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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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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풍경(View of Toledo, 스페인어: Vista de Toledo)은 엘 그레코가 그린 두 점의 현존하는 풍경화 중 하나로, 다른 하나는 톨레도 풍경과 지도이다. 톨레도 풍경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톨레도 풍경은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및 클로드 모네의 풍경화와 함께 서양 미술에서 하늘 묘사로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 미술사학자 키스 크리스티안센은 이 작품을 엘 그레코의 가장 야심찬 걸작 중 하나로 꼽으며, 서양 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풍경화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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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연대 측정
미술사학자, 특히 해럴드 웨디는 이 작품의 정확한 연대 측정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엘 그레코에 대해 월터 리트케가 쓴 초기 문헌 때문에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다. 리트케는 "엘 그레코의 세 그림"에서 톨레도 풍경이 1600년 이후, 엘 그레코가 1614년에 사망하기 직전에 그려졌다고 시사한다. 그러나 미술사학자 해럴드 웨디는 엘 그레코의 또 다른 작품인 <성 요셉과 아기 예수>와의 유사성 을 근거로 1595년에서 1600년 사이에 그려졌다고 믿는다. 웨디는 <성 요셉과 아기 예수>가 1597년에서 1599년 사이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다. 웨시는 또한 톨레도 풍경에서 볼 수 있는 배경과 <성 요셉과 아기 예수>의 배경이 동일한 기법이 사용되었음을 지적한다.[2]
풍경화의 중요성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스페인 회화에서는 풍경화가 드물었다. 풍경화가 워낙 드물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톨레도 풍경이 실제로는 더 큰 그림의 일부였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 주장이 사실인지에 대한 유효한 증거는 아직 없다.[3] 트리엔트 공의회가 풍경화를 금지했다는 믿음이 있어서, 이 작품이 당시 최초의 스페인 풍경화일 수 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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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
톨레도 풍경은 세로가 긴 풍경화이다. 그림은 파란색, 검은색, 흰색, 생생한 녹색으로 활기차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위쪽 하늘의 어둠과, 아래 언덕의 생생한 녹색 사이의 뚜렷한 색상 대비이다. 톨레도 풍경은 톨레도에 존재하는 어둠, 또는 음울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특히 도시 근처의 하늘이 유난히 어둡다. 엘 그레코의 팔레트는 극적인 색상으로 가득 차 있다. 톨레도 시가 위로는 구불구불한 언덕들이 있다. 시가는 생생한 녹색의 언덕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회색빛이다. 도시 반대편으로는 밝은 하늘이 대비된다.[4] 왼쪽에 있는 산 세르반도 성의 위치는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톨레도임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많은 랜드마크들은 도시의 실제 위치와 다르다. 월터 리트케는 이 이유로, 엘 그레코가 톨레도 풍경을 미래 또는 톨레도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희망으로 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2] 미술사학자 조나단 브라운과 리처드 카간도 마찬가지로, 엘 그레코가 톨레도를 자신의 상상이나 이상적인 버전에 맞춰 다른 방식으로 그렸다는 이론을 제시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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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엘 그레코의 스타일은 이탈리아 예술가뿐만 아니라 스페인과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양식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그가 살았던 장소에 따라 그의 양식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는 거의 항상 크레타 또는 그리스의 뿌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종종 그리스어로 글을 썼고 라틴 알파벳 대신 그리스 알파벳을 사용했다. 톨레도 풍경에서도 서명을 통해 그의 그리스 뿌리의 전통을 이어간다. 그는 항상 그의 실제 이름인 "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그의 작품에 서명했다.[6] 엘 그레코의 서명은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 나타난다.[7] 그의 스타일은 매너리즘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엘 그레코의 색상과 형태에 대한 표현적인 처리는 미술사에서 유례가 없다. 웨일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데이비스는 플라톤주의와 고대 신플라톤주의, 플로티노스와 위 디오니시우스의 작품, 교부들의 문헌와 전례가 엘 그레코의 양식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8] 이 문제에 대한 후속 학술 논쟁을 요약하면서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의 큐레이터 호세 알바레즈 로페라는 엘 그레코의 성숙한 작품에서 "비잔틴적 기억"의 존재가 명백하지만, 그의 비잔틴 기원에 관한 몇 가지 모호한 문제는 여전히 더 많은 해명을 필요로 한다고 결론 내린다.[8]
해석
상징주의
톨레도 시는 톨레도 풍경의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미술사학자 월터 리트케는 엘 그레코가 톨레도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싶어했다고 추측한다. 톨레도가 맨 위에 위치함으로써 도시가 천국과 가까움을 상징하지만, 여전히 언덕 꼭대기에 있어 세속적인 소유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중세 전통에 따라, 엘 그레코는 성당과 알카사르와 같은 랜드마크를 자신이 만든 톨레도, 즉 "영혼의 도시" 버전으로 배치했다.[8] 톨레도는 부자연스럽거나 하늘에 있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높은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마치 엘 그레코가 언덕을 받침대처럼 사용한 것 같다. 이 그림의 수수께끼 같은 상징주의는 당시 도시에 스며들었던 신비주의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톨레도 풍경과 지도와의 비교
톨레도의 엘 그레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톨레도 풍경과 지도와 이 작품은 주제가 동일하지만, 매우 다른 모습과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선, 이 작품은 <톨레도 풍경과 지도>보다 먼저 그려졌다. 또한 어두운 파란색/검은색과 녹색/흰색이 대비되어 더 생생한 느낌을 준다. 반면 <톨레도 풍경과 지도>는 갈색이 많아 훨씬 따뜻하고 갈색조를 띠고 있다. 또한 톨레도 풍경에 비해 조감도 성격이 강하다. 똑같이 톨레도를 묘사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그림은 더 이상 다를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이 두 그림은 페드로 살라사르 데 멘도사에 의해 의뢰된 것으로 믿어지는데, 그의 사후 개인 소장품의 일부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살라사르는 모든 면에서 톨레도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살라사르의 도시 사랑 때문에 엘 그레코가 <톨레도 풍경>과 <톨레도 풍경과 지도>를 그리게 된 영감을 받았다고 여겨진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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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엘 그레코의 작품 목록
- 100 Great Paintings, 1980 BBC 시리즈
내용주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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