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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시메옹 샤르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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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시메옹 샤르댕(Jean Siméon Chardin, 프랑스어: [ʒɑ̃ simeɔ̃ ʃaʁdɛ̃], 1699년 11월 2일 - 1779년 12월 6일)은 18세기 프랑스의 화가이다.[1]그는 정물화의 거장으로 여겨지며,[2] 주방 하녀, 어린이, 가정 활동을 묘사한 풍속화로도 유명하다. 신중하게 균형 잡힌 구성, 부드러운 빛의 확산, 그리고 미세한 임파스토가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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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샤르댕은 1699년 파리에서 목수인 아버지 장과 어머니 잔 프랑스와스 사이에서 태어으며 평생동안 거의 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1757년 루이 15세가 그에게 루브르궁에 스튜디오와 거주지를 제공할 때까지 파리 좌안의 생쉴피스 교회 근처에 살았다.[3] 시메옹은 세례명이며, 간간히 장-바티스트로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 샤르댕은 1723년에 마르그리트 생타르와 결혼 계약을 맺었지만, 1731년에야 결혼했다.[4]
그는 일찍부터 그림그리기에 관심과 재주을 보여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미술학원 상-뤽 아카데미 (Saint-Luc Académie)에 보냈다. 시메옹은 여기서 색채를 섞고 칠하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기술을 익히게 되며, 이 화법은 후에 샤르댕의 작품에서 역력히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 미술학원에서 장인 자격증을 취득한 후, 샤르댕은 아직 화가로서의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여러 군데 사설학원의 실습과정에 등록하여 화법을 개선하는 데 노력하였다.
19세기 한 작가에 따르면, 무명 화가가 왕립 아카데미의 주목을 받기 어려웠던 시절, 그는 퐁뇌프 근처의 도핀 광장에서 "작은 성체 축일" (정기 축제 8일 후)에 그림을 전시하여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 1720년에 지나가던 장바티스트 반 로는 그 그림을 샀고, 이후에도 계속 그를 후원했다.[5]

1728년 가오리와 뷔페를 제출한 후, 그는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 입회했다.[6] 그는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고객이 지불하고자 하는 가격으로 제작"하여[7] 생활비를 벌었으며, 1731년 퐁텐블로궁의 프란시스 1세 갤러리의 프레스코 복원과 같은 작업에 참여했다.[8] 1731년 11월에 그의 아들 장피에르가 세례를 받았고, 딸 마르그리트 아녜스는 1733년에 세례를 받았다. 1735년에 그의 아내 마르그리트가 사망했고, 2년 안에 마르그리트 아녜스도 사망했다.[4]
1737년부터 샤르댕은 살롱 드 파리에 정기적으로 전시했다. 그는 "헌신적인 아카데미 회원"이 되어[3] 50년 동안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으며, 고문, 재무관, 서기 등의 직무를 역임했으며, 1761년에는 살롱 전시회 설치를 감독했다.[9]

샤르댕의 작품은 프랑수아 베르나르 레피시에 및 P.-L. 쉬귀루 등이 제작한 풍속화 복제 판화를 통해 인기를 얻었고, 이는 샤르댕에게 "현재 로열티와 같은 형태"의 수입을 가져다주었다.[10] 1744년에 그는 프랑수아즈 마르그리트 푸제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샤르댕의 재정 상태를 상당히 개선시켰다. 1745년에 딸 앙젤리크 프랑수아즈가 태어났지만, 1746년에 사망했다.
1752년 샤르댕은 루이 15세로부터 500 리브르의 연금을 받았다. 1756년 샤르댕은 정물화 주제로 돌아와, 1759년 살롱에서 아홉 점의 그림을 전시했다. 이는 드니 디드로가 처음으로 논평한 살롱 작품이었으며, 디드로는 샤르댕 작품의 열렬한 숭배자이자 대중적 옹호자임을 입증했다.[11] 1761년부터는 살롱 전시 주관, 재무관 등의 역할을 맡아 작품 수가 감소했고, 이전 작품의 '복제품'을 전시하게 되었다.[12] 1763년 아카데미에 대한 그의 공로로 연금을 200 리브르 추가로 받았다. 1765년 그는 루앙 과학 예술 아카데미의 준회원으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지만, 이 명예를 수락하기 위해 파리를 떠났다는 증거는 없다.[12] 1770년에는 샤르댕이 '왕의 수석 화가'가 되었고, 그 댓가로 받은 연금 1,400 리브르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았다.[13] 1770년대에는 시력이 약화되어 파스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아내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다 (오른쪽 상단 자화상 참조). 그의 파스텔 작품은 현재 높이 평가된다.[14]
1772년 샤르댕의 아들 역시 화가였는데, 베네치아에서 익사했으며, 이는 자살로 추정된다.[13] 작가의 마지막 유화는 1776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마지막 살롱 참여는 1779년이었고, 몇 점의 파스텔 스터디가 전시되었다. 그해 11월에 심하게 병에 걸린 그는 12월 6일 80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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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요약
관점


샤르댕은 매우 느리게 작업했으며 총 200점 이상의 그림 (연간 약 4점)을 그렸다.[15]
샤르댕의 작품은 18세기 프랑스 미술을 지배했던 로코코 회화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역사화가 공공 미술의 최고 분류로 여겨지던 시기에 샤르댕이 선택한 정물화와 풍속화는 낮은 수준으로 간주되었다.[3] 그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질감의 정물화와 섬세하게 다룬 가정 실내 및 풍속화를 선호했다. <담배 갑이 있는 정물>과 같이 평범한 가정 용품을 그린 단순하고 심지어 삭막한 그림들과 <팽이를 든 소년>과 같은 어린아이들의 순수함을 감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묘사하는 놀라운 능력은 당대에 많은 인기를 끌었고, 그의 시대를 초월한 매력이 되었다.
대부분 독학으로 배운 샤르댕은 17세기 저지대 국가 거장들의 사실주의와 주제에 큰 영향을 받았다. 떠오르는 부르주아지를 비전통적으로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5세를 포함한 프랑스 귀족정의 후원자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그의 인기는 처음에는 동물과 과일 등을 그렸지만, 1730년대에는 주방 용품을 작품에 도입했다(예: <구리 물통>, 1735년 경, 루브르박물관). 곧 인물들도 그의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한 초상화가가 초상화를 시도해 보라고 도전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전해진다.[16] <편지를 봉하는 여인> (약 1733년)은 그의 첫 시도였을 수 있으며,[17] 그 뒤를 이어 식사 전 기도에서처럼 기도하는 아이들과 생각에 잠긴 주방 하녀들의 반신을 묘사한 그림들이 나왔다. 이 소박한 장면들은 단순한 일상 활동을 다루지만, 또한 이전에는 회화의 가치 있는 주제로 간주되지 않았던 프랑스 사회의 평범한 계층에 대한 기록이기도 했다.[18] 이 그림들은 형식적인 구조와 회화적 조화로 주목할 만하다.[3] 샤르댕은 회화에 대해 "색으로 그리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색을 사용하지만, 느낌으로 그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9]
샤르댕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그리기를 즐겼다. 그는 적어도 네 번에 걸쳐 카드 집을 짓는 청소년을 묘사했는데, 와데스던 매너에 있는 버전이 가장 정교하다. 이러한 장면들은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니타스 작품에서 유래했으며, 인간 삶의 덧없음과 물질적 야망의 무가치함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샤르댕의 작품은 또한 어린 시절의 덧없는 순간 자체에 대한 즐거움을 보여준다.[20]
샤르댕은 자신의 작품, 특히 풍속화의 복제품을 자주 그렸는데, 거의 모든 작품이 여러 버전으로 존재하며, 많은 경우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21] <가정교사>(1739년, 캐나다 국립미술관, 오타와)를 시작으로, 샤르댕은 노동 계급 주제에서 부르주아 생활의 넓은 공간으로 관심을 옮겼다.[22] 약 200점에 달하는 샤르댕의 현존하는 그림들[7]은 루브르 박물관을 포함한 많은 주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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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샤르댕이 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은 광범위했으며 잘 기록되어 있다.[23] 에두아르 마네의 <비눗방울 부는 소년>과 폴 세잔의 정물화는 모두 샤르댕에게 빚을 지고 있다.[24] 또한, 그는 앙리 마티스가 가장 존경했던 화가 중 한 명으로서, 미술 학생 시절 마티스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샤르댕의 그림 네 점을 모사했다.[25] 카임 수틴의 정물화는 샤르댕에게서 영감을 얻었으며, 조르주 브라크와 나중에는 조르조 모란디의 그림도 마찬가지였다.[24] 1999년 루시언 프로이드는 <어린 여교사>(내셔널 갤러리, 런던)를 본떠 여러 점의 그림과 에칭을 제작했다.[26]
마르셀 프루스트는 저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어떻게 눈을 뜰 것인가?" 장에서 단순한 아침 식탁에 앉아 있는 우울한 젊은이를 묘사한다. 그가 찾는 유일한 위안은 루브르 박물관의 위대한 걸작들 속에 묘사된 상상의 아름다움, 즉 환상적인 궁전, 부유한 왕자 등을 느끼는 것이었다. 작가는 젊은이에게 루브르 박물관의 다른 구역, 샤르댕의 그림이 있는 구역으로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한다. 거기서 그는 집 안의 정물화와 <순무 껍질 벗기기>와 같은 일상 활동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 된다.
대표작
- 죽은 토끼와 사냥 장비 (ca. 1727), 캔버스 유화, 81 x 65 cm., 루브르 박물관
- 가오리 (1727), 캔버스 유화, 114.5 x 146 cm., 루브르 박물관
- 유리 병과 과일 (ca. 1728), 캔버스 유화, 55.7 x 46 cm., 카를스루에 국립미술관
- 주방 용품과 세 마리의 청어 또는 새우 (1729), 캔버스 유화, 클라크 미술 연구소
- 하얀 천이 있는 냄비와 국자 (1729), 캔버스 유화, 15 3/8 x 12 1/8 in. (39.1 x 30.8 cm), 클라크 미술 연구소
- 탐험의 속성 (1731), 캔버스 유화, 141 x 219 cm., 자크마르 앙드레 미술관
- 편지 봉인 (1733), 캔버스 유화, 146 x 147 cm., 샤를로텐부르크성
- 그림 수업 (ca. 1734), 캔버스 유화, 41 × 47 cm., 도쿄 후지 미술관
- 제도사 (1737), 캔버스 유화, 80 x 65 cm., 루브르 박물관
- 시장에서 돌아오다 (1738–39), 캔버스 유화, 47 x 38 cm., 루브르 박물관
- 가정교사 (1739), 캔버스 유화, 47 x 38 cm., 캐나다 국립미술관
- 오귀스트 가브리엘 고드프로이의 초상 (1741), 캔버스 유화, 64.5 x 76.5 cm., 상파울루 미술관
- 주의 깊은 간호사 (1747), 캔버스 유화, 46.2 x 37 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 좋은 교육 (ca. 1753), 캔버스 유화, 43 x 47.3 cm., 휴스턴 미술관
- 점심 준비 (1756), 캔버스 유화, 38 × 46 cm., 카르카손 보자르 미술관
- 야생 딸기 바구니 (ca, 1760), 캔버스 유화, 38 x 46 cm., 개인 소장
- 라 브리오슈 (1763), 캔버스 유화, 47 x 56 cm., 루브르 박물관
- 자두 바구니 (1765), 캔버스 유화, 32.4 x 41.9 cm., 크라이슬러 미술관
- 예술의 속성과 정물 (1766), 캔버스 유화, 112 x 140.5 cm., 에르미타시 박물관
- 복숭아, 호두, 칼, 와인잔이 있는 바구니 (1768), 캔버스 유화, 32 x 39 cm., 루브르 박물관
- 생선과 채소가 있는 정물 (1769), 캔버스 유화, 68.6 x 58.4 cm., J. 폴 게티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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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민간 및 군사 음악의 속성
- 비눗방울 (회화)
- 카드 집
- 공꾸르 형제, 가제트 예술잡지 (Gazette des Beaux-Arts), 15 (1863년), p. 514-533; 16 (1864년), p 144-167.
내용주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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