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고려)
고려의 제11대 임금 (1019–1083)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문종(文宗, 1020년 1월 4일 (음력 12월 1일)[1], 율리우스력 1019년 12월 29일 ~ 1083년 9월 8일 (음력 7월 18일), 율리우스력 9월 2일)은 고려의 제11대 국왕(재위 : 1046년 6월 30일 (음력 5월 18일), 율리우스력 6월 24일 ~ 1083년 9월 8일)이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1년 11월) |
초명은 서(緖),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묘호는 문종(文宗), 시호는 강정명대장성인효대왕(剛定明大章聖仁孝大王), 능호는 경릉(景陵)이다. 불교 중흥에 힘썼으며 그의 치세 이래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한다.[2]
즉위 초 문하시중 최충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서산(書算)을 정리하도록 명하였으며, 그의 치세기간 중 이자연과 최충을 통해 문치 정책을 펼쳤다. 현종(顯宗)과 원혜왕후 김씨의 아들이다. 왕은 어려서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활을 잘 쏘았다. 고려사 문종 사망 기사에 따르면 지략이 원대하고 너그럽고 인자하여 많은 사람을 용납하였으며, 무릇 송사(訟事)를 듣고 판단한 것은 다시 잊지 않았다고 한다.
생애
생애 초반
문종은 현종과 원혜왕후 김씨의 셋째 아들로 덕종과 정종의 이복 동생이며 정간왕에 추증된 평양공 왕기의 친형이었다. 덕종과 정종은 그의 이복 형이면서 동시에 이종 사촌 형이기도 했는데 이모이자 적모인 원성왕후[3]의 소생이었다.
처음 이름은 서였으나 뒤에 휘로 고쳤다. 1022년 낙랑군으로 봉해졌으며, 1037년 내사령에 임명되었다. 이복 형인 정종이 세상을 뜬 후, 정종의 유지로 왕위를 계승했다.[4]
업적
문종은 즉위 후 문하시중 최충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서산(書算)을 정리하게 함으로써 각종 법을 만드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장인인 이자연은 사심없이 그를 보필하였고, 이자연과 최충을 통해 문치 정책을 추진해 나간다.
불교를 신봉하여 1067년 흥왕사(興王寺)를 세웠고, 자신의 아들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하고 태자 왕후(王煦)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니 그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이다.[5] 유학도 장려하여 이 무렵 최충의 9재(九齋)를 선두로 12도(十二徒)의 사학(私學)이 발달하였다. 지방에서도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리의 수가 늘었다.
국방과 외교에도 힘써 동여진(東女眞)이 북변을 침략하자 이를 토벌하여 동여진에 대한 초기의 정책은 다소 강경했으나 이후 점차 회유책을 썼고, 특히 송나라, 이슬람 등과 친선을 도모하여 교역이 융성하였다. 1056년 일본 사신이 개경을 방문하였다. 빈민 구휼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한편 일부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친동생인 평양공을 추대하려 한 사실이 발각되자 1072년 평양공의 작위를 추탈하고 그 아들들을 유배보내기도 하였다.
사후
재위 37년간 고려의 문물 제도는 크게 정비되어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 유교, 미술, 공예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괄목할 수준을 드러내 문화가 크게 발전되었다[6].
그의 즉위 직후 왕위를 계승한 장남 순종은 재위 3개월 만에 병사하여 둘째 아들 선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능은 개성시 장풍군에 위치한 경릉(景陵)이다. 불교 중흥에 힘썼으므로, 인효성왕(仁孝聖王)라고도 부른다.
가족 관계
요약
관점
부모
왕후
왕자[주 1]
왕녀
|
같이 보기
|
각주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