보혁은 앞서 순영(巡營)에서 본, 도신(황선)이 수정한 공죄계초(功罪啓草)를 이정필에게 보여 주어 의심을 풀게 하였다고 한다.[4]

이후

이후의 이정필의 관력은 알 수 없다. 이정필의 조카인 이종휘가 쓴 그의 행장에 따르면 영조 11년(1735년) 9월 21일에 붓실(筆谷)[주 2]의 종제(宗第)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향년 64세였다.[1]

이정필의 아들인 인휘와 준휘는 끊임없이 조정에 아버지의 신원을 호소했고, 이인좌의 난 당시에 참전했던 조현명(趙顯命)이나 박문수도 이정필에게 억울함이 있음을 호소하였다. 영남안찰사를 지낸 적도 있었던 도제조 조현명은 영조 22년(1746년)에 이정필의 신원을 청하는 이조판서 정우량에게 동조하여,

  • 이정필은 합천에서 적을 사로잡고자 비밀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이보혁은 성주에서 막 합천으로 와서 군내에 주둔하면서 역시 정탐군을 세워 정탐을 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이 애당초 계획을 상의한 적이 없는 상태였으며,
  • 이러한 상황에서 이정필이 먼저 도착하여 적을 죽였으나 그 수급(首級)을 처음 건네준 자는 바로 성주 주둔군으로 여기서 또 각자가 그 공을 빼앗길까 의심하게 되었고,
  • 또 이보혁은 순영(巡營, 경상감사 황선)에 보고하였는데 이정필은 병영(兵營, 경상우병사 이시번)에 보고하였기 때문에 도신(경상감사)인 황선으로써는 이정필이 이보혁의 공을 빼앗은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8]

정조 14년(1790년)에 합천의 정대동에 세워진 《합천군무신평란사적비》(陜川郡戊申平難事蹟碑)에는 이인좌의 난 당시 이정필이 고을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언급 대신 조성좌 형제를 잡아 가둔 뒤에 진주에 구원을 청하러 간 사이에 좌수 정상림이 반군과 짜고 조성좌를 풀어주고 합천을 점령해 버렸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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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성대중의 《청성잡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합천군수 이정필이 '이보혁이 자신의 공을 가로챘다'고 욕하였을 때 공론이 대부분 이정필을 두둔했지만 이보혁의 권세가 대단했으므로 이정필의 힘으로는 대항할 수가 없어 결국 관직에서 쫓겨난 채 죽었고, 이보혁은 공명과 부귀를 누리다 죽었고 자손은 번창하여 세상의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는데, 영남의 어떤 사람이 "조성좌가 처형당한 뒤에 이보혁이 군대를 이끌고 그 촌락을 포위하여 불살랐는데, 개나 닭 한 마리조차 살아남지 못했다. 악취가 몇 달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 그 폐허를 지나는 자는 반드시 길을 돌아 피해 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보혁이 몰래 역적과 내통했다가 마을 사람을 모두 죽여 입을 막은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대저 학살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 집안에 재앙이 닥치지 않겠는가. 돌아오는 무신년이 되면 위태로워질 것이다."라고 이보혁의 집안이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무신년(1788년) 다음 해인 1789년에 이보혁의 손자 이재간(李在簡)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 가던 길에 과천(果川)에서 객사했고, 과천 고을의 수령은 이재간이 죽을 집을 헐고 태워 버렸는데, 당시 사람들은 합천에서 이보혁이 저지른 일에 대한 응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보혁의 후손은 마침내 몰락하였다는 것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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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 증조할아버지:이민후(敏厚)
  • 할아버지: 이제두(齊杜) - 공주목사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아버지: 이상백(相伯) - 통덕랑(通德郞),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으로 관직이 동중추(同中樞)에 이르렀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되었다.
  • 어머니: 화순 최씨[1] - 최일(崔逸)의 딸
    • 형: 이정걸(廷傑)
    • 동생: 이정일(廷一)
    • 동생: 이정철(廷喆) - 《동사》(東史)의 저자인 이종휘의 아버지이다.
  • 정실: 진주 강씨(晋州姜氏) - 강택규(姜宅揆)의 딸[1]
    • 아들: 이인휘(寅徽)
    • 며느리: 조광벽(趙光璧)의 딸
      • 손자: 이동응(東膺)
      • 손자: 이동태(東泰) - 일찍 세상을 떠나 자손이 없었던 삼촌 이익휘의 양자로 들어갔다.
      • 손자: 이동식(東寔)
      • 손녀: 박동익(朴東䎘)에게 시집갔다.
      • 손녀: 안윤건(安允謇)에게 시집갔다.
    • 아들: 이익휘(翼徽)
    • 며느리: 도정(都正) 홍우석(洪禹錫)의 딸
      • (양자: 이동태)
    • 아들: 이윤휘(允徽) - 일찍 요절하였다.
    • 며느리: 도정 성의석(成義錫)의 딸
      • 손자: 이동적(東廸)
    • 아들: 이신휘(愼徽)
    • 며느리: 좌랑(佐郞) 류봉채(柳鳳采)의 딸
      • 손자: 이동현(東顯)
      • 손자: 이동귀(東龜)
      • 손녀: 임태원(林泰遠)에게 시집갔다.
    • 아들: 이준휘(儁徽)
    • 며느리: 현감(縣監) 서명운(徐命運)의 딸
      • 손자: 이동형(東馨)
      • 손자: 이동양(東養)
      • 손녀
    • 딸: 심철(沈喆)에게 시집갔다.
      • 외손자: 심화진(華鎭)
      • 외손자: 심규진(奎鎭)
      • 외손녀
  • 후실:
    • 서녀: 심빈(沈彬)에게 시집갔다.

이정필은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10대 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이민후가 수도군파에서 양녕대군파 이종영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양녕대군파로 입적되었다.

이정필은 부인 진주 강씨와의 사이에서 인휘(寅徽), 익휘(翼徽), 윤휘(允徽), 신휘(愼徽), 준휘(儁徽) 다섯 아들을 두었고, 이 가운데 윤휘는 아버지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1] 이인휘, 이준휘 형제는 이후로 거듭 조정에 "내 아버지는 고을을 버리고 달아난 적도 없고 공을 가로챈 것도 아니다"라고 호소하였다.

영조 10년(1734년) 이인휘가 북을 치면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영조 21년(1745년) 정시에 병과 4위로 문과 급제한 이준휘도 소장을 올려 조정에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조정은 이인휘나 이준휘 모두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상소를 올린 것에 대하여 효자라고 칭찬하였지만, 이정필에 대한 신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주

같이 보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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