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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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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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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봉수한반도에서 조선시대에 운영되었던 봉수(烽燧) 체계를 의미하며, 조선군의 군사 통신 수단이었다. 낮에는 연기[燧], 밤에는 횃불[烽]로 적의 침입 상황을 정해진 노선을 따라 알렸으며, 한반도 전역에 5개의 주요 봉수 노선인 직봉(直烽)과 5개의 주요 봉수로에 포함되지 않았던 간봉(間烽)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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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봉수로. 문화재청 제공

개요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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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직봉의 종착점인 서울 남산목멱산 봉수대 터 - 현재의 봉수대는 1994년 복원한 것이다.

한반도에서 봉수삼국시대에 처음 등장하였고 고려 시대에도 존재하였으나, 제도화되어 체계적으로 운영된 것은 조선 초기이다.[1] 세종 때에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설치하여 이후 조선 말 갑오개혁(1894)까지 운영하였는데, 상황에 따라 1개에서 5개까지 올렸다.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어서 연락을 할 수 없을 때는 봉졸들이 차례로 달려서 보고하였다. 서울에서는 오원(五員)이 병조에 보고하고 지방에서는 오장(伍長)이 관할 진장(鎭將)에게 보고하였다.

봉수를 올리는 봉화대(烽火臺)는 주요 산마다 설치되어 주요 노선인 직봉(直烽)과 포함되지 않았던 간봉(間烽)으로 구성되었다. 봉수의 간선(幹線)은 직봉(職烽)이라 하여 동북은 경흥(慶興), 동남은 동래(東萊), 서북은 내륙(內陸)으로는 강계(江界), 해안 지방으로는 의주(義州), 서남은 순천(順川)의 5개 처를 기점으로 하여 서울의 목멱산(木覓山: 남산)을 종점으로 했다. 직봉 외에도 간봉(間烽)이라는 보조선이 있어 직봉 사이의 중간 지역을 연락하는 장거리의 것과 국경 방면의 전선초소(前線哨所)로부터 본진·본읍으로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도 있었다. 이들 직봉과 간봉의 봉수대를 모두 합쳐 622개의 봉수대가 존재했다.[2] 대동여지도에는 봉화대를 적색의 삼각형으로 표기하였다.

봉화가 서울에 연락되면 병조에서는 사람을 지정해서 다음날 새벽에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여 이를 임금에게 보고하고, 만약 급할 때에는 밤중이라도 즉시 보고하게 하였다. 각 봉수대에 소속된 인원은 남산에는 군사 4인과 오원 2인, 연해와 변경 지방은 군사 10인과 오장 2인, 기타 내륙지방에는 군사 6인과 오장 2인을 배속하였는데 이들은 봉화대 근처의 거주자라야만 했다. 또한 봉화대에 배속되는 봉군은 다른 군역에 종사할 수 없으며 오직 망 보는 일에만 종사하게 했다.

봉화대는 표주(標柱)를 세워서 경계를 설정하고 거짓 봉화(烽火)나 단순한 방화(放火)를 막론하고 그것이 경계선의 백보(百步) 이내에서 일어났을 때는 병조에서 관할 단속했고, 백보 외에서 일어났을 때는 해당 진영에서 단속하게 했는데 이들은 대개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봉화대 근처에서는 무당이나 토속에 의한 제사를 금했다.

거화법

횃불을 올리는 거화법(擧火法)은 기존에는 평시 1개, 전시 2개의 횃불을 올리게 하였으나, 세종 1년(1419년)부터 평시에 1개를 올리고 비상시 2개부터 5개까지 올리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원래 있던 고려명나라의 거화법을 일부 수용한 것이다.[1]

  • 횃불 1개: 평상시
  • 횃불 2개: 적 출현
  • 횃불 3개: 적이 국경에 접근
  • 횃불 4개: 적이 국경을 침입
  • 횃불 5개: 적과 교전

병조에서 계하기를, "전일 각도의 봉화(烽火)는 무사하면 1번 들게 하고, 유사(有事)하면 2번 들게 하였으나, 지금부터는 왜적이 해중에 있으면 봉화를 2번 들고, 근경(近境)에 오거든 3번 들 것이며, 병선이 서로 싸울 때는 4번 들고, 하륙(下陸)하게 되면 5번을 들 것입니다. 만일 육지에서 적변(賊變)이 일어날 때 지경 밖에 있으면 2번 들고, 지경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면 3번 들고, 지경을 범하였으면 4번 들고, 맞붙어 싸우게 되면 5번 들게 할 것이며, 낮에는 연기로 대신하되, 정신차려서 바라보고 있지 아니한 봉화간(烽火干)이나 그 곳에 있던 관사(官司)는 법에 의하여 벌을 주게 하소서."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 5월 26일 경오 9번째기사[3]

전시

임진왜란 개전 당시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발견하고 부산 황령산 봉수대에서 한성 남산 목멱산 봉수대까지 약 12시간이 소요되었다고 전해진다.[2] 그러나 힘든 노역으로 군인들이 나태해져 병자호란 등 주요 전쟁에서는 대개 효과가 없었다. 전투 중에 봉화 전달에 실패하면 수령과 봉수군을 사형에 처했고, 적이 출현했는데 봉화를 전달하지 못하면 70~80대의 곤장을 쳤다.[4]

임금(세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봉수(烽燧)의 법은 옛날부터 있는 것으로서 변경의 경보(警報)를 알아서 미리 준비하려고 한 것인데, 우리 나라의 봉수는 실효가 없는 것 같다. 근자에 여연에서 적의 침입이 있었는데 봉수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이 전하였으니, 대개 봉수를 맡은 자가 서로 대하는 봉수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함부로 봉화를 들기 때문이다. 가령 적의 변고를 잘 살피고 봉화를 두 번 들어서 서울에 전달될지라도, 서울에서 설비하는 일이 없으므로 윤덕도 봉수가 쓸 데 없다고 말하였으니, 폐지하는 것이 어떤가." 하니, 허조가 아뢰기를, "봉수를 세운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갑자기 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혹 맡은 자가 살피지 아니하고 함부로 드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각도 감사가 고찰하여 죄를 주면 될 것입니다."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6월 23일 갑진 1번째기사[5]

현대

오늘날, 봉수대는 목멱산 봉수대 터와 같이 역사 유적지로 남아 있다. 봉화산(烽火山)이라는 지명은 전국 여러 곳에 있는데, 문자 그대로 과거 봉수대가 있었던 곳이다. 봉수대는 빛을 이용하여 사방이 트이고 높은 곳에 있어야 했는데, 전파 통신은 발신과 수신 사이에 장애물이 없어야 잘 전달되기 때문에, 전자파를 이용하는 통신 기지국이나 중계소는 옛날 봉수대가 있던 곳에 세워진 경우가 많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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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봉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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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후에도 한동안은 고려 말의 봉수 노선이 유지되었으나, 세종 5년(1423년) 중앙 봉수를 개성 송악산에서 한양 남산(목멱산)으로 이동하여 이때부터 전국의 봉수들이 한양으로 모이게 되었다. 제1로부터 제5로까지 있었으며, 이중 부산에서 출발하는 제2로 직봉과 여수에서 출발하는 제5로 직봉은 현재도 대한민국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병조에서 계하기를, "서울 남산(南山)의 봉화(烽火) 다섯 곳을, 본조(本曹)가 진무소(鎭撫所)와 더불어 산에 올라 바라보고 불을 들어 서로 조준(照準)한 뒤에 땅을 측량하여 설치하였는데, 그 지명(地名)과 내력을 아래와 같이 자세히 기록해 올립니다. 동쪽의 제1봉화는 명철방(明哲坊)의 동원령(洞源嶺)에 있는데, 양주(楊州) 아차산(峩嵯山)의 봉화와 서로 마주쳐 함길도와 강원도로부터 오게 되고, 제 2봉화는 성명방(誠明坊)의 동원령(洞源嶺)에 있는데, 광주(廣州) 천천(穿川)의 봉화와 서로 마주쳐 경상도로부터 오게 되고, 제 3봉화는 훈도방(薰陶坊)의 동원령(洞源嶺)에 있는데,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의 봉화와 서로 마주쳐 평안도로부터 오게 되고, 제 4봉화는 명례방(明禮坊)의 동원령(洞源嶺)에 있는데, 무악(毋岳) 서봉(西峯)의 봉화와 서로 마주쳐 평안도·황해도의 바닷길로 오게 되고, 제 5봉화는 호현방(好賢坊)의 동원령(洞源嶺)에 있는데, 양주(楊州) 개화(開和)의 봉화와 서로 마주쳐 충청도·전라도의 바닷길로 오게 됩니다. 위의 봉화를 들어 서로 마주치는 곳이 연대가 오래되면, 혹 변동이 있을까 염려되오니, 청컨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대(臺)를 쌓고 표(標)를 세워, 서로 마주치는 지명(地名)과 봉화를 드는 식례(式例)를 써서 둘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9권, 세종 5년 2월 26일 정축 5번째기사[7]

아래의 봉화로는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에 근거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지역별로 지역 내 봉수대의 개수, 전파 상태가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는데, '(특정 지역)의 봉화(烽火)는 몇 곳이다. (방향)쪽으로 (위치)의 봉화에 응하고, (방향)쪽으로 (위치)의 봉화에 응한다'의 형식으로 서술해 봉화의 전달 체계를 설명한다.

봉화(烽火)가 8곳이니, 임을랑포(林乙郞浦)는 군(郡)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기장현(機張縣) 남산(南山)의 봉화에 응하고, 북쪽으로 아이포(阿爾浦) 봉화에 응한다.] 아이포(阿爾浦) [북쪽으로 이길(爾吉) 봉화에 응한다.] ·이길(爾吉) [북쪽으로 하산(下山) 봉화에 응한다.] ·하산(下山) [북쪽으로 가리(加里) 봉화에 응한다.] ·가리(加里) [북쪽으로 천내(川內) 봉화에 응한다.] ·천내(川內) [북쪽으로 남목(南木) 봉화에 응한다.] ·남목(南木) [북쪽으로 유등포(柳等浦) 봉화에 응한다. ] ·유등포(柳等浦) [북쪽으로 경주(慶州) 안산(顔山) 봉화에 응한다. ] 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울산군

제2로 (부산 → 서울)

제2로 직봉(第二路 直烽)은 부산 동래현 다대포 응봉봉수대에서 시작하여 경주시, 안동시, 충청북도, 경기도 남동부를 지나 서울 남산 목멱산 봉수대까지 이어지는 직봉 봉수로이다.

제5로 (여수 → 서울)

제5로 직봉(第五路 直烽)은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도에서 시작하여 남해안과 서해안을 지나 서울 남산 목멱산 봉수대까지 이어지는 직봉 봉수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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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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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 안동

포항~안동 간봉은 포항시 구룡포읍 성동리의 제2로 직봉 뇌성산(212 m, 뇌산) 봉수로부터 분리되어 포항시, 영일군, 흥해군, 청하군, 영덕군의 동해안을 따라가다가, 영덕 대소산 봉수대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청송군을 지나 안동시에서 다시 제2로 직봉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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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 간성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영해 도호부 영덕 대소산 봉수대에서 북쪽으로 진행하는 간봉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간봉은 조선 후기의 대동여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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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 영천/성주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 천성동의 연대봉(煙臺峰, 459.4 m)에서 시작한 봉화는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성화야(省火也) 봉수대를 거쳐 김해시밀양시를 지나 영천시의 제2로 직봉에 연결되었고,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웅천(진해)의 사화랑산(沙火郞山)을 거쳐 대구, 성주, 상주를 지나 충주의 제2로 직봉에 이어졌다.[4]

연대봉(煙臺峰)은 459.4 m의 봉우리로 서쪽 애안가에 천성동과 천성선착장이 있고, 이 연대봉과 천성동 사이로 거가대교와 연결되는 거가대로가 지나간다. 가덕도 둘레길과 연결된 가덕도 등산로가 연대봉 정상까지 연결되어 있다. 연대봉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는데, 고려 의종 때를 전후하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 강서구에서 다시 복원했다. 위치로 보아 일본의 대마도와 가장 가까운 해안 봉수대이고, 동래직봉 소속의 연봉대로 서쪽으로는 웅천의 시화랑 봉수대와 연결되어 진해, 창원, 창녕, 성주, 칠곡, 김천, 상주, 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른다. 복쪽으로는 녹산동의 성화야(省火也)산 봉수대에 연결되어 김해 분산성과 진영, 수산, 밀양, 청도, 경산, 대구를 거처서 영천의 성황당 봉수대에 닿게 된다. 동으로는 다대포의 응봉 봉수대와 교신을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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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 성주

거제도에서 올라온 봉화 신호는 고성현 우산에서 분리되어 하나는 성주 각산을 지나 충주로, 서측으로는 진주와 김천을 지나 망이산으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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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 충주

가덕도 연대봉에서 출발해 김해 시화랑산과 대구 서측을 지나온 간봉과 거제도에서 출발해 의령군합천군을 지나 올라온 간봉은 성주군 각산(칠곡군/성주군 월항면 용각리 104-2)에서 합쳐졌다. 이후 북쪽으로 계속 진행하여 상주시조령을 지나 충주시에서 제2로 직봉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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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 음성

고성 → 음성 망이산 간봉은 통영시의 우산(牛山)으로부터 봉수대는 소백산맥을 넘은 봉수로서 단양 죽령과 충주 조령을 넘은 봉수로와 추풍령을 넘은 봉수로가 최종적으로 합쳐지는 가장 중요한 봉수대였다. 사천시, 진주시 지역에는 고성 좌이산 봉수대, 사천 안점산 봉수대, 망이산 등 이 간봉로 상에 위치했던 봉수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 봉수로 상에 위치했던 진주 망진산 봉수대는 1996년 복원되었으나 2022년 집중 호우로 무너졌다가 2025년 9월 복원되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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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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