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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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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침(丁綝, ? ~ ?)은 신나라 ~ 후한 초기의 군인으로, 자는 유춘(幼春)이며 영천군 정릉현(定陵縣)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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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씩씩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무략(武略)을 갖추고 있었다.[2][3] 왕망 때 영양위(潁陽尉)를 지냈다.[1]
유수는 영양을 공격하였으나 방비가 굳건해 무너뜨리지 못했는데, 정침의 설득을 받은 재(宰)가 항복한 덕에 입성할 수 있었고, 유수는 이를 기뻐하여 정침을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종군케 하였다. 정침은 병사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고, 각지에 격문을 뿌리는 한편 둔영을 공략하여, 하남·진류·영천 등 21개 현을 정벌하였다.[1][a]
한편 이 과정에서, 부성(父城)을 지키던 같은 군 사람 영천군연(郡掾) 풍이가 유수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혔다.[6][7][8][9] 정침은 자신과 함께 유수를 따르던 풍이의 종형 풍효(馮孝)·같은 군 사람 여안(呂晏)과 함께 풍이를 유수에게 추천하였다.[6] 이후 풍이는 유수의 진영에 투항하였고,[6][7][8][9] 이때부터 유수에게 중용되어 활약하게 되었다.[6][8]
건무 원년(25년),[1] 유수가 후한을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하였고(광무제),[10][4][11] 이때 정침은 하남태수에 임명되었다.[1][2][3] 이 즈음에 광무제는 공신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봉토를 하사하였는데, 모두가 풍요로운 땅을 골랐으나 정침은 고향 땅을 달라고 하였다. 누군가가 정침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b] 정침은 이렇게 대답하였다.[1][10][4][5]
“ | 예전에 손숙오는 자식에게 척박한 땅을 봉토로 받으라고 일렀습니다.[1][2][3] 저는 능력이 하찮고 공적이 미미하니, 향정(鄕亭)을 얻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1][2][3][10][4][5] | ” |
이 말을 들은 광무제는 정침을 정릉현 신안향후(新安鄕侯)에 봉하여[1][2][3][10][4][5] 식읍 5천 호를 내렸고, 훗날 능양후(陵陽侯)로 옮겼다.[1][2][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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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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