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황선 (조선)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Remove ads

황선(黃璿, 1682년 ~ 1728년 음력 4월 11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성재(聖在)이다.

간략 정보 황선(黃璿), 자 ...
Remove ads

생애

요약
관점

숙종 36년(1710년)에 진사에 3등 41위로[2] 합격하고 한 달 뒤에 있었던 증광문과에서 병과 30위로 급제하였다.[주 1] 과거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뽑혀 들어가 설서(說書)가 되어 훗날 즉위하게 될 세자 균의 학습을 맡았다. 세자 균이 대리청정을 시작하고 문학(文學)에 충원되었다.[1]

조선 통신사 부사

숙종 44년(1718년) 일본에서 쇼군 요시무네가 새로 쇼군으로 취임한 것을 축하하는 통신사의 부사(副使)로 정사 홍치중(洪致中)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였다.[1] 원래 통신부사로 내정된 것은 정사효였으나[4] 외국에 보내는 사신은 전대(專對) 즉 돌발스러운 상황에서의 대답이나 일 처리에 뛰어나야 하는데 정사효는 지난 경력이 이미 가벼워서 물정에 맞지 않다는 사헌부의 건의에 따라 황선으로 교체되었다.[5]

황선은 숙종 45년(1719년) 1월 29일 세자를 만난 자리에서 인솔 잡류 가운데 작폐자 및 노자를 거느리고 오는 사람에 대한 규책, 활 제작에 필요한 흑각의 사무역 문제, 일행 가운데 양식과 반찬을 척매하는 자에 대한 논단, 소공물종에 대해 상관 이상은 일공하는 문제 등을 아뢰었다.[6] 기해통신사는 6월에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 이듬해 1월에 조선으로 돌아왔고, 황선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배수되었다.[1]

신임옥사와 유배

경종은 즉위한 뒤에도 후사를 두지 못하였는데, 당시 왕제(王弟)인 연잉군을 지지하던 노론김창집(金昌集) ㆍ 이이명(李頤命) ㆍ 이건명(李健命) ㆍ 조태채(趙泰采), 이른바 '사대신'(四大臣)이 나서서 경종에게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1] 황경원이 쓴 묘표에서는 이때 소론의 이광좌(李光佐)가 동부승지 김일경(金一鏡)과 함께 이들을 공격하였고, 이는 4대신의 죽음 및 노론이 대거 조정에서 축출되고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신임옥사).

경종이 막 즉위하였을 때 유학 조중우가 경종의 생모로 숙종의 명에 의해 사사되었던 희빈 장씨를 추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가[7] 노론측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조중우의 의견에 동의한 이들은 물론 의견을 처음 냈던 조중우 자신조차도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경종의 명으로 조중우의 심문을 맡았던 것이 형조참의를 맡고 있던 황선이었다. 그런데 조중우는 심문 과정에서 그만 목숨을 잃었고[8] 이로 인해 원한을 사게 되었다.

황선은 김일경 개인과도 원한이 있었는데, 10여 년 전에 이정우(李禎翊)와 김일경 사이에서 논척이 벌어졌을 때 김일경이 올린 상소에 대해서 경종이 이정익을 '흉인'(凶人)이라고 지적했던 비답을 당시 승정원의 승지로 있던 황선이 은밀히 품하여 비답을 개정하였다는 것이었다. 경종이 즉위하자 이 문제가 다시 재개되어, 황선은 김일경에게 미움을 받고 파직되었다.[9] 황선은 12월 19일에 소를 올려서 그 일에 대해 변명하였는데, "이미 품달하면 회답을 받들기 전에는 조지(朝紙)에 등출(謄出)하지 않는 것이 본래 승정원의 정해진 전례이고, 처음 비답을 반시(頒示)하지 못했던 것은 그 형세가 그러했던 것이며, 비지(批旨, 비답)를 개정하여 내릴 때에도 하급 관리를 시켜서 미품(微稟)[주 2]하였고 김일경에게도 이를 알렸다"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경종 1년 12월 12일 사간 이진유, 헌납 이명의 등이 김창집, 이이명 등을 비판하면서 황선을 두고 "김일경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흉인'이라고 쓴 것은 확실하게 이정익을 지시한 것인데도 승지 황선이 감히 성교를 잘못 생각한 것으로 돌려서 사알을 불러 방자하게 고치기를 청하였다"고 탄핵하였고, 경종은 이를 윤허하였다.[10] 이에 황선은 무장(茂長)으로 유배되었다.[1] 김일경은 조중우의 동생 조중수를 시켜서 "형을 위해 복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지만, 경종은 이에 대한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3년 뒤에 양덕(陽德)으로 옮겨졌다.[11] 그 이듬해(1724년)에 친상을 당하였으나 달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분장이 허락되었고[12] 장례를 치르고 나서는 다시 유배지로 돌아가야 했다.[13]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제가 즉위한 해(1724년)에 황선의 유배지는 평산(平山)으로 옮겨졌다가[14] 다시 몇 달 후에 김일경이 죽은 뒤에야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왔다.[15][1] 이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승진하였다가[1]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겼다.[1][16]

대사간으로 있을 때 영조가 재령군(載寧郡)에 있던 수어둔전(守禦屯田)을 후궁인 영빈 이씨(暎嬪李氏)에게 하사하려 하자 황선이 상소를 올려 이를 간하였는데,[17] 실록에서는 "임금이 엄하게 비답하고 따르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행장에는 이 일로 왕의 심기를 거슬러서 황선은 대사간에서 해임되었고[18] 당시 우의정(右議政)이던 이의현(李宜顯)이 황선을 변호하여 영조가 화를 풀고 다시 그를 기용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18]고 한다.

이인좌의 난 그리고 급서

경상감사를 맡고 있던 영조 4년(1728년)에 이인좌의 난(무신란)이 일어났다. 무신란은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명분으로 경상도 ⋅ 전라도를 비롯해 기호 지방까지 반란군이 결성되어 활동하였으며, 중앙의 금군 별장 남태징과 평안병사 이사성 등도 가담했다. 지방 거병의 총책임자는 이인좌가 맡았고, 그의 주도 아래 경상도는 상주와 안동을 중심으로 정희량(鄭希亮) ⋅ 김홍수(金弘壽) 등이 세력을 포섭하였다.

정희량은 할머니의 묘를 옮긴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모았고, 3월 20일 이인좌의 동생인 이웅보와 함께 안음에서 반란을 일으켜 거창과 안음을 점령한 뒤 합천에 거주하던 조성좌의 도움으로 합천까지 점령하였다. 이때 거창현감 신정모는 성을 버리고 도망갔고, 안음현감 오수욱 역시 반란군 측에서 보낸 투서에 겁을 먹고 병영으로 도망갔다.[19]

황선은 성주목사 이보혁을 우방장, 초계군수 정양빈을 좌방장으로 삼아 주변의 관군을 통솔하여 진압에 나섰다.[20] 난이 진압된 뒤에 그 전개되었던 양상을 보고하였는데, 그 중에는 곤양군수로써 반란 진압에 나섰던 우하형이 정희량 등을 체포하고도 그들을 심문이나 압송 절차 없이 독단으로 처형해 버린 것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경상감사를 맡아 현지에서의 상황을 수습하던 중에 황선은 급서하였다. 향년 47세.[1] 묘표나 행장에서는 난이 진압된 뒤에 사람들이 모두 황선에게 축하를 했지만 황선은 "영남이 어찌 다만 이웅보 하나뿐이겠는가? 적들이 틈을 엿보고 다시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노라."[18]라며 깊은 근심에 싸여 빈좌를 따라 군영의 남쪽 누대에 올라가 오랫동안 한숨을 쉬었고, 바로 그날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고 있다.[1]

실록에는 황선이 평소에 병이 없었고 사망하던 날에도 평소처럼 업무를 보고 손님을 접대하며 저녁까지도 몸이 건강하였는데, 날이 저물어 된죽을 먹고 나서 조금 있다가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었고, 죽은 뒤에는 뭔가 독살된 듯한 증상이 몸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21]

조정에서는 대신(臺臣)의 말에 따라 영남 감영의 다비(茶婢) 및 감선(監膳)을 맡은 아전을 서울로 압송하여 심문하였지만 결국 실상을 알아내지 못하였다.[21] 황선의 행장을 쓴 황경원은 행장에서 "상이 관찰사 박문수(朴文秀)에게 명하여 안험(案驗)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는데, 박문수는 안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18]라며 박문수를 비난하였다. 무신란 당시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진주로 원군을 청하기 위해 합천을 비웠다가 합천이 반란군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고 합천이 다시 탈환된 뒤에는 체포된 반란군 수괴 허택(許澤)을 재판도 없이 처형하였다는 황선에 의해 투옥되고 난이 진압된 뒤에 황선에 의해 탄핵을 받은 적이 있었던 이정필(李廷弼)이 황선의 죽음에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혐의가 나오기도 하였다.[22] 정조 때에도 황선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지만 끝내 황선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게 되었다.

이의현(李宜顯)[23]이관명(李觀命)[24]이 황선의 죽음 당시 그를 애도한 시가 남아 전한다.

훈공에 대한 논쟁

황선이 무신란에서 세운 공적에 대해서도 조정에서 논란이 있었는데, 졸기에는 황선이 죽은 바로 당일 기사에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고 하였으나, 황선의 조카인 황경원이 지은 행장에서는 황선이 사망하고 2년 뒤인 영조 6년에야 '원종'(原從) 즉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의 반열에 들었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가증되었다[18]고 적고 있어 실록과 다르다. '충렬공' 증시 또한 실록에는 그의 사망 직후가 아닌 영조 24년(1748년)의 일이라고 하고 있다.[25]

황선을 무신란 진압의 유공자로써 녹훈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간원과 달리 '원훈중신'들은 무신란 당시 황선이 분발하여 적을 치지 못했다며 배척하였고, 황선이 급서할 당시 영남안무사(嶺南安撫使)를 맡고 있었던 도승지 박사수(朴師洙)는 황선이 급서하고 한 달 뒤인 영조 4년(1728년) 5월 2일에 황선의 녹훈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지만, 영조는 비답으로 "중외를 획책한 대신(大臣)도 (공신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도신(道臣)이 한때 잠깐 지휘한 것을 가지고 뭐하러 논공까지 하느냐"는 부정적인 입장을 비쳤다.[26] 이듬해에야 황선에 대한 증직이 이루어졌는데, 졸기에 기록된 것과 달리 좌찬성이 아니라 이조판서로 증직하였다고 되어 있다.[27]

영조 5년(1729년) 4월 30일에 예조판서 송인명이 변란이 일어났을 적에 경상 감사 황선의 공이 가장 많았으니 의당 녹훈되었어야 하는데, 지금은 일이 지났다고 아뢰었다. 이때에도 영조는 "황선은 직분상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28]고 하교하였다. 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 운운하는 영조의 발언에 대해 5월 10일에 박사수는 다시금 나서서 그 발언은 왕의 실언이라고 지적하였고, 송인명도 거듭 훗날의 사신(史臣)들은 반드시 "영남의 역적은 경상감사 황선이 토평했다"고 쓸 것이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우의정 이태좌는 송인명이 한쪽 편만 들고 있다면서 오명항이 안성 ⋅ 죽산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영남의 역적(정희량 등)은 그 풍문에 별 싸움도 치르지 않고 저절로 무너졌다고 하였다. 박사수는 자신도 직접 출정하여 적과 싸우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군관들이나 해서안무사(海西按撫使)였던 조지빈(趙趾彬)의 군관도 모두 원종공신 1등·2등에 들었는데 황선의 군관은 처음부터 4등·5등에도 들지 못했다며 부당함을 아뢰었고, 영조는 영남에서는 교전한 일 자체가 아예 없다며 전공을 논할 수 없다고 하자 박사수는 박필건이나 이보혁이 모두 경상감사 황선의 절제(節制)를 받은 사람이고 대장이 공이 없다고 포상을 못 받는데 그 휘하 사람들이 공을 세웠다고 포상을 받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이에 이태좌는 "이는 큰 일이 아닌데 번거롭게 반복해서 진달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라며 일을 더 논하는 것을 마무리지어 버렸다.[29]

충렬공 시호도 영조 9년(1733년) 9월 18일 주강에서 지경연사 김재로가 황선의 공훈을 거론하면서 시호 내려주기를 청하고 있어[30] 이 무렵까지도 무신란에서 황선의 공적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그의 노모와 처자가 굶주림과 추위로 떠도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며 아들을 녹용(錄用)하여 그 어미를 봉양하게 하자"[30]는 김재로의 지적이나 황선 사후 61년이 지난 정조 3년(1779년) 2월에 "이제 그의 아내가 나이가 팔순인데 자손이 없다고 하니"[31] 운운하는 데에서 그 유족의 처지 또한 곤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선의 조카인 황경원이 지은 행장에는 황선의 문집 5권이 황경원이 삼촌의 행장을 짓던 당시까지 남아 있었다[18]고 하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Remove ads

묘소

묘표에 따르면 처음에는 장단(長湍) 마근(麻根)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29년 뒤 10월 정묘일에 파주(坡州) 자운(紫雲)의 언덕으로 이장하고, 부인 순흥 안씨와 함께 합장되었다. 황경원이 묘표를 지었다고 한다.

경상도의 사민들은 무신란 직후에 사망하여 공훈도 누락된 황선의 훈적을 기리는 민충사(愍忠祠)라는 사당을 세웠는데, 영조 17년(1741년) 경상감사 정익하(鄭益河)가 민충사에 면세지 10결을 지급하여 수호하도록 하자고 상소하였으나 서원 신설을 금지하고 있던 당시에 무단으로 서원을 지었다는 이유로 전지 지급은 물론 민충사를 처음 지었을 때의 도신을 추고하고 그 고을 수령은 파직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32]

민충사는 이때 훼철되었고, 이후 철종 연간에 다시 건립되기도 하였으나,[33] 최종적으로 고종 연간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사라졌다. 민충사에는 황선의 공적을 기린 비석도 세워져 있었다고 하며, 다산 정약용이 그 비문을 보고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34]

Remove ads

일화

황경원의 행장에는 황선에 대한 몇 가지 일화가 실려 있다.

어려서부터 캄캄한 밤에 혼자 서쪽 교외로 나가서 도적의 목을 베는 자리에 가서 소리를 몇 번씩 지르고 돌아온 적도 있었는데, 자라서는 태도를 바꾸어 밤낮으로 글을 읽었으니 집안사람도 만날 수 없을 정도였다. 황선의 할머니 이씨(李氏)는 손자의 이런 태도를 걱정하여 황선이 병이 들었다고 여기고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였는데, 황선은 "내가 병은 무슨 병입니까"라며 웃어 넘겼다고 한다.

이웅보의 군사들이 거창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람을 모아 대구(경상감영 소재지)를 습격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황선은 군영을 닫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목수를 불러서 무너진 집들을 수리하게 하였다. 이웅보가 사람을 시켜 염탐하게 하였으나 병사들은 나타나지 않고, 감영 안에서는 막 공사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끝내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옆에서 자객이 감영에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는 소리에도 황선은 경상감사의 관저인 징청각(澄淸閣)을 가리키면서 "내가 죽어도 여기서 나가지 않겠다."라며 경상감영을 사수할 뜻을 보였다고 하였다.

가계

  • 할아버지: 황성(黃晠) - 추증 이조참의
  • 아버지: 황처신(黃處信) - 호조정랑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황선 자신은 조선 세종 때의 명신(名臣) 황희의 13대 손이었다. 황희에서 황선까지의 계보는 황치신(黃致身) - 황사장(黃事長) - 황섬(黃蟾) - 황기준(黃起峻) - 황열(黃悅) - 황정욱(黃廷彧) - 황혁(黃赫) - 황곤후(黃坤厚) - 황상(黃裳) - 황이징(黃爾徵) - 황성(黃晠) - 황처신(黃處信) - 황선으로 이어진다.

선조 연간의 문신으로 황선 자신의 6대조인 황혁(黃赫, 1551~1612)의 문집 《독석집》(獨石集)의 증보판을 영조 3년(1727년)에 중간하였다.

황선의 부인은 정조 3년(1779년)까지 살아 있었는데, 정언 류맹양(柳孟養)이 나이 팔순인데도 자손이 없어 적적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정조는 류맹양의 상소대로 황선의 부인에게 식량을 지급해 주게 하였다.[31]

판중추부사를 지낸 황경원(黃景源)은 황선의 조카로[35] 삼촌 황선의 묘표[1]와 행장[18]을 짓기도 했다.

Remove ads

각주

같이 보기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